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글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갈색 글은 다른 글의 원문 기록이다. 파란색 글은 저자의 해석이다.
6. 산상왕, 동천왕의 환도성 시대
6-1 산상왕의 환도성 시대ad198~ad227
산상왕(山上王)은 이름이 연우(延優)<또는 위궁(位宮)이라고도 이름하였다.>이고 고국천왕의 아우이다. 위서에 이렇게 쓰여있다. 『주몽의 후손 궁(宮)은 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볼 수 있었는데 이 사람이 태조이다. 지금의 왕은 태조의 증손인데 역시 나면서부터 사람을 보는 것이 증조 궁과 비슷하였다. 고구려에서 서로 비슷한 것을 불러 위(位)라고 하므로 이름을 위궁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위궁(位宮)은 <동천왕 대의 4개 비문>으로 보아서 동천왕의 이름이다.
고국천왕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연우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국천왕이 죽었을 때에 왕후 우씨는 죽음을 비밀로 하여 발설하지 않고, 밤에 왕의 아우 발기(發[])의 집으로 가서 “왕은 아들이 없으니 당신이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합니다.”고 말하였다. 연우는 일어나서 의관을 갖추고, 문에서 맞이하여 들여앉히고, 잔치를 베풀어 함께 마셨다. 왕후가 말하였다. “대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발기가 큰동생으로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겠으나, 첩에게 딴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난폭하고 무례하므로 당신을 보러 온 것입니다.” 그러자 연우는 예의를 더 중하게 하고 친히 칼을 잡고 고기를 베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다쳤다. 왕후가 치마끈을 풀어 다친 손가락을 싸주고, 돌아가려 할 때 연우에게 “밤이 깊어서 예기치 못한 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그대가 나를 궁까지 전송해 주시오.” 하고 말하였다. 연우는 그말에 따르니 왕후가 손을 잡고 궁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에 왕후가 선왕의 명령이라고 사칭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연우를 왕으로 세웠다. 연우는 동생 계수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니, 한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계수는 스스로 선봉이 되어 패잔병을 추격하니, 발기가 계수에게 말하기를 “네가 지금 늙은 형을 차마 해칠 수 있느냐?”고 하였다. 계수는 형제에 대하여 무정할 수 없어 감히 해치지 못하고 말하였다. “연우가 나라를 양보하지 않은 것은 비록 의가 아니지만, 당신은 한 때의 분노로 조종(祖宗)의 나라를 멸하려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죽은 후 무슨 면목으로 조상들을 뵙겠습니까?” 발기가 그 말을 듣고 부끄럽고 후회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배천(裴川)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계수는 슬퍼 통곡하며 그 시체를 거두어 짚으로 가매장하고 돌아왔다. 왕은 슬프기도 하고 [한편] 기쁘기도 해서 계수를 궁중으로 끌어들여 잔치를 베풀어 가인(家人)의 예로 대접하고 또 말하였다. “발기가 다른 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죄가 막대한데, 지금 그대가 그에게 이기고도 놓아주고 죽이지 않은 것은 족한 일이나, 그가 스스로 죽자 심히 슬프게 통곡한 것은 거꾸로 과인이 무도하다고 하는 것이냐?” 계수가 슬픈 얼굴로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기를 “신이 지금 한마디 아뢰고 죽기를 청합니다.” 하니, 왕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계수가 대답하였다. “왕후가 비록 선왕의 유명으로 대왕을 세웠더라도, 대왕께서 예로써 사양하지 않은 것은 일찍이 형제의 우애와 공경의 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대왕의 미덕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시체를 거두어 안치해 둔 것입니다. 어찌 이것으로 대왕의 노여움을 당할 것을 헤아렸겠습니까? 대왕께서 만약 인자함으로써 악을 잊고, 형의 상사(喪事)에 맞는 예로써 장사지내더라도 누가 대왕을 불의하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다 아뢰었으므로 비록 죽어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관부에 나아가 죽임을 당하겠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앞으로 나아가 앉으면서 따뜻한 얼굴로 위로하며 말하였다. “과인이 불초하여 의혹이 없지 않았는데, 지금 그대의 말을 들으니 참으로 잘못을 알겠도다. 그대는 책하지 말기 바란다.” 왕자가 절하니 왕도 역시 절하였으며, 즐거움을 마음껏하고 파하였다. 가을 9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발기의 관을 받들어 모셔오게 하여, 왕의 예로써 배령(裴嶺)에 장사지냈다. 왕은 본래 우씨 때문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다시 장가들지 않고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발기의 요청으로 공손탁의 군대가 출병하여서 이이모의 신성을 불태웠다. 그후 발기는 요동으로 들어오고 아들이 구려성을 다스리고, 요동국이 비류수까지 진출하여 직접 요동국 동내현을 설치한 것이다. 184년에 백고성(신성)으로 옮겨간 이이모를 향해서 공손강이 쳐들어와서 불질르고 돌아갔고, 뒤이어서 중국인 항호들이 반기를 들었다. 이이모는 백고성을 버리고 멀리 환도성으로 이주해 들어가서 환도의 구려왕으로서 고구려의 새로운 전방을 책임지게 되었다.
중국 기록을 보면 항호들의 반란이 이이모에게 있었다.
2년(198) 봄 2월에 환도성(丸都城)을 쌓았다. 여름 4월에 나라 안의 두 가지 사형죄 이하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3년(199) 가을 9월에 왕은 질양에서 사냥하였다.
7년(203) 봄 3월에 왕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산천에 기도하였다. 이 달 15일 밤에 꿈에서 하늘이 말하기를 “내가 너의 소후(小后)로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왕은 깨어 여러 신하들에게 “꿈에 하늘이 나에게 이와 같이 간곡하게 말했는데 소후가 없으니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을파소가 “하늘의 명령은 헤아릴 수 없으니 왕께서는 기다리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가을 8월에 국상 을파소가 죽어, 나라 사람들이 통곡하였다. 왕은 고우루(高優婁)를 국상으로 삼았다. 204년에 요동국 공손탁은 조조로부타 작호를 받았지만 사망해서 공손강이 요동태수가 되었다.
[통감 204] 曹操表公孫度?武威將軍,封永寧?侯。度曰:「我王遼東,何永寧也!」藏印綬於武庫。是歲,度卒,子康嗣位,以永寧?侯封其弟恭 [통감 207] 操令疇將其???導,上徐無山(천진에 있다.),塹山?谷,五百餘里,經白檀,歷平岡(내몽고 적봉시 영성현이다.),步鮮卑庭,東指柳城(조양시다)。未至二百裡,虜乃知之。?、熙與?頓及遼西單于樓班、右北平單于能臣抵之等將數萬騎逆軍。八月,操登白狼山(객좌현에 있다.),卒與虜遇,?甚盛。操車重在後,被甲者少,左右皆懼。操登高,望虜陣不整,乃縱兵擊之,使張遼?先鋒,虜?大崩,斬?頓及名王已下,胡、漢降者二十餘萬口。遼東單于速僕丸與?、熙奔遼東太守公孫康,其??有?千騎。或勸操遂擊之,操曰:「吾方使康斬送?、熙首,不煩兵矣。」九月,操引兵自柳城還。公孫康欲取?、熙以?功,乃先置精勇於?中,然後請?、熙入,未及坐,康叱伏兵禽之,遂斬?、熙,?速僕丸首送之。
12년(208) 겨울 11월에 교제(郊祭)에 쓸 돼지가 달아나서 담당자가 쫓아가서 주통촌(酒桶村)에 이르렀으나 머뭇거리다가 잡지 못하였는데, 20세 쯤 되는 아름답고 요염한 한 여자가 웃으면서 앞으로 가서 잡으니 그 후에야 쫓아가던 사람이 잡을 수 있었다. 왕은 그것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그 여자를 보려고 밤에 몰래 여자의 집으로 가서, 시종을 시켜 말하게 하였다. 그 집에서는 왕이 온 것을 알고 감히 거절하지 못하였다. 왕은 방으로 들어가 여자를 불러서 관계하려 하자, 여자가 고하였다. “대왕의 명을 감히 피할 수 없으나, 만약 관계하여 아들을 낳으면 버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왕은 그것을 허락하였다. 자정이 되어 왕은 일어나 궁으로 돌아왔다.
13년(209) 봄 3월에 왕후는 왕이 주통촌 여자와 관계한 것을 알고 질투하여, 몰래 군사를 보내 죽이려고 하였다. 그 여자가 듣고 알게 되어 남자 옷을 입고 도주하니 군사들이 쫓아가 해치려고 하였다. 그 여자가 물었다. “너희들이 지금 와서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이 왕의 명령이냐 왕후의 명령이냐? 지금 내 뱃속에 아들이 있는데 진실로 왕이 남긴 몸이다. 내 몸을 죽이는 것은 가하나, 왕자까지도 죽일 수 있겠느냐?” 군사들이 감히 해치지 못하고 와서 여자가 말한 대로 고하니, 왕후가 노하여 기필코 죽이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가을 9월에 주통촌의 여자가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은 기뻐하며 “이것은 하늘이 뒤 이을 아들을 나에게 준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교제(郊祭)에 쓸 돼지의 일에서 시작되어 그 어미를 침석에 들게 하였으므로, 그 아들의 이름을 교체(郊)라 하고, 그 어미를 소후로 세웠다. 이전에 소후의 어머니가 아이를 배어 낳기 전에 무당이 점쳐 말하기를 “반드시 왕후를 낳을 것이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기뻐하고 낳은 후 이름을 후녀(后女)라고 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은 환도로 도읍을 옮겼다.
17년(213) 봄 정월에 교체(郊[])를 세워 왕태자로 삼았다.
23년(219) 봄 2월 그믐 임자에 일식이 있었다.
24년(220) 여름 4월에 이상한 새가 왕궁 뜰에 모여들었다.
환도성의 위치
6-2. 동천왕의 환도성 시대ad227~ad248
동천왕(東川王)의 이름은 우위거(憂位居)이고, 어릴 적의 이름은 교체(郊)인데 산상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주통촌 사람으로서 왕궁에 들어와 산상왕의 소후(小后)가 되었으나, 역사책에 그 족성(族姓)이 전해지지 않는다. 산상왕 17년에 태자로 세워졌다가 재위 31년에 산상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왕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었다. 왕후가 왕의 마음을 시험해보기 위해, 왕이 밖으로 나간 틈을 타서,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자르게 하였다. 왕은 돌아와서 “말이 갈기가 없는 것이 불쌍하다.”고 할 뿐이었다. 또 시중드는 사람을 시켜 식사를 올릴 때 일부러 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게 하였으나, 역시 화내지 않았다. 2년(228) 봄 2월에 왕은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3월에 우씨(于氏)를 왕태후로 봉하였다.
이해에 요동왕 공손연이 즉위했다. [통감] 228 初,公孫康卒,子晃、淵等皆幼,官屬立其弟恭。恭劣弱,不能治國,淵?長,脅奪恭位,上書言狀。侍中劉曄曰:「公孫氏漢時所用,遂世官相承,水則由海,陸則阻山,外連胡夷,?遠難制。而世權日久,今若不誅,後必生患。若懷貳阻兵,然後致誅,於事?難。不如因其新立,有黨有仇,先其不意,以兵臨之,開設賞募,可不勞師而定也。」帝不從,拜淵揚烈將軍、遼東太守。
4년(230) 가을 7월에 국상 고우루高優婁가 죽자, 우태 명림어수明臨於漱를 국상으로 삼았다.
8년(234)에 위(魏)나라가 사신을 보내 화친하였다. 가을 9월에 태후 우씨(于氏)가 죽었다. 태후는 임종시에 유언하였다. “내가 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였으니 앞으로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국양(國壤)을 뵈올 것인가? 여러 신하들이 만약 차마 나를 구렁텅이에 떨어뜨리지 않으려거든 나를 산상왕릉 곁에 묻어주기 바란다.” 마침내 그 유언대로 장사지냈다. 무당(巫者)이 말하였다. “국양이 내게 내려와 말씀하였습니다.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더불어 싸웠다. 돌아와서 생각하니 낯이 두꺼워도 차마 나라사람들을 볼 수 없다. 네가 조정에 알려, 물건으로 나를 가리게 하라.’” 이리하여 능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
10년(236) 봄 2월에 오(吳)나라 왕 손권(孫權)이 사신 호위(胡衛)를 보내 화친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그 사신을 잡아두었다가, 가을 7월에 목을 베어 머리를 위나라로 보냈다. 11년(237)에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연호를 바꾼 것을 축하하였다. 이 해가 경초(景初) 원년이다.
12년(238)에 위나라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公孫淵)을 치니, 왕은 주부(主簿), 대가(大加)를 보내 군사 천 명을 이끌고 그것을 돕게 하였다. 16년(242)에 왕은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깨뜨렸다. 17년(243) 봄 정월에 왕자 연불(然弗)을 세워 왕태자로 삼고, 나라 안에 사면을 베풀었다. 19년(245) 봄 3월에 동해 사람이 미녀를 바치니 왕은 그 여자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한반도 함흥지방을 공략한 것이다.
20년(246) 가을 8월에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을 보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로부터 침범하여 왔다.
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위나라의 대군이 오히려 우리의 적은 군대보다 못하고, 관구검이란 자는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 [그의] 목숨이 내 손아귀에 있다.” 그리고는 철기(鐵騎)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관구검이 방진方陣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니, 우리 군대는 크게 궤멸되고 죽은 자가 1만 8천여 명이었으며, 왕은 기병 1천여 기(騎)를 데리고 압록원(鴨록原)으로 달아났다.
왕은 방도가 막히고 기세가 꺾여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동부사람 유유(紐由)가 나서며 말하였다. “형세가 매우 위급하나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습니다. 청컨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에게 제공하면서 틈을 엿보아 그 장수를 찔러 죽이려고 합니다. 만약 신의 계책이 성공하면, 왕께서는 분연히 공격하여 승부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좋다”고 하였다. 유유가 위나라 군대로 들어가 거짓으로 항복하며 말하였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얻어서 도망쳐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몸 둘 땅이 없어서 장차 진영 앞에 나와 항복을 청하고 목숨을 맡기려고, 먼저 저를 보내 변변치 못한 음식을 가지고 와서 부하들에게 먹이려 합니다.” 위나라 장수가 그 말을 듣고 그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는 식기에 칼을 감추고 앞으로 나아가, 칼을 빼서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함께 죽으니, 위나라 군대가 마침내 어지러워졌다. 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히 공격하니, 위나라 군대가 소란해져서 군진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樂浪)으로부터 물러갔다.
이 전쟁 때 위나라 장군이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그 공을 새겼으며, 또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불내성(不耐城)에 공을 새기고 돌아갔다.
당시 동천왕은 비류수에 관구검을 끌어들여 이겼다가 너무 깊이 추격하여 양맥에서 방진에 걸려 패전하고 압록원으로 달아났다.
이전에 동천왕의 신하 득래(得來)는 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여러 차례 간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득래가 한탄하여 “이 땅에 장차 쑥대가 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 하고, 결국 먹지 않고 죽었다. 관구검이 모든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그 묘를 무너뜨리지 말고 그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 처자를 포로로 잡았으나 모두 놓아 보내 주었다.<괄지지(括地志)에 이렇게 쓰여 있다. 『불내성은 곧 국내성인데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 이것은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양서(梁書)에 이렇게 쓰여 있다.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을 토벌한 틈을 타서, 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을 습격하자, 관구검이 내침하였다.』 통감(通鑑)에는 득래가 왕에게 간한 것을 왕 위궁(位宮)(산상왕) 때의 일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21년(247) 봄 2월에 왕은 환도성이 난을 겪어서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이 살던 곳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22년(248)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시원(柴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동천왕이라고 하였다. 지금의 철령시를 지나는 시하柴河 변이다. 나라 사람들이 그 은덕을 생각하며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가까운 신하 중에 자살하여 따라 죽으려고 하는 자가 많았으나, 새 왕은 예가 아니라고 여기고 그것을 금하였다. 장례일이 되어 묘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땔나무를 베어 그 시체를 덮었으므로, 마침내 그 땅을 시원이라고 이름하였다.
동천왕 시대에는 연대순으로 1. <동천왕 양위교서>, 2. <중천왕 즉위교서>, 3. <동천왕 묘지 벽비>, 4. 동천왕 신하 <해덕루 묘지> 등이 남아 있다.
1. <동천왕 양위교서>는 다음과 같다.
정시전쟁(246년)이 끝나고 위나라의 침입으로 피신한 동천왕은 (피신처에서 영원히 은거하여서) 쑥이나 뜯어먹다가 죽자는 신하들의 충간을 따르지 않고, 망명에서 돌아와 고도에서 스스로 자살하여慾? 불내성에 살신 치성을 받치려했다 환도성에 돌아와서 보고 흘계를 (평양으로) 보내어 새로 도성(동천왕 평양東川王 平壤)을 짓게 하고 왕위를 양위한다. 위정시 7년(246년) 왕 선포함.
正始武止 宮 不從固諫 食蒿而死 殊 還亡命慾? 存其固都 將誠 不耐城 往丸都 遣訖繼 造邑都 護位殊麓酋 魏正始七年 百殊 宣 위 비문으로 인해 패전한 동천왕이 양위하고 자살한 것을 알 수 있다.
2. <중천왕 즉위교서>는 다음과 같다.
246년 동천왕은 신하들과 자살하기 위해 망명에서 돌아와 국도를 높이고 불내성에 살신 치성을 드렸다. 흘계를 보내어 읍도를 새로 세우도록 하고 246년 10월에 양위한다. (선왕은) 현도와 비류를 다스리는 가영동국리였던 유리명왕의 뒤를 이어 안태천세예악하고 고구려백제왕은 백성을 위했던 천부조 추모왕을 대신하였다.
가을 8월에 보기 이천 병사로 위나라장수 관구검과 혁현령에서 싸워 수천리를 공격했고 항복한 적이 수천이었다. 동천왕의 유신들이 동천왕을 따라 자살하여 왕릉을 시체로 가렸으니, 이 충절을 천지에 기록하여 이름을 높이고 (시원에) 비석을 세워서 백세후 백성들에게 알린다. [中川王 卽位 敎書 壁碑] 正始武侵 宮百殊 固諫 慾? 還亡命 存其固都 誠不耐城 遣訖繼創邑都 護殊百位麓酋 委台七年十月 繼明王 封假寧東國吏玄?沸流 安泰天歲禮樂 世百濟高麗殊 代天府祖 鄒牟王 以城民之意 秋八月步騎二千戰 儉 ?峴? 攻數千里 降士數千 國宮 前臣 高伏儉? 城北王盲 記天地之中銘存永世 隨登愿此碑永立 以傳百世紹示百殊城民 위 비문으로 인해 1. 246년 동천왕은 패전으로 양위하고 스스로 불내성에서 자살하였다. 3. <동천왕 묘지벽비>는 아래와 같다.
1)위명제 청룡계축 5년, 동주 고구려 동천왕 11년 237년 魏明帝 靑龍癸丑 五年 東主高麗 東川王十一年
2) (불내성의) 동천왕이 현현궁(불교 사원의 도인)을 찾아오라고 삼태읍장에게 명령하여서, 삼태읍장이 보기병 이백으로 위나라(공손연의 요동국 경계) 현현궁에 들어갔다가 도성에 돌아와 (마힐도, 유마경) 책을 바쳤다. (삼태읍장) 광욕(삼태읍장, 불교도)이 답했다. 王詔 峴睍宮 三太邑長 入漢魏 步騎二百 回都 捐冊 廣欲 答 3)연기와 구름이 가득하여 오르기 어렵고, 산과 물이 깊은 곳, 방외方外에서 만물이 생왕生旺한 4월에 마힐도는 단혈에서 조용히 좌선하고 있었습니다. 煙雲丘壑 扶?登? ?外其所 於水山?間 生旺四月 摩 4)우리 사졸들이 성곽을 약간 깨고 성 안에 들아가니 인연 있는 일곱 가문 안에서 여러 책이 전해옵니다. 물어서 알 수는 없고 스스로 비밀스러운데 선대의 오래된 유적에서 책 한권이 세상에 나왔고, 기이하게 상세하여 체필로서 意不可自秘引世出一冊 先世遺所已久 奇爲詳盡 體筆 6) 향기를 남겼습니다. 지혜?倫를 더하여(책으로 수련하여) 점차 경지에 올라 눈을 감고 풀을 벨 수 있었다. 왕은 안차 삼채에 행차하여 처음으로 습원(백습이라는 족속이 객좌현에 있었다.)을 차지하고 7) 그 지역의 46명의 추장殊을 잡았다. (마힐)도의 사원宮室에 경축행사節를 올리니, 대략 133세의 종선(도사)이 이끌었다. 禁凡四十六殊 道宮室 畢節 於以 百三十三歷 輯 宗 8) (종선)공이 세상에 나와서 바람을 부리니 만물이 따르고 많은 낭중들 앞에서 기적을 행했다. 渲引之 以公世天地 蹈事 師之 ?須萬 前郞衆 始異焉 9) 짐승들도 이상한 기미를 보여서 떨어져 (쓰러져) 죽었다. 동천왕비(祖宮前室)께서 백수(동천왕)를 대신하여 멈추게 명령하여 짐승들의 죽음이 그치었다. 觀獸異微 斯狀墜委遺矣 祖宮前室 ?百殊 規止. 繼 10) 비류에 도읍하였던 호영동백수사리 “(유리)명제 축다”를 이어서 예악으로 나라를 평화롭게 하고, 明帝逐多 ?(寧)東百殊司吏 邑都沸流 安泰久歲禮樂 11) 하늘의 아들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을 이어서 (동천왕은) 자살(살신 공양 치성)하여 불내성을 보전하려 하였다. 世高麗殊 代天祖 ?牟王 慾? 存其故都 將不耐城 12) (중천왕이) 국내위나암성으로 가서, 3천국의 졸본읍도를 이어받아 성을 세워 제를 올리고, 往 尉那岩城 繼造 三千國 卒本邑都 以祭祀祖 尉那 13) 위나암성 동쪽에 (동천왕의 치적을)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알린다. 다시 국도(불내성)을 세우고, 천부궁을 세우고, 천지에 일월제를 지냈다. 岩東 記告後人 復國都 再造昌 天府宮 拜謁日月 14) 모든 읍장과 백장 국수 등의 정성으로 벽비를 세워 백세에 알려 후손들이 조상을 존경토록 한다. 祭示天地 衆邑長 百長 國殊 誠意 立壁碑 永傳 百世 存祖 위 동천왕 묘지벽비에서는 1.고구려만의 특이한 연호 기록법이 보인다. 魏明帝 靑龍癸丑 五年은 위나라 연호 계축년으로부터 5년 째다.
4. <해덕루묘지>는 다음과 같다.
惟古鄒加 東部大人 解德婁 爲祖先 고추가 동부대인 해덕루 조부가 별세하여 別世 銘其曰 太歲在 甲辰年 五月二十 비문에 새기니 갑진년(284년) 5월 26일에 六日恭造 [?=不]血刃 求解脫 又僧[?]盒[權] 피묻지 않은 칼을 만들어 해탈을 구하고 승들은 用盈時興 詣先祖隨王 振邦 還住沸 다하면 흥하리라. 선조는 왕을 따라 진방하고 流水之上 衆生 念感 王恩 衣食 豊足 비류수지상에 살았는데 중생은 왕은에 감사하며 의식이 풍족하고 得亨 萬世 而 戊辰之初 親奉 王命[기][] 득형하여 만세를 기원하였다. 188년초에 친히 왕명을 받들어 산천에 기도하고 川原野 隸土之境 有不臣之心者 皆(往) 국경에 기도하며, 복종하지 않는 자는 모두 討收其土地 虜男女生口 以爲奴婢 토벌하여 그 땅을 빼앗고 남녀생구를 노비로 하고 又永爲王奴客 東川大王 三年 秋九月 (229) 영원히 왕을 위한 노객이 되었다. 229년 9월에 躬率師往 討逆賊人地 留?小之邑 山川 해덕루는 원수가 되어 역적의 땅을 치고 작은 읍의 산천과 요충에 천편을 남겼다. 險要 先祖師 先前 行首 拔其城 於是請 선조는 선봉이 되어 성을 함락하여 항복받고 降王 利策贈 太大兄 統軍 車騎 同助 古鄒 태대형 통군 거기장군 동조 고추대가로 승진했다. 大家 來攻支羅人(246) 力不? 斬煞蕩盡 [罪] 중국인의 침공을 받아 힘이 모자라 참살탕진 당하고 服王 赦宥 而追念王恩 於[旋] 還都 攻 我祖 왕에게 엎드려 죄를 청하니 왕이 용서하여 그 왕은을 추념한다. 다시 환도를 위해 공격하니 우리 조부는 上盡攻大菓 賜食邑 [蕃](厘) 於是 添言 後 최선을 다해 공격하여 대과를 얻고 식읍을 하사받고 번리를 하게 되었다. 이때 왕이 말씀하기를 후손들이 人永亨世爲奴客 誰守 幹弓利城 世世代代 영원히 향세하는 노객이 되라 하였다. 이후 간궁리성을 세세대대 지켰으니 연유를 기록하여 왕은을 잊지 않게 하리라. 故銘記不忘 王恩 祖[殷到] 我輩[感]念 杞(祀) 조상의 부가 우리에게 내려와 그 은덕을 기념하고 殷 不改永爲奴客 官接 大兄命 謂 孝感 오직 영원히 노객으로 충성하니 대형을 명받았다. 天地愛微 舊禮 是拜 苗城 高[?]立 唯 효성이 천지미애에 감응하여 구례에 따라 묘를 성같이 하고 높은 살문을 세우고 而木? 禮知節 哀集蓼莪 痛深 龜北 銘之 나무판에 예지절을 새기니 슬픔이 커서 비통한 마음을 거북등(묘석)에 새기노라.
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1. 해덕루는 동천왕 대 장수로서 패전도 하고 승전도 했다.
참고적으로 204년 요동국왕이 된 공손강이 206년경에 낙랑군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지에 대방군帶方郡을 처음으로 설치했다. 공손강은 공손모와 장창 등을 파견해서 한, 예 등을 정벌하고 일본도 복속시켰다고 하였다. 일본까지 복속했다면 당연히 거짓이니 실상은 고작 의무려산醫巫閭山 동쪽에 대방군을 설치하고 한, 예, 일본 등과 외교하였을 것이다. 공손국을 멸망시킨 진제晉帝 사마의司馬懿의 요동국 원정 기록에서 고죽국, 갈석 다음에 바로 요수를 건너므로 대릉하가 당시의 요동국의 요수遼水다. 대방군에 속한 현들의 이름은 대방현, 열구현, 남신현, 장잠현, 제해현, 함자현, 해명현 등 7현인데 대방군 전체가 고작 4900호 정도로서 왜소하다. 따라서 요동국 시대에는 지금의 금주시 의현에 요동국성이 있고, 그 북쪽 200리에 500호戶 내외의 현도군이 부신시 자도대를 중심으로 있었고, 그 요동국 동쪽에 의무려산을 경계로 북쪽에 요동국의 낙랑군과 남쪽에 대방군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의무려산 동쪽의 대방군에서 한예민족韓濊民族을 위무하여 군사적 지원을 바라고 있을 때에, 그 반대쪽 해안에 위나라가 237년 공손연 요동국의 배후인 한예를 이간離間하기 위하여 낙랑, 대방태수를 바다 건너 밀파하여 낙랑군과 대방군을 한 자리에 세우는데 그 위치는 요동반도다.
진미산은 금나라 진주辰州 요해군遼海軍의 위치다. 후에 개주蓋州 신향현神鄕鎭으로 바뀐다. [만주지리풍속지]에서 진미산의 낭낭묘 대축제가 알려졌다.
237년 낙랑태수 유흔劉昕과 대방태수 선우사鮮于嗣가 밀파되어 공손연의 요동국과 한예, 즉 대방 백제를 갈라놓았는데, 238년 요동국이 멸망되고서, 245년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고구려에 속한 영동-예嶺東-濊의 불내예후不耐濊侯를 항복시켰다. 이는 무순시撫順市와 요양遼陽 지역으로 고려된다.
이어서 두 태수가 직접 진한辰韓을 8국으로 나누어서 다스리겠다고 하니, 어디선가 “한예韓穢”가 일어나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시켰고, 낙랑태수 유무는 쫓겨갔으며 낙랑, 대방 2군은 설치후 10년도 못 버티고 만주에서 소멸되었다. 260년에 이르러 낙랑樂浪에 사는 외이外夷가 낙랑이나 대방군을 거치지 않고 직접 위나라 조정으로 사절을 보낸다. 237년 요동반도에 밀파했던 만주의 위나라 낙랑, 대방군이 260년 이전에 멸망했음을 뒷받침하는 기록이다. 만주에서 위나라를 몰아낸 이 혁혁한 전공은 실제로 백제가 세운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 기록에서 고이왕 13년246년 기록에는 낙랑태수 유무가 유주자사 관구검을 따라서 고구려를 공격하니, 그 틈에 좌장 진충眞忠을 보내어 낙랑을 쳤다. 진충도 백제 지방왕으로서 진한眞韓의 왕가 후손이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
출처: 홍익인간/대동아공영 원문보기 글쓴이: 솔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