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 서풍(書風)의 글 임서(臨書)한 것임
추사(秋史)의 서풍(書風)을 임서(臨書)한 글.
추사 김정희의 대련 (對聯) 글
春風大雅能容物 춘풍대아능용물
秋水文章不染塵 추수문장불염진
봄바람은 크고 부드러워 능히 만물을 담아 포용하고
가을의 차고 맑은 물과 같은 선비의 문장은 속세의 먼지에 물들지 않는다.
추사(秋史)의 대련(對聯), 춘풍대아 春風大雅「춘풍대아」는 추사의 만년 명작이다.
春風大雅能容物 (춘풍대아능용물)
춘풍은 봄바람이고 대아는 크고 우아하다는 것인데, 그게 왜 갑자기 튀어나올까?
그것을 알려면 공자가 편찬한 시경을 알아야 한다.
시경은 공자가 자신의 시대에까지 전해지는 각지의 노래를 모은 것으로 305편에
이르는데, 우리가 아는 대로 풍(風, 國風이라고도 함. 여러 나라의 노래),
아(雅 궁중에서 부르는 노래) 송(頌 제사 지내는 노래)으로 나눠진다.
열다섯 나라의 광활한 풍토 위에서 펼쳐진 국풍(國風)은 인생의 각종 애환이 모두
담겨 있어서 누구에게나 가슴이 뭉클한 감동으로 자기의 처지와 심경을 호소하고 있다.
아(雅)는 다시 소아(小雅)와 대아(大雅)와 나눠지는 바, 소아는 연회, 곧 잔치에 쓰이는
것이고, 대아는 조회 등 공식 의례용인데, 이들을 단순히 노래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소아(小雅)는 철저한 합리주의와 중용(中庸)사상과 대동(大同)정신으로 천하문명을
건설하는 아름다운 의례와 제도와 문장을 모아놓은 것이고.
대아(大雅)는 정치지도자가 천명(天命)을 받들고 민심을 따르는 도덕적 지도력으로
전체 인간들의 안녕과 행복을 보장하는 덕치인정(德治仁政)의 도량을 묘사하고 있다.
공자가 시경을 편찬한 것은 단순히 그 때까지의 노래를 모아놓자는 것이 아니라
음악과 노랫말 속에서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마음을 배우게 하자는 원대한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아는 단순히 크고 우아하다는 뜻 만이 아니라 시경 대아편에서 이야기하는
정치를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춘풍대아는 큰 정치란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설명하는 말로서, 큰 정치는 곧 춘풍,
곧 봄바람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봄바람처럼 한없이 부드럽고 포근하고, 그러면서도
우아하고 격조 높고 올바른 그런 정치는 그 속에 능히 모든 것들을 녹이고 담을 수
있으므로 세상을 구원하는 큰 정치가 될 수 있다, 정치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그 다음 문장은 秋水文章不染塵 (추수문장불염진)이다.
秋水란 말은 가을의 물이니, 차가운 물, 맑은 물, 깨끗한 물을 뜻한다고 하겠다.
흔히 가을, 또는 차다는 말은 매화의 기품에 비유하면 금방 뜻이 들어온다.
한 여름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의 정신을 맑게 해주는 가을 물의 차가움,
그것은 세상의 혼탁함에 휩쓸리지 않고 고고함과 아름다움, 격조, 지조를 지키는
매화의 향기와 그대로 통하는 것이다. 그런 문장은 세상의 티끌에 오염되지 않아야 한다.
그런 문장, 그런 글, 그것은 곧 시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세상의 혼탁함을 비춰내는,
맑은 물과 같은 글, 곧 옛날로 치면 선비들의 엄정한 역사의식과 비판정신,
요즈음으로 말하면 언론인들의 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원래 이 말은 중국에서 성리학(性理學)의 세계를 열어놓은 정명도, 정이천 두 학자를
묘사한 글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단순히 사람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 현대 정치의
요체를 압축해서 설명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는 이 글씨를 만년에 머물던 봉은사에서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찍부터 당쟁에 휩쓸려 오랜 세월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한 추사로서는 당시 펼쳐지는
정치에 대해 할 말이 많았겠지만 이런 문장으로 그 소회를 대신한 듯 싶다.
2천 5백 년 전 공자는 자신이 편찬한 시경의 대아(大雅)라는 편 속에 제왕이 가야할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그 때부터 이 시대까지 이어지는 정치의 본질은 곧 지도자는
봄바람과 같이 포근하고 따뜻하게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가 시경의 시 3백여편을 ‘思無邪’(사무사, 생각에 있어 사악함이 없다)라고 했다는데,
시편의 시들, 그 가운데 대아(大雅)편은 정치의 본질을 설파하면서 그런 정치를
구현할 것을 후세인들에게 말하고 있다
추사는 1809년 10월, 24살 때
생부인 동지부사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으로 연경에 갔다.
이 때 등석여(1743-1805)의 대련 「춘풍대아」를 보았을 것이다.
등석여는 추사보다 마흔 세 살 많은 사람으로. 그 때 그는 이미
4년 전에 작고한 뒤였다.
등석여는 청대 중기의 서예가로 모든 체에 뛰어났다.
특히 전서는 진의 이사와 당의 이양빙에 필적하고,
예서도 청조의 제일인자로 불리워지고 있다.
비학파碑學派의 비조이며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동안 전서는 많은 서예가들에게 부담스러운 서체였다.
인장 글씨,부적,비석의 머리글에 쓰여 신성한 글자로 인식되어 왔다.
이 서체가 잘 쓰이지 않은 것은 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서체에 능한 사람들도 전혀 필법이 다른 전서를 쓰려면
거의 초보수준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등석여는 오랫동안 고서를 연구한 뒤 이렇게 말했다.
“전서는 그 법을 알고 나면 어린 아이라도 일주 일이면 쓸 수 있다,
전서의 법식은 역입도출이다.”
추사 김정희는 조선시대 명필 중에서도 으뜸가는 서예가다.
김정희는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내고 붓 일천 자루를
닳아 없앴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서예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그의 독창적인 서체인 추사체는 이러한 부단한 노력과 열정
그리고 그의 천부적 자질이 빚어낸 최고의 서체라 생각한다.
추사체는 해서체뿐 아니라 행서체 예서체에서도 독창성이 두드러진다.
*. 참고: 다움카페 "추사사상" 글과 구글 자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