<에베소서 시작 - 예정하신 목적>
출처 : KTSM 대표 최승호묵상
(엡 1:1-7)
◆ 에베소서
에베소서는 '교회'에 대한 귀중한 비밀을 담고 있다. 성도라면, 기본적으로 두 가지 지식을 알아야 하는데, 곧 복음과 교회다. 이것은 마차의 양 바퀴 같아서 하나만 망가지면 마차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복음과 교회를 포도주와 가죽 부대로 비유했다. 즉 복음이 포도주라면, 교회는 그것을 담는 가죽 부대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데, 낡은 부대에 넣을 시에 결국 터져서 둘 다 버리게 된다고 하셨다(마 9:17).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구약의 교회를 답습하고 있다. 목사님이 제사장으로, 예배당이 성전으로, 주일을 안식일로, 세례를 할례로, 헌금을 제사로 간주한다. 완전히 유대교의 짝퉁이다. 새 포도주를 완전히 낡아빠진 부대에 넣은 셈이다. 이러니 율법주의에 빠지고, 입으로는 여호와를 부르지만, 정작 금송아지를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 꼴이 되었다.
모조품은 절대로 명품을 능가할 수 없다. 그런데 유대교가 명품이고 교회는 모조품인가 말도 안 된다. 외려 유대교가 미래에 올 교회의 모조품이요, 그림자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성경도 가려질 수밖에 없으며, 평생 종교인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무려 2년이 넘도록 머물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고, 많은 신자를 얻었다(행 19:1-21). 그 후에 바울은 유대인에게 잡힌 후 가이샤라에서 2년간 구류되었고(행 24:27), 다시 로마 감옥으로 옮겨졌는데, 그 와중에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작성했다. 그래서 이 네 서신을 옥중 서신이라고 부른다. 기록 시기는 대략 AD 60~62년 경으로 추정한다. 아마도 에베소서는 바울이 감옥에 갇히지 않았으면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이해되지 않은 상황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발전하여서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누리는 복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얼마나 놀라운 복을 받은 자들인지를 일깨운다. 성도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자다(3). 세속적인 사람은 이 복을 가볍게 취급할지 모르나 사실은 세상의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복이다. 영생을 얻었고, 성령을 받았으며,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채워지다 못해 넘친다.
또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다(4). 사실 나는 이 말씀을 오랫동안 별 관심 없이 지나쳤다. 그저 성도들에게 보내는 덕담 정도로나 여겼다. 나 같은 존재가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의 생각 속에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성을 이해한 후에는 정말 창세 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셨음이 믿어졌다.
바둑의 고수가 하수와 둘 때는 100수 앞을 내다본다는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수 천수를 못 내다보시겠는가? 인간은 무한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 유한에서는 아무리 큰 수라도 1을 더하면 더 큰 수가 된다. 그러나 무한에서는 1을 더하든, 1억을 더하든, 아무리 큰 수를 더해도 더 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한한 내 머리로 창세 전에 택하신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속단하지 말라.
메시아도 아닌 나 같은 존재가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의 머릿속에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흥분되는가? 내 주변 환경이 내가 하찮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도,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한 존재다. 이러한 믿음이 성도들에게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5).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 예정되었고, 그렇게 부르심을 받았다. 오, 이것은 과장이 아니고, 덕담으로 건네는 빈말도 아니다. 우리가 실상을 깨닫고 감격하면서 느껴야 할 복이다.
◆ 우리를 택하신 목적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도대체 하나님은 왜 나 같은 죄인을 택하셨을까? 오늘 본문에서는 구원하신 목적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밝힌다. 말씀은 명쾌하지만, 이해가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 사회 문화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상대방의 자질이 훌륭한 것을 보고 아낌없이 투자하여서 왕이 되도록 도왔다면, 그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그저 자비심 때문일까? 그럴 리가! 부모가 아닌 이상 그런 사람은 없다. 그가 왕이 되면 투자 금액의 수십 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설사 부모일지라도 성공할 만한 자식에게만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슨 이익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란다. 나는 오랫동안 이 구절이 이해가 안 되었다. 상인의 가치관으로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예술가의 영역에서 비로소 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진정한 예술가는 이익의 여부를 따지지 않고, 순수 예술 자체를 추구한다. 명작을 그린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 표현이고, 그의 자부심이다.
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신 목적은 바로 그런 예술가의 경지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작품으로 생각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엡 2:10)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 하나님께 큰 보탬이 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선하고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목적을 알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이 거룩함과 흠이 없는 상태를 망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면서 온갖 잡다한 기사나 클릭하고, 음란한 동영상이나 보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성도라고 자부할 수 없다. 거절하고, 절제해야 할 것이다.
거룩함은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다. 성도란 '거룩한 자'란 뜻이다. 우리는 성도가 되기 위해 힘쓸 것이 아니라, 성도된 자의 신분을 지켜야 할 사람이다. 성막 안에서는 숯을 집는 부지깽이도 거룩하다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모두 예외없이 거룩한 자다.
그러나 실패를 거듭한다고 낙심하거나, 도달해야 할 곳이 너무나 높다고 좌절하지 말라. 우리가 믿음을 버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한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행하시는 그 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 내가 나를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만들어 가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쓸 것은 예수님을 믿고 그를 사랑하며, 그를 경배하는 것이다.
주님, 창세 전에 저를 택하신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경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