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봄 집회
2.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의 비밀(2)
2014. 3. 2. 이현래 목사님 말씀
인간은 왜 선악과를 먹었으며 동산에는 왜 생명나무를 두었는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런 것이 이번 봄 집회의 주제(主題)다. 왜 하나님은 두셨는가? 선악을 아는 나무 그 자체가 좋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누가 그것을 먹느냐 누가 그것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필요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했다.
왜 인간은 선악과를 먹으면 안 되는가?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이어받을 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다.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분이고 귀로도 들리지 않는 분인데 무슨 수로 이론으로 설명을 하겠냐는 것이다.
내가 금강산을 보고 와서 아무리 그대로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직접본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산을 통해서 설명해주는 것을 인식해 간다. 그러니까 그것이 꼭 거울로 본 것같이 희미한 것이다. 생전 먹어보지 않은 과일에 대해서 설명하려니까 너무 어렵다는 것을 경험했다. 내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망고라는 과일을 처음 먹어보았다. 그것을 한국에 와서 이야기 하고 싶은 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몰랐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을 했는데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한 번도 안 보고 안 먹어 본 것은 아무리 이론으로 설명을 해도 안 된다는 것이라고 알았다. 비슷한 것이라도 먹어봤어야 연상을 해서 알아가는 것인데 전혀 그런 것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다. 그와같이 하나님을 이론적으로는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희랍사람들과 유대인의 차이점이 있는데, 유대인들은 부딪혀서 경험한 하나님을 말하는데 희랍사람들은 신하면 인간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완전 하니까 신은 완전하다. 인간은 지저분하니까 신은 정결하다. 이런 것은 인간의 상상일 뿐이다. 이렇게 사고하는 세계에 복음이 전해졌다. 그러니까 복음이 순수하게 복음만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고 희랍사상이 섞어졌다. 그래서 복음을 알기가 어려운 것이다.
왜 지식의 나무를 먹으면 안 되는가? 만일 하나님을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으면 지식의 나무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론으로 하나님을 설명할 수가 없다. 이것은 생명으로 받아서 생명으로 소화해서 생명으로 표현해야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후사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후사가 될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파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나타남에 있어서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을 통해서 전파되지 않은 것은 다 이론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그런 이론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내가 체험하고 경험한 분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악을 아는 지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관문이 선악(善惡)을 아는 지식(知識)이다. 우리가 처음 교회를 시작할 때 한 30명 정도였다.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 다 선악을 아는 지식 때문에 생겼다. 그래서 참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선악을 아는 지식은 세상에서 참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멍청한 것이 되고 있으면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서로가 그것을 자랑한다. 자기가 선악을 더 잘 분별한다고 자랑을 하는데 교회생활을 하는 데는 이것이 절대적인 방해물이 된다. 왜냐하면 형제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연합하자는 것이지 돈벌자는 것도 아니고 자랑하자는 것도 아니다. 교회는 둘이 하나가 되어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이 목표다.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었다. 그래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이것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절대적인 방해물이 선악을 아는 지식이다. 이것이 교회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성경을 봐도 선악과가 왜 있는지 왜 먹으면 안 되는지가 없다. 그래서 교회생활 안에서 이것은 절대적으로 금지해야할 나무다.
여러분이 해 보시면 알게 된다. 우리교회에 들어오면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선악을 아는 지식이다. 예배당에 가면 이런 문제가 없다. 나 혼자 기도하고 나 혼자 봉사하고 나 혼자 찬양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생활은 사람을 한 형제로 날마다 보고 살아야 하는데 만일 거기서 선악의 기준이 개입하게 되면 어떤 사람이 그 기준에 맞는 사람이 있겠냐는 것이다. 맞는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자기는 다 옳지만 남은 틀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같이 살 수 없는 것이다.
요즘에는 부모와 자식도 같이 안 살려고 한다. 가장 발달했다는 미국에서는 아이들이 18세가 되면 집을 나가서 독립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기 때문이다. 연합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다른 데서는 다 필요한 것인데 연합해서 하나 되려고 하는 것에서는 요즘말로 쥐약이다. 그래서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창2:17) 한 것이다. 왜 하나님과 연합이 안 되는가? 왜 예수님과 연합이 안 되는가? 그것은 선악을 아는 지식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안 보이니까 그분은 다 완전하고 그분은 다 잘하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걸리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 내가 잘못된다든지 재수 없다든지 하는 경우에는 하나님이 원망이 되지만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니까 내게 걸림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목사님도 멀리 계시고. 요즘 지식이 있는 교인은 교회에 가서 깊이 참여하지 않으려고 한다. 깊이 참여하면 상처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뒷자리에 와서 있다가 예배만 보고 간다. 이런 주장이 많이 있다. 왜냐하면 교회의 중심부에 가면 늘 싸운다. 화목한 데가 별로 없다. 그럼에도 왜 그런지 모르고 싸운다.
나는 젊은 날에 싸워서도 안 되고 싸울 수도 없는 싸움을 4년 동안 했다. 그분은 나이가 많아서 70세로 내 부모와 같은 분이었고 나는 그때 31살 때였다. 그리고 내 은사였고 그때까지 내가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분이었다. 나는 생각할 때 내가 더 노력하고 더 공부를 해서 이분을 계승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실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사건에 부딪혀서 옳고 그르냐는 문제가 나오니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전혀 붙을 수 없는 사람끼리 붙어서 4년을 싸웠다. 마지막에는 내가 힘에 밀려서 나왔다. 그때 ‘세상은 힘이구나 교회는 힘이구나 어디가도 힘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로 뒤로 보니까 다 힘이었다. 우주 전체가 힘, 에너지다. 그런데 근본 본질을 몰랐다. 왜 그렇게 싸웠는지를 몰랐다. (교단을) 나와서도 나는 절대로 옳았고 그쪽은 절대로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가까우니까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만일 친하지 않은 분이 내게 그랬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나를 너무 너무 사랑했던 분이었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 내 등록금을 대주시던 분이었다. 그러니까 도저히 싸울래야 싸울 수 없는 그런 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본다면 미쳤지! 이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신학교는 물론 공짜로 다녔지만 또 일반대학에 편입을 했을 때 그분이 등록금을 대주었다. 그분도 저를 사랑하고 좋아하고 저도 역시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존경하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싸워서 깨지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내가 속해 있던 교단은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분은 자기 인생이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자기 일생 쌓아왔던 공로가 다 무너지고 말았다. 그때 아들이 미국에 있어서 미국으로 가셨는데 미국으로 가실 그런 분이 절대로 아니었다. 자기 평생 쌓아놓은 일이 있는데 미국을 가실 분이 아니었는데 미국으로 가셨다. 거기서 알지 못하는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마지막 보고 온 사람이 하는 말이 무슨 병인지는 모르지만 바짝 말라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도 그때 완전히 낭떠러지로 밀렸다. 올 때 갈 때 없이 밀렸었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나는 거기서 추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는 일어설 형편이 안 되었다. 그런데 묘하게 하나님이 정말 독수리 날개로 옮겨서 그때 갑자기 생각지도 않게 CCC를 들어갔다. 들어갈 수 없는 데를 들어가게 되었다. 내 실력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을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그 위기를 넘기고 여기까지 살아있는 것이다. 그때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면 어디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아무도 날 도와줄 사람도 없었고 갈 곳도 없는 그런 형편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 수 없다. 부자간의 관계를 끊는 것도 이 선악과 때문이고, 부부간에 결국 이혼하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다 이것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 때문에 고통도 당하고 심한 절벽을 느꼈지만 그것이 선악과 때문이라고는 전혀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단지 저 사람들이 잘 못 판단해서 그렇다고만 생각했다. 늘 나는 ‘진리냐 아니냐? 정의냐 아니냐? 옳으냐 그르냐?’ 이렇게만 생각했다. 뒤로 내가 권위(權威)를 알고 나서 ‘옳으냐 그르냐?’는 것 보다 권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구나! 권위가 있구나!’하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때 전에 가졌던 원한 불만 그런 것이 사라졌다. ‘내가 틀린 것이 아니고 권위에 복종하지 못했구나!’하는 이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선악과와 특별히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물론 여러분도 다 인연이 있겠지만 나는 내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서 이 사건이 내 일생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 후 CCC에 들어가서는 일체 그런 생각이 없어지고 무엇이든지 김중권 목사님이 하는데로 따라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큰 공과를 배운 것이다. 그만 두고 나가라고 했을 때도 나는 전혀 이의가 없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하는 전혀 이의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까 사람이 멍청해졌다고 할 수 있다. 멍청해졌는데 질서가 있는 사람이 되었다. 옛날에는 아주 예리했었다. 그래서 조금만 틀리면 절대로 용납이 안 되고 그랬었다. 그것이 똑똑한 것인 줄 알았는데 똑똑한 것이 아니고 멍청한 짓이었다. 알고 보니까 그렇게 미련한 짓이 없다. 아무리 똑똑하고 뭐하고 옳으면 뭐하냐는 것이다. 힘이 없으면 깨지는 것인데. 우리 조선 왕조가 잘 못해서 일본에게 합병당한 것이 아니다. 힘이 없으니까 당한 것이다. 아무 이유가 없다. 힘이 없는 자의 용맹 이것은 자기를 파멸시키는 것이다. 내가 딱 그랬다. 힘이 없는 자가 용맹만 있었다. 힘없는 자가 용맹이 없으면 괜찮다. 빌고 하면 사는데 힘은 없는데 용맹만 있으니까 죽기에 딱 맞는 것이다. 요즘에 정도전이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기개와 용기가 대단하고 이 사람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이다. 그때 간신이던 사람이 “힘이 없는 사람의 용맹은 자기파멸이다.”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그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들어보려고 자꾸 회유를 하는데 ‘내가 그랬다. 내가 과연 그랬구나! 내가 정도전 같은 사람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조선왕조를 건국하고 나서 죽임을 당한다.
그러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이라는 것은 정말 신비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래도 사람은 먹고 싶었다. 먹음직고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기 때문에 먹었다는 것이다.
또 우리 속에는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이 있다. 누구한테도 머리를 숙이고 싶지 않는 그것이 있다. 이것이 옛날 얘기가 아니고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다. “연결이 싫다. 나는 독립하고 싶다. 시키는 대로 하기 싫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 정해진 대로 가기 싫고 내 마음대로 가고 싶다. 그런데 지금 교육은 전부 그렇다. 시키는 대로 하지마라 그것은 창의력이 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정한대로 하지 말고 너대로 한 번 해보라고 한다. 그러니까 역시 세상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구나. 이렇게 해야 스티브 잡스 나오고 에디슨도 나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하라는 대로 하게 되면 그런 천재들이 안 나온다. 그러니까 세상은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함녀 세상은 그런 것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을 먹고 만들어진 것이 세상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세상은 그 구조 안에 있기 때문에 그 구조대로 살아야지 그 구조대로 살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어떤 세계에서는 아주 필요한 것이고 어떤 세계에서는 쥐약이고 그렇다. 우리가 무엇을 취할 것인가? 우리가 연합을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생명공급을 받아 하나님을 표현하는 세계로 갈 것인가? 아니면 지식을 조합해서 뭘 만들어내는 세계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이 마지막 판에 바벨과 새 예루살렘의 대결이 된다. 역사는 그렇다. 이것은 아주 우리 인생에 있어서 역사에 있어서 그리고 신앙에 있어서 전 성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다.
사람에게는 두 노선(路線)이 있다. 하나는 지식의 노선이 있고 하나는 생명의 노선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의 노선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생명의 노선으로 살면 좋고 편하지만 지식의 노선으로 살면 괴롭고 힘들게 된다. 늘 걸리는 것만 보이게 되고 걸리는 사람이 없어졌더니 또 걸리는 사람이 나오고 이제는 없어졌겠지 싶었는데 또 하나 나오고 계속 나오게 된다. 이런 사람은 늘 교회에서 걸리다 만다. 우리교회를 나와도 30년 동안 계속 걸리기만 하고 전진을 못 한다. 참 신기하다. 그렇게 걸리는 사람을 보면 아주 선한 사람이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선하지도 않는데 걸리는 경우가 있다. 참 이상하다. 우리가 볼 때는 자기가 지탄을 받아야 하는데 자기가 지탄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이런 것이 너무 너무 이상하다. 어떤 사람을 보면 너무너무 선해서 저렇게 되는구나. 이렇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보면 정말 지탄받아야 하는데 그러고 다닌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말 이상한 지식이다.
우리가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벗어나려면 이것을 떠나야 된다. 불가에서는 자기들에게는 그게 없다고 한다. 자기들은 선악이 없다고 한다. 선악은 원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비웃을 때 ‘기독교는 차원이 너무 낮다. 왜냐하면 선과 악의 싸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알 때 그렇게 알기 쉽다. 어떻게 보면 다 그렇게 보인다. 선한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악한 것은 사탄의 것이다. 전부 다 그것이다. 선한 자는 상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고 이런 것이다. 상선벌악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까 초월을 주장하는 불가에서 볼 때 ‘그것은 아주 하수다. 저 밑에서 기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선악의 길을 초월하는 해탈의 길이다. 초월의 길이다.
우리도 초월로 가면 되는 것인가? 아니다, 그게 아니다. 우리는 초월로 갈 수가 없다. 생각 뿐이지 사람은 초월할 수가 없다. 여전히 밥을 먹어야 되고 여전히 걸어야 되고 여전히 현실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세상(世上)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교회는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이다. 이 구별이 분명해야 된다. 선한 일을 하면 교회인가? 아니다. 선한 일은 교회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옛날에는 좋은 일을 교회가 다 했다. 고아원도 교회가 하고 뭣도 교회가 하고 그랬다. 지금은 전혀 그런 것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또 할 능력도 없다. 왜냐하면 정부가 다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아무리 한다고 해서 정부가 하는 일만큼 되겠는가? 안 된다. 북유럽에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는 나라들은 교회에서 전혀 그런 것을 할 필요가 없다. 국가에서 출생부터 무덤까지 다 보장해 준다. 그러니까 교회는 할 일이 없어져 버린다. 그런 것이 교회가 할 일인 줄 알았던 교회들은 텅텅 비어 있다.
교회와 세상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노선이 다르다. 하나는 지식의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의 노선이다. 교회가 이 지식의 노선에 휘말리면 만날 싸운다. 교리를 가지고 만날 옳으니 그르니 해서 죽이고 살리고 한다. 로마제국이 기독교인들을 학살한 숫자보다 기독교가 이단이라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죽인 숫자가 더 많다고 한다. 그것은 선악과에 휘말려 든 것이다. 그래서 서로 자기가 옳다고 한다. 옳다는 사람이 실력을 잡으면 안 된다. 그래서 정교 분리정책이 반드시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교회에게 정치를 맡겨 놓으면 만날 죽인다. 칼을 쥐어주면 사람이 안 남는다. 종교에게 칼을 쥐어 놓으면 남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래서 종교에게서 칼을 빼앗아 버린 것이다.
무솔리니는 이태리에서 바티칸 궁전만 빼 놓고 나머지를 다 내놓으라고 해서 바티칸은 바티칸시티, 그 면적이 얼마 안 된다. 그것만 남고 나머지는 무솔리니가 다 빼앗아 갔다. 지금 교황도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하는 데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면 안 된다.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면 사람을 죽인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 왜 그런가? 그것은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교회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만약에 내가 드린 제물이 옳다면 남이 옳지 않은 제물을 드리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내 제물이 열납 되었다. 자기의 제물이 열납이 되지 않으니까 그 짓을 하는 것이다. 가인의 제물이 열납 되었으면 무슨 문제가 있는가? 자기 제물이 열납이 안 되었으니까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칼을 든 자는 누군가? 항상 자기 제물이 열납되지 않은 자가 칼을 드는 것이다. 자기 제물이 열납되면 칼을 들 필요가 없다. 선악과의 독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요한 계시록 2장에서는 교회가 회복된다. 새로운 교회의 회복에 대한 계시가 시작되는 데 첫 번째 교회가 에베소 교회다. 에베소 교회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너는 행위나 모든 것이 다 온전하다. 아는 지식에 있어서, 행위에 있어서 온전하다. 그런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처음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고 가장 중요한 것을 버렸다는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을 우리 기독교에서는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 사랑을 버렸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처음 사랑이 아니고 가장 중요한 것, 제일가는 것을 버렸다는 것이다. 제일가는 것이 무엇인가? 첫째 가는 것이 무엇인가? 그 뒤에 보면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줘서 먹게 하겠다.’고 한다. 생명나무를 주겠다는 말이다. 다른 것은 다 있다. 교리도 완전하고 행위도 완전하고 봉사도 잘하고 다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버렸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을지라도 이 한 가지를 버리면 그것은 교회가 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것은 다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있으면 좋지만 이 한 가지가 없으면 다른 것도 다 없어진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중심은 생명나무의 길에 있다.
4. 하나님은 왜 이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셨는가?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리기 위하여 그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의 생명공급을 받기 위하여 산 혼이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공급을 받아야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다. 흙은 주인의 뿌린 씨를 받아야 주인을 위한 밭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왜 하나님은 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는가?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리기 위하여 그의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지어졌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공급을 받기 위하여 산 혼이 되었다. 산 혼을 만든 이유는 생명 공급을 위해서 산 혼이 되게 한 것이다. 그릇을 왜 만들었는가? 밥을 담으려고 만들었다. 이와 똑 같은 것이다. 밭을 왜 갈고 있는가? 씨를 뿌리기 위해서 갈고 있다. 똑 같은 것이다. 사람은 왜 산 혼으로 만들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 공급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든 것이다. 흙은 주인이 뿌린 씨를 받아야 주인을 위해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주인이 뿌린 씨를 받지 않으면 잡초 밭이 되고 말아버린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공급 없이 자기 스스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 지킬 법과 지키지 않을 법을 가리게 된다면, 즉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한다면 하나님 같이 되어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결국에는 무익하게 될 뿐 아니라 반역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흙이 스스로 씨를 선택한다면 주인을 위한 밭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공급이 없이 자기 스스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 시킬 것과 시키지 않을 법을 자기 스스로 가리게 된다면, 즉, 선악을 스스로 판단한다면, 하나님과 같이 되어서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결국에는 무익하게 될 뿐만 아니라 반역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무익한 것만 해도 괜찮은 데 반역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다. 흙이 스스로 씨를 선택한다면 주인을 위한 받은 될 수 없다. 뿌린 씨를 받아야지 자기가 씨를 선택하면 안 된다. 우리의 충성은 어디에 있는가? 뿌린 씨를 잘 받아서 그것을 가꾸어 내는 것이 충성이다. 내가 씨를 열심히 찾아다닌다고 해서 그것이 충성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이며 생명의 단절임으로 곧 죽음이다. 생명은 지식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오로지 연결, 즉 연합을 통해서만 공급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공급을 받아서 본분을 행해야 할 인간은 절대로 선악을 아는 지식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생명의 단절이다. 이것은 곧 죽음이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우리 육신의 목숨이 죽는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말이다.
생명은 지식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오로지 연결, 연합을 통해서만 전달되고 공급이 된다. 내 손가락에 다 어떻게 영양공급을 하겠는가? 무슨 지식으로 공급하겠는가? 연결되는 것밖에는 공급할 수 없다. 그러니까 내 손에 연결되어 있으면 계속해서 생명공급을 받는 것이고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금방 죽어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생명은 관계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공급을 받아서 본분을 행해야 할 인간은 절대로 선악을 아는 지식을 받아서는 안 된다. 혹시 눈에 그런 것이 보이더라도 내가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할 사람이라 생각하면 나는 그것을 무시해야 된다. 선악을 아는 지식은 무시해야 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유는 연합으로 연결되어 존재하도록 되어 있다. 인체만 해도 수 없는 세포들이 상호 연합하고 연결 되어 생존한다. 이 관계가 단절 되면 죽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유는 연합으로 이루어져 존재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의 육체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수십 억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이 세포들이 상호 연결하고 연합되어서 우리가 생존하고 있다. 떨어지면 다 죽는다. 어느 세포든지 분리되면 다 죽는다. 그러니까 이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죽음이다. 세포와 세포가 단절되는 것이 죽음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람이 단절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영광스러운 사명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는 것이다. 쓸모가 없는 것은 죽은 것이 아닌가?
늘 말하지만 사람을 잘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위임을 했기 때문에 그렇지 위임을 하지 않았다면 인간만큼 이 우주 안에서 쓰레기가 없다. 인간만큼 악질이 없다. 모든 동물에게 인간을 내 놓고 이야기 해 보라. 내가 어떠냐고 물으면 ‘너 임마. 쓰레기야, 쓰레기.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하는 줄 아느냐?’ 이런다. 다 그런다.
우리 집에 고양이가 여러 마리가 산다. 키우는 고양이가 아니라 도둑고양이다. 쥐가 오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가 먹고 남은 것을 주니까 안 떠나고 계속해서 주변에 산다. 하루 이틀 산 것이 아니고 지금 몇 년 째 산다. 그러니 얼마나 친한 사이인가? 그리고 우리도 늘 챙겨준다. 지 놈들도 알고 있기는 하다. 우리가 점심 때 어디 갔다 오면 당연히 뭘 가지고 오는 줄 알고 있다. 그래서 집에 들어오면 ‘야웅!’한다. 뭘 가지고 오는 줄 알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도 인정상 ‘고양이가 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니까 먹다가 생선 뼈다귀를 안 버리고 꼭 싸서 가져온다. 이런 관계다. 자기들도 우리를 기다리고 우리도 저들에 대해서 배려를 하는 그런 관계다. 상당히 좋은 관계이지 않은가! 그런데 몇 년이 되었는데도 절대로 가까이 오지 않는다. 내가 뭐라고 하는가? 와 보라 해도 안 온다. 그것을 보면서 ‘저놈이 인간을 생각할 때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저놈이 나를 생각할 때는 상당히 나를 경계하고 아주 나쁜 놈으로 생각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나보고 좋다고 하는 데, 저놈은 그것도 모르고 말이지.’ 한 번 손으로 만져보면 좋겠는데 절대로 안 온다. 옆에 와서 앉아 있으면서도 눈치를 보고 앉아있지 절대로 가까이 안 온다. 그래서 나는 ‘동물들이 인간을 볼 때는 전부 다 괴물로 보이는구나.’ 인간이 괴물로 보인다. 악한 자로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아무리 밥을 줘도 안 된다.
이런 인간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위대한 위임을 받았다.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려라.’ 이 말은 ‘네가 나를 대신해서 이 만유를 다스려라.’ 이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너무너무 영광스러운 위임이다. 이 위임을 빼버린다면 인간은 괴물이다. 이 관계가 단절되면 죽음이다. 그런 것이 끝나버렸다. 그게 없다. 아무 위임도 없다. 이러면 그것은 죽는 것이다. 무슨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랑할 게 없다.
그러므로 이 단절을 막기 위하여 먹지 말라한 것이다. 만물은 사람과 연결 되어야 하고 사람은 하나님과 연결 되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생명이 우주에 편만하게 되고 그의 영광이 나타나서 만유는 그의 영광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단절(斷絶)을 막기 위해서 먹지 말라고 한 것이다. 만물은 사람과 연결되어야 하고 사람은 하나님과 연결(連結)되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생명이 우주에 편만하게 된다. 그의 영광이 나타나서 만유는 그의 영광에 참예하게 된다. 어떻게 만유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게 되겠는가? 그렇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이 자기가 지은 모든 피조물에게 편만하기를 원하고 있다. 어디를 가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도록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 그렇게 되려면 개가 무슨 수로 그렇게 되겠으며 소가 무슨 수로 그렇게 되겠는가? 소는 나하고, 사람과 연결되어야 하고, 나는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그게 가능하다. 소가 스스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 중간에서 중보자라고 할 수 있다. 만물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되는데 이 중보자로서 위치가 아주 영광스러운 위치다.
그런데 이 위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소는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만물이 탄식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저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이 자기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들도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는데 중보자가 없으니까 참예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도살장이나 끌려 다니고 이렇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만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서 옳고 그름을 칼 같이 잘라내는 그런 인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공급할 수 있는 그 인간을 찾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이것을 알아야 된다. 만물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것을 먹지 말하고 한 것은 단절 때문에 먹지 말라고 했다. 죽을 것이다.
5. 먹은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와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하는 나무임을 보고 과일을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었다는 것이다. 사단은 “네가 이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창3:5) 하였다.
먹은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와는 이것을 보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이 나무를 보고 그 과일을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었다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다. 쉽게 말이다. 어떻게 이렇게 중대한 문제를 이토록 쉽게 결정하고 말았을까? 사탄은 ‘네가 이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이랬다.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는 이 말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다.”는 뜻이다.
인간의 깊은 소원(所願)이 있다. 모든 사람들 속에 깊은 소원이 있는 데 그것은 항상 신이 되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 같이’라고 번역했는데, 이 ‘하나님 같이’라는 말에서 하나님은 신이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할 때는 인격화시켜서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런데 원문에는 엘로힘이다. 이 엘로힘은 전능자라는 뜻이고 힘이라는 뜻이다. 창세기 1장1절에 나오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엘이다. 그것은 단순하게 힘이다. 그러니까 성경은 알고 보면 굉장히 과학적이다. 우주는 힘이 만들었다, 힘, 에너지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에너지가 인격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는 말을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말에서는 하나님과 신(神)이 구별이 잘 안 된다. 한자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할 때는 인격화된 말이고, 신이라고 할 때는 비인격화된 그런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어 성경을 보면 신과 하나님은 딱 구별되어 있다. 하나님이라고 할 때는 상제라고 한다. 임금이라고 한다. 하늘 임금, 위에 있는 임금, 상제다. 그 말이 맞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신 이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중국 사람들이 신이라고 할 때는 인간을 초월하는 어떤 능력이라고 할 때 신이라고 한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고 할 때 그 사람을 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관운장을 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관운장 사당이 있다. 그러니까 이 신이라는 말이 귀신이라는 말이 아니라 ‘귀신같다.’ 이런 뜻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을 보고 신이라고 한다.
의사도 얼굴만 딱 보고도 어디가 아픈지 아는 사람, 이것을 보고 신이라고 한다. 물어보고, 문진을 해 보고 병을 아는 사람은 성인 성자를 쓴다. 그리고 맥을 짚어보고 아는 사람을 보고는 기술자라고 한다. 그렇게 틀리다. 딱 사람을 보고 병을 알아버리는 사람을 신이라고 한다. 딱 사람을 보고 알아보기가 쉽겠는가? 아니다. 그러니까 신이라고 한다. 제갈량이나 관운장이나 이렇게 우리가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신이라고 한다.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원하고 있는 것을 바로 그것을 원하고 있다. 그런 인간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김연아는 피겨스케이팅의 여신이다.’ 그런 말로 표현했다.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니라 신이다. ‘여신이다.’ 이렇게 말한다.
사람 속에는 뭔가 인간성의 연약함, 부족함, 이것을 초월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것을 종교적으로 초월하려는 사람도 있다. 인도사람들은 초월적 명상을 하는데 자기 몸을 이탈하는, 유체이탈을 경험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도 젊었을 때 처음 목회를 하러 나가니까 당장에 무엇이 필요한가하면 바로 그런 것이 필요했다. 손을 얹으면 나아버리면 여러 말 할 것이 없다. 예수 믿으라면 예수 믿고, 부처님 믿으라면 부처님 믿는다. 예수냐 부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손을 얹어 나아버리면 된다. 아주 간단하다. 걸어서 15분 쯤 가는 교회에서 신유 은사를 주는데 수천명이 모여서 난리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오면 냉냉해 있다. 그래서 저런 능력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젊은 나이에 나도 한 번 해보려고 열심히 쫓아다녔다. 삼각산 기도원도 가보고 제일 유명한 기도원도 찾아가보고 완전히 암벽위에 세워놓은 기도원도 있다. 길도 없어 기어 올라가야 된다. 거기를 쌀가마니를 짊어지고 올라가서 밥을 해먹고 산다. 거기도 가봤다. 신령하다는 사람, 손만 얹으면 방언이 나온다는 사람도 만나보았다. 현실적으로 필요하니까 정말 하고 싶었다. 이것이 신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 너무너무 쉽고 간단하다. 이렇게 말씀 전하려고 할 필요도 없다. 그냥 손만 얹고 할렐루야 하면 다 해결된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그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굴복하게 된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소용없다. 지식이 있고 별 사람이라도 그것만 봐버리면 끝나버린다.
우리 교회는 내가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안수 받아서 고침 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정읍교회에서 오신 분이 집회 왔다 간 후 완전히 새 사람이 됐다고 하여 신유 은사가 지금은 옛날처럼 손 얹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공기처럼 나가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일일이 손 얹고 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편리하다. 부흥회 가보면 앞에서부터 두드리면서 가는데 그것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한 마디 해버리면 전부 나아버리는 것이다. 우리 교회도 신유 은사가 없는 것이 아니고 있구나.
신처럼 되고 싶다는 이것이 인간 본성 속에 들어있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다면 빠져 죽는다. 그렇지만 내가 만일 신적인 힘이 있다면 물에 빠져 죽을 필요가 없다. 신이 왜 죽겠는가? 신은 날라가면 그만이다. 얼마나 편리한가. 신적인 어떤 것이 나에게 있다면 인생은 완전하다고 할 것이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항상 인생은 불완전하다고 한 것이다. 그것이 갖추어 진다면 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 이것을 먹었는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지금 없는 게 무엇인가? 신적인 것이 없다. 공부도 할 수 있고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적인 것은 없다. 여기서 내가 여러분에게 신적인 것을 한 뭉치씩 준다면 여러분은 가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아예 떠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 나도 그렇게 한 번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잠시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다가도 그래도 이럴 때는 그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람이 얼마나 끈질긴 것인가. 자기가 완전해지고 싶다. 이것을 봤으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병철 회장도 만일 이것만 봤더라면 삼성 전 재산을 내놓더라도 샀을 것이다. 삼성 있으면 뭐하는가?
예수님을 따라가던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이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래서 따라 갔는데 십자가에서 그만 생각 밖에 죽고 말았다. 제자들이 마지막까지 일말의 기대를 갖고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만 죽고 말았다. 큰 소리를 지르고 운명하셨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운명하셨다. 누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죽어버렸다. 그러니까 다 떠나갔다. 죽는 데도 같이 가고 옥에도 같이 가겠다고 했던 사람들이다. 거짓말이 아니다. 만일 그 자리에서 예수가 신으로 나타났다면 죽어도 갔을 것이다. 목숨 바치고 갈 사람들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도로 고기 잡으러 갔던 것이다.
신이 되고 싶다. 출애굽기 7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하는 말인데, 내가 너를 바로 앞에 신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12장 12절에 보면 내가 모든 신들을 벌하겠다는 말이 나온다. 신적인 그 능력, 이것이 어떤 경우에서는 바로를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고, 바로 앞에 신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으니까 바로가 아무리 애굽의 왕이라 할지라도 신 앞에서 감당하겠는가. 내가 신이 되어서 간다면 철통같은 북한이라 하더라도 김정은 오라고 하면 오지 않겠는가. 신이 대포를 쏜다고 죽겠는가? 처음에는 기관총 쏘고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면 완전히 질려버리고 말 것이다. 틀림없이 대번에 머리 꿇고 올 것이다. 이것이 신이다. 그런 것인데 먹음직하지 않고 보암직하지 않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먹은 것이다. 인간의 그 소원 때문에.
하나님 같이 되려고, 신과 같이 되려고. 어쩌면 이것은 천사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나타난 것은 천사밖에 없었으니까.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먹었는데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으며 “네가 어디 있느냐?”(창3:9)고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내가 벗었음으로 두려워 숨었다”(창3:10)고 했다는 것이다.
먹었는데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았다. 너무 똑똑해지니까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고,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내가 벗었음으로 두려워 숨었습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신이 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신은 되지 않고 자기 몸이 벗은 줄 알았다. 벗은 줄을 알았다는 말은 자기 허물이 보였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가리려고 무화과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그리고 여호와의 낯을 피했는데, 왜? 허물이 나타나니까.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다. 사람은 항상 뭔가를 앞에 내놓고 가린다. 직업을 내놓고 가리든지 재주를 내놓고 가리든지 앞에 광대를 세운다. 그 광대를 만들기 위해서 인생을 노력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못 보게 하기 위해서, 나를 그냥 보면 허물이 있으니까. 내가 나를 봐도 허물이 있는데 남이 나를 보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광대를 만들려고 평생을 노력한다. 사람들은 광대를 보고 안동 광대네, 전라도 광대네,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벗었음으로 두려워 숨었습니다.”라는 이 말과 창세기 마지막의 “저들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더라.”는 말과 비교해보라. 왜 한쪽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왜 한쪽은 벌거벗었기 때문에 부끄러웠는가? 한족은 연합을 했기 때문에 흠이 없다. 인간은 연합을 해야 흠이 없도록 되어있다. 나 혼자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고 연합해야 완전해지도록 되어있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원리가 다 그렇다. 둘이 합하여 하나가 되도록 되어있지 혼자 완전한 것은 없다. 남자도 혼자 있으면 부끄럽고, 여자도 혼자 있으면 부끄럽다. 남녀가 합하면 부끄러움이 없어진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우리는 연합 안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진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 왜? 연합했기 때문에. 왜 사람은 자기 허물을 탓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든지 도야해서 허물없는 인간이 돼보려고 하는가? 그래서 그것이 수양이고 명상이다. 그런데 평생 해봐도 언제 완성될지 모른다. 평생 그 짓만 하다 말 것이다. 밥도 먹어야 되고 이웃집도 가야 되고 수퍼도 가야되는데 평생 명상만 하고 앉았겠는가.
우리는 자기 스스로 온전해지려고 하지 말고, 둘이 합해서 온전해지려고 생각하면 된다. 이 원리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똑같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해야 온전해지는 것이지 내 스스로 온전해질 수 없다. 밭이 어떻게 스스로 온전해지겠는가? 씨가 들어와야 온전해지는 것이다. 지금 겨울이라 밭이 모두 황폐해져 있다. 얼마 가지 않으면 씨를 뿌릴 것이고 씨를 뿌리면 싹이 나와서 보리밭도 되고 콩밭도 되고 옥수수 밭도 된다. 그런 풀들이 자라고 나무들이 자라고 곡식이 자라면 땅의 허물이 싹 없어져버린다. 땅이 보이지 않는다. 곡식만 보인다.
미국에 가니까 옥수수 밭이 끝없이 있었다. 걸어서는 다 갈 수가 없다. 차를 타고 가야 다 볼 수 있다. 어떤 형제는 농장 견학을 갔는데 아침에 차를 타고 가면 저녁에 끝에 간다고 한다. 얼마나 그 농장이 큰가. 흙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흙의 허물은 작물이 무성해져야 흙의 허물이 가려지지 흙 스스로가 허물을 가릴 방법은 없다.
만물은 다 연합해서 완전해지도록 되어있지 홀로 완전해지도록 되어있지 않다. 그래서 사람이 만든 모든 제품을 보면 다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 모양대로 만들어놓았다. 하나님도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 모양대로 모든 물건을 만든다. 이 마이크도 사람이 만들었다. 이것도 이렇게 생겼지만 사람의 형상을 따라 사람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마이크는 그냥 소리가 안 난다. 전기가 들어와야 소리가 난다. 밥을 먹어야 우리가 말을 하는 것과 똑같다. 사람이 만든 모든 제품은 사람의 형상을 따라 사람의 모양대로 만들어져있다.
이 원리는 전부 동일하다. 둘이 연합하여 하나가 될 때만 부끄러움이 없어지고 완전해진다. 스스로 홀로 완전해지려는 생각을 말라는 것이다. 왜 우리가 순모임을 하는가? 홀로 완전해지려고 하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자기 혼자 살면 모른다.
진짜로 편안하기를 구하는 사람은 점점 자기만 남는다. 아무도 간섭하지도 않고 간섭 받지도 않는다. 가령 아침에 10시에 일어나든지 12시에 일어나든지 누구도 말할 사람도 없고, 밥을 먹든지 죽을 먹든지 말할 사람도 없고,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세계로 가고 싶은 것이다. 결국은 자기만 남는다. 윗목에 있는 것을 아랫목에 밀쳐놓았다가 아랫목에 있는 것을 윗목에 밀쳐놓았다가 자고 일어나면 몸만 쏙 빠져 나가면 편하다. 연합하기 싫으니까.
우리는 연합하는데 고통이 있을지라도 연합하여 완전해져야 한다. 무슨 고통인가? 선악과 때문에 고통이니까 우리가 연합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면 아~ 이것이 우리가 거쳐야 할 과정이구나.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그 독소가 빠져나가야 되는구나. 그렇게 우리가 생각해야 된다.
하나님 목적에서 이탈되고 불행으로 들어간다. 이것을 먹고 나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의 열매를 먹고 보니까, 신이 되려고 먹었는데 먹고 보니까 눈이 밝아져서 벗은 줄을 알고 여호와의 낯을 피해 숨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이야기다.
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 되고 불행으로 들어감
1). 사단의 말을 들음으로 불행이 시작 됨
아담은 하나님의 말은 듣지 않고 사단의 말을 들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들어야 하고, 학생은 선생의 말을 들어야 하며, 군인은 상관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세계를 이탈한 반역자의 말을 들은 것이다. 이것은 군인이 역적의 말을 들은 것과 같은 것이다.
각론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되고 불행으로 들어갔다.
사단의 말을 들음으로 불행이 시작되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은 듣지 않고 사단의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불행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 말을 들어야 한다. 학생은 선생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선생님 말을 잘 듣는 학생이 공부를 잘한다. 선생님 말을 안 듣는 학생은 공부를 못한다. 백발백중 못한다. 군인은 상관의 말을 들어야 한다. 상관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세계를 이탈한 반역자의 말을 들었다.
사단은 누구인가? 원래는 천사였는데 자기가 그 위치를 만족하지 못하고 이탈한 것을 보고 사단이라고 한다. 결국 본질적으로는 천사다. 이것은 마치 군인이 역적의 말을 들은 것과 같다. 간첩의 말을 들은 것과 같다. 군인이 상관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상관이 아닌 다른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같이 역적이 되는 것이다. 똑같은 이치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명령을 생명으로 여기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잘못하면 아군에게 총을 쏜다. 상관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혼자 총을 쏘다 보면 아군에게 총을 쏠 수 있다.
말은 듣고 해석하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 하는 자가 누구인가가 중요하다. 나를 위하는 자인가 해하는 자인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자기를 지으신 이의 말을 듣지 않고 이탈자의 말을 들은 것이다.
말은 듣고 해석하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말을 듣고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절대적인 해석이라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절대적인 해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이것이 아주 큰 실수를 가져오게 된다.
말하는 자가 누구인가가 중요하다. 우리가 그 말만 갖고 옳으냐 그르냐, 나에게 유익하냐 불리하냐를 분석하는 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 원수가 와서 말할 때 나를 해롭게 하겠다고 말하겠는가? 이롭게 하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속는 것이다. 사기꾼에게 속을 때 왜 속는가? 그 말이 너무나 그럴듯하기 때문에 속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을 때 전혀 아니다, 이것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도 속지 않는다. 그런데 나를 속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들으면 정말로 그 말이 옳다고 말하는 사람이 사기꾼이다. 도저히 그것을 당해낼 수 없다. 말만 가지고, 그 해석만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할 수가 없다. 문제는 이 말하는 자가 누구인가가 중요하다. 누가 이 말을 하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나를 위하는 자인가, 나를 해하는 자인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자기를 지으신 자의 말을 듣지 않고, 이탈자의 말을 들었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과 “네가 이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는 말 중 어느 말이 더 합리적인가? 사단의 말이 더 합리적이다. 우리는 합리적인 것만 찾기 쉽다. 더군다나 현대에 오면 이론이 분분한 세대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주장을 해야 된다. 합리적인 주장을 해야 설득력을 갖게 된다. 어떤 사람도 비합리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비합리적인 말을 하면 아무도 듣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 합리적인 말을 하려고 한다.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옥신각신 하는 것을 보면 다 자기대로 옳은 말을 한다. 입장이 다르다는 것뿐이지 이 입장에서는 이 말이 옳고 저 입장에서는 저 말이 옳은 것이라고 그렇게 말을 한다. 이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듣는가 하면 이편에 속한 사람은 이편의 말을 듣고 저편에 속한 사람들은 저편의 말을 듣는다. 그래서 자기가 속한 편의 입장에서 듣지 옳고 그른 것을 하지 않는다. 내가 듣기에는 틀린 말인데 그편 사람은 그 말이 옳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기편에서 듣는다. 아주 합리적으로 듣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그게 더 쉬우니까 그런 것 같다. 이탈자의 말을 들었다는 것이 인생 불행의 시작이다.
이것은 인생과 우주가 좌우 되는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입에는 써도 배에는 단것이 있고, 입에는 달아도 배에는 쓴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지혜는 말을 잘 해석하는 것 보다 그 말이 누구 의 말인가를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사단의 말을 들은 것은 인생 불행의 시작이다.
이것은 인생과 우주가 좌우되는 중대한 문제이다. 누구 말을 듣냐는 것이다. 입에는 써도 배에는 단 것이 있고 입에는 달아도 배에는 쓴 것이 있다. 그런데 인생의 지혜는 말을 잘 해석하는 것 보다 그것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것보다 그 말이 누구의 말인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는 누구 말을 들으면 본성상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생각이 많아서 잘 속는다. 그래서 나는 사기를 잘 당할 사람이다. 왜냐하면 진짜 합리적으로 누가 말을 하면 나는 그대로 믿는다. 왜냐하면 안 믿으려고 생각했다가도 그 말을 들으면 안 믿을 수가 없어서 믿는다. 그런데 우리 집사람은 나하고는 반대다. 들어보지도 않고 반대할 것은 반대한다. 들어보고 하지 하는데 자기는 직감으로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무슨 말을 해도 아니라고 한다. 이게 더 정확하다. 나는 면밀히 검토한다고 하는데 결국 걸린다. 그러니까 사람의 말을 잘 해석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말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국회의원들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누구의 말인가를 알아야지 그 사람 말이 맞는가 틀리는가를 생각해서는 헷갈려 버리고 만다. 공산주의자들이 말을 너무 잘한다. 우리말에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말이 있다. 그럴듯하니까 공산주의가 되지 그럴듯하지 않는데 공산주의자가 되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는 공산주의자다.’ 하면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는 백성을 잘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평등하기 위해서 이렇게 제안을 한다. 초창기에는 우리나라에 남존여비 사상이 많았었다. 신학문이 들어오면서 여학교가 생기게 되었다. 그때 여학교에서 공산주의자가 굉장히 많이 나왔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이 남녀평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남녀평등을 주장하니까 여학생들이 남존여비의 사상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니까 그때 당시 많은 여학생들이 남로당에 들어갔었다.
그러니까 누구의 말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사탄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불행이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에게 이탈한 자가 와서 그 말을 듣게 되니까 자기는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사는 사람이 나에게 와서 온갖 좋은 말로 감언이설을 했지만 그 사람을 보면 자기는 스스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 사람 말을 듣다보면 나도 스스로 사는 사 이 되게 된다. 그러니까 말이 옳으냐 그르냐만 생각할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사람이 스스로 살고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에게 이끌려서 살고 있는 사람이냐가 중요하다. 내가 하나님에게 이끌려 사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나도 하나님에게 이끌려 사는 사람이 되고 자기가 스스로 사는 사람의 말을 듣으면 나도 스스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2). 사단의 말은 인생의 영광을 앗아감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영광을 표현할 자로 위임했다. 그런데 사단의 말을 들은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위임을 버린 것임으로 그 영광도 버린 것이며 연합하여 영화롭게 될 하나님을 버린 것임으로 영광의 길을 스스로 이탈한 것이다. 영광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 그의 위임을 받고 그와 연합한자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사탄의 말은 인생의 영광을 빼앗아 가버린다. 하나님을 사람을 지으실 때 자신의 영광을 표현할 자로 위임했다. 하나님의 영광은 태양처럼 저렇게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영광은 인격적인 영광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표현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소가 하고 개가 하겠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할 자로 지었다는 것이다.
고양이가 볼 때는 참 악질이지만 하나님이 볼 때 사람을 왜 사랑하시고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하면 자신의 영광을 표현할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다. 그러니까 사단의 말을 들은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위임을 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것을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영광도 버린 것이다. 연합하여 영화롭게 될 하나님을 버린 것이므로 영광의 길을 스스로 이탈한 것이다.
영광은 어디에서 오는가? 명령을 준행하는 데서 온다. 군인이 훈장을 받는 것은 명령을 준행했기 때문이다. 군인에게 명령은 위임이다. 그러면 우리 인생에도 위임이 있는데 그 위임을 이행한 대가가 영광이다. 영광이 저절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연합해서 그의 생명공급을 받아서 내가 그를 인격적으로 표현하면 그때 영광이 된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을 기뻐하는가 하면 왜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남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냐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내가 해보면 안다. 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살면 내가 영광스러워진다. 그러니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내가 영화롭게 된다. 그러니까 한다. 하나님이 자기만 위해서 사람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 자기를 영화롭게 할 자를 영화롭게 하려고 만들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탄의 말을 듣는 것은 영광의 길을 스스로 이탈한 것이다.
영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위임을 받고 그와 연합한 자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분에 속한 것이지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훈장을 만들어서 달고 다닌다. 그러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누가 준 것이냐가 중요하다. 대통령이 준 것이냐 아니면 자기가 만든 것이냐다. 자기가 만든 것은 아무리 달고 다녀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훈장은 남이 나에게 달아줘야 하고 나보다 높은 자 나보다 큰 자가 달아주는 것이 영광스러운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서는 영광스럽지 않다. 그리고 나보다 못한 자들이 와서 달아주는 것도 영광스럽지 않다. 그러니까 영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예를 들면 군인에게 있어서 계급장과 훈장은 대통령에게 속한 것임으로 그의 명령 안에서 그와 연합한자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위임과 연합을 이탈했음으로 인생에게 약속 된 영광을 얻지 못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군인에게는 계급장과 훈장이 있다. 군인들을 보면 가슴에 뭔가를 많이 달고 있다. 그것이 다 훈장이다. 이 훈장의 근원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에게 있으니까 모든 훈장은 대통령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명령 안에서 그와 연합한 자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대통령에게 속한 것이니까 대통령의 명령을 무시한다든지 따르지 않는 자는 받을 수 없다. 그 명령을 존중하고 따르는 자가 받을 수 있다. 000형제도 간단하다. 훈장을 많이 받으려면 대통령에게 충성해야 한다. 대통령이 국군 통수권자니까 그렇다.
위임과 영광을 이탈했기 때문에 인생에 약속된 영광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을 안 듣고 사탄의 말을 들었을 경우는 위임을 이탈한 것이다. 그냥 말을 좀 듣고 안 듣고 하는 이런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이 부모 말을 듣고 안 듣고 하는 이런 문제가 아니고 우리에게 맡겨진 중대한 위임을 이탈한 것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영광을 자기를 위하여 스스로 만들어보려고 헛되이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다. 위임과 연합을 이탈한 자는 스스로 영광의 길에서 이탈한 것이다. 영광이 없는 인생은 스스로 영광을 만들려고 하지만 무엇을 해도 허무로 끝이 나는 것이다. 영광은 받아야 하는 것이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영광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보려고 헛되이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 지금 인생이다. 왜 인생이 피곤한가? 물론 배고플 때 밥을 먹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도 피곤한 것이지만 이것 때문에 인간이 고통스럽고 피곤한 것이 아니고 자기 영광을 만들려고 하는 이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어떻게든 자기를 알아주게 만들려고 하는 그것이 어렵다.
위임과 연합을 이탈한 자는 스스로 영광의 길에서 이탈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만들 수 없다. 영광이 없는 인생은 스스로 영광을 만들려고 하지만 무엇을 해도 허무로 끝나버리고 만다. 훈장을 보면 실 같은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있는데 내가 훈장을 금으로 멋있게 만든 것은 실로 만들어 놓은 것만 못하다. 왜냐하면 실로 만들어놓은 것은 대통령이 준 것이고 삐까뻔쩍하게 금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내가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허무한 것이다. 자기가 훈장을 만들어서 다니려고 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잔뜩 만들어서 붙이고 다녀보지만 이 훈장을 누가 줬냐는 것이다. 영광은 받아야 하는 것이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다. 영광을 스스로 만들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네가 땀이 흘러야 먹고 살 것이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은 네가 아무리 영광을 만들지만 결국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3). 인간의 가치를 상실하게 함
눈이 밝아짐으로서 자신의 벗었음을 알고 무화과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자신을 가렸다고 한다. 스스로 자신을 판단하게 됨으로서 하나님이 보시고 심히 좋다고 하신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 세계와 그 사랑을 잃은 것이다. 축복 속에서 그 행복을 알지 못하면 더욱 불행한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상실하게 한다. 눈이 밝아짐으로써 자신이 벗었음을 알고 무화과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자신을 가렸다고 한다. 스스로 판단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이 보시고 심히 좋다고 하신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 세계와 그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보고 부끄럽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보시고 심히 좋다고 한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도 자기를 인정하지 못하게 되었고 하나님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왜?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나를 보니까 부끄럽다.
여러분도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자기를 검토해 보면 알게 된다. 일일삼성이라는 말이 있다. 하루에 자기를 세 번 살핀다는 말이다. 하루에 세 번씩 자기를 살펴보면 전보다 조금 향상된 사람이 될 수는 있는데 하루에 세 번씩 자기를 살핀다고 하는 것은 인생을 아주 괴롭게 하는 것이다. 왜 자기를 살피고 살아야 하는가? 자기가 잘 못한 것이 있으니까 살피고 살라는 것이다.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판단해보면 올바른 인간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시고 심히 좋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뭘 보고 좋다고 했냐는 것이다. 내가 나를 보면 이렇게 불완전하고 또 희랍인들은 인간은 불완전하다고 했고, 우리 동양 사람들이 볼 때 인간은 비도덕적이라고 봐진다. 잣대에 따라서 달라진다. 보는 자가 어떤 자냐에 따라서, 즉 어떤 자로 보는가에 따라서 나 자신이 달라진다. 그런 자로 볼 때 마다 인간이 만족한 경우가 없는데 하나님은 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했을까? 그러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그것을 찾아야 내가 행복할 것이 아니겠는가?
사랑이 무엇인가? 내가 어떤 사람이던지 간에 나를 보고 심히 좋다고 하면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이 다른 것이 아니다. 빵을 사준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겠는가? 쫓아다닌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겠는가? 그것이 아니다. 내 모든 것을 보고 심히 좋다고 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부모는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다. 부모는 자기 자식의 허물을 잘 모른다. 허물을 안 보고 생명으로만 보기 때문에 그저 예쁘고 그저 좋은 것이다. 남이 욕해도 좋으니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나를 분석해서 나를 판단해서 좋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면 아무도 나를 사랑할 사람이 없다. 그런데 내게 허물이 있던지 말던지 상관없이 그냥 좋다고 하는 것이 사랑이다. 하나님이 심히 좋다고 하는 그것을 발견해야 참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고 참 사랑을 발견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그저 무조건 사랑 받고 무조건 좋다하는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커서도 그 사람의 심성이 부드럽고 온화한 법이다. 그런데 어려서 부모로부터 왜 이 모양이냐며 욕을 듣고 공부도 못한다는 힐책을 매일 들은 사람은 강팍해 진다. 집에서 부모가 아이를 때리면 아이는 밖에 나가서 다른 친구들을 때린다고 한다. 배운대로 하는 것이다. 그전에 그런 경우를 봤는데 자기 아버지가 어린애를 정말로 호되게 다루니까 그 앞에서는 꼼짝을 못하지만 밖에 나가면 다른 애들을 해한다. 이상하다. 그러니까 부모의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심성이 부드러워진다. 자기의 적을 못 만났으니까. 그런데 늘 꾸중만 듣고 사는 아이는 항상 긴장을 하고 사니까 세상에 나가서도 그런 긴장 속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랑을 잃지 않아야 되는가하면 심히 좋다고 하는 그 사랑을 잃지 않아야 된다. 내가 봐도 나는 사랑스럽지 못한데 왜 하나님은 심히 좋다고 하는지 이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니까 좋다고 하겠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을 보시고는 하나님이 다 좋다고 하신 것이다. 거기서 지어진 사람은 바로 나고 여러분이다. 예외가 없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보고 좋다고 한 것이다.
인생의 가치는 위임에 따른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때는 자기를 위임할 자가 바로 사람이기에 보기에 좋다고 하신 것이다. 선해서 좋다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잘해서 좋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임할 자로써 좋다는 것이다. 앞에 있는 이 마이크가 잘 생겼는가? 잘 생긴 것은 아닌데 나는 이 마이크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왜냐하면 내 음성을 잘 확성해 주기 때문이다. 모양이 이것보다 더 나쁘게 생겼을지라도 소리만 잘 내주면 나는 그것을 좋아할 것이다. 모양이 굉장히 예쁘게 생겼을지라도 내소리를 잘 내주지 않으면 나는 싫어한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왜 사람을 좋아하시는가 하면 자기를 위임할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한다. 그점을 봐야 한다. 하나님이 그 점을 보고 나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가 자기를 판단해서 좋으니 나쁘니 악하니 선하니 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3). 인간의 가치를 상실하게 함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이 정하신 가치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이 보시고 좋다고 하신 가치를 선악을 아는 지식의 잣대를 가진 인간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온전한 가치를 바로 앞에 두고도 스스로 가치를 추구한다고 일생을 허비하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이 정하신 가치를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이 보시고 좋다고 하는 가치를 선악을 아는 지식의 잣대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선악을 아는 잣대를 가지고 나를 판단하고 또 남을 판단한다. 그 기준 그 잣대를 가지고는 하나님이 좋다고 하는 가치를 잴 수가 없다. 전혀 길이 다르고 용도가 다르니까 그것으로 잴 수가 없는 것이다. 도량형에는 거리를 재는 것도 있고 무게를 재는 것도 있다. 무게를 재는 것이 저울인데 그 저울로 거리를 어떻게 재겠는가? 저울을 가지고 거리를 잴 수 있는가? 무게를 가지고 거리로 환산할 수 있는가? 못 한다. 거리를 잴 때는 cm자가 필요하고 무게를 잴 때는 저울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가치를 선악을 아는 지식의 잣대로서는 모른다. 모르니까 너는 이것을 먹지 말라고 한 것이다. 선악을 아는 잣대를 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것도 내가 그 사람을 모르는 것이고 자기를 판단하는 것도 자기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인가하면 하나님이 나를 심히 좋다고 하시고 자기를 위임하는 그 존재로서 내가 좋은 것이다. 나는 여기서 자부심이 생긴다. 내가 뭔가 자랑거리가 있어서 하나님이 좋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위임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다. 흙이 왜 가치가 있는가? 씨를 뿌릴 수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흙처럼 가치가 없는 게 없다. 흙을 좋아하는 것은 씨를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지금 도시에서는 그렇게 되어 지고 있는데 선진국에 가보면 도무지 흙이라 것이 안 보인다. 그러니까 신발을 신고 다니다가 그냥 방안으로 그대로 들어가서는 침대에 벌렁 눕는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너무 지저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신발을 신고 다녀도 흙이 묻을 데가 없다. 흙이 묻을 데가 없으니까 방안에 들어가나 침대에 올라가나 매 한가지다. 가는 곳마다 아스팔트 아닌 곳엔 다 잔디를 깔아 놓았기에 흙이 안 보인다. 그런데 밭에 가면 흙이 보인다. 왜냐하면 밭은 흙이어야 되기 때문이다. 보기 좋은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릴 수 있어야 되기 때문에 농부는 그 흙을 보고 심히 좋다고 할 것이고 차를 몰고 가는 사람은 아스팔트를 보고 심히 좋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서로 가치가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좋다고 하는 것은 가치가 다른 것처럼 우리는 이 가치를 발견해야 형제를 형제로 볼 수 있고 교회를 교회로 볼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자기 자신대로 볼 수가 있다.
인생의 가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상품의 가치는 사용자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들여 만든 제품이라 해도 그 가치는 사용자가 결정하는 것이다. 인생도 어떤 경우 사람들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면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의 가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상품의 가치는 사용자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들여서 개발해 놓은 제품이라 해도 쓸 사람이 없으면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다. 가치는 사용자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우리 교회 어떤 자매가 신제품이 나오면 출시를 하기 전에 동네 아줌마들을 모아놓고 그 제품에 대한 평가를 받아서 회사에다 제출을 하는 일을 하는데 그러면 회사에서는 그것이 팔리겠구나 아니면 안 팔리겠구나 하는 것을 안다고 한다. 소비자의 의견을 듣는 것이다. 서울의 어떤 자매가 그 일을 하는데 일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돈은 많이 받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신제품을 그냥 출시하는 것이 아니고 소비자의 의견을 먼저 듣는 것이다.
상품의 가치는 사용자가 결정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가치는 나를 사용하는 자가 결정하는 것이다. 회사에 가면 내 인생의 가치가 회사의 잣대로 결정되고 학교에 가면 내 인생의 가치는 학교의 잣대로 결정된다. 그러니까 여기 가도 가치가 있고 저기 가도 가치가 있는 사람은 참 좋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슬퍼 할 일이 아니다. 다 인정을 안 하더라도 유일하게 나를 인정하는 곳이 있다. 하나님은 나를 인정하고 있다. 다윗은 시편에서 ‘부모가 나를 버릴지라도 여호와는 나를 버리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사람은 많이 있다. 요즈음에는 더군다나 많아졌다. 세상이 이러니까 앞으로는 더 많아 질 것이다. 낳아서는 던져놓고 가버리는 사람이 많다.
하나님께서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필요가 있으니까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셔서 필요한 것이 이니라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옛날에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몰랐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자신의 독생자를 피 흘리기까지 십자가에 뒀다. 이렇게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지 몰랐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께 필요한 것이 인생이구나!’ 이것을 알고 나니까 ‘아 그래서 이분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이것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흔들리지 않았다. 옛날에는 ‘어느 날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했다가 또 어느 날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 안하는 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사랑의 척도가 늘 변했다. 왜? 내가 비중을 갖고 있으니까 그렇다. 나의 어떠함에 따라서 오늘은 새벽기도를 하고 오늘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다음날은 무엇을 하고 시장에 돌아다니고 하다 보니까‘아이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맨날 그렇게 한다. 그러고 나면 또 회개하고 가슴치고 또 다시 살아보고 맨날 그렇게 한다. 주일날 설교를 듣고 나서 월요일부터 그렇게 산다고 꾸물꾸물 하다가 또 어떻게 간신히 간신히 살다가 주일날 다시 오고 이렇게 살았다. 그런데 흔들리지 않는 자리가 있다. 그 분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분이 나를 필요로 하니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필요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는가?
내가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이 마이크가 나는 절대로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이 마이크를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잘생겼냐 못생겼냐가 중요하지 않고 이 마이크가 소리를 잘 내주기 때문에 이 마이크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예식장에 내가 잘 안 가려고 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시끄러운 것도 시끄러운 것이지만 마이크가 나빠서다. 싸구려를 갖다 노니까 소리가 안 들린다. 뒤에서는 소리가 안 들리니까 더 시끄럽다. 그래서 가능하면 안 가고 싶다. 그런데 어떤 예식장에 가면 잘 된 데가 있다 그런 곳은 또 가고 싶다. 왜 또 가고 싶냐? 마이크 때문에 또 가고 싶다. 다른 이유는 하나도 없다. 내가 예식장 사장을 아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마이크 하나가 좋아서 또 가고 싶어진다. 지난번에 간 예식장에는 마이크가 잘 돼 있어서 말이 잘되니까 하객들이 조용히 했다. 정말 좋았다. 그런데 어떤 예식장에 가서 주례사를 한다고 하는데 뒤에서는 막 떠들고 난리다. 안 들리니까 떠드는 것이다. 그런 곳은 다시는 안 가고 싶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필요가 있다. 이것은 나이가 늙으나 젊으나 상관이 없다. 사람이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사람이기만 하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생명을 내가 표현할 수가 있다. 사람이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인생이 어떤 경우에 사람들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면 가치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부분적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영원히 나를 필요로 하신다. 또한 영원히 나를 사랑하신다. 영원히 필요하니까 영원히 사랑한다.
나는 내 마음에 드는 것 하나만 있으면 평생 가지고 있다. 내 성질이 잘 안 바꾼다. 옷도 한번 좋으면 다라질 때 까지 입는다. 한번 싫은 것은 싫고 좋으면 계속 좋다.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것이 별로 없다. 좋으면 나는 계속 좋다.
하나님이 사용하는 가치 이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다. 하나님이 사용하는 가치 그래서 내가 어디에 사용 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는 곳에 나를 드리면 나는 영원한 가치를 소유한 사람이 되게 되고 사장님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나를 드리게 되면 한 15년에서 길면 20년 정도 가치를 소유하게 된다. 요즘에는 그것도 안 된다. 40대 퇴직 이런 것도 많이 있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다. 먹고 살려니까 해야 되기는 해야 되는데 그러나 거기다가 내 인생을 걸지는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나를 영원히 인정할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일시적으로 필요하니까 인정하는 것뿐이지 영원히 인정하지는 않는다. 일시적으로 인정해도 밥 주니까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기 위해서 인정하는 가치하고는 비교할 수 없다.
상품의 가치에는 사용자가 있는 것이 첫째 조건이지만 사용자의 수준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이다. 바가지는 다 가치가 있다. 그러나 똥바가지로 사용 될 수도 있고 물바가지로 사용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서 인생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이 또한 인생을 안타깝게 하고 헛되게 하는 것이다.
상품의 가치에는 사용자가 있는 것이 첫째 조건이다. 사용자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가치가 없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사용자의 수준이다. 누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그 수준에 따라서 이 물건을 이렇게 쓸 수도 잇고 저렇게 쓸 수도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바가지가 있다. 이 바가지는 바가지 자체로 가치가 있기보다 사용하는 데 가치가 달라진다. 똥바가지로 사용 될 수도 있고 물바가지로 사용 될 수도 있는 것이 바가지다. 그러므로 사용자의 수준이 똥바가지로 사용될 사람 앞에 가면 아무리 해도 똥바가지 밖에 안 된다. 그러나 사용자의 수준이 물바가지로 사용될 곳에 가면 나는 못생겼어도 물바가지가 된다는 것이다. 물바가지라고 꼭 잘생긴 것만 물바가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쪼그라졌어도 물바가지가 되는 것도 있고 아주 잘 생겼어도 똥바가지가 되는 경우도 있다. 누가 나를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가 나를 사용한다면 나는 바로 가장 존귀한 자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아주 간단하다.
똑같은 가방이라도 박근혜 대통령이 들고 다니는 가방을 보면 같은 가방일지도 모르고 싸꾸려일지도 모지만 그런데도 대통령이 들고 다니는 가방이기 때문에 아주 비싼 가방같이 보인다. 그 안에 비밀문서가 들어 있을 것 아니겠는가 블랙박스가 들어있다.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어떤 것이 들어있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항상 남자 대통령들의 가방을 들어주는 경호원이 따라 다닌다. 그 가방이 중요해서 그렇다.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을 만큼 중요한 가방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통령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자니까 항상 가방을 들고 다닌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지만 그 안에 든 핸드폰도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꼭 아이폰이라고 해서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삼성이라고 할지라도 아주 중요하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전부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 자체가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누가 나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내 가치는 달라지게 된다.
하나님을 떠나서 인생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정말 우수운 것이다. 자기 혼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뭐하겠는가. 아무도 써주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자기 혼자 가치가 있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은 안타까운 헛수고다. ‘참 안타깝다.’ 우리가 볼 때 참 안타까운 그런 사람이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가 자기 가치를 추구하고 있으니까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 내 인생을 사용하는 데에 따라서 가치가 있고 누구에게 사용되는냐에 따라서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한다.
4) 인간의 자존감을 무너지게 함
나무 잎으로 몸을 가린 것은 스스로 자기 약점을 가리고 자존감을 세우려 한 것이다. 하나님이 세워주셔야 할 인간의 자존감을 만물 중에 그 무엇이 세워줄 수 있겠는가? 햇볕이 떠오르면 즉시 말라버릴 나무 잎으로 벗은 몸을 가린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며 어리석은 일인가?
네 번째는 인간의 자존감을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나무 잎으로 몸을 가린 것은 스스로 자기 약점을 가리고 자존감을 세우려 한 것이다. 자존심하고 자존감은 다르다. 자존심은 자기 배짱이고 자존감은 내 존재에 대한 만족이다. 여기서 자기 약점을 가리려고 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자존감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위임에 있다. 그것이 우리의 자존감이다. 하나님이 세워주셔야 할 인간의 자존감을 만물 중에 그 무엇이 세워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위임으로 채워져야 할 내 자존감을 어떤 다른 것이 와서 내 인생의 자존감을 채워주겠냐는 것이다.
햇볕이 떠오르면 즉시 말라버릴 나무 잎으로 벗은 몸을 가린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며 어리석은 일인가? 최소한도 대구교회 오신 분들은 어리석은 노력은 하지말기 바란다.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는 그런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자.
그런데 인간은 이 일을 위해서 일생을 허비하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이것을 자기 의라고 한다. 자기 의로 하나님 앞에 서려는 것이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연합의 자리(창2:25)를 이탈한 인간은 그 무엇으로도 그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창세기2장25절에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더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은 부끄럽지 않다. 이 말은 하나님 위임을 가지면 부끄럽지 않다는 말이다. 그것을 이탈했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부끄러움을 가릴 수가 없다. 흙은 씨와 연합하지 않고 홀로 있으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흙이 어떻게 자기가 자랑스러울 수가 있겠나. 부끄럽지 않는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 위치를 이탈케 함으로 부끄럽고 두렵게 된다.
5). 위치를 이탈케 함으로 부끄럽고 두렵게 함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고 한다. 아담은 인간의 위치를 잃었다 그러므로 두려운 것이다. 만유는 그 지으신 이 앞에서 각각의 위치가 있다. 식물은 식물의 위치가 있고 동물은 동물의 위치가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사람의 위치가 있는 것이다. 경기장의 선수들은 감독의 지시에 따라 각자의 위치가 정해진다.
하나님께서도 만유의 창조자요 감독자로서 만유에게 합당한 위치를 부여하였다. 그런데 사단이 먼저 위치를 이탈했고 인간을 유혹하여 이탈하게 하였다. 이로써 우주질서가 파괴 되었고 위치가 없는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그의 심판이 두려운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사이에 숨었다한다. 아담은 인간의 위치를 잃어버렸으므로 두려운 것이다. 요즘 회사에서 제일 두려운 것이 나가란 말을 하면 차라리 좋은데, 나가란 말을 안 하고 책상만 딱 치운다. 아침에 출근하고 보니 자기 앉는 책상이 없어 두려운 것이다. 나가라면 노동법에 위반 되니까 나가란 말은 안하고 책상만 딱 치운다. 그러니까 인간의 위치를 잃었기 때문에 사람은 두려운 것이다. 이것은 우스운 이야기지만 인간이 개하고 비교하면 이상하지만 개는 길가에서 똥을 싸도 아주 당당하게 싼다. 어떤 개가 우리 집 잔디밭에서 똥을 싼다. 길가 옆에 다른 흙도 있는데 거기서 싸면 좋을 텐데 일부로 잔디밭에 들어와서 싼다. 이놈은 당당하게 싸고 나간다. 자기위치가 개다. 자기위치가 개니까 아무렇지 않다. ‘야, 저놈은 하나님이 주신 위치로 당당하구나.’ 사람은 사람의 위치에 있으면 얼마나 당당하겠는가. 개도 똥을 싸도 당당하게 싸는데,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위치에 있으면 얼마나 당당하겠나.
만유는 그 지으신 이 앞에서 각각의 위치가 있다. 식물은 식물의 위치가 있고, 동물은 동물의 위치가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사람의 위치가 있다. 경기장에 있는 선수들 보면 감독의 지시에 따라 각자의 위치가 딱 정해져 배치되어있다. 제멋대로 서 있으면 안 된다. 감독이 서 있으라는 데 있어야 한다. 골키퍼가 자기 멋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 딱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골키퍼가 너무 멀리 나와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 너무 멀리 나와 공을 잡으려 하다가 놓친다. 그때 텅 비어있으니까 백발백중 들어간다. 위치를 지키는 것이 참 중요하다.
위치가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위치가 없는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심판이 두려운 것이다. 헛되고 썩어질 것을 위하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킨다.
6). 헛되고 썩어질 것을 위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킴
사도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부정)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썩어질 것과 허무한 것을 숭배함으로서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사람 위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다(롬3:23참). 영광을 나타낼 자가 썩어질 것을 따르면 영광을 주실 자가 진노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썩어질 것과 허망한 것을 숭배하므로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사람에게 머물러 있다고 한다. 영광을 나타낼 자가 썩어질 것을 따르면 그냥 좋은 게 아니고, 영광을 주실 자가 진노한다. 영광을 주실 자는 영광을 줄려고 준비하고 있다. 영광을 주기 위해서 위임했다. 그런데 이 위임을 거절하고 썩어질 것을 따르고 있으면 영광을 줄자가 진노한다. 불가에서는 너의 하나님은 성도내고, 분도내고 온전하지 않지 않느냐. 모든 것에 관대해야 되고 관용해야 되지, 하나님이 돼서 화도 내고 신경질도 내서 그것은 저급하다. 그것은 영광이 없는 세계에서 하는 말이다. 영광을 줄자가 아니면 화낼 일도 없다. 영광을 줄려는 자이기 때문에 화를 낸다. 거기는 영광을 줄자도 없고, 받을 자도 없고, 자기 알아서 자기 사는 대로 산다. 광해임금하고 허균하고 관계를 보면 광해임금이 허균을 굉장히 사랑한다. 왕이지만 친구로 철석같이 믿은 사람이다. 그런데 허균이 반란을 일으키자 마지막까지 물어본다. 지금이라도 돌이킬 수 없냐! 마지막까지 간청한다. 그러나 허균은 내가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 때문에 죽은 사람이 많다. 지금 나만 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광해군은 마지막 분노를 터트려 능지처참하라고 명령하게 된다. 사랑했지만,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너무 진노하게 된다. 광해는 그 이후로 폭군이 되게 된다. 자기가 신뢰하는 사람을 잃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영광을 낼 자 앞에서 썩어 질 것을 따르고 있으면 영광을 주실 자가 진노한다.
가인과 아벨은 자기들이 스스로 선택한 제물로 제사를 드리다가 살인극을 연출했으며 하나님의 경륜에서 제외 되었다(창세기5장은 셋의 계보로 이어짐). 이것은 오늘날도 동일하다 스스로 만든 제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드린 제물을 보면 그를 핍박하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은 스스로 선택한 제물로 제사를 드렸다. 이것이 이탈자의 선택이다. 하나님과 연결이 안됐으니까 자기가 알아서 제물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가인은 농사짓는 자이고 곡식을 가져오고, 아벨은 양치는 자이므로 양을 가져왔다. 그런데 이 제물을 드리다가 살인극이 연출되고 말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륜에서 두 사람 다 제외되고 말았다.
창세기 4장은 그렇게 끝나고 셋으로 이어지는 다른 족보가 시작된다. 가인과 아벨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자기가 선택한 제물로 ????참 중요한 문제이다. 기독교 안에서 더군다나 그렇다. 결국 자기가 선택한 제물로 제사를 드렸으니까 자기제물이 안 받아지니까 분노가 나서 아우를 죽였다. 그리고 이제 셋의 계보로 이어지는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의 결과의 일단락이 창세기 4장에서 표현되고 있다.
선악과를 먹고 나면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이 이것은 좋아할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자기가 선택한다는 것이다. 내 잣대로, 내 생각으로 선택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좋아하는가, 좋아하지 않는가 하는 것보다 내 기준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보이지 않는 분인데 가서 ‘뭘 좋아하십니까!’ 물어 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자기 생각의 좋을 대로 제물을 드려야 된다. 그런데 제물을 드렸으면 되는데 하나는 받아들이고 하나는 안 받아 드리니까 분노가 나서 죽였다.
종교(宗敎) 안에서 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졌나하면 오늘도 동일하다. 자기 스스로 만든 제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드린 제물을 보면 핍박을 한다. 하나님이 드리라고 하는 제물을 드렸으면 다른 사람이 어떤 제물을 드리거나 상관이 없다. 나는 하나님이 드리라 하는 물을 드렸으니까. 그런데 자기 스스로 만든 제물로 제사를 드리고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고, 종교생활을 하고, 예배를 드리고 하고 있기 때문에 만일 거기에 어긋나면 죽이려고 한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모른다. 오늘날도 동일하다. 종교적으로 보면 자기가 만든 제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알면 된다.
자기가 만든 제물로 드린 사람은, 다른 사람이 드린 제물을 볼 수가 없다. 유태인들이 왜 예수를 죽였나를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 유대인은 자기들이 만든 제물로 제사를 드리고 있는 사람이다. 자기들하고 예수님의 제사가 달랐다. “이 성전을 헐라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겠다.” 아니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니까 유대인들과는 제사 드리는 방법이 다르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다르다. 그래서 예수를 이단이라고 처형하게 된 것이다. 참람하다.
예수님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자기의 전 생명을 다해서 섬기고 있는데 이것이 유대인의 섬기는 방법과 다르다. 이 말은 사람이 만든 제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기가 만든 제물로 섬기고 있느냐? 아니면 유태인들이 자기가 만든 제물을 섬기고 있느냐?’를 분간하려면 결과를 보면 안다. 예수님은 자기가 만든 제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해서 진짜로 거룩하게 지키고 있다. 성전을 헐라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겠다한 것은 자기의 전 존재를 드려서 성전이 되고 있다는 말이다. 자기의 생명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제사 드리는 것을 보고 막 죽이려고 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였다. 그러니까 누가 자기가 만든 제물을 섬기는 자이냐? 하는 것을 보면 남을 죽이는 사람들이 자기가 만든 제물을 섬기는 자이다.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오늘날도 동일하다. 스스로 만든 제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드린 제물을 보면 핍박하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공급이 없는 인간은 영광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헛된 영광을 구하느라고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허무한 것을 숭배하다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또 진노하신다. 밭을 만들려고 애를 쓰고 돈을 많이 들여서 만들어 놨는데 이 밭이 씨를 안 받아들인다. 주인이 뿌린 씨를 안 받아들이고 잡초만 받아들인다면 주인은 진노하신다.
또한 하나님의 공급이 없는 인간은 영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헛된 영광을 구하느라고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허무한 것을 숭배하다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진노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께서 자기가 쓰시기 위해서 만유가운데서 유일하게 선택을 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쓰심에서 이탈해서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진노하겠는가? 부처님이 아니니까 진노하는 것이다. 부처님 같으면 진노 안 하겠죠? 여호와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7). 하나님의 동산을 떠나서 바벨로 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지어진 산 혼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기 위하여 그의 동산에 두셨다. 그런데 사단의 말을 들은 그는 하나님의 동산에서 추방 되어 바벨로 향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동산을 떠나서 바벨로 갔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지어진 산 혼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기 위하여 그의 동산에 두셨다. 왜 동산에 뒀나? 그것은 자신과 함께하기 위해서 뒀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동산이다. 여호와의 동산이다. 여호와께서 사람과 함께하는 자리를 동산이라고 한다. 사람은 하늘에 못산다. 하늘에 못사니까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살 곳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동산이다. 이것이 뒤에 발전을 해서 성막이 된다. 동산을 잃었으니까 그 동산 대신에 만들게 된 것이 성막이다. 그 성막은 회막이라고도 한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그러니까 출애굽기 이후에 동산은 결국 성막이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온전한 것이 올 때까지 그것이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왔을 때 예수님은 바로 그 성막자체였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보자라고 한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그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성막이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기위해서 세워놓으시고 창설하신 것이 동산이다.
바벨은 혼잡과 분열의 세계로서 허물어질 성질의 도성이다. 이 길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 정해진 당연한 길이다. 지식으로는 바벨 밖에는 세울 수가 없는데 그 성은 본질적으로 무너질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탄의 말을 들은 그는 하나님의 동산에서 추방되어 바벨을 향하게 되었다. 어디로 가는가? 바벨로 간다. 선악을 아는 지식을 먹고 인생을 경영하게 되면 그 결과는 바벨이다. 바벨이라는 말은 혼잡과 분열이라는 말인데 혼잡과 분열의 세계이다. 허물어질 성질을 갖고 있는 도성이다. 왜냐하면 지식으로 조합된 성이니까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성질을 갖고 있다. 이 길은 선악과를 먹는 인간에게 정해진 당연한 길이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바벨밖에는 갈수가 없다. 그것이 최선의 길이다. 지식으로는 바벨밖에는 세울 수 없기 때문에 그 성은 본질적으로 무너질 성질을 갖게 된다.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생명의 성이 아니다. 지식으로 조직된 성이기 때문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세상은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되어있다.
지금 세계의 사정을 보면 잠시 동안 조용하다. 어디서 또 터질지 모른다. 물론 중동에서는 계속 전쟁을 하고 있고 아프리카에서도 전쟁을 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일본이 덜썩 덜썩하고 있으니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좌우지간 편안하게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인간이 이상하다. 우리 생각 같으면 각자 다 편안하게 살면 좋을 것 같다. 싸울 필요가 뭐있나? 그런데 한판 겨루자고 으르렁거리고 있다. 중국과 일본이 한판 겨루고 있다. 언제 이것이 터질지 모르지만 터지면 우리가 고래등살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 된다.
그래도 이 성은 하나님의 성이 나타날 때까지 버티다가 그 영화롭고 아름다운 생명의 도성이 나타날 때 큰 소리를 내면서 무너지고 말 것이다(계18:2참). 선악과의 최후는 무너질 바벨이다.
바벨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 서로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니 언젠가는 무너지게 된다. 아무도 굴복하려는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굴복하려면 비참해진다. 그러니까 어찌하던지 강자가 되려고 한다. 일본은 이것을 빌미로 해서 재무장을 시도하고 있다. 평화헌법에 따르면 그들은 무장하거나 전쟁을 못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이런 여러 가지 빌미를 만들어서 분위기를 조성해가지고 결국 평화헌법을 치우고 전쟁도 할 수 있는 헌법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래서 아베가 꼼수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잠시 동안 평안하다해도 또 언젠가는 뒤집어진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월남전쟁이 일어났다. 계속 전쟁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 성은 하나님의 성이 나타날 때까지 버티다가 그 영화롭고 아름다운 생명의 도성이 나타날 때 큰 소리를 내면서 무너지게 될 것이다. 왜 이 바벨론은 아직도 안 없어지고 있는가? 늘 무너지고 싸우고 하면서도 왜 이 바벨론이 계속가고 있는가? 그것은 영화롭고 아름다운 성이 아직 안 나타나서이다. 요한계시록은 이것을 말하고 있다. 영화롭고 아름다운 성이 나타나기 직전에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신부가 준비될 때 교회가 준비될 때 하나님의 성이 준비될 때 그 바벨론이 무너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길은 이것이다. 우리가 아름다운 교회가 될 때 세상이 무너진다.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이 무너지게 되고 밖에 있는 세상이 무너지게 되고 다 무너진다. 문제는 교회가 영화롭고 아름다운 성이 되는 것이다. 생명의 성이 되는 것이다. 선악과의 최후는 무너지는 바벨론이다. 생명과의 최후는 영화롭고 아름다운 생명의 도성 새 예루살렘이다.
잘 들어주셔서 감사하고 조는 사람이 없어서 감사합니다.
박수 많이 쳐주셔서 감사합니다.
[ 기 도 ]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무엇이관대 이처럼 사랑하시고 우리가 무엇이관대 이처럼 존귀하게 여기시고 만물의 찌끼같은 인생이라도 하나님은 필요하고 존귀하게 여기시고 심히 좋다하시고 그리고 사랑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를 아껴주신 것을 감사하고 우리를 보호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지속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의 나라를 기다리는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일생이 주님의 위임을 받은 자로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위임을 받은 자로서 그것을 위해서 살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 이외의 어떤 것도 더 가치 있는 것이 없는 줄로 알고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