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륵사 (神勒寺)
사 찰 명 : 신륵사 (神勒寺)
종 단: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
창건연대: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
주 소 :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282
전화번호: 031-885-2505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에 있는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한다,
어느날 원효대사의 꿈에 희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을 지을 곳이라 알려주고 사라지니,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우고 절을 지으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연못에서 나와 승천한 후에야
그 곳에 절을 지을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는 이 곳에 절을 짓기가 어려웠던 사실을 전하는 전설일 뿐
정확한 문헌사료가 없어 유래를 알기는 어렵다
신륵사라는 절 이름에 관한 유래는 2가지가 전해오는데...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이라는 바위 부근에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 따라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고,
두번 째는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이를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순해졌다,
이에 신력으로 제압했다 하여 신륵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전한다
신륵사(神勒寺): 강월헌(江月軒)
전탑 가까이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누각이 있는데 본래 나옹선사가 입적한 후
화장터의 석탑 가까이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1972년의 대홍수로 떠내려가고 이후 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세웠다.
강월헌이라는 이름은 나옹의 당호(堂號)로 그를 추모하여 누각을 세운 것이라 생각된다.
이색은 나옹의 비문에서, '보제의 몸은 이미 화장을 하였건만 강물과 달은 지난날과 다름이 없구나.
이제 신륵이 장강에 임하여 있고 석종이 거기에 우뚝 솟아 있어 달이 뜨면
그림자가 강에 거꾸로 걸려있고 물빛은 등불빛 같고,
무럭무럭 타오르는 향기만 그 속에 엉겼으니 이른바 강월헌이로다.
비록 한없는 세월이 흐른다 해도 마치 보제가 살아있는 것만 같구나'하고 읊었다.
신륵사 강월헌 편액
신륵사 삼층석탑
강월헌 앞에 있는 이 탑은 삼층석탑으로 누구에 의해 조성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신륵사 삼층석탑
신륵사 삼층석탑
신륵사 명부전
조사당 옆 경내 맨 왼쪽에 있으며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고려 초 도원 대사가 처음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의 전각은 조선 후기에 지은 것이다.
안에는 목조 지장삼존불을 비롯하여 시왕상, 판관, 녹사 등 모두 21위의 조각이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冥府殿) 편액의 글씨는 17세기 중건 당시 쓴 글씨로 보이며, 주련은 4점이 걸려 있다.
신륵사 명부전
신륵사 명부전 편액
신륵사 명부전 불단
신륵사 명부전 불단
목조 지장삼존불을 비롯하여 시왕상, 판관, 녹사 등 모두 21위의 조각이 봉안되어 있다.
신륵사 명부전
신륵사 명부전 지장보살
신륵사 명부전 주련
신륵사 대장가기비
극락보전 동쪽 언덕에 있는 대장각비는 맞은 편에 있었던 대장각에서 대장경을 인출한 기념으로
1387년(고려 우왕 13)에 세운 것이다. 비신의 높이는 133cm, 너비 88cm이며 이를 보호하는 돌기둥을 세웠다.
이는 석종비와 같은 양식으로 복련대석과 옥개석을 얹어 놓은 모습이다.
비문은 2cm의 해서체로 당시 직제학 권주(權鑄)가 썼다
신륵사 대장가기비
신륵사 대장가기비 편액
신륵사 대장가기비
신륵사 김병익 공덕비
신륵사 김병익 공덕비
신륵사 다층전탑 (보물제226호)(전탑-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
다층전탑은 경내 동남쪽 강가에 솟은 동대(東臺)위에 있는데, 당시의 풍수지리사상에 의하여
경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세웠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은 1726년(영조2)에 보수가 이루어진 것이나 벽돌의 무늬로 보아 처음 조성한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며 이는 고려시대 유일의 전탑이 된다
신륵사 다층전탑 (보물제226호)(전탑-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
신륵사 적묵실
신륵사 적묵실 편액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
신륵사 팍가원당형석조부도
신륵사 조사당
가람의 서북쪽 명부전 옆에 자리한 조사당은 낮은 돌기단 위에 남향으로 세워진 아담한 건물로
현재 보물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절의 여러 건물 중 가장 오래된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인데,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1982년에 기와를 교체하였다.
이색이 지은 '보제존자진당시병서(普濟尊者眞堂詩幷序)'에 1397년(우왕 5)에 진영당(眞影堂)을 지었다고
나와 있으므로 고려시대에도 조사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면 1칸, 옆면 2칸 규모로 다포식 단층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여느 전각과 달리 건물 의 평면이 앞면과
옆면의 비례가 1.07:1로 되어 있어 정사각형에 가깝다. 앞면에는 여섯 짝의 문을 마련하여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고
나머지 삼면에는 벽을 만들었다. 자그마한 건물로 가운데에 기둥을 쓰지 않았으므로 대들보가 없고
공포는 내외 각 2층목으로 앞뒷면에 공간포를 4개씩, 옆면에는 기둥 사이에 1개씩 배열하였다.
바닥은 우물마루로 만들었다.
주련은 2점이 걸려 있는데 중국 왕희지의 행서체를 바탕으로 하여 쓴 근대의 격조 높은 글씨다.
주련의 내용은 조사당에 걸맞게 조사의 존경스런 행적을 한 마디로 표현하였는데, 그 뜻은 다음과 같다.
신륵사 조사당 전경
신륵사 조사당
신륵사 조사당
신륵사 조사당 편액
조사당(祖師堂) 편액은 단정한 해서체 글씨인데 작가와 시기를 알 수 없지만 매우 격이 높은 작품이다.
신륵사 조사전 불단
불단 위에는 나옹 선사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지공과 무학 대사의 영정을 모셨고,
나옹 스님의 진영 아래는 나무로 만든 나옹 스님의 조각이 있다.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 스님은 고려 말의 불교를 중흥시킨 선사이다.
경상북도 영덕 사람으로 아버지는 선관서령 벼슬을 지낸 아서구(牙瑞具)이고,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속명은 원혜(元慧)이고 호가 나옹 또는 강월헌(江月軒)인데 지금 전탑 아래 여강 가에 지은 정자 ‘강월헌’은
바로 나옹 스님의 호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20세 때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의
요연(了然) 선사에게 출가하였다. 4, 5년간 명산을 찾아다니다가 1344년(고려 충혜왕 5)에
경기도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4년 동안 정진하여 득도하였다.
1347년(고려 충목왕 3) 7월에 원나라 서울 연경 법원사(法原寺)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스님 지공(指空)에게 4년 동안 불도를 배웠다
이때 원나라 임금의 청을 받고 광제선사(廣濟禪寺)에서 주지로 머물며 법회를 크게 열기도 하였다.
그 뒤 정자사(淨慈寺)로 가서 임제종 18대손인 평산처림(平山處林)의 법을 전수받았으며,
명주의 보타낙가산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육왕사(育王寺)에서 석가모니상을 예배하였다.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여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머물렀다.
공민왕과 태후의 청으로 황해도 신광사(神光寺)에 머물면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1363년에는 구월산 금강암(金剛庵)에, 3년 뒤인 1366년에는 금강산 정양암(正陽庵)에, 그리고 청평사(淸平寺)에 차례로 머물렀다.
그 뒤 공부선(功夫選)의 시관(試官)이 되었고 1361년부터 용문산, 원적산, 금강산 등지를 돌아본 후,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고
10년 후인 1371년(공민왕 20)에는 왕사가 되었다. 이후 송광사에 잠시 머물다가 회암사를 중창하여 낙성식을 열었다.
1376년(우왕 2) 왕명으로 경북 밀양 영원사로 가다가 신륵사에서 열반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행적이 대개 널리 알려진 생애이다.
곧 신륵사와 그가 관련 있는 부분은 다만 이곳에서 입적하였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나 그는 입적하기 이전에 한 신륵사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또 다른 호가 강월헌(江月軒)인데, 이색의 『보제존자석종비』에는 강월헌은 나옹선사가 거주하던 곳이라 하였고,
또 ‘신륵사는 보제께서 크게 도를 펴던 곳으로 장차 영원히 무너지지 않으리라.’ 하였던 데서도 알 수 있다.
이색이 지은 『보제존자선각탑명』에는 나옹선사가 영원사로 가면서도, ‘내가 가는 길은 여흥에서 그칠 것이다.’ 라고 하였다는데
이 점도 나옹이 신륵사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던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나옹선사의 생애에 있어서 의문이 남는 것은 왜 무엇 때문에 갑자기 신륵사에서 입적하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는 1375년(공민왕 19)에 고려의 마지막 승과시험을 실시하였고, 이듬해인 1376년에는 회암사를 중창하여 낙성식에서
문수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때 선비와 여인들이 주야로 왕래하였고, 그들은 생업까지 포기하면서 회암사에 몰려들어
조정에서는 명을 내려 나옹을 영원사로 떠나게 하였다.
그는 이 무렵 병을 앓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열반문을 통하여 길을 떠나 7일만에 여주에 도착하여
신륵사에 머물다가 입적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열반문을 통해서 나가라고 했다는 점이다.
이 광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사람들이 모두 의심스럽게 여기고 소리쳐 울자 이에 나옹은, "힘쓰라! 힘쓰라! 나로 인해서
중단하지 말라. 내가 가는 길은 마땅히 여흥에서 그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는 무엇을 힘쓰라고 한 것일까 의문이 남는다.
한편 그가 입적했을 때, 오색의 구름이 산마루를 덮었고 유골을 싣자 구름도 없는 맑은 날씨에 유독 그곳에만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후 유골을 회암사로 옮기는 과정에서 갑자기 여강의 강물이 불어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영이로움을 듣고 조정에서는 시호를 선각(禪覺)이라 하고 이색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제자들이 신륵사에 영정을 모시고 석종부도를 조성하여 사리를 봉안하였다.
신륵사 조사당 주련
禪指西天爲骨髓(선지서천위골수) 선사의 뜻은 서천의 골수가 되었고
敎說東土作?篁 (교설동토작생황) 가르침과 말씀은 우리나라의 생황이 되었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조사당 뒷편 언덕 전망이 좋은 곳에 나옹선사의 부도가 있다.
이 부도는 높이 1.9m 크기로 종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석종이라고도 하며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와는
달리 라마탑의 형식을 지닌 특이한 부도이다.
이러한 석종형부도는 인도에서 기원한 탑 형식인데
개성 화장사의 지공부도와 묘향산 안심사의 석종도 이러한 계열에 속한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
보제존자 석종 앞에는 공양등의 성격을 지닌 높이 1.94m의 화려한 석등이 있다.
8각 기단부 위에 8각의 화사석과 옥개를 얹고 그 꼭대기에 보주를 올렸다.
석조부도를 모방하여 상대·하대의 명확한 구별 없이 하나의 돌로 쌓았다.
화사석은 다른 부분과는 달리 납석제를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각 우주에는 용을 양각하였고 각 면에는 선을 나타낸 창문이 8개 있으며 창구(窓口)마다 비천상이 있다.
이 석등은 고려말기 나옹이 입적한 후 부도를 세웠던 1377년(고려 우왕 3)에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