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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마태복음 11장 28절 이하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중요한 것,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이냐? 그것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큰 행복이 없고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없고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은혜가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축복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처음 교회에 나와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어느 교회나 십자가가 우뚝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처음에는 무슨의미인지 모르고 교회를 나오다가 나중에 은혜를 받게 되면 ‘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내가 구원을 받았구나.’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요, 우리 신앙의 핵심이요, 우리 신앙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신앙으로 무장할 때 문제 많고 어려움 많은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와 어떠한 관계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고 치료가 임하고 용서가 임하고 축복이 임하고 천국의 은혜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1. 우리의 쉴 자리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쉴 자리가 됩니다. 먼저 우리의 쉴 자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기 원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할렐루야. 주님이 이 시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다 내게로 오라 어떤 문제와 어떤 고통과 어떤 슬픔을 갖고 있던지 그 무거운 짐을 지고 다 내게로 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할렐루야.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쉴 자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이 가진 만큼 또 무거운 짐이 있어요. 몸에 질병이 든 사람은 질병의 무거운 짐이 있어요. 어느 위치에 있든지 간에 모두가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무거운 짐을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모세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시편 90편 10절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순식간에 지나가는데 뒤돌아보면 다 수고와 슬픔뿐이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누구도 우리의 인생에 무거운 짐을 대신 져주지 않기때문에 우리는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가다가 쓰러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의 짐을 아내가 대신 져줄 수 없고, 아내의 짐을 남편이 대신 져줄 수가 없고, 자녀의 짐을 부모가 대신 져줄 수 없고, 부모의 짐을 자녀가 대신 져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예수님 안에서만 참된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두 팔을 벌리시고 무거운 절망의 짐을 지고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만이 문제의 해결함을 받을 수가 있어요. 여름철에 뜨거운 태양 볕이 내려쬘 때 나무 그늘 밑에 가면 시원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환난의 태양이 막 내려 쬐어서 갈급하고 온 몸에 땀이 나고 힘들고 어려울 때 예수님의 십자가 그늘 밑에 쉬게 되면 마음에 평안이 있고 안식이 있고 자유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415장에 보면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새 찬송가 415장, ‘십자가 그늘 아래’)
1. 십자가 그늘 아래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볕 심히 뜨겁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3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3. 십자가 그늘에서 나 길이 살겠네
나 사모하는 광채는 주 얼굴뿐이라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두려움 없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유일한 쉴 자리, 쉼터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을 믿고 의지하고 가다가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우리가 권력 있는 사람에 이렇게 기대보았다가 권력이 무너지면 하루아침에 같이 무너지는 내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 것을 많이 가지면 내가 행복할 줄 알고 막 움켜쥐며 살아왔지마는 마음의 고통, 마음의 짐을 이길 수가 없어요.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무거운 짐을 해결해 주시는 유일한 해결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부르실 때 주님 앞에 나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주님, 나를 도와주옵소서. 주님 나와 함께 하여주옵소서. 내 삶에 이 고통과 아픔, 문제를 주님 해결하여 주옵소서.’ 주님께 맡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계적인 화학자 이수민 교수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한남대 생명나노과학대학 학장을 지내신 분이신데, 한 때 참 잘 나가던 분이셨어요. 34살에 박사 학위를 받고,35살에 한남대 교수로 학과장이 되고, 36살에 장로 장립을 받고, 37살에 국비 유학생으로 해외에 이제 파견 받아서 그곳에 가서 교환교수로 있게 되었는데 바로 그때, 눈이 침침하고 잘 안보여서 병원에 갔더니만 녹내장 말기입니다. 그런데 너무 늦게 와서 “이제 교수님은 곧 눈이 멀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세계 최고의 안과 의사에게 6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는데 수술을 받고 나서는 오히려 아무 것도 안보이게 되어 버렸어요. 절망의 늪에 빠지자 신앙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교회 장로까지 되었는데도 ‘하나님이 계신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내게 이런 일이 있는가?’ 낙심해가지고 밤마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그 다음부터는 신앙생활하기 싫어졌어요. 회의가 생겼어요.
‘내가, 이렇게 잘나가던 내가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니까 성경 읽는 것도 싫고 교회 가자고 그러니 할 수 없이 끌려는 가도 설교말씀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뭐 먹고 싶지도 않고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내게 이런 고통을 가져다주시는가? 왜 멀쩡한 내 두 눈이 보지 못하게 되고 내가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우울증이 깊어져가지고 ‘이제 죽어야 되겠다.’ 하는 생각만 자꾸 들어왔어요.
그런데 그가 나가던 교회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교회에서 관람하러 간다고 하니까 본인도 따라가겠다고 그랬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데 왜 폭포를 따라갑니까? 거기에 뛰어내리려고. 그런데 떠나기 전날 밤 그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어요. 성령이 임했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부는 것 같은 ‘휙’ 하는 소리가 나면서 번갯불 같이 번쩍 치는데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이 ‘콱’ 귀에 들려왔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 음성을 듣고 난 순간부터 막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이 나오는데 막 통곡하면서 “하나님,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네가 장로냐? 하나님이 함께 하는데 장로로서 죽을 생각을 했느냐?” 주님의 책망이 들려왔어요. 눈물, 콧물을 흘리며 회개할 때 주님이 말씀 하십니다. “내가 너를 도와준다고 하지 않느냐? 수민아, 거기서 넘어져서는 안 된다. 나를 의지하고 일어나 보려무나.” 주님이 권능의 손을 내미셔서 그를 붙들어 주셨어요.
그래서 벌떡 일어나서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도하고. 한밤중에 자는 아내를 깨워가지고 “여보, 나 이제 뭐 좀 먹어야 되겠어. 밥해 줘.” 밥을 먹고, 그 날 이후로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연구를 시작했는데 메사추세츠 대학교의 화학과에 연구교수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연구를 하는데 교수들과 함께 이야기 하는 것을 다 녹음을 했다가 집에 와서 틀어보면서 다시 그것을 듣고 연구를 하고 원서는 아내가 읽어주면 그것을 가지고 녹음했다가 또 듣고 그래서 그는 세계 3대 인명사전 중의 하나인 미국인명정보기관의 최우수상 수상자로 선정된 세계적인 화학자로 이름이 꼽히게 됐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시력은 잃었지만 영적인 눈을 떴다고 생각해요. 사도 바울처럼 앞으로도 저는 약한 것(실명)을 기뻐하고 주님을 자랑하며 살아갈 겁니다." 할렐루야. 절망의 무거운 짐, 우울증의 무거운 짐, 자살충동의 무거운 짐을 지고 마지막 그가 죽음의 자리로 한걸음 옮겨나가고 있을 때 주님이 와서 그를 붙들어주시고 십자가 밑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하시고, 자유케 하여 주셔서 그는 새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밑에 나가기만하면 우리의 마음의 모든 무거운 짐이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짐이 해결이 됩니다. 질병의 짐이 해결이 됩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질병의 짐도 내려놓아야 되요. 가난과 저주의 짐도 내려놓아야 되요.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망의 무거운 짐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은혜 가운데로 장차 영생천국으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늘 밑에서 참된 평안함을 얻으십시오. 참된 기쁨, 참된 자유, 참된 만족, 참된 사랑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온유와 겸손의 자리
둘째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온유와 겸손의 자리가 됩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온유와 겸손의 자리인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하다는 것은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럽다.’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스펀지는 이렇게 눌러도 쿠션이 있어서 들어갔다 다시 쑥 나옵니다. 쉽게 표현하면 마음이 스펀지같이 늘 부드러운 사람이에요. 딱딱한 나무같이 찔러봐야 손가락만 뚝 아프고, 때리면 고통이 내게 임하는 그런 딱딱한 마음이 아니라 쿡 찔러도 푹신하고 말이에요. 누가 뭐라고 이렇게 옆에서 쿡 찔러도 그냥 온유한 사람은 반응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 마음이 굳은 사람은 건들면 “누가 건드렸어! 누구야!” 벌써 반응이 굉장히 세게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찔러도, 떠밀어도 그저 모른척하고 그 사랑의 쿠션에 받아주는 그 모습이 온유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그 온유함의 은혜가 있어요. 어떤 사람이 와도, 어떤 문제 있는 사람이 와도 주님이 그 사랑의 품에 우리를 감싸주시는 거예요. 그 넓은 사랑의 품에 우리를 안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들고, 피곤하고, 지치고,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 주님 앞에 나오면 따뜻한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내손을 붙잡아 주시고, 내 상처 난 마음을 어루만져주셔서 주님의 은혜 가운데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 밑에는 겸손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이 겸손의 일생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임하신 예수님. 여러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되신 예수님, 이 땅에 태어나실 때 어떻게 편안한곳에서 태어나지 못했어요. 요즘 아무리 힘들어도 병원에서 태어나잖아요. 태어날 때만은 좀 산모가 좋은 환경에서 아이를 낳아야 되는데 여관에서 다 거절하니까 냄새나고 더러운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서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누가복음 2장 7절에,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가장 낮은 곳에 임하시고 섬김의 삶을 사신 예수님. 마지막 십자가 달리시기 전날 밤 만찬 할 때 하신 일이 제자들에 발을 씻기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4절, 15절 보니까,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사람들은 다 나를 위해달라 그러고 자기중심으로 항상 나, 나, 나, 대접 받기만을 좋아하고, 군림하기 좋아하고, 명령하기 좋아하고. 근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섬김의 본을 보였어요. 제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우린 옆에서 장관쯤 한자리 할 줄 알았는데 당시 자기들이 가장 천하게 여기는 하인들이 주인 들어올 때 발 씻는 일을 예수님이 하신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들에게 본을 보였음으로 너희도 이렇게 하는 것이 옳으니라.’
여러분, 예수 믿고 나서 은혜 받은 다음에 섬김의 삶을 살아가면 그 삶에 기쁨이 임합니다. 평안함이 임합니다. 자유함이 임합니다. 서로 섬기라 그러지 말고 앞서서 섬기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구역장이 구역원을 섬기고, 구역원이 구역장을 섬기고, 남편이 아내를 섬기고, 아내가 남편을 섬기고, 할렐루야.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어떻게 사셨습니까? 남들은 편하게 지낼 때 주님은 편히 쉬실 곳도 없었어요.
누가복음 9장 5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섬김의 삶을 사시다가 십자가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에게 편지를 보낼 때 이와 같이 말합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로 8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를 위해서 섬김의 본을 보이시고 낮아지셔서 죽음의 자리까지 가신 예수님을 본받아서 이제 우리가 주님 앞에서 낮아져야 되고, 섬기는 자가 돼야 되고, 사랑으로 상처 입은 사람을 껴안아 주는 그러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요 목사님 존 비비어 목사님 책이 요즘 많이 읽히는데요. 이 「존중」이란 책에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글의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아주 어린 그리스도인이었을 때,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영영 잊지 못한다. 운전 중이었는데 그분의 음성이 들려왔다. "존, 내가 너를 나 자신보다 낫게 여김을아느냐?" 그 말씀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우주를 지으신 분이 어떻게 나같이 하찮은 사람한테, 그분 자신보다 나를 더 소중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실 수 있단 말인가? “주님 무슨 말씀입니까? 어떻게 주님 나를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 말하십니까?”
그때 주님이 말씀을 주십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을 기억하느냐?” “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낫게 여기고“ “바로 그것이 내 마음이다.” “주님 그것은 빌립보 성도에게 사도바울이 쓴 편지인데요?” “나는 내 자신이 하지 않는 일을 자녀들에게 시키지 않는다.” 주님 앞에서 그가 자꾸 질문하자 또 음성이 들려옵니다. "누가 십자가에서 죽었느냐? 너냐? 나냐? 너의 죄와 질병과 심판을 지고 내가 십자가에 달렸다. 그것은 너를 나 자신보다 낫게 여겼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이 로마서 12장 10절입니다.
로마서 12장 10절 말씀 다 같이 보겠습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할렐루야. 온유와 겸손을 옷 입고. 여기 형제라는 것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끼리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 할렐루야. 옆에 분하고 한번 이렇게 인사하세요.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같이 죽고다시 부활하는 은혜를 체험해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할렐루야.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하면 나의 옛사람이 사라지고 내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탐욕, 미움, 교만, 불신앙의 모습이 사라지고 예수님과 함께 온유와 겸손을 옷 입고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부터는 사랑하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용서하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섬기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베풀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움켜쥐고 살지 말게 하시고 나누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할렐루야.
3. 주님과 동행하는 자리
셋째로 예수님에 십자가는 주님과 동행하는 자리가 됩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 30절에,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주님과 동행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내 멍에를 매라 그랬어요, 멍에를 매라.
요즘은 멍에를 메는 소들을 잘 보기가 힘들지만 옛날에는 그 밭을 갈 때 소에 두 마리를 갖다 짝을 지어서 이렇게 멍에를 메우고 밭을 갈게 하는데 한쪽에 멍에를 멘 소가 경험이 많고 잘하는 소이고, 한쪽은 잘 밭을 매어보지 못한 소를 갖다 짝을 지웁니다. 그러면 옆에 잘 모르는 소는 따라만 가면돼요. 왜? 이 잘하는 소가 알아서 다 가는 길을 가고 일을 다 하기 때문에 그냥 따라가다 보면 밭이 다 갈아지는 거예요. 가끔 어미소에 새끼소를 붙여놓기도 합니다. 그럼 새끼소는 그냥 장난삼아 따라만 댕기다보면 밭을 다 가는 거예요. 그것을 우리에게 비유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멍에 속에 딱 우리가 얹혀지면은 주님이 다 우리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우리의 환난과 고난의 밭을 다 갈아엎어주시고, 길을 내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우리 그저 덜래 덜래 따라만 가면 다 되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에요.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삶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이냐? 주님 따라가는 거예요. 주님 의지하는 거예요. 주님 그 가는 길을 같이 가기만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의 멍에를 매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냥 따라가면 안 됩니다. 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에,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할렐루야.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 짐 지고 인생을 사는 것이 얼마 힘든지 몰라요.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진다는 찬송도 있잖아요.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 주님이 그 짐을 대신 져 주신다니까요.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길을 주님께서 같이 걸어가 주시는데 우린 따라만 가면 돼요.
개인의 문제, 가정의 문제, 생활의 문제, 자녀의 문제, 직장의 문제, 사업의 문제, 육신의 질병의 문제, 어떤 문제든 간에 주님과 함께 가기만 하면 주님이 해결해주세요.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요.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지고 일생 주님과 함께하시면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주셔서 필요한 모든 것 다 채워주시고 풍성한 은혜로 넘치게, 넘치게 부어주시고 채워주시는 은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교회학교 출신으로 지금은 인도네시아로 가셔서 사역하시는 이송용 선교사님이 있는데요. 이분께서 저한테 책을 보내주셨어요. 「괜찮아 그래도 널 사랑해」그러면서 그 책에다가 ‘제가 어릴 때 순복음교회서 자랐습니다.’ 그 말은 지금은 순복음교회가 아니지만은 ‘그때 받은 은혜를 내가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책을 보내왔어요.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본인 자신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굉장히 어려워서 아르바이트하면서 학비를 벌어가지고 공부를 했어요. 때때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기도 하고.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지내면서도 늘 긍정적인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 잘하고, 교회 활동도 열심히 하고, 앞으로 교수가 돼서 학원선교를 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그다음 카이스트 한국의 영재들이 모인다는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석사학위까지 받았는데, 어느 날 기도하는데 주님이 “너, 선교사로 가라.” 본인의 길과는 다
른 길로 주님이 인도하시는데요. 아, 이분은 역시 순복음교회서 어릴 때 신앙생활을 잘해갖고 자라가지고 “예, 무조건 순종하겠습니다.” 그 주변의 사람들이 “아니 그렇게 공부를 해갖고 왜? 하필이면 선교사로 갈라 그러느냐?” “더욱이 왜? 몽골을 가려 그러느냐?” “몽골을 가면 고생뿐인데.”
그 아내는 8개월째 임신 중이어서 이제 두 달 있으면 아이를 낳아야 되는데 말립니다. “그러면 아내는 두고 당신만 먼저 가시오.” “아닙니다. 같이 가야됩니다.
선교사 같이 가서 선교를 해야지.” “아니 두 달 있다 애 낳고 몸 추스르고 한 6개월 1년 있다 따라가면 안 되냐고.” 아니라고 기도하고 몽골에 같이 갔는데, 가서 애를 낳으니 환경이 열악하고, 의료시설이 열악해서 첫 출산에 태반이 잘 빠지지 않아서 많이 출혈하고 이로 인해서 그 출산후유증으로 굉장히 고통을 많이 당하고, 또 아이에게 먹일 젖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아,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셨어요. “젖을 빨 수 없어 배고파 우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죽어가는 몽골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출산 후 아내와 아이의 고통을 보며, 내 지식과 힘이 아니라 성령충만 해야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몽골민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5년 동안 그 정말 헌신적으로 선교를 하는데 나중에 그 책을 보면요. 자기 첫애가 몽골에서 열악한 환경에 태어난 게 너무 감사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이가 그곳에서 태어나면서 면역력을 길러갖고 자라면서 큰 병을 앓지 않게 됐데요. 그런데 한국에서 아주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서 왔으면 면역력이 약해가지고 몽골에서 내내 앓았을 거래요. 그런데 오히려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서 아이가 더 강하게 자라가지고 잔병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를 몽골에서 낳은 것도나중에 보니까 하나님 은혜라는 겁니다.
그리고 5년 동안 그 귀한 사역을 감당하는데 어느 날 하나님 또 부르십니다. “이제는 인도네시아로 가서 사역을 해라.” 그래서 인도네시아에 제 2의 선교사역을 준비하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았기에 선교지로 왔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있으면 축복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따라가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고 하나님 원하는 곳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다. 할렐루야.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 가장 행복한 길이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쳐나는 길인 것을 믿고 믿음으로 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멍에를 지고 가는 길, 때때론 희생의 길이고 연단의 길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가진 것들을 포기해야 될 때도 있고 내 경력을 희생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행복한 길이요. 그 길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길이요, 그 길이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주는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고단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어떤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십니까? 지금 십자가 그늘 밑으로 내려오십시오. 오셔서 여러분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마음의 평안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 그늘 밑에서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십시오. 온 세상을 품는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시고 온 세상 사람을 섬기는 그 섬김을 배우셔서 여러분의 삶이 섬김과 나눔의 삶으로 변화되어지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여러분 주위에 가난하고,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들고, 문제 있고, 불쌍한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여러분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무거운 짐을 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 우리를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그늘 밑이 우리의 쉴 자리인 것입니다.
(새 찬송가 415장, ‘십자가 그늘 아래’)
십자가 그늘에서 나 길이 살겠네
나 사모하는 광채는 주 얼굴뿐이라.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두려움 없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