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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대 정조 |
차남 : 정조(1752-1800) |
재위기간 : 1776.3-1800.6(24년 3개월) |
부인 : 3명 / 자녀 : 2남 1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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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치
1. 정조의 문화정치와 실학의 융성
2. 실학의 거장들 : 북학파의 '박지원' / 실학의 최고봉 '정약용' / 신세계를 염원한 석학 '박제가'
3. 인조시대의 변란들 : 이괄의 '삼일천하' / 정묘호란 / 병자호란
4. [정조실록] 편찬
역사 개요
▣ 정조 (正祖) |
이름 산(姦). 자 형운(亨運). 호 홍재(弘齋). 영조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思悼世子),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惠嬪)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2월에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이 해 5월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1764년 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孝章)세자의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다. 1775년(영조 51) 12월 노병이 깊어진 국왕이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자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이 이를 방해하여 조정이 한때 크게 긴장하였다. 홍인한은 세손의 외척으로 기대를 모을 위치였으나, 탐포하고 무지한 그를 세손이 비천하게 여겨 멀리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소생으로 어미와 함께 권세를 부리던 정후겸(鄭厚謙)에게 붙어 세손의 적당이 되었다. 그는 세손을 고립시키기 위해 시강원(侍講院)의 궁료 홍국영(洪國榮) ·정민시(鄭民始) 등을 참소하기까지 했으나 세손이 이를 듣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손이 대청(代聽)의 명을 받게 되었을 때는 이를 극력 반대하면서 대청을 명하는 왕의 하교를 받아쓰려는 승지를 몸으로 가로막기까지 했다. 1776년 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곧 왕비를 왕대비로 올리면서 어머니 혜빈(惠嬪)을 혜경궁으로 높이는 한편,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도 진종(眞宗)대왕으로 추숭하고, 효장묘도 영릉(永陵)으로 격을 높였다. 그 다음에 생부의 존호도 장헌세자로 높이고, 묘소도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하고 경모궁(慶慕宮)이라는 묘호(廟號)를 내렸다. 자신의 왕통에 관한 정리를 이렇게 마친 다음 곧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사(賜死)하고 그 무리 70여 명을 처벌하면서 《명의록(明義錄)》을 지어 그들의 죄상을 하나하나 밝혔다. 즉위와 동시에 본궁을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고 규장각(奎章閣) 제도를 시행하여 후원에 그 본각인 주합루(宙合樓)와 여러 서고 건물들을 지어 문치의 왕정을 펼 준비를 다졌다. 세손 때부터 시강원 열서(說書)로 자신을 도운 홍국영을 도승지로 임명하고, 숙위소 대장도 겸하게 하여 측근으로 크게 신임하였다. 그러나 홍국영이 1779년에 누이 원빈(元嬪)이 갑자기 죽은 후 권력 유지에 급급하여 종통을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여 그를 내쫓고 정사를 직접 주재하기 시작했다. 그 후 재위 5년째인 1781년,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각신(閣臣)들은 이때부터 문한의 요직들을 겸하면서 조정의 문신들의 재교육 기회인 초계문신(抄啓文臣) 강제(講製)도 주관하였다. 이 제도는 조정의 37세 이하 문신들 가운데 재주가 있는 자들을 뽑아 공부하게 한 다음 그 성과를 시험을 통해 확인하여 임용 승진의 자료로 삼고자 한 것으로 규장각이 이를 주관하게 하여 왕정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할 신하들을 확대해 나갔다. 근 20년간 10회 시행하여 100여 명을 배출하였다. 무반의 요직인 선전관(宣傳官) 강시(講試)제도도 함께 시행하여 1783년의 장용위(壯勇衛), 1791년의 장용영(壯勇營) 등 친위군영 창설, 운영의 기초로 삼았다. 정조는 숙종 ·영조의 탕평론을 이어받아 왕정체제를 강화하여 진정한 위민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1784년에 지은 《황극편(皇極編)》을 통해 주자 ·율곡의 시대에는 붕당정치가 군자의 당과 소인의 당을 구분하여 전자가 우세한 정치를 꾀할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각 붕당 안에 군자 ·소인이 뒤섞여 오히려 붕당을 깨서 군자들을 당에서 끌어내어 왕정을 직접 보필하는 신하로 만드는 것이 나라를 위해 더 필요하다고 논파하였으며, 편전의 이름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하여 이를 실현시킬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재위 21년째인 1797년에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에서 백성을 만천에 비유하고, 그 위에 하나씩 담겨 비치는 명월을 ‘태극이요, 군주인 나’라고 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닿는 지공지순한 왕정이 자신이 추구하고 실현시킬 목표라는 것을 정리해 보였다. 그는 만천에 비치는 밝은 달이 되기 위해 선왕 영조 때부터 시작된 궁성 밖 행차뿐만 아니라 역대 왕릉 참배를 구실로 도성 밖으로 나와 많은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만들었다. 100회 이상을 기록한 행차는 단순한 참배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민원을 접수하는 기회로도 활용하였다. 그는 재위 3년째에 상언(上言) ·격쟁(擊錚)의 제도에 붙어 있던 모든 신분적 차별의 단서들을 철폐하여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하여 능행(陵行) 중에 그것들을 접수하도록 하였다. 《일성록(日省錄)》과 실록에 실린 상언 ·격쟁의 건수만도 5,000건을 넘는다. 재위 13년째인 1789년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소(園所)를 수원으로 옮긴 뒤로는 능행의 범위가 한강 남쪽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그는 수원도호부 자리에 새 원소를 만들어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수원부는 화성(華城)을 새로 쌓아 옮기고, 이곳에 행궁과 장용영 외영을 두었다. 화성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만들었는데 그 횟수가 10회를 넘었다. 재위 9년에 경강(京江), 즉 한강의 상인들 소유의 배를 편대하여 각 창(倉)별로 분속시켰는데 14년에 주교사(舟橋司)를 세워 그 배들을 이에 소속시켜 전라도 조세 운송권의 일부를 주면서 행차 때 배다리를 만들게 했다. 정조는 재위 2년째인 1777년에 대고(大誥)의 형식으로 자신이 펼 왕정의 중요 분야를 민산(民産) ·인재(人才) ·융정(戎政) ·재용(財用) 등 4개 분야로 크게 나누어 제시했다. 민산을 일으키기 위해 민은(民隱), 즉 민의 폐막부터 없애야 한다는 신념 아래 즉위 직후 각 전궁(殿宮)의 공선정례(貢膳定例)를 고쳐 궁방의 법외 납수분을 호조로 돌리고 궁방전의 세납도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을 폐지하고 본읍에서 거두어 호조에 직납하도록 바꾸어 왕실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그리고 2년에는 내수사(內需司) 도망노비를 추쇄하는 관직을 혁파하였다. 이렇게 왕실 스스로 모범을 보인 다음에 감사 ·수령들로 하여금 민은을 살피는 행정을 강화하도록 하는 한편 어사 파견을 자주하여 악법을 잘라내고 무고를 펴도록 하였다. 심지어 지방의 상급 향리들까지 소견하여 백성들의 질고를 직접 물었다. 민산의 대본인 농업 발전을 위해 여러 차례 응지(應旨) 상소의 기회를 만들고 생산력 증대에 관한 많은 의견들을 수렴해 보급에 힘썼다. 측우기와 점풍간(占風竿)을 설치하여 세정의 합리화를 꾀했으며 진휼을 위해 여러 차례 내탕(內帑)을 출연했다. 1782년에 서운관에 명하여 1777년을 기점으로 100년간의 달력을 계산하여 천세력(千歲曆)을 미리 편찬 ·간행하게 했다. 민산은 경계(經界)에서 비롯한다는 견지에서 전제(田制) 개혁에도 뜻을 두어 조선 초기의 직전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으나 치세 중에는 실현을 보지 못했다. 도시로 모여든 이농인구가 중소상인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1791년에 이른바 신해통공(辛亥通共)의 조치로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없애 상업활동의 기회를 균등히 했다. 백성들이 부당한 형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영조 때 시작된 형정의 쇄신을 계승하여 재위 2년째에 형방승지를 의금부 형조 등에 급파하여 기준을 어긴 형구(刑具)의 실태를 조사해 이를 고치게 하고, 그 기준을 《흠휼전칙(欽恤典則)》에 실어 각도에 배포하였다. 책에 실은 자의 길이와 같은 유척(鍮尺)을 만들어 함께 보내면서 준수를 엄명하고 어사들로 하여금 이를 자주 확인하게 하였다. 재위 7년부터는 의금부와 형조 등의 결옥안(決獄案)을 초록하여 매월 말에 보고하게 하고, 4분기마다 책자를 만들어 왕에게 올리도록 하였다. 사형수의 결옥안은 밤을 새워가면서 10번이나 확인하여 억울함이 없도록 힘썼다. 그 심의 기록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자로 전한다. 9년째 되던 해에는 역대 법전들을 모아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하여 법치의 기반을 다졌다. 인재의 양성을 위해서는 초계문신 문강(文講), 선전관 무강(武講) 제도를 시행하는 한편, 성균관 월과(月課:월별 수강과목 지정)제도를 시행하고, 유생들이 관내에 상주하면서 공부하도록 하기 위해 사찰 승려들의 회식제도를 도입하여 식당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大科)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하여 많은 과폐를 없앴으며, 만년에는 각도에서 행해지는 소과(小科:흔히 道科라고 불렸다)도 혁신하고자 주나라의 고사를 빌려 빈흥과(賓興科)로 이름을 고쳐 시행했다. 빈흥과는 국왕이 직접 출제하여 이것을 규장각신이 가지고 현지에 내려가 과장에서 개봉 ·게시하고 답안지를 거두어 규장각에 가지고 와서 국왕의 주관 아래 채점하여 합격자를 발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신설하고 북학파의 종장(宗匠)인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들, 즉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을 등용함으로써 그 사상의 수용을 기도하였다. 그런데 이 검서관들은 신분이 서얼로서 영조 때부터 탕평책의 이념에 편승하여 [서얼통청운동(庶孼通淸運動)]이라는 신분상승운동을 펴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임용은 서얼통청이라는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는 조처이기도 하였다. 각 지역별 성과를 〈경림문희록(瓊林聞喜錄:한성부, 1792)〉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영남, 93)〉 〈관동빈흥록(關東賓興錄:강원도, 1794)〉 〈탐라빈흥록(耽羅賓興錄:제주도, 1795)〉 〈풍패빈흥록(豊沛賓興錄:함흥, 1795)〉 〈관북관서빈흥록(關北關西賓興錄:함경 ·평안도, 1800)〉 등으로 각각 간행하여 도과(道科:소과의 별칭)의 새로운 전범으로 삼고자 하였다. 무과에서도 몇 차례의 경과(慶科)를 통해 다수의 출신(出身)들을 배출하면서 《병학통(兵學通, 9년)》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14년)》 등 정예병 양성에 필요한 병서들을 편찬하여 보급했다. 융정으로는 기존 5군영보다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중심으로 병력을 강화하고 서해의 해방(海防)을 위해 교동의 통어영(統禦營)과 강화도 경영에 힘썼다. 재용면에서는 중앙 각 관서와 군영의 보유 양곡수를 조사하여 《곡부합록(穀簿合錄)》, 환곡행정의 전국적 현황을 조사하여 《곡총편고(穀總便考)》, 전세 징수의 기본상황을 파악하여 《탁지전부고(度支田賦考)》를 각각 편찬하여 재정의 혁신을 위한 준비를 하였고, 실제로 각 관서간의 급대(給代) 관계의 개선을 통해 각 계층의 부당한 부담들이 경감되는 추세를 보였다. 재위 중에 치세의 방향 모색과 관련하여 규장각을 통해 어정(御定) ·어명(御命)으로 저술사업을 벌여 근 150종의 신저술들이 이루어졌다. 문장에 관한 것으로 《사원영화(詞苑英華)》 《시악화성(詩樂和聲)》 《팔자백선(八子百選)》 등 다수, 경학에 관한 것으로 《경서정문(經書正文)》 《역학계몽집전(易學啓蒙集箋)》 등, 사서로 《송사전(宋史筌:72)》 《사기영선(史記英選:95)》 등, 유가서로 《주서백선(朱書百選)》, 불서로 《범우고(梵宇考)》, 지리서로 《도리총고(道里摠攷)》, 축성서로 《성제도설(城制圖設)》, 왕조의 의례관계로 《속오례의(續五禮儀)》 등 수다한 저술이 이루어졌다. 선왕 영조 때 한국의 제도문물의 내력을 쉽게 알아보기 위해 편찬한 《동국문헌비고》를 크게 증보하여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를 만들고, 1782년에는 역대 선왕들의 치적을 담은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완하였다. 보감은 세조 때 태조 ·태종 ·세종 ·문종 4조의 것을 편찬한 이후 숙종 때 《선조보감》, 영조 때 《숙묘보감》을 편찬하는 데 그쳐 그 사이에 12조의 보감이 궐문이었는데 이를 보충하고 《영조보감》을 새로 만들어 합쳐 1768권으로 완성시켰다. 1784년에는 보감을 종류별로 재편집하여 《갱장록》이라고 하였다. 1781년에 강화도 외규장각을 설치하여 역대 왕실의 의궤들의 원본을 안치하여 영구보전을 꾀하였다. 비단 조선왕조의 역대 왕들의 치적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단군 ·기자 ·삼국 ·고려의 시조 등의 왕릉을 수리하고 수로왕릉과 신라의 제 왕릉에 두루 제사지냈으며, 삼성사(三聖祠) 제의를 바로하고, 온조왕묘를 숭열전(崇烈殿)으로 이름붙이고, 고려 4태사묘에 사액하였다. 외적 격퇴에 공이 큰 인물들의 전기 편찬에도 힘써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비롯해 《김충장유사(金忠壯遺事)》 《임충민실기(林忠愍實記)》 《양대사마실기(梁大司馬實記)》 등을 편찬 ·간행하였다. 왕조 전기에 만들어진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쳐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로 편찬 간행하고 향촌질서 유지에 필요한 각종 의례들을 종합 정리하여 《향례합편(鄕禮合編)》을 펴내게 했다. 이 많은 저술들의 출판을 위해 임진자(壬辰字) ·정유자(丁酉字) ·한구자(韓構字) ·생생자(生生字:목활자) ·정리자(整理字) ·춘추관자(春秋館字:철자) 등 여러 가지 자체의 활자를 80여 만 자 이상 만들었다. 그러나 재위 중에 활자로 간행을 한 것은 전체 신저술 중 1/3 정도였으며 순조 연간에 어느 정도 간행이 후속되었으나 현재 대부분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근신인 규장각 각신들로 하여금 중요 정사를 매일 기록하게 하여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새로운 연대기 작성을 시작했으며, 경연 석상에서 한 말은 참석자들이 기록하여 《일득록(日得錄)》으로 편집되었다. 1791년 윤지충(尹持忠) ·권상연(權尙然) 등이 천주교 신자가 되어 제사를 거부하고 가묘의 신주를 불사른 진산(珍山)사건이 발생하여 천주교 박해를 주장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나, 정학(正學)을 신장하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억제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극형은 윤지충 ·권상연 두 사람에만 한정하고 탄압으로까지 발전시키지 않았다. 이 때 천주교뿐만 아니라 명나라 말, 청나라 초 패관소품의 학을 속학(俗學)이라 하여 경계의 뜻을 함께 보였는데, 재위 초부터 문체가 날로 흐트러지는 추세를 바로잡으려는 뜻을 본래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자신의 측근 가운데 천주교에 가까이 간 사람들이 많은 한편, 공격하는 측에 후자의 경향을 띤 자들이 많은 상황을 간파하여 양쪽의 잘못을 지적하여 위기를 넘기고 새로운 발전을 다지려는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1795년에 어머니의 회갑연을 아버지의 원소가 있는 화성유수부에서 열어 전국의 노인들에게 두루 혜택이 돌아가는 조치를 내리기도 하였다. 즉 이 행사를 기념해 조관(朝官)은 70세 이상, 일반 사서(士庶)는 80세 이상, 80세 전이라도 해로한 자 등에게 1계를 가자(加資)하여 모두 75,145인이 혜택을 보았는데 《인서록(人瑞錄)》이라는 책으로 이 사실의 자세한 내용을 남겼다. 1793년의 현륭원 참배를 계기로 비변사로 하여금 원행정례(園行定例)를 저술하게 하여 원행의 절차, 행렬 규모와 의식 등을 정례화하고, 1795년 잔치의 모든 사실은 《정리의궤통편(整理儀軌通編)》으로 남겼다. 재위 10년째에 효의왕후 몸에서 난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자 24년째 정월에 수빈(綏嬪) 박씨 몸에서 난 아들을 세자로 책봉했다. 재위 18년째인 1794년에 발병한 절후(癤候), 즉 부스럼이 피부를 파고드는 병이 격무와 과로로 아주 심해져 1800년 6월 28일에 49세로 일생을 마쳤다. 타계하기 한 해 전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저술을 손수 편집하여 예제(睿製) 3책을 남겼고 자신의 저술 ·강론 등도 수년 전부터 각신들에게 편집을 명하여 생전에 《홍재전서(弘齋全書)》 100권으로 정리된 것을 보았으며, 1814년에 순조가 규장각에 명하여 이를 간행하였다. 유언에 따라 현륭원 옆에 묻고 건릉(健陵)이라 했다. 시호를 문성무열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라고 하였으며, 왕조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1900년에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었다. |
23대 순조
제 23대 순조純祖 1790~1834(1800~1834 재위) : 정조와 수빈 박씨의 장남
1. 휘 : 이공(李玜)
2. 자 : 공보(公寶)
3. 호 : 순재(純齋)
4. 별칭 : 왕세자(王世子) → 왕(王)
5. 시호 : 순종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열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純宗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 → 순조(純祖)
6. 능호 : 인릉(仁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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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 金氏 1789~1857) : 안동 김씨
1. 가계
- 부친 : 영안부원군 충문공 김조순(永安府院君 忠文公 金祖淳 1765~1832)
- 모친 : 청송 심씨(沈氏) 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
- 남동생 : 충익공 김좌근(忠翼公 金左根 1797~1869)
2. 별칭 : 왕비(王妃) / 명경왕비(明敬王妃) → 왕대비(王大妃) → 대왕대비(大王大妃)
3. 시호 : 명경문인광성융희정렬선휘영덕자헌현륜홍화신운수목예성홍정순원왕후(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英德慈獻顯倫洪化神運粹穆睿成弘定純元王后) → 명경문인광성융희정렬선휘영덕자헌현륜홍화신운수목예성홍정순원숙황후(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英德慈獻顯倫洪化神運粹穆睿成弘定純元肅皇后)
4. 능호 : 인릉(仁陵)
5. 자녀(2남 3녀) + 1남
* 장남 문조 영(文祖 旲 1809~1830)
* 장녀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1832)
* 차녀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1832)
* 차남 대군(大君 1820~1820)
* 3녀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
* 양자 철종 변(哲宗 昪 1831~1863)
★ 숙의 박씨(淑儀 朴氏 ?~?) : 밀양 박씨
1. 별칭 : 궁인(宮人) → 숙의(淑儀)
2. 자녀(1녀)
* 서장녀 영온옹주(永溫翁主 1817~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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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남 문조 영(文祖 旲 1809~1830) : 순원왕후 김씨 生
☆ 장녀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1832) : 순원왕후 김씨 生
1. 부마 : 안동 김씨 동녕위 현근(東寧尉 金賢根 ?~1868)
- 김한순(金漢淳)의 아들
2. 자녀(없음)
☆ 서장녀 영온옹주(永溫翁主 1817~1829) : 숙의 박씨 生, 요절
1. 나서부터 병이 잦아 말도 잘 못했다고 함
☆ 차녀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1832) : 순원왕후 김씨 生
1. 부마 : 안동 김씨 창녕위 병주(昌寧尉 金炳疇)
- 김연근(金淵根)의 아들
2. 자녀(없음)
☆ 차남 대군(大君 1820~1820) : 순원왕후 김씨 生, 요절
☆ 3녀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 : 순원왕후 김씨 生
1. 부마 : 해평 윤씨 남녕위 의선(南寧尉 尹宜善)
2. 자녀(없음)
* 양자 윤용구(尹用求 1853~1939)
☆ 양자 철종 변(哲宗 昪 1831~1863) : 전계대원군의 3남
잘 보면 알 수 있지만... 순조의 자녀 중 마의 23살을 넘긴 자녀는 한명도 없음.
손자인 헌종도 23살에 황천길로 갔으니...-_-
순조 45살, 순원왕후 69살로 보면 딱히 부모 건강 탓은 아닌 것 같은데...;;
- 천주교 탄압의 서곡 -
순조는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그러자 영조의 계비이며 대왕대비인 정 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동하였던 벽파의 실세 김귀주의 누이로 벽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가리는 인물이었다. 옥새를 거머쥔 정순왕후는 우선 친정 6촌 오빠인 김관주를 이조참 판직에 앉히고 벽파들을 대거 등용한다. 권력을 잡은 김관주, 심환지 등은 정조의 탕평을 보좌하였던 인물들을 대 거 살육함으로써 벽파 정권을 수립한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즉시 왕의 즉위를 공포하는 글에서 '척사'를 표방했다. 이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 정순왕후의 천주교 탄압의 두가지 이유 -
그 첫째가 왕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군신간의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조선의 지배 윤리인 유교 윤리를 근 본적으로 부정하는 천주교의 위험성을 미연에 막는다는 것이요 둘째가 천주교를 공부하거나 믿는 사람 중에 벽파의 반대파인 시파나 남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천주교도를 잡아들이는 것은 곧 유교 윤리를 받든다는 명 분도 얻을 뿐더러 반대파인 정적을 제거하는 이중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실권을 잡자마자 척사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 오가작통법 -
이는 본래 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묶어서 서로 강도, 절도 같은 범법 행위가 일어나는지를 감시하고 규제하는 치안 유지법이었다. 그 방법을 천주교도 색출에 동원하여 다섯 집끼리 서로 천주교도가 있는지 감시하고 고발하게 하였 다. 그 중에 한 집에서라도 천주교 신자가 나오면 다섯 집이 모두 화를 입게 되는 식의 법.
-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시작 -
정순왕후가 죽자 벽파는 다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동안 실권을 잡고 있던 김관주는 정조의 뜻을 배신한 죄와 왕비의 삼간택 방해를 방조한 죄목으로 귀양가다가 병사하고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는 이미 죽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를 해치려 한 죄목으로 역적의 율로 다스려졌다. 이 후로 국왕의 장인인 국구가 된 김조순은 나이 어린 왕을 곁에서 모시면서 세도 정치의 첫 장을 열게 된다. 후 대 사가들은 김조순이 그런 대로 청류임을 표방하여 어떤 종류의 벼슬도 사양하며 오로지 국왕의 보필에 전념을 다했다고도 하지만 벽파가 물러난 조정의 자리를 채운 것은 바로 김이익, 김이도,김달순, 김명순 등 안동 김씨일문이었다. 이들이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해버리니 그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 견제 세력이 없는 정권은 부패하게 마련 이다. 안동 김씨 일문이 요직에 앉아 한 가문의 영달을 위해 갖가지 전횡과 뇌물 수수를 일삼으니 공평한 인사의 기본인 과거 제도가 문란해지고 매관매직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정치 기강이 무너지고 신분 질서의 급속한 와해와 함께 왕조 사회의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 홍경래의 난 -
서북인 차별 대우 철폐와 세도 정권의 가렴주구 혁파, 정도령의 출현 등을 기치로 내세운 이 반란은 몰락 양반과 유랑 지식인 서민 지주층의 재력과 사상이 결합되어 나타난 대규모 반란으로서 단순한 농민 반란이 아니라 체제 변 혁 까지를 도모하는 정치적 반란이기도 했다. 광산 노동자, 빈농, 유민들을 봉기군의 중심 부대로 삼고서 홍경래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각지에 격문을 띄워 출병했다. 그리하여 거병한 지 열흘 만에 관군의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 정주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곧 관군의 추격을 받은 봉기군은 그 세 력이 급속히 약화되어 정주성으로 후퇴해 들어간다. 정주성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보급로가 끊긴 채 무려 4개월 동 안 관군과 대치하다가 1812년 4월 마침내 관군에 의해 제압됐다.
- 순조대의 세도정치 -
집권 초기에는 정순왕후를 둘러싼 경주 김씨 일문 아래 있었고 친정을 하게 된 15세 이후로는 장인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문 아래 있었다. 순조 역시 세도 정권의 전횡을 모를 리 없었 기에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서 풍양 조씨 일문을 중용하고 1827년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 게 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다른 외척 세력인 풍양 조씨 일문의 세 도 정권을 만들어냈을 뿐 균형과 견제가 이루어지는 정계 개편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처럼 당시의 세도 정권은 당쟁이 없는 대신에 반대파가 없는 독재 정권으로서 민생과 사회 문제는 도외시하고 일문의 영달과 영예이만 관심을 쏟게 만들었다.
- 천주교 박해의 배경 -
군신 관계와 상하 관계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성리학적 지배 원리는 조선왕조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사상적, 통치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인 의례를 거부했으며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평등 사상과 유일신 사상을 주장했으니 그것은 유교 사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또한 권력에서 소외된 지식인 양반층과 수 탈과 횡포에 시달리던 서민층이 천주교 신앙을 통해 결합되는 것도 지배 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변천사와 폐단 -
순조 시대에는 김조순이 정권을 전단하다가 헌종 대에는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에게 넘어가고 그것이 철종 대에 와 서는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에게로 넘어간다. 세도 정권의 특징이라면 당쟁 시대와는 달리 견제 세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이 어린 왕을 정권에서 배제시켜버리는 세도 정권의 전횡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 결과 관료 사회 의 부패와 백성을 상대로 한 수탈, 민생의 피폐가 나타났다.
- 순원왕후 김씨 -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창조인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이다. 1800년(정조24년)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삼간택을 앞두었을 때 갑자기 정조가 죽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외척 김관주와 권유 등의 방해로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 만 마침내 1802년(순조2년) 10월에 왕비로 책봉된다. 순원왕후 김씨는 아버지 김조순과 오라비 김좌근으로 이어지는 안동 김씨 일문의 집권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한 때 세자비의 외척인 풍양 조씨 일문에게 정권의 주도권을 빼앗기다가 헌종 대에 이르러 다시 회복하지만 헌종이 젊 은 나이에 갑자기 죽자 자손이 없는 헌종의 왕통을 누가 이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타났다. 이때 순원왕후 김씨는 조대비 일문이 미처 손을 쓰기 전에 재빨리 원상에 권돈인을 지명하고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강화도령 원범(철종)을 지목하여 왕위를 잇게 한다. 또한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에 책봉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이 절정기를 맞게 한다. 순조와의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으며 1857년 창덕궁에서 죽었다. 능호는 인릉으로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있다.
- 효명세자 -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났으며 이름은 영, 자는 덕인, 호는 경헌이다. 1812년 순조 12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 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이 때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에 노력했으나 대리청정 4년 만인 22세에 죽는다. 이때 그의 외척인 조씨 일파가 대거 등용되어 안동 김씨 일파와 정치적 세력 투쟁을 벌임으로써 정국이 혼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아들 헌종이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익종에 추존되었으며 1899년 고종에 의해 다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 었다. 능호는 수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24대 헌종
제24대 헌종 가계도
순조-순원왕후→장남 익종-신정왕후 조씨
제 24대 헌종 |
장남 :헌문종(1827-1849) |
재위기간 : 1834.11-1849.6(14년 7개월) |
부인 : 3명 / 자녀 : 1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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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사회의 총체적 위기
2. [인조실록] 편찬
▣ 헌종 (憲宗) |
휘(諱) 환(奐). 자 문응(文應). 호 원헌(元軒). 익종(翼宗:추존왕)의 아들. 어머니는 조만영(趙萬永)의 딸 신정왕후(神貞王后). 비는 김조근(金祖根)의 딸 효현왕후(孝顯王后). 계비는 홍재룡(洪在龍)의 딸 명헌왕후(明憲王后). 1830년(순조 30) 왕세손에 책봉되고,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로 경희궁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니,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순조妃)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순조 때 정권을 잡은 안동김씨(安東金氏)와 새로 등장한 풍양조씨(佯壤趙氏) 두 외척이 세력을 다투다가 한때 풍양조씨가 집권하였으나, 1846년 조만영이 죽자 정권은 다시 안동김씨에게로 넘어갔다. 1841년 비로소 친정(親政)의 길이 열렸으나 세도정치의 여파인 과거제도 및 국가재정의 기본이 되는 삼정(三政)의 문란 등으로 국정이 혼란해졌으며, 재위 15년 중 9년에 걸쳐 수재(水災)가 발생하여 민생고가 가시지 않았다. 또한, 1836년에는 남응중(南膺中), 1844년에는 이원덕(李遠德)·민진용(閔晉鏞) 등의 모반사건이 일어나고, 1848년부터는 많은 이양선(異樣船)의 출몰과 그 행패로 인하여 민심이 소연하였다. 순조 때의 천주교 탄압정책을 이어받아서 1839년에 주교 앵베르(Imbert, L.J. M.), 신부 모방(Maubant, P. P.)과 샤스탕(Chastan, J. H.)을 비롯하여 많은 신자를 학살하였으며 (기해박해), 이어 천주교인을 적발하기 위하여 오가작통법 (五家作統法)을 실시하고, 1846년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金大建)을 처형하였다. 한편,《동국사략》 《삼조보감》 《동국문헌비고》 등의 문헌이 찬수(撰修)되었고, 1837년 각 도에 제언(堤堰)을 수축하는 등 치적도 있었다. 후사는 없으며, 글씨에 능하였다. 능은 양주(楊州)의 경릉(景陵)이다. |
25대 철종
21대 영조 -> 사도세자 -> 은언군 -> 전계대원군 ->철종
위의 가계도가 철종의 가계도입니다.
철종의 할아버지는 은언군으로 정조의 이복동생입니다. 숙빈임씨 소생이죠.
철종은 영조의 고손자입니다. 안동김씨가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계대원군의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였죠.
- 안동김씨 세력연장을 위한 철종의 즉위 배경 -
안동 김씨가 계속 실권을 잡게 되는 배경에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순조의 비인 순원 왕후는 손자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 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썼다. 그도 그럴것이 헌종의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촌 이상의 왕족은 몇 명 있었다. 후대의 왕은 본래 항렬로 따져 동생이나 조카벌이 되는 자로 왕통을 잇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왜냐하면 종묘에 서 선왕에게 제사를 올릴 때 항렬이 높은 이가 항렬이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법도 때문이었 다. 그러나 안동 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헌종의 7촌 아저씨벌 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렇듯 안동 김씨 척족들은 기왕에 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 하여 왕가의 법도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전횡을 저지른다.
- 민진용의 옥 -
순조 말기부터 김유근과 김홍근에 의해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이루어지다가 헌종 10년에 이들이 물러나자 권력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반역을 꾀한 민진용은 우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의술로 은언군의 아들 이광과 은언군의 손자 원경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이원덕을 포섭하였다. 그들은 은언군의 손자이자 이광의 아들인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모의를 꾸미다 가 발각되어 모두 능지처참을 당하고 마는데 이것을 '민진용의 옥'이라 한다.
- 철종의 대민 노력 -
친정을 시작한 다음 해인 1853년 봄에는 관서 지방의 기근 대책으로 선혜청전 5만 냥과 사역원삼포세 6만 냥을 민 간에 대여해주록 하였고 또 그 해 여름에 가뭄이 심하자 재물과 곡식이 없어 구휼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 겨 재용의 절약과 탐관오리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1천여 호의 민가에 은전과 약 재를 내려 구휼하게 하였으며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천 냥을 지급하였다. 그 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 지역에 내탕 금 2천 냥, 단목 2천 근, 호초 200 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빈민 구제에 성의를 다했다.
- 삼정의 문란 -
토지세에 대한 징수인 전정은 본래 토지 1결당 전세 4두 내지 6두로 정해진 전세보다도 부가세가 훨씬 많았다. 부 가세의 종류만 해도 총 43종류에 달했는데 본래 그것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이 물게 되어 있었으나 전라, 경상 지 방은 모두 땅을 빌려 농사짓고 있는 농민들이 물고 있었다. 또한 지방 아전들의 농간으로 빚어지는 허복, 방결, 도 결 등이 겹쳐서 전정의 문란이 고질화되었다. 한편 군정은 균역법의 실시로 군포 부담이 줄긴 하였으나 양반층의 증가와 군역 부담에서 벗어나는 양민의 증가로 말미암아 계속 가난한 농민에게만 부담이 집중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을의 형세에 따라 차등을 두어 군포를 부과하 기 때문에 지방관은 그 목표량을 채우기 위해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부과하는 백골징포나 어린 아이에게 부과하는황구첨정 등을 감행했다. 환곡은 본래 관에서 양민에게 이자 없이 빌려주게 되어 있는 곡식인데 여기에 비싼 이자를 붙이거나 양곡의 양을 속여서 가을에 거두어들일 때 골탕을 먹이는 등의 수법을 사용해 농민 생활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관리들이 비일비재했다. 이같은 일은 세도 정권의 공공연한 매관매직을 통한 관기의 문란과 더불어 세도 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는 지방 토 호 세력의 횡포 아래 빚어진 일이었다. 이런 삼정의 문란이 겹쳐 백성들이 부담해야 하는 결세가 높아져만 갔고 그 것이 결국은 민란의 커다란 원인이 되었다.
- 진주민란 -
진주민란의 직접적인 발생 계기는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탐학과 착취에 있었다. 백낙신이 민란이 일어나기 전 몇 년 동안 착취한 돈만도 약 5만 냥에 달했는데 쌀로 환산하면 약 1만 5천 석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게다가 당 시 진주목에서는 지금까지 지방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축낸 공전이나 군포 등을 보충하기 위해 그것을 모두 결세에 부가시켜 해결하려 했는데 그 액수가 2만 8천 석에 축난 환곡만 해도 2만 4천 석이나 되어 농민 부담이 급격하게 가중될 처지에 있었다. 이에 농민 봉기군들은 스스로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진주성으로 쳐들어 갔는데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우병사 백낙신은 환곡과 도결의 폐단을 시정할 것을 약속했으나 농민들은 그를 놔주지 않고 죄를 묻는 한편 악질적인 아전 몇 명을 죽이고 원한을 샀던 토호의 집을 불태웠다. 6 일간이나 계속된 진주민란은 그동안 23개 면을 휩쓸었고 120여 호의 집이 파괴되고 재물 손실이 10만 냥을 넘었다. 단성을 시작으로 진주에서 폭발한 이 민란은 곧 경상, 충청, 전라, 황해, 함경도의 5도와 경기도 광주에서 무려 37차에 걸쳐 일어난다. 크게는 수만 명에서 작게는 천여 명에 이르는 규모로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악정에 대항하여 민란에 참가했다.
- 동학의 탄생 -
동학은 1860년(철종11년) 4월에 최제우가 창도한 종교로서 그 교지가 시천주 신앙에 기초하면서도 보국안민과 광 제창생을 내세운 점에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종교라 할 수 있다. 동학이라는 명칭은 교주 최제우가 서교인 천주교 에 대항하여 동방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 1905년 손병희에 의해서 천도교로 개칭되었다. 창도 당 시 동학은 시천주 신앙을 중심으로 모든 서민이 내 몸에 한울님을 모시는 입신에 의하여 군자가 되고 나아가 보국 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나라 구제 신앙이었으나 2대 교주 최시형에 가서는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한다'는 사인여천의 가르침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산천초목에 한울님이 내재한다고 보는 범천론 적 사상으로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3대 교주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사상을 교지로 선포하였다.
- 동학의 초대교주 최제우 -
최제우는 1824년 순조 24년에 경주 최씨 옥의 서자로 태어났다. 몰락 양반 가문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에 의술, 복술 등 여러 방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세상의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1856년 천성산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구도 노력은 185 9년 구미산 용담정 수도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그가 파악한 당시의 사회상은 왕조의 기운이 쇠하여 개벽이 필요한말세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위기 의식에서 최제우는 서학과 서교에 대한 대응으로 동학이라는 새로운 도를 제창하게 되었다. 그가 본래 이름인 제선을 제우로 고친 것도 종교적으로 구국과 제세의 길을 찾겠다는 자각에서 나온 것이다. 1860년 4월 5일 마침내 그는 득도 체험을 하고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제하였다. 그로부터 1년간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체득하고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어 1861년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신앙을 포교하기 시작하였 다. 특히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신도가 많이 모여들었는데 동학이 가지고 있는 민간신앙적 성격이 신앙적 결집을촉진하였다. 동학은 기성 종교인 유교와 불교의 쇠운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유교 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였다. 그는 서민들이 수학 기간을 거치지 않고도 입도할 수 있으며 입도한 그날부터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서민이 군자의 인격을 갖 추는 길을 열어놓았다. 또한 동학의 교지인 '시천주' 사상을 통해 각 개인이 천주를 모시는 인격적 존재이자 각자 자기 안에 천주를 모신 주체임을 강조하였다. 이와같은 동학 사상은 후에 일어날 동학 농민혁명에 사상적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거니와 인간 관계가 상하 주종 의 지배, 복종 관계가 아니라 누구나 다 같이 천주를 모시고 있는 존엄한 존재이다 평등한 관계임을 가르침으로써 근대적 사상의 선구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한편 동학교도들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같이 민심을 현혹시킨다 하여 나라가 금하는 종 교로 규정하고 1862년 9월 교조 최제우를 백성을 현혹시킨다는 이류로 경주 진영에서 체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 방면되는데 이 사건이 곧 동학의 정당성 입증으로 받아들여져 그 후 교 세가 더욱 커졌다. 신도가 늘자 그 해 12월에 각지에 접을 두고 그 지역의 접주가 지역 신도를 이끌게 하는 접주제 를 두어 1863년에는 교인 3천여 명, 13개 접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8월에는 최시형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제2대 교 주로 삼았다. 당시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었던 최제우가 미리 후계자를 세워놓은 것이다. 한편 조정에서는 동학의 교세 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최제우를 다시 잡아들일 것을 명하니 그 해 11월 20일 최제 우는 선전관 정운구에 의하여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최제우가 한양으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 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3월 10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효수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러나 한 번 일 어난 동학의 불길은 2대 교주 최시형에 이르러 더욱 그 사상적 기반을 다지면서 조선 말기의 국내외 정세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민족 종교로 발돋움한다.
- 철인왕후 김씨 -
철종 대에 마음껏 권력을 휘둘렀던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이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근친인 그녀는 1851년 열 다 섯의 나이에 왕비에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온다. 1858년 원자를 낳았으나 곧 죽었다. 왕비 김씨는 탐욕스러운 그의 아버지 김문근과는 달리 말수가 적고 즐거움이나 성냄을 얼굴에 잘 나타내지 않는 등 부덕이 높은 것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1863년 철종이 서른 셋의 젊은 나이로 죽자 명순의 존호를 받고 이듬해 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 다. 1866년 휘성에 이어 정원, 1873년에 다시 수령의 존호를 받아 명순휘성정원수령대비가 되었다. 1878년 42세의 나이로 창경궁 양화당에서 죽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사삼릉의 예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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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그는 정비 1명과 후궁 7명을 두었으며, 그들에게서 적자 1명, 서자 4명, 서녀 1명을 얻었다. 그러나 아들은 모두 일찍 죽고, 딸 하나만 살아남았다.
철종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서삼릉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예릉(睿陵)이다. 강화도령으로 불리우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휘둘려 자기의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33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한 그의 삶과는 달리,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고종은 철종의 능을 매우 거창하고 웅장하게 잘 꾸려주었다. 이는 왕실에서 이루어진 오랜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강화를 꿈꾸던 고종의 친부(親父)인 대원군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부덕(婦德)이 높은 여인이었던 철인왕후는 1878년(고종 15년)에 승하 후 철종 곁에 안장되었다.
철종의 비 철인왕후(哲仁王后:1837-1878)는 비록 안동 김씨 일문에서 나온 왕비였지만, 친정(親庭)을 두둔하지도 않았고, 정치에 간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말수가 적고 쉽게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전술한 바대로 안동 김씨 김문근의 딸로 1837년 3월 23일 순화방의 사저에서 태어났으며, 안동 김씨 일문의 정략에 따라 1851년에 15세의 나이로 왕비가 되었다. 덕분에 철종 재위 내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이어졌다.
1863년 철종이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대왕대비가 된 그녀는 1878년(고종 15년) 5월 12일 창경궁 양화당에서 4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철종의 후궁은 귀인 박씨, 귀인 조씨, 숙의 방씨, 궁인 이씨, 궁인 김씨, 궁인 박씨 등 모두 7명이다. 이들은 모두 궁인출신으로 자식을 낳은 사람은 봉작을 받고, 나머지는 궁인으로 남았다.
귀인 박씨는 원래 궁인이었다가 철종5년 7월 10일에 아들을 낳은 덕에 귀인 봉작을 받았다. 그녀의 아이는 일찍 죽었다. 귀인 조씨도 원래는 궁인이었다가 철종 10년 10월 15일에 아들을 낳은 덕에 귀인에 봉해졌다. 그녀는 철종 12년 1월 15일에도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숙의 방씨는 철종 5년 2월 22일에 아들을 낳아 숙의에 봉작되었는데, 그녀의 아들 역시 일찍 죽었다. 숙의 범씨는 딸을 낳았는데, 영혜옹주이다. 영혜옹주는 철종의 자식들 중에서 유일하게 성장하여 혼례까지 치뤘는데, 남편은 개화파의 선두주자이기도 한 박영효이다.
나머지 궁인들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다.
철종의 장인과 처족으로 철인왕후의 아버지 김문근은 김인순의 아들이며 김이순에게 입양되었다. 이조판서를 지낸 김수근이 그의 형이며, 안동김씨 일문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1841년에 음보(蔭補:지난날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게 되는 일)로 벼슬을 얻어 현감생활을 하다가 1851년에 딸이 왕비에 간택된 덕분에 영돈녕부가 되었다.
26대 고종
제26대 고종 가계도
영조-영빈 이씨 |
장조(사도세자)-숙빈 임씨 |
은신군 |
남연군(인평대군/인조 3남) |
흥선대원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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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6대 고종 |
차남 : 철종(1852-1919) |
재위기간 : 1863.12-1907.7(43년 7개월) |
부인 : 7명 / 자녀 : 6남 1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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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난의 왕 고종과 조선왕조의 목락
2. 떨어지지 않은 녹두꽃 '전봉준'과 동학혁명
3. [고종실록] 편찬
▣ 고종 (高宗) |
초휘(初諱) 재황(載晃). 아명(兒名) 명복(命福). 초자(初字) 명부(明夫). 자 성림(聖臨). 호 주연(珠淵). 영조의 현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 비(妃)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딸 민씨(閔氏). 1863년(철종 14)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趙大妃)의 전교(傳敎)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하였으나, 대정(大政)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 척신(戚臣) 세도정치의 배제, 붕당문벌(朋黨門閥)의 폐해 타파, 당파를 초월한 인재의 등용, 의정부의 권한 부활에 따른 비변사(備邊司)의 폐지 및 삼군부(三軍府)의 설치, 한강 양화진(楊花津)의 포대(砲臺) 구축에 따른 경도수비(京都守備) 강화, 양반으로부터의 신포징수(身布徵收), 양반 유생의 발호 엄단 등은 고종 초기 10년 동안 대원군이 이룩한 치적이다. 그러나 경복궁 중수(重修)에 따른 국가재정의 파탄, 악화(惡貨)인 당백전(當百錢)의 주조(鑄造)와 민생의 피폐, 과중한 노역(勞役)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소요, 가톨릭교 탄압에 따른 8,000여 명의 교도 학살, 쇄국정책,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등 어두운 정치적 자취를 남기고 1873년(고종 10) 11월, 민비의 공작에 따라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정권은 민비와 그 일족인 민승호(閔升鎬) ·민겸호(閔謙鎬) ·민태호(閔台鎬)로 대표되는 민씨 일문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고종은 민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국난을 헤쳐나가야 했다. 1875년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쇄국정책을 버리고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 근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개국과 함께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되자, 개화당이 대두, 조정은 개화 ·사대당(事大黨)의 격심한 알력 속에 빠졌다. 1881년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 朝鮮策略》의 유입, 반포를 계기로 위정척사파는 마침내 신사척사상소운동(辛巳斥邪上訴運動)을 일으켜 민씨정부규탄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때 안기영(安驥永) 등에 의하여 국왕의 이복형인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이재선(李載先)을 국왕으로 옹립하고자 하는 국왕폐립음모(國王廢立陰謀)가 꾸며졌으나, 고변(告變)에 의하여 사전에 적발되어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민씨정권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척사상소운동을 강력히 탄압하여 정국을 수습하였다.그리고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게 하고, 군사제도를 개혁, 신식 훈련을 받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으나 신제도에 대한 반동으로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 개화 ·수구(守舊) 양파는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벌이게 되어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겪고 고종은 개화당에 의해 경우궁(景祐宮) ·계동궁(桂洞宮) 등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이런 중에도 한 ·미, 한 ·영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서방국가와 외교의 길을 텄지만, 1885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우월권을 배제하고, 일본도 동등한 세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청 ·일 간의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어 일본이 한반도에 발판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이 청 ·일 전쟁을 유발하고,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는 대원군을 영입, 김홍집(金弘集) 등의 개화파가 혁신내각을 조직하여 개국 이래의 제도를 바꾸는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로부터 한국 지배기반을 굳힌 일본은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여 한국 최초의 헌법이라고도 할 <홍범 14조(洪範十四條)>가 선포되고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독립국으로 행세하는 듯하였으나, 일본의 내정간섭은 더욱 심하여져 관제를 일본에 준하여 개혁하고, 8도를 13도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3국간섭으로 일본이 랴오둥 영유[遼東領有]를 포기, 국제적 위신이 떨어지자 민씨 일파는 친러로 기울어 친일내각을 무너뜨리고 이범진(李範晋) ·이완용(李完用) 등을 등용하여 제3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에 맞서 일본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는 1895년 8월 대원군을 받들고 일본인 자객(刺客)들을 앞세워 경복궁으로 들어가 민비(閔妃)를 시해, 고종에게 강압하여 친러파 내각을 물러나게 하고 유길준(兪吉濬) 등을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였다. 종두(種痘) ·우체사무 ·단발령 ·양력사용 ·도형폐지(徒刑廢止) 등은 이 해의 제4차 김홍집 내각에 의해 이루어졌다.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계략으로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있자 김홍집 ·정병하(鄭秉夏) ·어윤중(魚允中) 등 개화파 인사가 살해되고 다시 친러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로부터 한동안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았지만, 고종은 1897년 2월 25일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따라 경운궁(慶運宮: 후의 덕수궁)으로 환궁, 8월에는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10월에는 국호를 대한, 왕을 황제라 하여 고종은 황제즉위식을 가졌다. 1904년(광무 8) 러 ·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요구로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위한 제1차 한 ·일 협약을 체결, 이듬해 한성의 경찰치안권을 일본헌병대가 장악하였으며, 이해 11월에는 제2차 한 ·일 협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김으로써 병자호란 이래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았다. 이에 우국지사 민영환(閔泳煥) ·조병세(趙秉世) ·홍만식(洪萬植) 등은 자결로써 항의하였지만 일본은 1906년 2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대행정치(代行政治) 체체를 갖추었다.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자 고종은 밀사 이준(李儁) 등을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 오히려 이 밀사사건 때문에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讓位)한 후 퇴위,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1일 일본인에게 독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의 재위 44년은 민족의 격동기로서 실질적으로 국운(國運)과 명운을 함께 하여, 양위 3년 후에는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능은 금곡(金谷)의 홍릉(洪陵)이고, 저서에 《주연집(珠淵集)》이 있다. |
- 고종이 왕위에 오른 배경 -
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조정은 안동 김씨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들은 순조 이후 반세기 이상을 계속해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헌종의 어머니이자 효명세자(익종)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는 이같은 권력 구도를 깨트 리기 위해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과 결탁하여 그의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게 된다. 둘째 아들 명복을 즉위시키기 위한 이하응의 계략은 치밀했다. 안동 김씨 세력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달들 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같은 호신책 덕분으로 목숨을 부지 한 그는 철종의 죽음이 임박하자 익종비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 조대 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에 이하응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뒤를 잇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 정을 하였다. 그리고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 그에게 위임시켰다. 이로써 고종을 대신한 흥 선대원군은 향후 10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 대원군의 정책 -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당쟁의 근거지가 된 사원을 철폐하는 한편 토색을 일삼 아 주구로 전락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양반과 토호의 면세 전결을 철저히 조사하여 국가 재정을 충당했다. 이밖에 민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무명잡세를 없애고 궁중에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제도를 폐지했으며 은광산을 개발하는 것을 허용하여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또한 사회의 악습을 개선하고 복식을 간소화했으며 군포세를 호포세로 변경하여 양반도 세금을 부담하도록 했다. 한편 '대전회통', '육전조례', '양전편고' 등의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를 확립시켰고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 를 부활시켜 삼군부를 두어 군국기무를 맡게 함으로써 정무와 군무를 분리시켰다.
- 대원군의 실정 -
우선 왕의 위엄을 세우고자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원납전을 징수하고 문세를 거두는 것도 모자라서 소유자 의 허락 없이 전국에서 거석과 거목을 징발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도들에 대한 지나친 박해로 인해 자신의 정치 생명에 타격을 입기도 했다.
- 병인박해 -
그는 한때 천주교도들이 건의해온 이이제이(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의 논리에 흥미를 가진 적도 있었지만 이때문에 도리어 정적들에게 탄핵의 빌미를 주게 되자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천주교 박해령을 내려 1866년부터 1872년까지 6년 동 안 8천여 명의 신자들을 학살하였다. 이것이 바로 '병인박해' 혹은 '병인사옥'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 병인양요 -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죽자 프랑스는 그 보복으로 1866년 10월 군함 7척에 총병력 1천 명을 승선시키고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강화도 수복 계획을 구상하고 그들을 공격했지만 화력이 밀려 실패하였다. 그러나 제주목사 양헌수의 전략으로 정족산성 싸움에서 승리하여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한다.
- 셔먼호 사건 -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미국상선 제너럴셔먼 호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군민의화공으로 불타버린 사건
- 신미양요 -
미국은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 개항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에 걸친 탐문 항 행을 실시하면서 셔먼호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동시에 통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조선 원정 을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1871년 5월 조선 원정을 결행하기로 하고 군함 5척, 병력 1천 2백여 명, 함포 85문 등으로 무장하고 강화도 해협으로 침입해왔다. 미국 군함이 강화도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그들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 이것이 이른바 '손돌목 포격 사건 '으로 조. 미간의 최초의 충돌이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보복 상륙 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면서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하지만 조선의 거부로 평화 협정이 결렬되자 그들은 대대적인 상륙 작전을 감행해 강화도 초지진에 무혈 입성하였다. 이후 조선 수비병은 광성 보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였고 강화도는 완전히 미군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 정책에 밀려 결국 점거 1달여 만에 강화도에서 물러갔다.
- 일본과의 수교 -
신미양요 이후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한 조선에서 대원군이 물러남으로써 점차 대외 개방에 대한 여론이 높아가자 일본은 1875년 2월부터 군함을 이끌고 동해와 남해, 황해 등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결국 병력을 이 끌고 강화도로 침입해오자 조선군은 영토에 대한 불법 침입을 이유로 발포한다. 일본은 이 조선군의 발포를 빌미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 영종도에 상륙했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군은 군사를 동원해 그들과 일전을 벌였지만패배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한동안 영종도를 점거하고 있다가 조선의 감정이 악화되자 일단 물러났다. 하지만 조선 영해에 계속해서 군함을 진주시켜 무력 시위를 벌이며 개항을 요구했고 마침내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조. 일 수호협약이 체결되면 서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이후 부산과 원산항도 개항되었다.
- 개혁파와 위정척사파와의 격돌로 인한 자주권 손실 -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에소속됐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에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 청군에 의해 납치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가 청군에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이 크게 실추 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과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 을미사변의 발생 -
당시 일본은 청. 일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받은 요동반도를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동맹군의 힘에 굴복해 다시 청에 돌려준 상태였고 조선 조정은 이같은 정세를 감지하고 배일 친러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 895년 8월 대러 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 세력으로 하여금 조정을 장악하게 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 대한제국의 탄생 -
을미사변 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은 일본 군대와 친일 세력의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은밀히 러시아와 내통하고 1896년 2월 러시아 영사관으로 몸을 옮긴다. 고종은 여기에서 친러 정권을 수립하여 친일 내각의 요인들 을 역적으로 규정지으며 단죄하였고 갑오경장 때 실시된 단발령을 철폐하는 한편 의병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렸다. 그러나 친러 내각이 집권하면서 열강에 많은 이권이 넘어가는 등 나라의 위신이 추락하고 권익을 잃어 국권의 침 해가 극심해진다. 이에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 선양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같은 여론에 밀려 고종은 1897년 2월 아관으로 떠난 지 1년 만에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올라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 계속되는 고종의 위기와 을사보호조약 -
1898년 7월 안경수가 현역, 퇴역 군인들을 매수하여 황 제 양위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고 또 9월에는 유배되어 있던 김홍륙이 차에 독을 타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고종을 위협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또한 그무렵 독립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만민공동회가 만들어져 맹렬하게 자유민 권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보부상과 군대의 힘을 빌려 이들을 진압하였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간에 전쟁이 일어나 일본군의 군사적 압력이 격해지는 가운데 장호익 등이 다시 황제 폐립 음모사건을 일으켰고 러.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하여 제1차 한. 일 협약을 강요했 으며 1905년에는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 고종의 퇴위와 헤이그 밀사사건 -
고종은 일본이 설치한통감부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대한제국 문제를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 최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특사로 내정된 사람은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과 전 평리 원감사 이준이었다. 이들을 특사로 파견한 고종은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친서를 보내 이들 특사 활동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영국과 일본의 방해로 고종의 밀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 사건 으로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 세력과 일본의 강요에 의해 고종은 이 해 7월 20일 퇴위하게 된다.
-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왕 -
고종에 이어 순종이 즉위하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고종이 조선의 마지막 왕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이미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보호 조약이 이루어졌고 또한 그가 일본의 강권에 의해 퇴위되었을 뿐만 아 니라 그 이후에도 경술국치를 보았고 다시 9년을 더 살며 일본의 식민 통치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망국의 상황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조선의 멸망 과정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1백 년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 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그 사건들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 영왕 -
고종의 넷째 아들이며 귀인 엄씨 소생으로 순종의 이복 동생이다. 1897년에 태어났으며 1900년 8월에 영왕에 봉해 졌고 1907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이 해 12월 조선 총독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어 순종이 폐위되자 왕세제로 격하되었다. 1920년 4월 일본 황실의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일 본 왕족 나시모토의 맏딸인 마사코와 정략 결혼했다. 1926년 순종이 죽자 형식상으로 왕위 계승자가 되어 이왕이라 불리었으나 일본에 머문 채 귀국하지 못했다. 일본 에 강제 체류하는 동안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육군사관하교, 육군대학을 거쳐 육군 중장을 지내기도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어 환국하고자 하였으나 국교 단절 및 국내 정치의 벽에 부딪쳐 귀국이 좌절되었다. 한편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황족의 특권이 상실되고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하여 1963년까지 일본에서 보냈다. 그 후 1963년 11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하고 부인 이방자와 함께 귀국하였 다. 귀국 당시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에 시달리면서도 1966년 오랫동안 수권하던 심신장애자 재활원인 자행회, 1967년에는 그의 아호를 빌린 신체장애자 훈련원 명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하지만 지병으로 1970년 74세를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가 죽은 후 부인 이방자는 영왕기념사업회, 정신박약아 교육시설인 자혜학교, 1982년 신체장애자 교육시설인 명 혜학교 등을 설립하며 그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그는 부인 이방자 여사에게서 진과 구, 두 아들을 얻었으며 맏아들 진은 어려서 죽고 둘째 아들 구는 현재 생존해있다. 능은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홍유릉 내에 있으며 1989년 4월 30일 이방자 여사도 이곳에 함께 묻혔다.
- 의왕 -
고종의 셋째 아들로 귀인 장씨 소생이며 순종의 이복 동생이고 영왕 이은의 이복 형이다. 1877년에 태어났으며 15 세가 되던 1891년에 의화군에 봉해지고 1893년 9월 김사준의 딸을 맞아 가례를 올렸다. 1894년 청.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전승을 축하하는 보빙대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갔다가 그 해 10월에 귀국하 였다. 이듬해 5월에는 특파대사에 임명되었으며 8월에는 특파대사 자격으로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 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1900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였고 같은 해 8월에 의왕에 봉해졌다. 1905년 4월 미국 유학을 마친 뒤 귀국하여 그 해 6월에 적십자총재가 되었다.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항일 독립투사들과 접촉하여 1919년 대동단 의 전협, 최익환 등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하였으며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중 그 해 11월 만주 안동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일본으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여 항일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고 해방과 6.25를 경험한 뒤 서울 사가에서 곤궁한 생활을 하다가 1955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슬하에 우와 건, 두 아들을 두었다.
27대 순종
< 조선왕조 제 27대 "순종융희황제"의 가계도 >
순종의 아버지 순종의 어머니
"고종광무황제"===================="명성황후 민씨"
[ 1852 - 1919 ] [ 1851 - 1895 ]
'차 남'
제 27대 "순종융희황제"< 이척 : 1874 - 1926 >
< 재위기간 : 1907 - 1910 >
부인 2명 ,
정비"순명효황후 민씨"------------[ 1872 - 1904 ]
계비"순정효황후 윤씨"
순명효황후 윤씨 - 자식 없음
순정효황후 윤씨 - 자식 없음.
순종은 앞서 말한 대로 고종의 장남이며 명성황후 민씨 소생으로 1874년 2월 8일 창덕궁에서 태어나 1926년 5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사실 등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일생 동안 두 명의 정비(正妃)외에는 후궁을 두지 않았다.
그의 첫 왕비인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1872-1904)는 민태호의 딸이다. 1872년 10월 20일 한양의 양덕방 계동의 사가에서 태어났다. 11살 때인 1882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입궐하였으며, 1897년에 황태자비가 되었다. 그녀는 1895년 을미사변 때 난입한 왜인 낭도들의 앞을 막으며 시어머니인 명성황후 민씨를 구하려다가 그들에게 맞아 쓰러져 한참 동안 기절한 채 깨어나지 못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행히 큰 부상은 당하지 않았지만, 이때의 충격으로 그녀의 마음은 크게 병들었고, 결국 1904년 9월 28일에 경운궁 강태실에서 33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다음으로 계비(繼妃)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1894-1966) 윤씨는 해평윤씨 택영의 딸이다. 순종의 첫 번째 황태자비인 순명효황후 민씨가 1904년에 사망하자 1906년 12월 황태자비에 책봉되어 입궐했다. 그 후 1907년 순종이 황제에 오르자 황후가 되었으며, 그해 여학에 입학하여 황후궁에 여시강을 두었다.
1910년 국권을 강탈당할 때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이를 저지하고자 치마 속에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 이에 친일의 우두머리인 총리대신 이완용이 황후의 숙부(叔父)인 윤덕영에게 국새를 가져오게 해 숙부 되는 윤덕영에게 국새를 빼앗기고 말았다.
순정효황후는 망국(亡國) 후 일제의 침탈(侵奪)행위를 경험하면서, 조국해방과 6·25때 공산군의 남침으로 인한 동족상잔의 아픔도 겪고,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이라는 법명(法名)을 받기도 했다.
1966년 71세를 일기로 낙선재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에게 소생은 없다.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인 순종황제의 능은 특이하게 조성되었다.
즉 순종황제와 정비 순명효황후, 계비 순정효황후 세 분의 유일한 동봉삼실의 합장(合葬) 릉(陵)이다. 홍릉(洪陵)과 같은 양식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다소 좁으며, 석물(石物)들은 사실적으로 만들어져 중후한 느낌을 준다. 위치는 경기도 미금시 금곡리다.
조선왕조를 합방 점령한 직후인 1910년 10월에 일제(日帝)는 76명에 달하는 합방에 공을 세운 조선인에게 이른바 합방공로작(合邦功勞爵)을 수여했다. 이들 대부분이 이씨, 민씨 등 왕족들과 집권 노론(老論)들이었다. 김석진, 민영달, 윤용구, 조경호, 한규설 등 일제가 자의적으로 수여한 남작(男爵) 작위를 거부한 8명 등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은 합방공로작(合邦功勞爵)으로 대우를 받으며, 일제시대에 계속 귀족의 지위를 누렸다.
◇◆고종의 가계도 : 고종 1852 - 1919
고종 ----
명성황후 민씨 ---- 순종
귀비 엄씨 ---- 영왕[이은]
귀인 이씨 ---- 완왕(병사함)
귀인 장씨 ---- 의왕[이강]
소의 이씨
귀인 정씨 ---- 우
귀인 양씨 ---- 덕혜옹주
= 고종은 완왕을 비롯하여 어린 나이에 잃은 자식이 많으며, 황태자인 순종, 의왕 이강, 영왕 이은, 늙은 나이에 얻은 덕혜옹주가 있었습니다.
1.고종 [광무황제]
2.명성황후 민씨 [명성태황후]
3.귀비 엄씨 [엄황귀비]
영왕 이은의 생모로 똑똑했던 인물로 알려진다. 고종의 상궁으로 명성황후 시해후 고종의 총애를 받아 영왕을 생산했으며, 거의 왕비로써의 역할 을 수행하였으나 출신상의 문제로 왕실에서 천대받았다. 고종의 재가를 얻어 숙명, 진명, 양정학교를 세우기도 한 인물이다. 그러나 아들 영왕이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자 애를 태우다가 결국 1911년 장티푸스로 별세하였다.
4.덕혜옹주
고종과 상궁 양씨에 태어난 고종의 고명딸. 1912년 출생. 13세때 볼모로 일본에 끌려간 뒤 외로움과 향수병으로 정신질환에 걸림. 19세때 일본인 소다케시 백작과 강제 결혼. 그러나 결혼의 충격으로 병이 악화돼 이혼당하고 정신병원에서 생활하다가 1952년 38년 만에 귀국. 귀국후에도 백치로 낙선재에서 생활하다 1989년 3월 별세했다.
◇◆순종의 가계도 : 순종 1874 - 1926
순종 -----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
= 순종은 자식이 없었고, 첫째 왕비인 순명효황후 민씨는 어린나이에 돌아가셨고, 순정효황후 윤씨는 1966년까지 창덕궁 낙선재에서 기거하셨습니다.
1.순종 [융희황제]
2.윤대비 [순정효황후 윤씨]
◇◆영왕의 가계도 : 영왕 1897 - 1970
영왕 ----
영왕비 방자(마사코) ---- 진(유아때 사망)과 구(현재 생존)
= 원래 민갑완이라는 약혼녀가 있었으나 영왕은 일본의 조선왕족 결혼법 제정에 의해 강제로 일본왕족과 결혼하였습니다. 일본이 제정한 조선왕족결혼법은 다음과 같은데 "조선왕족은 선일융화를 위해 무조건 일본왕족과 결혼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1.영왕 이은 [의민황태자 영왕]
2.이방자 여사 [영왕비]
3.민갑완 [영왕의 약혼자]
4.진왕자 (유아시기 사망)
영왕과 영왕비 방자 사이에 태어난 장남으로 유아시기에 사망했다. 조선방문시 사망하였으며, 검은 물체를 계속 토해낸 것으로 보아 독살일 것으로 추정된다.
5.故구왕자 [황세손 구]
현존하는 유일한 영왕의 자식이자 현재 조선왕실의 최고 직계 황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구는 영왕이 이왕직(조선국왕)에 책봉되었기 때문에 왕세자로 일컬어졌다. 사춘기에 불행한 부모의 운명과 혼혈왕자인 자신의 처지를 알고 충격을 받았으며, 결국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겠다고 17세에 미국으로 떠나 MIT 공과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다. 그러다가 미국여인 줄리아를 사랑하여 결혼하였다.
1963년 32세때 부모를 따라 조국에 왔고 한때 서울대 공대 및 연세대 공대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직계 황손으로써 의무를 강요하는 종친회와의 갈등과 '신한공항'등의 사업실패의 좌절, 단지 왕손이라는 이유로 이용하려는 주변의 시각들에 의해 1979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1982년에는 종친회의 강요 및 이구씨의 개인사정에 의해 줄리아랑 이혼하게 되었다. 그 후 일본여인 아리다랑 동거하면서, 도쿄에서 살면서 사업활동을 하였다. 84년 사기혐의로 고소, 89년 어머니 이방자 여사의 사망등의 파란을 겪기도 했다.
이방자여사가 타계한 뒤 수차례에 걸친 종친회의 귀국 종용을 거부하던 이씨는 환갑을 넘기면서 심경 변화를 보여, 귀국을 결심했고, 결국 96년 귀국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는 종친회장자리를 이구씨에게 기증하였고, 부영주택 이중근 회장이 마련해준 장충동 호텔 영빈관에서 생활하며, 왕실제사인 종묘대제등의 초헌관 참여, 종친회 사무를 보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6.줄리아
이구의 전 아내. 미국에서 고생하는 동안 외로운 동양 청년 이구와 사랑으로 결혼. 실내장식가인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으나 외국인에다가 후손이 없다는 이유로 이혼하라는 종친회와 큰 갈등을 가졌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실내장식품을 만들어 시어머니였던 방자여사의 사업을 돕고 왕실의 일원으로 열심히 활동하였다. 시어머니였던 이방자여사는 줄리아에 대해 외국인만 아니었다면 최고의 왕실며느리 감이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종친회의 갈등 및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던 이구씨와의 관계악화에 의해 1982년 이혼했다.
줄리아숍을 운영하다 결국 생활고에 의해 1995년 하와이로 떠났다가 2000년 남편의 사진 450점을 돌려주기 위해 다시 한국에 방문하였는데, 그리운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한채, 줄리아가 왕세자비시절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시아버지 영왕의 묘소를 방문한후 왕실의 30여년간 삶을 회고하는 편지를 남겼다. 이런 사실이 언론에 보도 되면서 "줄리아의 마지막 편지"라는 특집방송이 방영되기도 하였다.
◇◆의왕의 가계도 : 의왕 1877 - 1955
= 의왕의 가족관계는 상당히 복잡합니다. 약 20?여명이 넘는 자녀분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1.의왕 이강
2.이건
의왕의 장남으로 궁인 정씨의 소생이다. 1918년생. 11세에 일본에 볼모로 가서 일본왕족 딸과 강제결혼하였다. 해방후 이혼하고 일본인으로 귀화. 현재 재혼한 일본 부인과 일본에 살다가 현재는 별세했다.
3.이우
의왕의 차남으로 궁인 김씨의 소생이다. 1911년생. 12세에 일본에 볼모로 가서 군인으로 복무중 1945년 8월 히로시마의 원폭으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비운의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진다. 똑똑하고 인물이 좋아 의왕의 사랑을 받았으며, 조선 말기 왕족중 거의 유일하게 오랜기간 일본의 강압결혼에 저항하여 결국 한국여성인 박찬주씨와 결혼하였고 청과 종이라는 자식을 두었다. 이종씨는 현재 사망했고 이청씨는 미국 시카고에 거주하고 있다.
4. 이수길
이우의 동생. 1918년생. 민주당 장면 내각때 문화재관리국장을 지내며, 영왕을 귀국 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칠궁에서 살다가 전두환 대통령 당시 청와대 경호실의 강제 축출 강요에 충격받고 1982년 65세로 별세. 부인 김신덕 여사는 칠궁에서 쫓겨나 서울 개포동의 19평 시영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딸인 이순씨는 인천 아들인 이한주씨는 일본에 살고 있다.
5. 이석
본명은 이해석으로 홍씨 소생. 1941년 생으로 관훈동 사동궁에서 의왕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잠시간의 행복한 생활이 있었지만 6.25전쟁으로 왕실은 재산의 대부분을 잃고, 그나마 남아있던 재산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국고로 환수당한 뒤 가족들은 심한 생활고를 겪어야 했다. 특히 1959년 아버지 의왕이 사망하자 그는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위해 종로 2가 음악다방에서 DJ일을 시작했고, 1962년부터는 미8군에서 한달에 3만원을 받으며 노래도 불렀다. 그러나 왕실어른들과 문중 어른들에게 노여움을 샀고 그는 경제력 무능력한 왕족의 신분에 대해 눈물로 왕실어른들께 호소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64년 사회각층의 인사와 만나는 TV프로그램"굿이브닝쇼"의 사회를 보게되자 결국 윤대비는 화를 풀었다고 전해진다. 가수 이석은 '비둘기집''두 마음''외로운 조약돌'등의 노래를 부르며, 한때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64년 여러 주변상황에 의해 그는 월남전에 참전했다. 제대후 암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 홍씨를 잃고, 어려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미국 한인회장인 김병묵박사의 도움으로 79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부의 길이 쉽게 열리지 않았고,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육체노동을 하는 등 고생을 하다가 87년 드디어 미국의 영주권을 얻었다.
그러나 89년 이방자여사의 장례 직후 다시 조국인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결의가 생겼고, 결국 귀국한후 잠시간 가수생활을 하기도 하면서, 흩어진 왕실을 다시 모우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 그가 만난 세 명의 부인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났고, 이석씨는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음반을 준비하면서, '황실보존국민연합회' 총재로써, 황실 문화 복원 작업 등의 활동을 하고 추진중이다.
6. 이해경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의왕과 김금덕여사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1950년대 몰락하는 왕가가 싫어 미국으로 도미했다. 1969년 컬럼비아대 동아시아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의왕 이강의 독립운동사실을 알아냈고, 의왕의 명예를 살리기 위해 복권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한국 방문때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라는 강연을 주체한 적도 있으며, 왕실의 유품등을 기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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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 넘어갈 사항 ==
- 고종의 가계도를 중심으로 보면서 각각 갈라지는 순종, 영왕, 의왕의 가계도를 살펴보시면 됩니다. -
- 조선이 대한제국황실이 되면서 왕은 황제로 대군이나 군등 왕자는 왕으로 봉작됩니다. -
- 영친왕, 의친왕등의 일본식 왕 직위 표현이 있지만 영왕, 의왕 등 대한제국시기에 고종이 명명한 명칭을 적었습니다. -
- 이왕이란 직위는 한일합방후 조선국왕에게 형식적으로 봉하는 일본의 직위였습니다. 합방후 일본은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격하시키고 고종은 이태왕 순종은 이왕으로 봉해졌고, 순종의 승하후 이왕직은 영왕 이은이 물려받았습니다. -
[1] 고종의 가계도 : 고종 1852 - 1919
고종 ----
명성황후 민씨 ---- 순종
귀비 엄씨 ---- 영왕[이은]
귀인 이씨 ---- 완왕(병사함)
귀인 장씨 ---- 의왕[이강]
소의 이씨
귀인 정씨 ---- 우
귀인 양씨 ---- 덕혜옹주
= 고종은 완왕을 비롯하여 어린 나이에 잃은 자식이 많으며, 황태자인 순종. 의왕 이강, 영왕 이은, 늙은 나이에 얻은 덕혜옹주가 있다.
1. 고종 [광무황제]
조선의 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초대황제로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다. 25대 철종이 아들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고 대원군의 섭정 정치를 겪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개항되었고, 수많은 고초와 조선왕실의 번영을 위해 수십년간 노력을 기울였다. 1894년 갑오개혁을 단행하였으나 1895년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는 참변을 겪고,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아관파천) 1897년 독립협회에 의해 덕수궁으로 환궁한 후 대한제국을 성립시키고 독립국가임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추진하였으나 1905년 일본과 친일관료(을사오적)사이에 외교협정이 맺어짐으로 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게 박탈당하였다.(을사조약)
고종황제는 외교권을 되찾고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헤이그특사를 1907년 파견하게 되나 일본에 의해 발각되어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퇴위 당한다.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후 일본에 의한 감시와 함께 덕수궁에서 유패되어 세월을 보내게 된다. 독립을 위해 망명을 준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1919년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위한 밀사를 파견하려고 하는 중 의문사 당하였다. 일본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종황제의 승하가 전국에 알려지자 전국민의 분노를 사게되었고 결국 고종황제의 인산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2. 명성황후 민씨 [명성태황후]
우아한 여성의 이미지와 함께 강건한 여걸의 성격 또한 간직한 분으로 알려져있다. 순종의 어머니이자 고종의 정실부인으로서 시아버지인 대원군으로 부터 왕권을 찾아 고종에게 전해 주었으며, 일본에 대항하여 친러시아정책을 펴다가 미우라공사가 이끈 일본의 낭인에 대해 시해되었다. 이 을미사변이 전 조선에 알려지면서 을미의병운동이 일어났다.
3. 귀비 엄씨 [엄황귀비]
영왕 이은의 생모로 똑똑했던 인물로 알려진다. 고종의 상궁으로 명성황후 시해후 고종의 총애를 받아 영왕을 생산했으며, 거의 왕비로써의 역할 을 수행하였으나 출신상의 문제로 왕실에서 천대받았다. 고종의 재가를 얻어 숙명, 진명, 양정학교를 세우기도 한 인물이다. 그러나 아들 영왕이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자 애를 태우다가 결국 1911년 장티푸스로 별세하였다.
4. 덕혜옹주
고종과 상궁 양씨에 태어난 고종의 고명딸. 1912년 출생. 13세때 볼모로 일본에 끌려간 뒤 외로움과 향수병으로 정신질환에 걸림. 19세때 일본인 소다케시 백작과 강제 결혼. 그러나 결혼의 충격으로 병이 악화돼 이혼당하고 정신병원에서 생활하다가 1952년 38년 만에 귀국. 귀국후에도 백치로 낙선재에서 생활하다 1989년 3월 별세했다.
[2] 순종의 가계도 : 순종 1874 - 1926
순종 -----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
= 순종은 자식이 없었고, 첫째 왕비인 순명효황후 민씨는 어린나이에 돌아가셨고, 순정효황후 윤씨는 1966년까지 창덕궁 낙선재에서 기거하셨다.
1. 순종 [융희황제]
조선 27대 왕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명성황후 민씨사이에 태어 났다. 고종이 강제 퇴위되자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이미 국가의 운명은 기운 상태였고 결국 1910년 한일합방에 의해 일본에 의해 이왕이라고 불리우며 창덕궁에서 생활을 하였다. 어린시절 누군가에 의해 아편을 탄 커피를 다량 마신 후 치아를 대부분 잃고, 남성능력을 상실하였으며, 결국 승하할때 까지 슬하의 자식없이 쓸쓸히 살았다. 일본에 의한 감시에 의해 고통받았으며, 망국의 한을 품은채 1926년 승하하셨다. 순종황제의 인산일을 기해 6.10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2. 윤대비 [순정효황후 윤씨]
순종의 황후이자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장녀이다. 순종의 첫째 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두번째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였다. 33세(1926년)에 순종이 승하하고, 영왕이 이왕의 자리에 오르자(1926년) 대비가 되었고, 왕실의 최고 어른으서 마지막 조선왕실을 지탱해 나갔다. 6.25전쟁 때 피난을 못가 북한을 피해 창덕궁에서 극비에 탈출 운현궁으로 들어가야 했으며, 전쟁후 다시 창덕궁으로 들어가려 하자 이승만 대통령의 거부로 인해 창덕궁 낙선재에서 쫓겨나 정릉 산속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4.19 혁명후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낙선재로 환궁는 등 곡절 많은 생을 살다가 1966년 73세로 별세 하였다. 슬하의 자식도 없이 외로운 생을 산것으로 알려지며, 팔만대장경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1966년 윤대비가 돌아가실때 당시 주변의 10여명도 안되는 궁녀들이 남은 왕실의 몰락상황과 한국정부의 무관심한 처우는 윤대비의 한 많은 삶의 단면을 느낄 수 있게 한다.
[3] 영왕의 가계도 : 영왕 1897 - 1970
영왕 ----
영왕비 방자(마사코) ---- 진(유아때 사망)과 구(현재 생존)
= 원래 민갑완이라는 약혼녀가 있었으나 영왕은 일본의 조선왕족 결혼법 제정에 의해 강제로 일본왕족과 결혼하였다. 일본이 제정한 조선왕족결혼법은 다음과 같은데 \"조선왕족은 선일융화를 위해 무조건 일본왕족과 결혼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 영왕 이은 [의민황태자 영왕]
고종과 귀비엄씨 사이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은. 4세때 영왕으로 명명되어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가 되었다. 11세에 일본의 통감 이토 이로부미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볼모로 일본에 끌려가 일본에서 교육받았고다. 성격이 온화하고 총명하여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1920년 일본황족의 딸 방자(方子)와 일본의 강요에 의해 정략결혼하였으며, 1923년 관동대지진때는 일본인의 조선학살로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1926년 형식상 이왕(조선국왕)에 책봉되어 조선에 돌아가기를 원하였지만 일본정부에 의해 거부당하였으며, 한국독립을 구심점을 마련하기 위해 벌여졌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영왕망명 사건이 실패로 돌아감에 의해 단속이 더 강화되었고, 산책이나 쇼핑등 단순한 일상생활까지 제지 받았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왕족의 신분을 상실하였으며, 그 후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영왕은 일본의 감시가 풀리자 조국이었던 한국으로 환국하고자 하였으나 왕실복위가 벌어지는 상황을 우려한 이승만 대통령의 적극적인 반대로 저지 당했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서 일본에 있던 영왕 및 조선에 남아있던 왕족들의 왕실재산 뿐만 아니라 개인 물품 하나하나까지도 한국정부에 의해 강제 회수 당하였고, 왕궁에서 쫓아내는 일이 벌어졌다. 그당시 영왕 주변의 사람들은 정부가 국보급 문화재를 회수해 갈 수는 있지만 개인 물품까지 압수해 가는 법은 없다며, 한국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하라고 권유하였으나 영왕은 조국인 한국을 상대로한 재판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하며, 전재산이 거의 국유화되는 것을 인정했다고 한다. 또 이승만정권은 일본에 있는 영왕일가에게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 이구씨의 미국여행또한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어쨌든 군인생활 및 왕족으로서의 생활 밖에 해보지 못했던 영왕으로써 일본에서의 생활은 매우 힘들었고, 결국 생활은 일부 아는 사람들에게 의해 도움받아서 생활하였다. 게다가 일본에서 오랜기간 볼모생활 동안 애타게 그리워했던 조국 한국의 그러한 대접에 큰 충격을 받은 채 오랜기간 동안 고독한 생활을 보내게 되었고, 건강 또한 매우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조선왕실을 싫어했던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후 한국사회에서는 영왕 귀국을 위한 활동 추진되었고 결국,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호의로 볼모생활 55년 만에 부인인 이방자 여사랑 귀국하였는데 그 당시 영왕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영왕은 뇌혈전증에 의한 실어증에 시달리면서, 거의 의식불명 상태에서 병원생활을 하였다. 결국 영왕은 윤대비와 친족들을 만나지도 못한체, 또 귀국후 한국의 땅 한번 걸어보지도 못한 상태에서,1970년 5월 1일 73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2. 이방자 여사 [영왕비]
영왕 이은의 아내. 일본황족 모리마사왕 나시모토의 장녀로 태어났다. 한때 일본황태자비의 물망에 오른 인물이었으나 한일융화 초석이 되어라는 일본천황의 명에 의해 영왕과 강제결혼, 조선왕자의 아내로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외부적으로는 한일융화가 목적이었으나 방자가 임신능력이 없다는 의사의 보고에 의해 조선왕실의 대를 끊으려고 결혼시킨 일본의 야심이 깔려진 정략결혼이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방자가 아기를 임신하자 그 당시 방자가 임신할 수 없다고 보고했던 의사들은 사형당했다고 한다. 어쨌든 방자도 이러한 일본의 계략에 이용당한 비운의 여인이었고, 왕실의 희생양이라는 비슷한 상황속에 만났던 두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부부사이또한 좋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망국의 왕으로써 남편 영왕 이은이 고통받는 것에 때문에 이방자 여사도 마음적 고통이 심했으며, 진왕자의 의문의 죽음이후 정신적 고통이 더 심해졌다.
1964년 영왕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하게되자 언론들과 사회에서 이방자여사에 대해 일본왕족이라는 이유로 시각이 좋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방자여사는 스스로 낙선재 근처에서 물건을 만들어 팔고, 일본과 한국에서 장애인을 위한 모금회를 여는 등의 활동을 하며, 정박아와 신체부자유자를 위한 명휘원, 자행회 등을 설립하였다. 그녀의 이러한 활동은 한국사회에 심신부자유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 1960년대 말 영왕의 건강이 악화되자 성심을 다하여 보살폈으며, 남편의 사망후에는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를 친형제처럼 돌봐주었다. 때때로 일본에 돌아가 이구씨를 다시 귀국시키려고 노력도 기울였다. 하지만 그녀는 1989년 4월 급박히 건강이 나빠져 덕혜옹주가 사망한 후 몇일 후인 4월 30일 낙선재에서 별세했다. 이방자 여사는 최근까지 궁궐에 기거한 마지막 왕실의 일원이었다. 1991년 까지 이방자여사의 3년상이 끝나자 결국 정부에 의해 왕실 최후의 모습이 담긴 창덕궁 낙선재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게 되었다.
3. 민갑완 [영왕의 약혼자]
주영공사를 지낸 민영표씨의 장녀로 11세때 영왕비로 간택되었으나 영왕이 방자랑 강제 결혼함으로 비운의 일생을 보냈다. 원래 왕실에 의해 파혼당하면 그 가문은 역적가문으로 취급되기 일수 였고 평생 재가가 금지 되었기 때문이다. 민갑완은 왕실의 체통을 위해 일본의 결혼 주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일본에 의한 강제 파혼 소식으로 아버지가 급사하고 집안이 파산했다. 결국 상해로 망명하여 고독과 고통의 세월을 보내다 1945년 해방후 귀국. 일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1967년 동래에서 곤궁 속에 생을 마쳤다.
4. 진왕자 (유아시기 사망)
영왕과 영왕비 방자 사이에 태어난 장남으로 유아시기에 사망했다. 조선방문시 사망하였으며, 검은 물체를 계속 토해낸 것으로 보아 독살일 것으로 추정된다.
5. 구왕자 [황세손 구]
현존하는 유일한 영왕의 자식이자 현재 조선왕실의 최고 직계 황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구는 영왕이 이왕직(조선국왕)에 책봉되었기 때문에 왕세자로 일컬어졌다. 사춘기에 불행한 부모의 운명과 혼혈왕자인 자신의 처지를 알고 충격을 받았으며, 결국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겠다고 17세에 미국으로 떠나 MIT 공과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다. 그러다가 미국여인 줄리아를 사랑하여 결혼하였다.
1963년 32세때 부모를 따라 조국에 왔고 한때 서울대 공대 및 연세대 공대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직계 황손으로써 의무를 강요하는 종친회와의 갈등과 \'신한공항\'등의 사업실패의 좌절, 단지 왕손이라는 이유로 이용하려는 주변의 시각들에 의해 1979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1982년에는 종친회의 강요 및 이구씨의 개인사정에 의해 줄리아랑 이혼하게 되었다. 그 후 일본여인 아리다랑 동거하면서, 도쿄에서 살면서 사업활동을 하였다. 84년 사기혐의로 고소, 89년 어머니 이방자 여사의 사망등의 파란을 겪기도 했다.
이방자여사가 타계한 뒤 수차례에 걸친 종친회의 귀국 종용을 거부하던 이씨는 환갑을 넘기면서 심경 변화를 보여, 귀국을 결심했고, 결국 96년 귀국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는 종친회장자리를 이구씨에게 기증하였고, 부영주택 이중근 회장이 마련해준 장충동 호텔 영빈관에서 생활하며, 왕실제사인 종묘대제등의 초헌관 참여, 종친회 사무를 보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6. 줄리아
이구의 전 아내. 미국에서 고생하는 동안 외로운 동양 청년 이구와 사랑으로 결혼. 실내장식가인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으나 외국인에다가 후손이 없다는 이유로 이혼하라는 종친회와 큰 갈등을 가졌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실내장식품을 만들어 시어머니였던 방자여사의 사업을 돕고 왕실의 일원으로 열심히 활동하였다. 시어머니였던 이방자여사는 줄리아에 대해 외국인만 아니었다면 최고의 왕실며느리 감이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종친회의 갈등 및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던 이구씨와의 관계악화에 의해 1982년 이혼했다.
줄리아숍을 운영하다 결국 생활고에 의해 1995년 하와이로 떠났다가 2000년 남편의 사진 450점을 돌려주기 위해 다시 한국에 방문하였는데, 그리운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한채, 줄리아가 왕세자비시절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시아버지 영왕의 묘소를 방문한후 왕실의 30여년간 삶을 회고하는 편지를 남겼다. 이런 사실이 언론에 보도 되면서 \"줄리아의 마지막 편지\"라는 특집방송이 방영되기도 하였다.
[4] 의왕의 가계도 : 의왕 1877 - 1955
= 의왕의 가족관계는 상당히 복잡하다. 약 20?여명이 넘는 자녀분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정식 왕실족보에는 의왕의 아들로 이건공과 이우공만이 올라와 있다.) 일부분만 소개하자면....
1. 의왕 이강
고종과 귀인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강. 일찍이 생모를 잃고 외로움 속에서 성장했다. 그러한 상황속에 아버지인 고종은 항상 미안해했고, 고종은 1900년 미국 유학을 보낸 후 같은해 8월 의왕에 봉해주었다. 1905년 적십자총재가 되었고, 1919년 항일 독립투사들과 접촉하여,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탈출하려다 실패하여 일제의 심한 감시를 받게 된다. 그후 여러차레 일본으로 부터 도일을 강요 받았으나 항일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해방후 6.25전쟁을 경험한뒤 사가인 사동궁에서 곤궁한 생활을 하다가 1955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망국의 한과 일제의 감시 속에서 술과 여자에 빠지게 되것으로 보이며, 울분과 욕구불만의 불행한 생을 살았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왕족 중 가장 똑똑하고 수려한 외모로 제왕의 기질또한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2. 이건
의왕의 장남으로 궁인 정씨의 소생이다. 1918년생. 11세에 일본에 볼모로 가서 일본왕족 딸과 강제결혼하였다. 해방후 이혼하고 일본인으로 귀화. 현재 재혼한 일본 부인과 일본에 살다가 현재는 별세했다.
3. 이우
의왕의 차남으로 궁인 김씨의 소생이다. 1911년생. 12세에 일본에 볼모로 가서 군인으로 복무중 1945년 8월 히로시마의 원폭으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비운의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진다. 똑똑하고 인물이 좋아 의왕의 사랑을 받았으며, 조선 말기 왕족중 거의 유일하게 오랜기간 일본의 강압결혼에 저항하여 결국 한국여성인 박찬주씨와 결혼하였고 청과 종이라는 자식을 두었다. 이종씨는 현재 사망했고 이청씨는 미국 시카고에 거주하고 있다.
4. 이수길
이우의 동생. 1918년생. 민주당 장면 내각때 문화재관리국장을 지내며, 영왕을 귀국 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칠궁에서 살다가 전두환 대통령 당시 청와대 경호실의 강제 축출 강요에 충격받고 1982년 65세로 별세. 부인 김신덕 여사는 칠궁에서 쫓겨나 서울 개포동의 19평 시영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딸인 이순씨는 인천 아들인 이한주씨는 일본에 살고 있다.
5. 이석
본명은 이해석으로 홍씨 소생. 1941년 생으로 관훈동 사동궁에서 의왕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잠시간의 행복한 생활이 있었지만 6.25전쟁으로 왕실은 재산의 대부분을 잃고, 그나마 남아있던 재산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국고로 환수당한 뒤 가족들은 심한 생활고를 겪어야 했다. 특히 1959년 아버지 의왕이 사망하자 그는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위해 종로 2가 음악다방에서 DJ일을 시작했고, 1962년부터는 미8군에서 한달에 3만원을 받으며 노래도 불렀다. 그러나 왕실어른들과 문중 어른들에게 노여움을 샀고 그는 경제력 무능력한 왕족의 신분에 대해 눈물로 왕실어른들께 호소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64년 사회각층의 인사와 만나는 TV프로그램\"굿이브닝쇼\"의 사회를 보게되자 결국 윤대비는 화를 풀었다고 전해진다. 가수 이석은 \'비둘기집\'\'두 마음\'\'외로운 조약돌\'등의 노래를 부르며, 한때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64년 여러 주변상황에 의해 그는 월남전에 참전했다. 제대후 암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 홍씨를 잃고, 어려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미국 한인회장인 김병묵박사의 도움으로 79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부의 길이 쉽게 열리지 않았고,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육체노동을 하는 등 고생을 하다가 87년 드디어 미국의 영주권을 얻었다.
그러나 89년 이방자여사의 장례 직후 다시 조국인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결의가 생겼고, 결국 귀국한후 잠시간 가수생활을 하기도 하면서, 흩어진 왕실을 다시 모우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 그가 만난 세 명의 부인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났고, 이석씨는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음반을 준비하면서, \'황실보존국민연합회\' 총재로써, 황실 문화 복원 작업 등의 활동을 하고 추진중이다.
6. 이해경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의왕과 김금덕여사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1950년대 몰락하는 왕가가 싫어 미국으로 도미했다. 1969년 컬럼비아대 동아시아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의왕 이강의 독립운동사실을 알아냈고, 의왕의 명예를 살리기 위해 복권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한국 방문때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라는 강연을 주체한 적도 있으며, 왕실의 유품등을 기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