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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구살단나국(瞿薩旦那國)
구살단나국53)의 둘레는 4천여 리이며54) 모래와 자갈이 태반을 이루고 있는데 그 땅은 좁다. 농사가 잘 되며 온갖 과일이 많이 난다. 양탄자와 가는 모직물을 생산하는데 가늘게 실을 뽑아내는 기술이 특히 뛰어나다.
또 백옥(白玉)과 예옥(黳玉)을 생산하고 있다. 기후는 온화하고 화창하며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먼지가 날아다닌다. 풍속은 예의를 알며 사람들의 성품은 온화하고 공손하다. 학문을 좋아하고 예능을 익히며 여러 기술에 널리 통달해 있다. 인민들은 부유하고 집집마다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나라에서는 음악을 숭상하고 있으며 사람들도 춤과 노래를 즐긴다. 소수의 사람들은 털옷이나 모직옷을 입고 대부분은 명주를 기운 옷[絁紬]이나 흰 모직물[白氈]의 옷을 입는다. 행동거지에는 예의가 있고 풍속에는 기강이 있다.
문자와 법률·제도는 인도의 것을 따르고 있지만 필법이나 양식은 조금 바꾸었으므로 새로운 부분도 있다. 말은 여러 나라들과 다르다.55) 부처님의 법을 숭상하고 가람은 백여 곳이 있으며 승도는 5천여 명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익히고 있다. 왕은 매우 굳세고 용감하며 부처님의 법을 깊이 받들고 있어서 스스로를 가리켜 비사문천(毘沙門天)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다.
옛날 이 나라는 허허벌판의 광야였을 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는데 비사문천이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 무우왕의 태자가 달차시라국에 있다가 눈을 도려내는 일을 당하자 무우왕이 격노하여 태자를 보좌하던 신하를 내쫓았다. 또 그 호족들을 유배 보내어 거주하던 설산의 북쪽에서 내쳐서 황량한 골짜기에 자리 잡게 하였다. 유배당한 사람들은 맹수들을 쫓아내며 이 서쪽 경계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여 왕으로 받들었다.
당시에는 동쪽 지역 황제의 아들이 유배를 당하여 이리저리 유랑하다가 이 동쪽 경계에 와서 살았다. 그리고 아랫사람들의 권고에 의하여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였다. 세월이 꽤 흘렀어도 두 나라는 문화를 서로 교류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왕이 각각 사냥을 하러 나왔다가 우연히 황량한 늪에서 서로 만나 자신의 가계(家系)를 따지다가 서로의 우위를 주장하며 다투게 되었다. 말이 거칠어졌고 마침내 서로 병사를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런데 신하가 이렇게 간언하였다."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사냥하러 와서 싸움이라니요? 게다가 지금은 군대와 무기도 미처 갖추어지지 못하였습니다. 돌아가셔서 병사들을 정비한 뒤에 날을 정하여 모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에 가마를 돌려 각자의 나라로 돌아간 뒤에 군마(軍馬)를 정비하고 훈련을 시켰으며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마침내 약속한 날이 되자 병사들을 모아 깃발을 높이 세우고 북을 두드리며 나아가 대치하였다. 날이 밝자 마침내 전투가 벌어졌는데 서쪽 나라의 군주가 불리해지자 북쪽으로 달아났다. 동쪽 나라의 군주는 그를 쫓아가서 목을 베고 승리를 얻었다. 그는 군주를 잃은 나라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도읍을 중간 지역으로 옮겨서 성곽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느 곳이 적절한 땅인지 몰라 일을 성사시키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리하여 멀고 가까운 곳에 널리 포고령을 내려서 지리에 해박한 사람을 찾았다. 이 때 몸에 회를 바른 외도가 있었는데 그는 커다란 표주박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는 표주박에 물을 가득 담아서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제가 지리를 압니다."그리하여 그 물을 흘려보내니 물은 굽이굽이 돌고 돌아서 다시 처음 흘려보냈던 곳으로 왔다가 갑자기 급하게 흐르더니 어느 순간 홀연히 물이 보이지 않았다. 그 물이 흐르던 흔적을 따라서 성곽의 기초를 높이 세우고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고 드디어 이 나라를 통치하게 되었다. 지금의 왕이 이 성을 도읍으로 정하였는데 성은 그리 높지 않지만 공격을 받아도 쉽게 함락되지 않았으므로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 성을 빼앗은 사람이 없었다. 그 왕이 수도를 옮기고 마을을 만들고서 나라를 세우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였다.
그와 같은 위업을 이루고난 왕은 이미 노인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아직 후사를 잇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계가 끊어질까 두려웠다. 그리하여 비사문천신에게 가서 기도를 올리며 후사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신상(神像)의 이마가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갓난아이가 나왔다. 왕이 그 아이를 받들고 가마를 돌려 돌아오니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경사스러워 하였다.
그런데 아이가 인간의 젖을 먹지 않았다. 왕은 아이가 오래 살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다시 신사 로 가서 거듭 아이를 길러줄 것을 청하였다. 그 순간 신상 앞의 땅이 불쑥 솟아올랐는데 그 모양이 마치 젖가슴과도 같았다. 신이 내려준 아이는 그 젖을 먹고 자라나게 되었다. 아이의 지혜와 용기는 앞서 그 어떤 사람보다도 빛났으며 그의 덕풍과 교화는 널리 사람들에게 미쳤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사(神祠)를 지어 조상에게 제사지냈다. 그 뒤로 대대로 이 일을 이어받아서 나라를 계승하여 군림하여 그 왕통이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신묘( 神廟)에는 수많은 진귀한 보배들이 있으며 제사지내는 일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땅의 젖[地乳]'으로 왕을 길렀기 때문에 이것을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
왕성의 남쪽으로 10여 리를 가다 보면 거대한 가람이 있다. 이 나라의 선왕이 비로절나(毘盧折那)56)[당나라 말로는 편조(遍照)라고 한다]아라한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옛날 이 나라에 부처님의 법이 아직 미치지 못하였을 때 아라한이 가습미라국으로부터 이 숲 속에 와서 조용히 가부좌하여 선정을 익히고 있었다. 이 때 이 모습을 본 어떤 사람이 그 용모와 복장에 놀라서 그의 모습에 관하여 낱낱이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친히 그곳으로 나아가서 아라한의 용모와 행동거지를 살펴보고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데 홀로 깊은 숲 속에 있는 것이오?" 아라한이 답하였다.
"나는 여래의 제자로서 조용하게 지내며 선정을 닦고 있는 중입니다. 왕께서는 복을 짓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찬양하며 가람을 세우고 승가 대중을 불러 모아야 마땅합니다."
왕이 물었다."여래라는 자는 어떤 덕을 갖고 있으며 어떤 신이기에 그대가 숲 속에서 지내며 고행을 하면서까지 그의 가르침을 받드는 것인가?"나한이 답하였다."여래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시며 삼계(三界)를 인도하시기 위해 모습을 나타내시거나 숨기시면서 나고 죽는 오묘한 이치를 보이십니다. 그 법을 따른다면 생사를 벗어날 수 있지만 그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면 애욕의 그물에 걸려들고 말 것입니다."
왕이 말하였다."진실로 그대의 말과 같다면 구체적인 일로 나타내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이렇게 말로 따지는 것보다 더 명백해질 것입니다. 대성(大聖)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만일 그분이 나를 위하여 모습을 나타내 보여 주신다면 우러러 뵌 뒤에는 마땅히 가람을 세워서 마음을 기울여 귀의하고 믿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겠습니다."
그러자 나한이 말하였다."왕께서 먼저 가람을 세우시어 공을 이루시면 감응이 있을 것입니다."왕은 그 청을 따라서 승가람을 세우니 멀고 가까운 곳의 모든 사람들이 몰려와서 법회를 열고 경하하였다. 그러나 사람을 불러 모을 때 두드려야 하는 건치가 없었다.
왕이 나한에게 말하였다."가람은 완성되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나한이 말하였다."정성이 지극하니 부처님의 보살핌이 멀지 않았습니다."왕이 나아가 예를 올리며 기도하자 갑자기 공중에서 불상이 나타나 내려와서 왕에게 건치를 내려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진실하게 믿게 되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게 되었다.
왕성의 서남쪽으로 20여 리 떨어진 곳에 구실능가산(瞿室
왕성 서남쪽으로 10여 리를 가면 지가파박나(地迦婆縛那)가람58)이 있는데 그 속에는 협저(夾紵)59) 입불상(立佛像)이 모셔져 있다. 본래 굴지국(屈支國)으로부터 이곳으로 와서 머물게 된 것이다. 옛날 이 나라에 신하가 있었는데 견책을 당하여 굴지국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언제나 이 불상에게 예를 올렸는데, 훗날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온 마음을 기울여서 멀리서나마 예불을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불상이 갑작스레 저절로 이곳으로 오자 그 사람이 집을 희사하여 이 가람을 세웠다.
왕성의 서쪽으로 3백여 리를 가다 보면 발가이성(勃伽夷城)60)에 도착한다. 이 성 안에는 부처님의 좌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높이는 7척 남짓하고 얼굴과 모습이 아름다우며 위엄이 있고 숙연하다. 머리에는 보석으로 장식한 관을 쓰고 있는데 이따금 광명이 비친다.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은 본래 가습미라국에 있던 불상이었는데 지극히 기도하여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 어떤 나한이 있었는데 그의 사미 제자가 죽음을 맞이해 신맛이 나는 떡을 찾았다고 한다. 나한이 천안으로 그 모습을 보고서 구살단나국에 그 음식이 있음을 알고 신통력으로 이곳에 와서 구하여 가져다주었다. 사미가 그것을 먹고 난 뒤에 그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하였다. 마침내 바라던 대로 그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게 되었다. 그가 왕위를 이어받자 그의 위엄은 멀고 가까운 곳에 두루 미쳤으며 마침내 설산을 넘어 가습미라국을 정벌하러 갔다. 가습미라국의 왕도 군마를 정렬하고 소집하여 변방의 오랑캐를 치고자 하였다.
이 때 아라한이 왕에게 간언하였다."병사들을 부려서 전투를 벌이지 마십시오. 내가 능히 그들을 물리치겠소." 이어서 나아가 구살단나왕을 위하여 여러 가지 법의 요체를 설해주었다. 왕은 처음에는 믿지 않고 여전히 병사를 일으켜 전쟁을 벌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나한이 마침내 이 왕이 전생에 사미였을 때 입었던 옷을 가져다가 보여 주었다. 왕은 옷을 보고 나서 숙명지(宿命智)를 얻었다. 그리하여 가습미라왕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우호를 나누었으며 병사들을 해산시켜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사미 사절에 자신이 공양을 올렸던 불상을 봉양하고 군사들과 함께 예를 올리며 청하였다.
그러자 불상이 이 땅으로 온 뒤에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은 물러나서 가람을 세우고 승려들을 초청하였으며 자신의 왕관을 희사하여 불상의 머리 위에 올렸다. 지금 불상의 관은 바로 선왕(先王)이 보시한 것이다.61)왕성의 서쪽으로 150∼160여 리를 가다 보면 거대한 사막의 길 한가운데에 구릉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쥐가 파낸 흙이 쌓인 것이다.62)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이 사막에 사는 쥐 가운데 큰 것은 고슴도치만 한데 그 털 빛깔은 금빛과 은빛이 섞인 듯 이채롭다고 한다. 쥐들은 자기들의 우두머리가 구멍에서 나와 다닐 때마다 쥐떼들이 무리를 지어 따른다고 한다.
옛날에 흉노들이 수십만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변방의 성을 노략질하러 나왔다가 쥐가 파서 쌓아놓은 흙더미 옆에 군대를 주둔시킨 일이 있었다. 이 때 구살단나왕도 수만 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대적해내지 못할까 두려웠다. 한편 왕은 평소 흙더미 속에 사는 쥐를 기이하게 여기기는 하였지만 신령스러운 힘이 있는지 미심쩍어 하였다. 그리하여 오랑캐들이 쳐들어 와도 살아남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신하들도 겁에 질리기만 하였지 아무런 계책도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왕은 하는 수 없이 제단을 마련하고 향을 사르며 쥐에게 빌었다.
"바라건대 신령스러운 힘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군사력에 도움을 내려주소서." 그 날 밤 구살단나왕은 꿈에 커다란 쥐를 보았는데 쥐가 왕에게 말하였다. "삼가 힘을 돕고자 하오니 부디 일찍이 병사들을 정렬하소서. 다음날 아침 전투를 벌인다면 반드시 이기실 것입니다."
구살단나왕은 신령스러운 힘의 도움이 있을 것을 알고서 마침내 군마를 정렬하고 장수들에게 명하여 날이 새기 전에 전쟁터로 나아가서 멀리까지 적을 추격하여 덮치도록 하였다. 흉노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들 겁을 내면서 수레에 올라타고 갑옷을 입으려고 하였는데, 모든 말의 안장과 사람들의 옷, 활의 시위와 갑옷의 솔기 등 모든 띠나 실의 종류를 쥐가 모조리 쏠아 끊어 놓았다. 그 사이 구실단나왕의 군대가 이미 들이닥쳐 그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묶이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그 장수를 죽이고 병사들을 포로로 붙잡으니, 흉노들은 겁에 질려 이것은 신령이 왕의 군대를 도운 것이라고만 생각하였다. 구살단나왕은 쥐의 큰 은혜를 고맙게 생각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단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대대로 이들을 존경하면서 특별히 진귀하게 여겼다.
위로는 군왕에서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제사를 모시며 복과 도움을 구하였는데, 그 쥐구멍을 지날 때면 수레에서 내려서 종종걸음으로 빨리 나아가 절을 하며 지극한 공경심을 표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는 복을 구하기 위해 옷이나 화살, 또는 향이나 꽃, 온갖 맛난 음식들로 공양을 올리며,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하면 많은 이들이 복과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곧 재난을 당한다고 한다.
왕성의 서쪽으로 5∼6리를 가다 보면 사마약(娑摩若)승가람63)이 있다. 이 속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백여 척에 달하며 신령스러운 감응이 매우 많이 일어나며 이따금 신비한 빛이 비친다고 한다. 옛날 나한이 먼 곳에서 이 숲 속으로 와서 신통력으로 커다란 광명을 비추었다. 이 때 왕이 밤에 2층 누각에 올라 멀리서 숲을 바라보다가 광명이 환히 비치는 것을 보고서 그 내력을 물어보자 사람들이 말하였다.
"어떤 사문 한 사람이 멀리서 와있는데 숲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서 신통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왕이 곧바로 가마를 준비하도록 명하여 몸소 그곳으로 가서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현자라고 생각해 마음에는 존경심이 일어났다. 왕이 그의 풍모를 흠모하여 궁중으로 와줄 것을 완강히 청하자 사문이 말하였다.
"이 세상에는 각자 적합한 장소가 있으며, 뜻은 각자 있을 곳이 따로 있습니다. 깊은 숲과 늪지가 마음에 맞으니, 훌륭한 집과 높은 건물은 내가 찾아갈 곳이 아닙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한층 존경하고 우러러보면서 깊이 존중하는 마음이 더해졌다. 그리하여 그를 위해서 가람을 세우고 솔도파를 일으켰다. 사문은 왕의 청을 받아서 결국 그곳에서 머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왕은 감응을 통해 사리 수백 과[粒]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크게 기뻐하면서도 혼자 이렇게 생각하였다.
'사리가 나의 정성에 감응한 것이 어찌하여 이렇게도 늦었단 말인가? 일찍 얻어서 솔도파 아래에 안치했더라면 어찌 훌륭한 유적지가 되지 아니하였겠는가?' 그리고 곧 가람으로 가서 사문에게 자세하게 말하자, 나한이 말하였다.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안치하십시오. 금·은·동·철·대석(大石)을 가지고 상자를 만들어 차례로 사리를 넣으십시오."
왕이 장인에게 명하자 하루도 안 되어 함이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보석들을 가마에 싣고 가람에 도착하였다. 이 때 왕궁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부터 관리,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 광경을 보기 위하여 몰려든 사람들의 수가 만 명을 헤아렸다. 나한이 오른손으로 솔도파를 들어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뒤에 왕에게 말하였다.
"이제 사리를 안장하십시오." 마침내 땅에 구멍을 파서 사리함을 안장하자 공사는 끝이 났다. 이에 솔도파를 내려놓았는데 조금도 기울어지는 부분이 없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며 찬탄하였다. 그리하여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 더욱 굳어졌고 법을 공경하는 뜻이 더욱 강해졌다.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부처님의 힘은 생각조차 할 수 없고 신통력도 궁구하기 어렵다고 들었다. 어떤 때는 몸을 백억 가지로 나누고 또 어떤 때는 인간과 하늘에 그 모습을 나타내어 주시기도 한다고 들었다. 온 세계를 들어서 손바닥 안에 올려놓아도 그 속에 사는 중생들은 조금도 움직인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며, 법의 성품을 평범한 말씀으로 널리 연설하여도 중생은 자기 근기에 따라서 깨우침을 얻는다고 하였다. 바로 이런 부처님의 신통력이야말로 그 누구에게도 비 길 데가 없으며, 부처님의 지혜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에 있음을 의미한다.
부처님의 몸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어도 여전히 그 가르침은 전해지고 있다. 그 교화를 즐기고 은택에 젖으며 도를 맛보고 그 풍모를 흠모하는 것이다. 이제 부처님의 사리를 얻어서 그 복의 도움을 크게 입게 되었으니, 사람들이여, 부지런히 깊이 존경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깊고 광대해져 밝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왕성에서 동남쪽으로 5∼6리 떨어진 곳에 마사(麻射)승가람64)이 있다. 이 나라의 선왕의 부인이 세운 것이다. 옛날 이 나라 사람들은 누에나 뽕나무를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동쪽의 나라에는 그것이 있다고 들었으므로 사신에게 명하여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동쪽 나라의 군주는 이것을 비밀이라고 하여 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변방의 출입문에 엄명을 내려서 누에나 뽕나무 종자가 나가지 못하게 철저히 경비를 서도록 하였다.
하는 수 없이 구살단나왕은 자존심을 굽혀서 동쪽나라에 혼처를 구하였다. 동쪽 나라의 군주는 먼 나라에 영향력을 미치려는 뜻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 청을 받아들였다. 구살단나왕이 사신에게 왕녀를 맞아들일 때 다음과 같이 하도록 명하였다."너는 동쪽나라 공주에게 '우리 나라에는 본래 비단실이나 누에, 뽕나무의 종자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가지고 와서 옷을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라."
공주는 그 말을 듣고 비밀리에 그 종자를 구한 뒤 모자 속에 감추었다. 마침내 변방의 출입문에 도착하였다. 관리는 두루 수색하였지만 공주의 모자만은 감히 조사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구살단나국에 들어가서 마사(麻射)가람의 옛 땅에 머물렀다. 왕은 그곳에서 비로소 의례를 갖추고 공주를 받들어 궁으로 맞아들였다. 뽕나무와 누에의 종자는 이 땅에 남겨두었는데 따뜻한 봄이 오자 그 뽕나무를 심고 누에 먹일 달[蠶月:음력 사월]이 되자 다시 이곳으로 와서 뽕나무 잎을 따다가 누에에게 먹였다. 처음에 왔을 때는 여러 가지 잎을 섞여서 먹였지만, 이 때 이후로는 뽕나무가 무성해졌다. 왕비가 이에 돌에다 규정을 새겨두었다."살상해서는 안 된다. 누에가 나방이 되어서 날아가 버린 뒤에 누에고치를 처리해야 한다. 만일 이 법칙을 어긴다면 신이 보호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누에를 위해 가람을 세웠다. 이곳에는 말라버린 뽕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이것이 그 본래 종자였던 나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이 나라에서는 누에를 죽이지 않는다. 그리고 몰래 실을 가져가면 다음 해에는 누에 작황이 좋지 못하다고 한다.
성의 동남쪽으로 백여 리를 가면 큰 강65)이 있는데, 이 강은 서북쪽으로 흐른다. 이 나라 사람들은 이 물을 이용하여 밭을 경작하였다. 그런데 훗날 강물이 끊겼다. 그러자 왕은 참으로 괴이하다고 여기고 가마를 준비하게 하여 나한승(羅漢僧)에게 가서 물었다.
"큰 강의 물을 이 나라 사람들이 나누어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강물이 끊겼으니, 이것은 대체 누구의 잘못입니까? 정치를 공평하게 하지 못하였거나 저의 덕이 널리 두루 미치지 못하였던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이토록 무거운 재앙을 내리는 것입니까?"
나한이 말하였다. "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릴 때에 정치와 교화는 맑고 온화하였습니다. 강물이 끊어진 것은 용의 소행입니다. 서둘러 사당으로 가서 기도하고 소원을 빈다면 예전처럼 이익을 회복하실 겁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가마를 돌려 사당에 가서 강의 용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러자 갑자기 한 여인이 파도를 타고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남편을 일찍 여의고서 의지하고 따를 만한 지아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을 막아 농민에게 피해가 가도록 심통을 부렸던 것입니다. 왕께서 나라 안에 지체가 높으신 신하 한 사람을 골라서 나와 혼인을 맺어준다면 강물은 예전과 같이 흐를 것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삼가 그대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용이 이 나라의 대신에게 맘에 드는 표정을 보였다. 왕이 가마를 돌려 환궁하고서 군신들에게 말하였다. "대신은 이 나라의 막중한 인물이고 농사는 사람이 연명하기 위한 일이다. 나라가 막중한 인물을 잃는다면 곧 위험해질 것이고 사람에게 음식이 끊어진다면 곧 죽게 될 것이다. 위험함과 죽음의 일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하겠는가?"대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답하였다.
"오래 전부터 미천한 몸으로 감히 나라의 중책을 맡아 일을 그르쳤습니다. 언제나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으나 그 시기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선택된다면 감히 막중한 책임을 감당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백성을 이롭게 한다면 이 한 사람의 신하가 어찌 아깝겠습니까? 신하란 나라를 보좌하는 사람이요, 백성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부디 대왕께서는 더 염려치 마소서. 만약 다행히 복을 짓게 된다면 승가람을 세워주소서." 왕이 그의 소원을 받아들여 공사를 하여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그 신하는 용궁으로 빨리 들여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은 모두 음악을 연주하고 음식을 가지고 나와서 그에게 공양을 올렸다. 그 신하는 흰옷으로 갈아입고서 백마에 올라탄 뒤에 왕에게 작별인사를 올리고 나라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그리고 말을 몰아서 강으로 들어갔는데 물 위를 밟는데도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강의 중류까지 건넜을 때 말채찍을 휘둘러서 물을 젓자 물의 가운데가 열리면서 가라앉아 버렸다. 잠시 후에 백마가 떠올랐는데 전단으로 만든 커다란 북 하나와 한 통의 편지를 싣고 왔다. 그 편지에는 대략 이렇게 쓰여 있었다."대왕께서 미천한 저를 저버리지 않으셔서 과분하게 선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디 복을 지으셔서 나라를 이익 되게 하시고 신하들에게 은혜를 두루 미치소서. 이 큰 북을 성의 동남쪽에 걸어두소서. 만일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북이 미리 울려서 소리를 낼 것입니다."
마침내 강물이 다시 흘렀고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 물을 이용하고 있다. 세월이 오래 흘러 용의 북은 없어진 지 오래이며 예전에 걸렸던 곳에 지금은 다른 북이 걸려있다. 연못 옆의 가람도 폐허가 되어 스님이 살고 있지 않다.
왕성의 동쪽으로 3백여 리를 가다 보면 드넓게 황폐해진 늪지가 있다. 수십 경(頃)에 달하는 땅에 초목은 없고 토지는 검붉은 색이다. 옛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전쟁에서 패한 곳이라고 한다. 옛날 동쪽 나라의 장군이 백만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서쪽을 정벌하러 왔다. 이 때 구살단나왕 또한 군마를 정비하고 수십만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나아가 강적들과 대항하였다. 이곳에 이르러 두 나라 군사가 마주쳐 전투가 벌어졌는데 서쪽 병사들이 밀렸다. 그리하여 승리를 얻게 된 동쪽 나라의 병사들이 살육을 자행하였다. 왕을 포로로 잡고 그 장수를 죽였다. 병사들은 모조리 살육당하여 누구 한 사람 살아남지 못하였다. 유혈이 낭자하여 땅을 적셨으니, 그 흔적이 지금 이렇게 남아있다.
전투를 벌인 곳에서 동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비마성(媲摩城)66)에 도착한다. 전단(栴檀)을 새긴 입불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높이는 두 길[二] 남짓하고 영묘한 감응이 매우 많이 일어난다. 이따금 광명을 비추기도 하는데 누구든지 아픈 사람은 자신의 아픈 부위와 같은 불상의 부위에 금박(金箔)을 붙이면 완쾌된다고 한다. 마음을 비우고 기도하고 소원을 비는 자는 대부분 소원을 들어준다.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은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교상미국 오타연나왕이 만든 것인데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 그곳에서 허공을 타고 이 나라 북쪽 갈로락가성(曷勞落迦城)67) 안으로 왔다고 한다. 처음 이 성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안락하고 부유한데다가 삿된 견해에 깊이 빠져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귀하게 여기거나 공경하지 않았다. 그 불상이 저절로 이곳에 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신기하게는 생 각하였지만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훗날 어떤 나한이 이 불상에 예배를 하였는데 이 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의 용모와 복장이 남다른 것에 놀라서 달려가 왕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왕이 명령을 내렸다.
"모래와 흙을 이 낯선 사람에게 뿌려라." 그리하여 아라한은 온몸에 흙과 모래를 뒤집어썼고 입에 풀칠할 음식도 구하지 못하여 끼니를 굶고 있었다.
이 때 어떤 한 사람이 속으로 이 일을 못 견뎌 하였다. 그는 옛날부터 언제나 이 불상을 공경하고 존귀하게 여겨 절을 올려왔던 사람이다. 그가 나한이 이런 지경에 빠진 것을 보고 몰래 그에게 음식을 주었다. 나한이 그 지방을 떠나가려 할 때에 그 사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떠난 지 7일이 지나면 흙모래가 비처럼 쏟아져 내려 이 성을 가득 메울 것이며 아마 살아남을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오. 그대에게 그 일을 알려주니 서둘러 빠져나갈 계책을 세우시오. 나에게 흙모래를 끼얹은 사람들은 그런 재앙을 당하게 될 것이오."
나한은 이렇게 말을 하고서 이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 사람이 성 안으로 들어가서 친지들에게 이 일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자는 누구라도 비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틀째가 되자 큰 바람이 홀연히 불더니 흙먼지가 불어왔다. 그리고 온갖 보석들이 비처럼 쏟아져 길거리를 가득 채웠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시 앞서 재앙을 예고한 사람을 비웃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반드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다. 은밀히 길을 파서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구멍을 만들어놓았다. 7일째가 되던 한 밤에 모래와 흙이 비처럼 내리기 시작하더니 온 성 안을 가득 메웠다. 이 사람은 구멍을 통하여 성을 빠져 나와 동쪽으로 가서 이 나라에 도착하여 비마성(媲摩城)에 머물렀다.
이 사람이 이곳으로 오자 불상도 따라왔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불상에게 공양을 올리자 다시 옮겨가지 않았다. 여러 앞선 기록들에 의하면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이 다하면 불상이 용궁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지금 갈로낙가성은 커다란 구릉이 되어있는데 여러 다른 나라의 군왕이나 귀족들이 이곳에 와서 흙을 파고 그 보물을 발굴해내려고 많이 시도하지만 바로 그 옆에 도착하기라도 하면 맹렬한 바람이 사정없이 불어대고 자욱한 연기와 구름이 4방에서 일어나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비마천(媲摩川)으로부터 동쪽을 향하여 사막으로 들어가서 2백여 리를 가게 되면 니양성(尼攘城)68)에 도착한다. 성의 둘레는 3∼4리에 달하며 커다란 늪지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늪지는 무덥고 습하여 걸어다니기가 어렵다. 갈대가 어지럽게 자라있어 지나다니는 길이 없는데 오직 이 성을 거쳐 나가야지만 간신히 길을 찾아다닐 수 있다. 그러므로 왕래하는 사람은 이 성을 거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구살단나(瞿薩旦那)는 이 성을 동쪽 국경의 관문으로 삼고 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거대한 유사(流砂:사막)에 들어가게 된다. 모래가 4방으로 흘러내리고 바람에 따라서 쌓였다가 흩어지곤 하여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이 사라져 결국에는 대부분 길을 잃고 만다. 4방으로 멀리 바라보아도 망망한 모래뿐이어서 어느 곳으로 가야 할 지 알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오가는 사람들은 쌓인 유해로 표식을 삼곤 한다. 물과 풀이 부족하고 뜨거운 바람이 많이 일어나는데 바람이 불면 사람과 동물이 혼미해지고 이로 말미암아 병이 생기기도 한다. 때로는 휘파람이나 노랫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또 때로는 흐느끼며 곡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는데 귀 기울여 듣고 보고 있는 사이에 문득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서 이로 인해 자주 목숨을 잃게 되는데, 아마 이것은 도깨비의 소행일 것이다.
이곳에서 4백여 리를 가다 보면 도화라(都貨邏)의 옛 영토에 도착하게 되는데, 나라는 이미 텅 빈 지 오래고 성도 완전히 황폐해졌다.69) 이곳에서 동쪽으로 6백여 리를 가다 보면 절마타나(折摩馱那)의 옛 영토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은 바로 옛 저말국(沮末國)의 영토이다.70) 성곽은 우뚝 높이 솟아있지만 사람들의 흔적은 끊어졌다. 다시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천여 리를 가면 납박파(納縛波)의 옛 땅에 도 착한다. 이곳은 바로 누란(樓蘭)의 땅이다.71)
각 나라의 산천을 명백히 밝히고 그 국토들을 두루 고찰하여 그 나라의 풍속이 거칠고 강한지, 부드럽고 순박한지를 상세하게 살펴보고 각처의 기후와 자연환경을 엮어보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갖가지 상황이 동일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도 달랐으며, 직접 끝까지 체험해보기가 어려웠고 함부로 억측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머물거나 도착한 곳마다 간략하게 그곳에 관하여 대체적인 줄거리를 기록하였고, 그 보고 들은 것을 열거하고 당나라의 덕화(德化)를 그리워하는 나라들을 기록하였다."태양이 지는 저 곳에서부터 여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폐하의 은혜를 흠뻑 입고 있으며 대당의 교화가 퍼진 곳에서는 모두 폐하의 성덕을 우러러 받들고 있사옵니다. 천하가 대동(大同)을 이룩할 수 있게 폐하는 한 집안에 통일을 이루셨으니, 어찌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역만리 머나먼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겠나이까?"
각주
53) 범어로는 gost na이며 즉 오늘날의 화전(和闐)이다. 오늘날에는 화전은 Khotan, 우전(于闐)은 동방의 keriya를 나타낸다.
54) 구살단나국의 대도성(大都城)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화전 지방은 곤륜산계(崑崙山系)인 티벳고원으로부터 북쪽으로 흐르는 동쪽의 옥롱객십하(玉隴喀什河, Yurung Kash Darya:白玉河)와 서쪽의 합납객십하(哈拉喀什河, Kara Kash Darya:黑玉河)와의 사이에 위치한 비옥한 지역이다) 이 두 강은 이윽고 사막에서 합류하여 화전하(和闐河)라고 불린다. 현재의 화전 거리는 백옥하에 가까운 지점에서 동쪽의 회성(回城)과 서쪽의 한성(漢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 화전의 도시는 지금의 한성(漢城:新城이라는 뜻)의 서문(西門)으로부터 약 5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Y tkan이라 불리는 작은 부락이 산재한 폐허에 해당한다.
55) 화전의 동북동쪽 사막의 유적인 단단 우일리크(Dandan-Uiliq)에서 발견된 문서에 들어있는 인도 문자는 브라흐미 문자이고 대략 8세기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언어는 동(東) 이란어에 속하는 코탄어이다
56) 범어로는 virocana이며 비로자나(毗盧遮那)·비로사(毗盧舍)·미로자나(微盧者那)라고도 음사한다. 지금의 Y tkan 남남동쪽 13마일 떨어진 지점의 Chalma-kaz n의 폐허가 이 사원의 터라고 추측된다.
57) 범어로는 go- ga이며 '소의 뿔'이란 뜻이다. Y tkan의 남남서쪽 11마일, 화전오아시스의 서남단, 흑옥하(黑玉河)의 동쪽 기슭에 있는 Kohm ri Hill로 추정된다. 이 산에는 이 지역 사람들이 성지로 숭배하는 석굴이 있는데 이곳에서 1892년 1, 2세기경에 쓴 것으로 보이는 카로슈티 문자에 의한 인도 속어의 『법구경』이 발견되었다.
58) 위치는 Y tkan의 서남쪽으로 약 4마일 떨어진 지점인 B wa-Kambar의 옛 터로 추정된다.
59) 건칠법(乾漆法)에 해당하는 당대(唐代)의 용어이다.
60) Bhagai, Bh gya 등으로 원음을 추정하지만 확정을 내릴 수 없다. 코탄으로부터 서쪽으로 나가는 주요도로상인 Pi lma 부근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61) 이 전설은 우전국(于闐國)과 총령 저쪽 카시미르에 있어서 간다라 불교 미술과의 교섭을 이야기해주는 문헌상의 증거로서 주목할 만하다.
62) 피아르마로부터 동쪽으로 16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Kum-rab t-P d-sh him Maz r로 추정된다. 20피트에 달하는 높은 반월형 사구(砂丘)가 연속해 있다. 그곳에는 지금 일반적으로 Kaptar-Maz r(비둘기의 冢墓)라 불리는 사당이 있는데 참배객들의 공양물로 살아가는 비둘기들이 무리를 지어 서식하고 있다. 일찍이 '성스러운 쥐'가 이슬람 시대에는 '성스러운 비둘기'로 변형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옛 전설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는 성지이다.
63) 이 원어는 sam j 일 것으로 추정한다. 티벳트에 전해오는 『우전국사(于闐國史)』에 의하면 코탄국왕 Vijaya-Virya가 성의 망루에서 멀리 바라보고 있었을 때 성 밖에 금은 빛의 광명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그 위치를 찾아다니던 중 gum-stir의 가섭불의 사리를 넣은 솔도파가 서있는 곳을 발견하였다. 그곳으로 Buddhad ta 아라한 등의 가르침에 따라 gum-stir절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의 Y tkan(옛 于闐國의 首都)의 서쪽 약 1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마을인 Somiya로 추정되며 그곳에는 먼 이국에 와서 머물다 간 성인(聖人)의 신령스런 자취로 전해지는 무덤이 있다.
64) 코탄의 옛 수도로 Y tkan의 동남쪽 약 1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Kum-i-Shah d n이라 불리는 흙으로 지은 사당이 있는데 이것으로 추측된다.
65) 이 강은 지금의 Yurung-k sh(하얀 옥), 즉 백옥하(白玉河)라 불리는 강이다.
66) 범어로는 ph ma이며 현재의 화전(和闐, Khotan)과 우전(于闐, Keriya)의 중간에 있는 책륵(策勒, Chira Bazar)으로 추정된다.
67) 범어로는 Krora, Kroraina. 즉 누란(樓蘭)을 가리킨다.
68) 범어로는 ni a, ninya이며 현재의 니아(尼雅, Niya Bazar)의 북쪽 65마일 떨어진 사막 안에 있는 니아(Niya) 옛 터를 가리키며 비마로부터는 동북쪽에 해당한다.
69) 오늘날의 Endere로 추정된다. 이곳에 있는 폐허는 수레바퀴 모양의 성벽이 있고 성벽의 일부분은 카로슈티 문서를 포함한 먼지 층을 기초로 하고 그 성 안의 거주지(居住址)에서는 개원(開元) 7년(719)의 기년문서(紀年文書)가 발견되었고 나아가 성 안의 사원에서는 브라흐미 티벳·한문의 문서류가 발견되었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이 지역은 일찍이 기원후 2∼3세기 무렵은 카로슈티 문자를 사용하는 현장이 말하는 도화라의 주민이 살았지만 이윽 고 니아와 함께 차츰 폐허가 되었으며 현장이 통과한 뒤 8세기 초엽에는 당나라가 서역을 개척해 가던 과정에서 그 치세에 들어가게 되며, 안사(安史)의 난(755) 직후에는 토번(吐藩)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70) 지금의 Charchan Bazar(Cherchen이라고도 하며 오늘날 중국 이름으로도 且末이라고 함)이다. 이 지역은 Charchen강을 연한 지역인데 농업이나 목축이 성행하지 않고 곤륜산록에서 많이 서식하고 있는 짐승을 잡아서 얻는 가죽은 광산과 함께 이 지역의 거대한 산업이다.
71) 납박파(納縛波)는 한(漢)나라 이래 누란(樓蘭)에 수도를 설치한 선선국(鄯善國)을 말하는데, 5세기에는 청해성(靑海省)에서 차츰 강대해진 토곡혼(吐谷渾)에게 멸망당하였다. 수나라는 토곡혼을 무너뜨리고 선선군(鄯善郡)을 설치하였으며, 당나라 초기 아직 그 세력이 서역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던 정관(貞觀) 초년에는 강국(康國) 소그디아나의 대수령(大首領) 강염전(康豔典)이 오랑캐를 이끌고 동쪽으로 와서 이 지역에 식민지를 세우고 있다. 이 같은 시기에 현장이 이 지역을 통과하고 있는 점으로 본다면 그가 납박파의 '옛 땅'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서북인도에 원류를 두고 있는 카로슈티 문자를 사용하는 과거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며, 따라서 납박파의 '옛 땅'도 navapa라는 고어(古語)에서 원류를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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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행복한 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