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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원문보기 글쓴이: 박희정
시인 | 시조집 | 출판사 | 수록지면 |
윤금초 | 『주몽의 하늘』 | 문학수첩, 2004 | 2013년 여름호 |
이우걸 | 『나를 운반해온 시간의발자국이여』 | 천년의 시작, 2009 | 2013년 가을호 |
유재영 | 『절반의 고요』 | 동학사, 2009 | 2013년 겨울호 |
이승은 | 『환한 적막』 | 동학사, 2007 | 2014년 봄호 |
박기섭 |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 | 만인사, 2003 | 2014년 여름호 |
이지엽 | 『북으로 가는 길』 | 고요아침, 2006 | 2014년 가을호 |
정수자 | 『허공우물』 | 천년의 시작, 2009 | 2014년 겨울호 |
고정국 | 『서울은 가짜다』 | 리토피아, 2003 | 2015년 봄호 |
박권숙 | 『홀씨들의 먼길』 | 고요아침, 2005 | 2015년 여름호 |
이종문 | 『봄날도 환한 봄날』 | 만인사, 2005 | 2015년 가을호 |
☐ 설문참여 시인 (등단 순)
정용국, 박희정, 유종인, 선안영, 손영희, 이송희, 이승현, 정혜숙, 이원식, 조성문, 김동인, 김남규, 김보람, 임채성, 박성민, 배우식, 변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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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래시조》 특집 : 2000년대 출간 대표시조집 ③
유재영 『절반의 고요』
무릉도원(武陵桃園)을 꿈꾸는 지상(地上)에서의 비애
정용국 시인
시는 함축되어 드러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희미한 글,
숨은 말로서 명백하고 통쾌하지 않은 것은 또한 시의 큰 병통이다.
- 서거정 『東人詩話』 중에서 -
1.
선인들이 꿈꾸었다는 무릉도원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가상의 선경으로 중국 후난성의 한 어부가 발견하였다는 복숭아꽃이 만발한 낙원을 말한다. 별천지나 이상향을 비유하는 말로 흔히 쓰이지만 사실은 난세를 벗어나 정신의 자유를 추구하려는 동양 지식인들의 안식처였다.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조선 최고 태평성대의 주인공이었다. 고귀한 혈통과 막대한 부를 지녔을 뿐 아니라 학문과 예술에 두루 뛰어난 선지식이었으며 시·서·화에도 능한 최고의 예술품 수집가였다. 성격도 호방하고 높은 인품을 지녀 주변에는 그와 교유하려는 인사들로 넘쳐났다. 안평대군은 어느 날 무릉도원을 찾아가는 꿈을 꾸게 되었고 중세 지식인이었던 그는 도원에 대한 꿈을 통해 자신의 천성을 자각하며 현실의 부귀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이상을 추구하고 싶은 본능에 휩싸인다.
안평은 당대 최고 산수화가인 안견에게 자신의 꿈을 소개하였고 그에게 명하여 그리게 한 것이 ‘몽유도원도’이다. 그림이 완성되자 최상의 명사들을 초대해 그림에 대한 찬문을 짓게 하였는데 ‘몽유도원도’는 조선 전기 문화 성숙미의 표본이며 지식인들의 이상과 예술가의 열정이 총화를 이루어 낸 최고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병약한 문종이 젊은 나이에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정치를 떠나 은거하려던 대군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안평의 연년생 형이었던 수양대군이 왕위 찬탈의 야욕을 드러내자 적장자 계승의 뜻을 굽히지 않고 회유를 거부한 안평은 결국 대역죄를 뒤집어쓰고 강화의 교동도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 후 안평의 삶과 사상에 대한 재평가나 복원의 노력은 거의 없었다. 다행히 ‘몽유도원도’는 1893년 일본에서 발견되었지만 일본으로 유입된 경로가 분명하지 않아 환수를 주장할 만한 근거도 마련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반의 고요』 서평을 궁리하던 중 필자는 중원대 김경임 교수의 근작인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를 만나게 되면서 한 편의 소설 같은 이야기를 지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안평의 속절없이 짧은 인생이 마치 유재영이 그려 낸 짧고 단촐하기 그지없는 그의 시조 속에 그려진 ‘지상에서의 비애’와 너무나도 흡사하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접미사가 아름다운 누구의 운문”과도 같은 이 버거운 세파를 건너며 모든 목숨들이 느끼는 거대하고도 소슬한 삶의 궤적은 무릉도원을 꿈꾸는 자들이 만나야하는 이율배반임이 틀림없다. 여기 유재영이 펼쳐 놓은 일당백의 서른 편 시조는 극명하고 슬픈 상처들을 도닥이는 아름다운 기억이다. 또한 시제를 도드라지게 함에 있어서 서두르거나 앞서지 않고 늘 에둘러 다가가서 감싸 안는 선생의 고즈넉한 시품은 서거정(徐居正) 선생이 『東人詩話』에서 걱정한 시의 본질과 맥을 관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마음에 담으면서 서평을 시작하려 한다.
2.
올 가을에는 정말 많은 시조집이 찾아왔다. 먼 길을 마다않고 당도한 스무 권이 넘는 시집들을 살펴보며 과연 시조 부흥기가 찾아오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름의 뙤약볕을 이겨내며 영근 열매들은 나름대로 색깔과 향과 육즙을 내보이며 내게 다가왔다. 대개 60 여 편이 실리게 되는 작품집에서 약 10% 정도의 명편만 자리해도 좋은 시집이라 할 수 있다. 그 나머지 작품들은 몇 단계의 높낮이에 따라 구분되고 그 격차가 심할수록 시집의 역량이 일정 수준에 못 미치는 것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일반적인 실태를 감안해 볼 때 유재영 시인의 과작에 대해 쉽게 토를 달아 낼 시인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절반의 고요』에는 단 30 편의 시조가 실려 있다. 60여 편 이상이 게재되는 여타 작품집의 절반 수준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 하나하나에는 수많은 밑줄을 그을 수 있는 메타포와 절차탁마를 거쳐 정제되고 수없이 음보의 완급을 조절하여 둔 안정된 구절들이 가지런하고 절도(節度)있는 모습으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한 각 편에는 음전하면서도 고즈넉해서 외려 아슴하게 가슴을 저며 오는 이 시대의 마지막 고향 같은 분위기와 맛깔 나는 언어들로 가득하다. 시의 본질이 슬픔의 발현에서 출발한다는 고전적 의미에 충실하게 서른 편의 시들은 각자 슬픔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마치 안평대군이 지상에서 무릉도원의 이상을 갈망하였듯이 비록 세사는 거칠고 매몰차지만 시인이 정답게 내민 손길은 마냥 따스하고 자애롭다.
언제나 경상 위엔 포롬한 붕어연적
아버지 두고 가신 지상에서 80년이
오늘은 눈보라 속에 세한도를 그립니다
굽힘 없는 해서체 필사본 논어 한 질
봄날에 쓴 글자에는 되감기는 아지랑이
가을에 쓴 글자에는 구절초빛 시간이
매화꽃 지는 밤엔 누가 와서 듣고 가나
장지문 환히 밝힌 촛불 같은 마음으로
고요도 먹물이 묻는 학이편 읽는 소리
아버지······! 부르면 오오냐 대답할 듯
마지막 가시던 날 진솔옷 그 한 벌이
무덤가 초롱꽃 되어 손자 절을 받습니다
- 「아버지 시학」 전문 -
30편의 시가 전부인 이 시집에는 단수가 16편으로 반이 넘으며 네 수의 연시조는 두 편 뿐이다. 위 작품은 소수정예를 추구하는 유재영의 작품 중 다른 네 수 짜리인 「이 돌 쉬어 가소서」가 조운선생 시비 건립 축시의 성격을 띤 것임을 감안한다면 아마 유일하게 네 수의 긴 호흡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작품 속에는 아버지 80년 성상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먼저 “경상, 포롬한, 장지문, 진솔옷” 등 우리 부모님들이 늘상 쓰던 어휘들이지만 이제 쉽게 쓰지 않아 낯설어진 시어들이 우리의 귀와 눈을 안쓰럽게 하고 있다. 물론 말과 글은 세월의 부침에 따라 생성되고 소멸하는 운명을 갖고 있지만 귀에 익었던 말들을 오랜만에 눈으로 보며 느끼는 심사에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물처럼 번지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어휘들은 문명의 발달로 말미암아 물건이나 행위가 사라져서 호명할 수 없게 된 말도 있지만 사투리나 구어체의 어휘가 소멸되어가는 과정에 놓인 것들도 있게 마련이다.
지금은 가뭇하게 사라진 시어들을 따라 행간을 걷다보면 그 시절 엄격하였지만 심저에 꿋꿋하게 부정이 깔린 아들과 아버지의 뒷모습이 독자의 옷깃을 잡아끌며 걸음을 주춤거리게 만든다. 많은 것들이 부족하여 오히려 고귀한 경외의 대상이 되었던 사물들도 더욱 따듯하게 눈에 다가온다. ‘경상’이나 ‘연적’, ‘논어 한 질’, ‘진솔옷’은 귀하디귀한 물건들이었다. 물질의 결핍은 인간에게 불편을 주지만 그 물건의 귀함과 고마움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절제된 시어들이 뿜어내는 감각적 분위기가 사물에 대한 깊이를 더해가고 그림을 보듯 손에 잡히는 아버지의 발자취와 말씀에 왈칵 눈물이 솟구치는 격한 감정에 이르게 된다. 언제나 꼿꼿한 자세로 경상 앞에 앉아 논어를 읽으시고 ‘붕어연적’에 먹을 갈아 ‘굽힘 없는 해서체’로 논어를 필사하시던 모습과 ‘진솔옷’ 입으신 단정한 모습은 아직도 눈에 삼삼하리라. 그러나 어른이 되어 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아들의 심정은 ‘눈보라 속에 세한도를 그리’는 다급하고도 벅찬 길 위에 놓여 있다. 아버지와 함께한 옛날은 ‘무릉도원’이었을지도 모르고 거센 세파에 흔들리며 세한을 뚫고 나가야 하는 아들은 현실의 팍팍함을 새삼 실감하는 어른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눈보라 속에 세한도를 그립니다” “봄날에 쓴 글자에는 되감기는 아지랑이” “고요도 먹물이 묻는” 등의 정갈하고도 뛰어난 비유들은 아련한 부자의 정한을 더없이 아름답고 격조 있는 그림으로 상승시키는 윤활제의 역할을 감당해 내고 있다. ‘아빠’라고 부르고 ‘응’이라고 답하는 경쾌하고 가벼운 호칭이 통용되는 시대에 다시 들어보는 “아버지······!”라는 애절함과 “오오냐”라는 푸근함은 결연(結緣)한 두 사람 사이를 결연(決然)하게 만들어준다. 이 두 마디의 절창은 결국 장쾌한 감정을 폭발시키며 진정 그리운 이들이 재회하는 후련한 절정을 맞게 하고 있는데 이야말로 얼마 만에 들어보는 정겨운 선문답들인가.
3.
중년의 나이 앞에 툭! 하고 떨어지는
신갈나무 열매 하나 가만히 주워본다
화두란 바로 이런 것 쓸쓸한 화답 같은,
마른 꽃 흔들다가 혼자 가는 바람처럼
등 뒤로 들리는 가랑잎 밟는 소리
가벼운 이승의 한때, 문득 느낀 허기여
- 「쓸쓸한 화답」 전문 -
화답(和答)이란 말은 상대의 건의나 행위, 물음 따위에 맞추어 그에 어울리게 대응하는 대답한다는 뜻을 지니면서 그 속에 긍정의 의미를 함북 담고 있는 어휘이다. 그러나 그 앞에 “쓸쓸한”이라는 수식어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화답”이라는 의미는 더욱 애처롭고 부정의 의미를 함축하게 된다. 그러나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에서의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와도 같이 “쓸쓸함”과 “화답” 또한 일맥상통하는 광의의 개념 아래 오붓하게 조화를 이루는 시어가 되어 “허기” 조차 ‘한없이 두둑한 배짱’으로 맞닿아 있다.
“중년의 나이 앞에”라는 초장의 첫 음보가 시의 모든 것을 다 암시하며 시를 밀어간다. ‘중년’은 어떤 나이일까. 평균수명이 연장된 현실을 고려하면 40대 이후 즉 인생 중간을 말할 수도 있겠으나(中年) 그 이후 나이를 많이 먹은 重年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인생의 내리막길에 해당하는 것은 틀림없다. 돌아가기엔 지나치게 멀리 왔고 나아가기엔 벅찬 삶의 무게가 실감되는 나이가 중년일 것이다. 그 복잡한 나이 발치 앞에 살며시 다가와도 놀랄 화두가 아무 예고도 없이 “툭! 하고 떨어지는” 장면은 난감 그 자체가 아닐까. 비록 그 장면은 “신갈나무 열매”로 환치되어 그려지지만 무겁기 그지없다. 여기까지를 단수로 그냥 두어도 시는 절창으로 맺게 되지만 그것은 너무 까칠한 모양새다. 한껏 부풀려 놓은 중년의 어깨가 너무 안쓰러웠던 모양인지 시인은 “쓸쓸한 화답”에 옷을 입힌다. 마치 ‘아버지······!’ 하고 부르면 ‘오오냐’ 대답해 주시던 바로 그 아버지가 ‘애비야! 일어나거라 그래도 힘을 내야지. 삶이란 다 그런 거란다’ 다정히 일러주시며 어깨를 감싸 안아주시는 모습으로 둘째 수가 이어진다.
“마른 꽃 흔들다가 혼자 가는 바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등 뒤로 들리는 가랑잎 밟는 소리”처럼 가볍게 받아들이라고 타이른다. 그렇게 무겁고 답답했던 ‘중년’을 “가벼운 이승의 한 때”로 돌려놓은 시인의 암시는 색즉시공의 광의를 은연 중에 표현하고 있다. 둘째 수가 담담하게 문을 닫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며 한 마디를 던지는 모습은 이 시조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위 작품에서는 “문득 느낀 허기여”라는 종장의 마지막 음보가 시조의 핵심인 앞의 3,5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특히 주어 “허기”보다 그것을 수식하는 “문득”이라는 부사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허기에 늘 시달리며 살지 말고 어쩌다 갑자기 한 번 쯤만 가볍게 느끼며 살라고 ‘문득’이라는 부사를 앞에 놓아두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재미있다. 첫 수에서 던진 중압감을 “가벼운 이승의 한때”로 해갈시킨 뒤 다시 ‘허기’라는 단어로 압박하며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문득’이라는 부사로 긴장감을 일시에 해소하게 하고 있으니 이는 짧은 시조 종장 안에 장치된 놀라운 ‘복선伏線)이다.
4.
시집에 놓인 서른 편의 작품은 서른 채의 작고 아스라한 비애를 걸머진 오두막집이다. 슬프지만 그 슬픔 안에 깨알 같은 기쁨이 고물거리고 있는데 그것은 비유 안에 내재하는 감정의 폭들이 담고 있는 빛나는 언어의 유희가 빚어내는 불꽃놀이와도 같다.
지우고 고쳐 쓰다 확 불 지른 종장같이 - 「홍시를 두고」
맨발로 눈썹달이 아장아장 걸어 나와 - 「계룡산 귀얄무늬분청사기」
다가가 만지고 싶던 손목 하얀 그 가을 - 「오래된 가을」
선운사 툇마루 녹찻빛 한나절은 - 「옷 벗고 마중 나온」
흰 이마가 젖도록 푸른 밤은 - 「별을 보며」
따라 놓은 찻잔 위에 손님같이 담긴 구름 - 「가을 은유」
초롓날 목안처럼/ 싱그런 눈을 뜨고 - 「윤삼월」
위 예문과 같은 비유들은 넌지시 뒷짐을 진 채 먼 곳을 보며 능청을 떨고 있는 시제의 옆구리를 슬슬 간질이며 살금살금 주제에 다가간다. 제목을 가려 놓고 시를 읽을라치면 얼핏 시가 하는 말을 몰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만 보고 있다가 앙큼을 떨며 단숨에 허를 찌르며 눙치는 선생의 진검에 급소를 겁박당하고 마는 벅찬 장면들을 연출해내고 있다. 이러한 메타포들이 살갑게 감겨드는 이유는 먼저 싱그런 시어에서 출발한다. 때로는 오래된 말 같고 시인의 연치가 느껴지는 한문 투도 보이지만 그것은 오히려 과거를 불러들이거나 시의 분위기를 감칠맛 나게 하는데 아주 적격인 어휘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또한 그 이미지들은 선명한 공감각(共感覺)이 유기적으로 교감하며 주어를 떠받들고 있다. 즉 시각이나 촉각이 하나의 주어에 동시에 감응하며 시제에 다가서는 보법은 오랜 내공으로 쌓은 것이리라.
위에 밑줄을 그어 본 주어들은 적어도 두 가지 감각들의 호위를 받으며 투명하고 유려하게 이미지를 발산하게 되는데 이들은 다시 시제를 협시(挾侍)하고 있다. 마치 그것들은 천을 짜기 위해 씨줄과 날줄이 서로 성실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다가 종내에는 질기면서도 화사한 무늬를 이루어 내는 피륙과도 같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기법이 총동원 되고 유재영 선생 인생과 고뇌의 무게까지 담겨 묵직한 완결편 하나를 마지막으로 살펴보며 글을 맺기로 한다.
언제였나 간이역 앞 삐걱대는 목조 2층
찻잔에 잠긴 침묵 들었다 다시 놓고
조용히 바라본 창밖 속절없이 흔들리던
멀리서 바라보면 는개 속 등불 같은
청음도 탁음도 아닌 수더분한 목소리로
해질녘 삭은 바람결 불러 앉힌 보랏빛
누구 삶이 저리 모가 나지 않았던가
자름한 고, 어깨를 툭 치면 울먹일 듯
오디새 울다간 자리 등 돌리고 피는 꽃
- 「오동꽃」 전문 -
누구나 자신의 시집 첫 자리에 어떤 작품을 올릴 것인지 고민하게 되어 있다. 유재영 시인이 이 작품을 앞자리에 올려놓은 이유는 자신의 마음 한 구석에 늘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반짝이며 빛나서 오똑하게 서 있는 다른 작품보다 삶의 깊이와 고뇌가 서려있고 다소곳하게 혹은 유행이 지나 약간 색이 바랜, 그래서 마음이 조금 더 가는 골동품 같은 우수가 자욱하게 깔려있는 작품이다. 세 수임에도 불구하고 행을 벌려놓고 다시 둘째와 셋째 수 사이를 한 줄 더 벌려 둔 데는 그만큼 천천히 뒤돌아보며 곱씹으며 행간을 들여다보라는 작가의 신호로 보여 진다.
주어가 생략된 첫 수는 먼저 시의 분위기를 잡으려고 여러 도구들을 내민다. 다소 신파조로 문을 여는 “언제였나”에서는 벌써 시인의 경륜이 묻어나 안정감을 주는 척하지만 바로 반전한다. 마치 몇 년 전까지 빌딩 숲에서도 의연하게 자리를 지켰던 경의선 신촌역 같은 분위기가 확 번지며 불안한 심사가 곳곳에 드러난다. “삐걱대는 목조2층”은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꾹 눌러 앉아 그 외양만으로 많은 말을 하고 있다. “찻잔에 잠긴 침묵”도 목조2층만큼이나 “속절없이 흔들리던” 주인공(오동꽃)의 마음을 조용히 거들고 있다. 꽃을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 갈피가 그대로 시에 투사되어 조용히 바람에 흔들리는 꽃이 마치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불안감과 조바심으로 휩싸여 있다. 둘째 수에서는 “등불” “목소리” “바람결”이 유려한 비유의 도움으로 세 기둥을 굳건하게 세우며 “보랏빛”을 향하고 있는데 이 세 기둥은 다시 그들이 데리고 온 수식어들의 이미지를 흔쾌하게 “보랏빛”에게 주고 있다. 결국 오동꽃의 “보랏빛”은 세 기둥과 그들의 수식어가 층층이 물고 물리며 질박하고도 튼튼하게 내밀한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모습이다.
셋째 수에 와서야 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첫째 수와 같은 분위기의 회고조로 “누구 삶이 저리 모가 나지 않았던가” 하며 슬쩍 앞의 두 수를 위로하며 툭 치며 울먹일 듯한 자름한 고 어깨를 감싸준다. 모가 나서 “삐걱대고” “속절없이 흔들리던” “는개 속 등불 같은” 연약한 인생들을 다 불러 모아 “청음도 탁음도 아닌 수더분한 목소리로” 가만가만 타이른다. 마지막 종장의 “오디새”는 그 이름만으로도 상큼하고 생경한 이미지를 던진다. 사실은 열대지방에 서식하는 부리가 길고 볏이 부채 같으며 화려한 색을 가진 새인데 히브리어로 새의 울음소리를 적었다는 설이 있다. 사전적 의미를 떠나 이름 자체가 시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다고 하겠다. 뽕나무의 열매인 ‘오디’를 연상시킬 뿐 아니라 아랍의 신화와 성경에도 등장하는 오디새라니 그 이름을 오동꽃 가지 위에 올린 것은 다분히 시인의 상상력이다.
수가 각자 시제의 이미지를 담아내기 위해 각개약진하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흘리듯 “언제였나”로 시작하여 “누구 삶이 저리 모가 나지 않았던가”로 이어지다가 이미지가 점점 상승하며 아래를 추스르는 모습은 피라미드의 구조를 연상할 수도 있다. 마지막에는 그 정점에서 인생을 위무하면서 ‘오동꽃’을 나부시 받들어 올리는 이 작품은 충분히 시집의 제일 앞에 와도 좋은 시였다.
5.
시보다 장경렬 교수의 해설이 더 긴 쪽을 차지한 시집 『오동꽃』이 2000년대 등단한 젊은 시인들의 큰 관심을 끈 데는 여일한 시의 서정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시의 본질이 정서와 사상이라는 주지의 논리를 더 말할 것도 없이 서정은 시의 가장 큰 기둥이다. 서른 편으로 정점을 그리려 했던 이 시대의 서정은 나머지 절반인 사상의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아름다운 메타포 뒤에 숨겨진 생의 절규와 아픔들은 유재영이 고육을 떼어내며 흘린 처절한 흔적과 한 몸이다. 안평대군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도원의 꿈도 그러하리라. 비록 우리가 지상에 두 발로 서 있지만 도원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시의 꿈과도 같기 때문이다.
정용국
경기 양주 생. 서울예대 문창과, 경기대 국문과 졸업. 2001년 시조세계로 등단. 제1 회 이호우시조문학상 신인상 등 수상. 시집 『명왕성은 있다』외.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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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의 시편들
-유재영 시조집 『절반의 고요』에 부쳐
이재무 시인
솔직하게 고백하기로 하자. 필자는 시조에 문외한이다. 그런 이유로 청탁을 받았을 때 완곡하게 거절하였으나, 선생과의 남다른 친분 때문에 거듭 요구하는 청을 결국 수납하고야 말았다(선생과 나는 고향 선후배인데다 한때 같은 직장에서 한 솥밥을 먹은 적이 있다). 따라서 독자 제위는 본격적인 해설이나 서평이랄 수 없는, 시조집에 대한 일종의 감상 에세이 정도로 이 글을 읽어주었으면 한다.
선생은 다들 아시다시피 양수겸장의 시인이시다. 즉 시조와 현대시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양 장르에서 일가를 이루신 분이시다. 사실 이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시단에는 시와 시조를 겸하는 시인들이 적지 않지만 선생처럼 두 분야에서 눈부신 성취를 이룬 분은 흔치 않다.
선생의 시편들은 간결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시편마다 일정한 성취를 이루고 있다. 선생은 장인 정신에 투철한 시인이다. 이것은 시조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현대시에도 마찬가지이다. 선생의 성정과 선생의 시편들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닳은 데가 많다. 시와 시인의 성정이 꼭 닮으란 법은 없다. 시인들 중에는 시와 삶이 일치 되는 경우보다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흔하다. 나는 선생의 이 점을 높이 평가한다. 언어의 군살을 일체 배제한 그의 시편들을 대하자면 누항의 들뜬 마음이 절로 정제되는 듯하다. 요설과 장광설의 산문 시대에 아직도 시의 올곧은 본분과 미덕을 지켜오고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 절제된 언어 형식 속에 세모시로 짠 옷감처럼 가늘고도 촘촘하게 언어의 바느질로 누벼 솔기 자국도 보이지 않게 시의 옷을 지어낸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그 짧은, 단아한 양식 속에 다채롭고도 섬세한 감성을 풀어놓고 있다. 가히 천의무봉의 솜씨다. 선생의 시편들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특유의, 그 간결한 언어 형식 속에 어떻게, 부드러움과 천진과 여유를 가장한 날카로운 감성과 반짝이는 성찰을 밑그림으로 깔아 놀 수 있는 것인지 읽을 때마다 거듭 눈을 놀래 키우고 있다.
시편들이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고유의 특성을 감안하여 우리는 선생의 시를 읽을 때 오래 우려낸 찻물을 들이키듯 천천히 시의 아우라에 젖어들면서 그 뜻을 새겨야 한다. 서두르는 독법으로는 시편 안쪽에 배어 있는 깊은 뜻을 놓칠 수밖에 없다.
선생의 시편들은 대개가 의인관적 세계관에 기초해 있다. 그렇다는 것은 시적 주체가 사물과 세계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분석,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하나가 된 상태에서 공감과 교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의인관적 세계관의 기원은 애니미즘에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사물에 영혼이 들어있다는 애니미즘과 의인관적 세계관 사이에는 통섭하고 상통하는 면이 적지 않다고 사료되기 때문이다. 또한 선생의 시편들에는 우주적 통찰이 들어있으며 동양적 시간관이 들어있기도 하다. 즉 천체 우주와 인간 지상을 둥글게 연결하는 원의 상상력 그리고 영원을 뜻하는 하늘의 시간과 지상 존재들의 한시적 시간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그에게 영원과 찰나는 분리된 이원적 별개의 개념이 아니다. 덧붙여 선생의 시편들에는 언어 표현 면에서 관념을 감각으로 전이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이상의 열거한 내용들은 사물과 사물 간 혹은 인간과 사물 간의 교감이라는 정서의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는 요소들로써 서로 간 겹치기도 하고 시 세계 안에서 개별적 위상으로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한다.
언제였나 간이역 앞 삐걱대는 목조 2층
찻잔에 잠긴 침묵 들었다 다시 놓고
조용히 바라본 창밖 속절없이 흔들리던
멀리서 바라보면 는개 속 등불 같은
청음도 탁음도 아닌 수더분한 목소리로
해질녘 삭은 바람결 불러 앉힌 보랏빛
누구 삶이 저리 모가 나지 않았던가
자름한 고, 어깨 툭 치면 울먹일 듯
오디새 울다간 가지 등 돌리고 피는 꽃
-「오동꽃」 전문
선생의 시편들에 등장하는 시적 소재들을 일별하면 하나같이 외곽의 주변적인 것들이 많다. 결코 중앙에서 화려하게 주목받는 대상들이 아니다. 외진 곳에 숨어있는 작고 여린 것들에게 감성의 숨결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이 사물을 통해 존재론적 성찰을 하고 있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이 시의 화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시적 공간은 어느 간이역, 그것도 삐걱대는 목조 2층 찻집이다. 시의 분위기가 적조하기 이를 데 없다. 시의 화자는 찻잔에 잠긴 침묵을 마시며 창밖 는개 속 등불 같은 오동 꽃을 바라보고 있다. 그 꽃에는 삭은 바람이 머물고 있다. 바람조차 삭은 바람이다. 거기에 움직이지 않고 꽃에 앉아 쉬고 있고, 청음도 탁음도 아닌 수더분한 목소리의 주인공인 오동 꽃이 불러들인 바람이다. 그렇다면 이 목소리의 주체는 누구일까? 나는 그를 시인으로 읽는다. 시인은 오동 꽃을 자신의 분신 혹은 초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동일시의 시학이 구현되고 있는 셈이다. 누구나 살다보면 모가 나지 않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시인은 오동 꽃을 일별하며 자신의 지난날을 반추해본다. 어느 생의 굽이에서 오디새처럼 생의 가지에 앉아있다 떠난 사람이 시적 화자의 눈에 밟혀오기도 하는 해질녘의 쓸쓸한 평화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위 시편은 오동 꽃과의 교감이 이룬 미의 승리를 보여준다. 동일시의 시학이란 교감의 시학에 다름 아니다. 시적 화자와 시적 대상과의 교감이 전경화 되어 한 폭의 그림으로 선명하게 그려진 시편을 통해 우리는, 정신없이 허겁지겁 살아온 굴곡의 지난날을 조용히 떠올려 성찰하는 계기를 가질 수 있다.
자벌레가
기어가면
한 오 분쯤
걸릴까
별과 별
사이에도
등이 파란
길이 있다
조그만
소년 하나가
말끄러미
쳐다보는,
-「윤동주」전문
별과 별 사이에도 등이 파란 길이 있다는 것은 우주적 상상력이 소산이다. 이때의 길이 물리적 차원의 길이 아님은 물론이다. 즉 그것은 심리적 차원의 길이자 상상력이 빚어낸 길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별과 별 사이에 이어진 파란 길을 자벌레의 속도로 걸어가면 오 분 쯤 걸린다고 진술한 대목이다. 이것은 그만큼 별과 별 사이의 거리가 가깝게 느껴진다는 시적 표현이리라.
시인 윤동주는 별과 같은 심성으로 별을 노래하다가 비극적으로 운명을 달리한 시인이다. 시적 화자는 어느 날 하늘의 별을 우러러보다가 문득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다간 식민지 시대의 소년 윤동주를 떠 올렸을 것이다. 그리고는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가 자신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별을 옛날 동경 시절의 나라 잃은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소년 윤동주도 고국을 그리워하며 바라보았을 것이라고 추측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짐작건대는 자신도 윤동주와 같은 순결한 감성과 시심으로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자는 상념과 의지에 젖었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무화되는 순간이다. 옛날과 현재가 아무런 장애 없이 순간적으로 넘나들고 있다. 또한 시적 화자의 거리 개념에서는 별과 별 사이의 거리가 자벌레의 속도로 오 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다는 것은 시적 화자의 시 공간에 대한 인식과 사유가 서구적 근대 개념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동양의 일원론적 시 공간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지하다시피 서양 근대의 경우는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직선론적 시간관인데 반해 동양에서는 일정하게 원을 그리며 순환 반복된다는 순환론적을 시간관에 기초해 세계와 사물을 이해하고 인식한다. 또한 하이젠베르크 이후 신과학에서는 동양의 지혜와 사유를 빌려 시간의 총체나 질이 공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상대적 시간관을 펼치고 있는데 위 시편에서 우리는 후자의 시간관을 느낄 수 있다. 좀 구체적으로 말해 상대적 시간관이란 어떤 공간에 시간의 주체가 위치하느냐에 따라 길이, 질, 양 등이 달라질 수 있다는 개념인데 이를테면 한 학생이 강의실에서 지겹게 보내는 한 시간과 호프집에서 사랑에 빠진 연인과 보내는 한 시간은 길이와 질에 있어서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대적 시간관에 입각하여 위 시를 누릴 수 있다. 요컨대 시적 화자에게 있어 일제의 과거와 시적 화자가 위치한 현재라는 시간의 경계가 아무런 장벽 없이 쉽게 무화되고 별과 별 사이의 거리가 물리적 차원이 아닌 심리적 차원에서 사유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공간에 위치해 있든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진행한다는 절대적 시간관을 따르지 않고 달라지는 공간에 따라 얼마든지 시간도 다르게 구성되고 인식될 수 있다는 상대적 시간관에 기초해 세계와 사물을 인식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옷 벗고 마중 나온 산그늘이 좋아서
선운사 툇마루 녹찻빛 한나절은
난보다 푸른 고요가 가부좌로 앉는다
-「옷 벗고 마중 나온」전문
위 시편에서 행위의 주체는 인간이나 사물이 아니고 관념이다. 즉 ‘푸른 고요’가 행위의 주체인 것이다. 산그늘이 옷을 벗고 마중 나온 것으로 보아 오후 늦은 시간 쯤 되리라. 여기에서에서도 시인 특유의 의인관적 세계관이 나와 있다. 선운사 툇마루가 녹차 빛인 것은 그늘 때문이다. 한나절 그 그늘에 몸을 담근 고요가 가부좌로 앉아있다. 그렇다면 푸른 고요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때의 푸른 고요는 시인 자신을 뜻한다. 풀이하면 이렇다. 시인 자신이 산그늘 속에서 푸른 고요의 경지에 든 것을 이 같은 시 구절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선생의 시편 속에는 이처럼 관념을 의인화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 때 관념은 순수하게 관념 그 자체만을 뜻하지 않고 이면적으로는 시인 자신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이 밖에도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내용으로 선생의 시편 속에 들어 있는 섬세한 감각 작용이다. 광학 현미경처럼 화자의 눈은 사물을 정밀,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미세한 감각의 떨림을 보여준다.
개미취 피고 지는 절로 굽은 길을 가다
밑둥 굵은 나무 아래 멈추어 기대서면
지는 잎, 쌓이는 소리 작은 귀가 간지럽다
-「가을 은유」일부
새로 바른 한지창에 기러기 머언 그림자가 무단으로 날아들고 있는 것을 바라볼 정도로 시력 좋은 시적 화자는 밑둥 굵은 나무 아래에서 지는 잎 쌓이는 소리까지 듣고 있다. 이처럼 시적 화자의 온몸의 감각은 자연과 우주로 향해 열려 있다. 즉 시적 화자는 언제든 우주 안에 편재하는 사물들과 감각으로 교감, 교신하고 소통할 수 있는 성능 좋은 감각 기관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선생의 시편들은 자연 사물에 대한 의인관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물과 세계에 대해 상호 소통하고 교감하는 시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 시적 표현들은 세모시처럼 섬세하면서도 촘촘하다. 또한 동양적 시간관과 사유로 대상과 세계를 인식하고 있으며 사물에 대한 주도면밀한 관찰력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에 있어 저울추처럼 예민한 떨림을 보여주고 있다.
선생의 시편들은 장광설과 요설이 난무하는 시대에 있어 자연주의 작가 플로베르가 주창한 ‘일물일어설’처럼 대체 불가능한 최상급 언어를 선택하여 적재적소에 배열함으로써 시가 본래 지켜야할 위의와 품격을 잃지 않고 있다. 그의 시편들에서는 오래 우린 찻물처럼 그윽한 향기가 오랫동안 은근히 풍겨 나온다. 나는 이들 시편들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아 손색이 없다고 감히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하고 싶다. 선생의 시여, 무궁하시라!
이재무
1958년 충남 부여 출생, 1983년 『삶의문학』으로 등단. 시집 『섣달그믐』『온다던 사람 오지않고』『벌초』『몸에 피는 꽃』『시간의 그물』『위대한 식사』『푸른 고집』『경쾌한 유랑』 난고문학상 등 수상
첫댓글 카페에 시조부흥을 일으켜주신 열정과 각고 늘 감사합니다
더욱 건승하시고 문운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