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낭콩이 나뭇가지에
새벽 산행에 발걸음이 느려진다. 시간적 여유를 부리다 평소보다 늦게 집을 나선다. 하루가 멀다하고 찾는 공원 체육장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든다. 나무 계단을 따라 큰 돌은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겨 다니게 한다. 굵은 나무를 휘감아 오르던 칡넝쿨은 가지 끝에서 하늘로 솟아올라 숲을 이룬다. 등산로 따라 길 가장자리는 사람의 손길이 닿아 풀 정리가 가지런하다.
가슴보다 아래에 머물러 보살핌이 필요했던 동백나무는 어느새 내 키를 훌쩍 넘어 이제는 고개를 올려 본다. 길 양쪽에 길게 이어진 동백나무는 강낭콩을 쏟아 부은 듯 가지 끝자락마다 주렁주렁 꽃 눈이 매달렸다. 어느 순간 훌쩍 자란 수목에 자연의 힘이 다가온다.
산등성이 길 따라 이어진 억새는 여느 명소 못지않게 새로운 볼거리를 안겨준다. 띄엄띄엄 야생으로 자란 작은 풀포기가 아름드리 섶으로 벌어졌다. 계절마다 돌봄을 받은 편백나무 사이로 군락을 이루어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은빛 물결이 일렁이는 커다란 화원이 따로없다. 동백나무에는 삼각 지지대가 세워지고 키 작은 잡풀은 베어져 뿌리만 겨우 남아있다. 가지런히 다듬어진 산길로 발걸음을 내닫는다. 내리막 길이 맞닿아 멈출 틈도 없이 발이 땅에 잠시 머물뿐이다. 새벽 산행은 몸과 마음의 여유를 안긴다. 자동차가 서로 비켜 가는 큰 길을 지나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 멀리 홀로 파도를 온 몸으로 맞으며 바다를 지키는 닭 벼슬 색깔의 등대가 선명히 다가온다.
순환 도로에 접어들 즈음 앞서가는 등산객과 인사를 건넨다. 부부인 듯 길가 풀 무덤을 헤집고 있다. 근처로 다가가 보니 늦가을 철모르고 자라난 쑥이 손에 들려 있다.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햇살에 옆으로 위로 손을 뻗었다. 길바닥을 덮은 빛바랜 굴참나무 잎에 발을 올린다. 푹신푹신한 느낌에 한 움큼 양손에 쥐고 힘껏 공중으로 던진다. 때맞춰 나를 반겨주듯 나뭇가지에 앉은 새 한 마리가 고운 목소리로 지저귄다. 도심 속 야산이 눈과 귀에 에너지를 퍼 붓는다. 오랜만에 토요일의 풍경을 가슴에 차곡차곡 채워 눌러 담는다.
산길은 자신의 발자국 소리만 뒤따른다. 전망대 도착을 앞두고 정중동을 깨는 기계음에 목 고개가 저절로 돌아간다. 등산로 풀 덤불을 정리하는 인부들의 손놀림이 시작되었다. 산새소리, 바람 내음에 파묻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흙 길을 더듬다가 발걸음이 드러누운 낙엽을 일으킨다. 떡갈나무, 옻나무, 생강나무, 단풍나무, 동백나무가 어울려 오방색으로 수를 놓는다. 이맘때가 등성이마다 넓은 도화지에 나무 종류마다 저마다의 창조물을 쏟아낸다.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선물에 경건함과 경외감까지 이어진다.
전망대 체육장에서 바라본 남해 바다는 때맞춰 떠오른 태양에 넓은 품을 내보인다. 고기 비늘이 반짝이듯 물결에 흰 빛이 반사된다. 잔잔히 밀려오는 물결 너머 만선을 꿈꾸고 출항하는 것인지, 잡은 물고기를 받으러 나가는지 뱃고동 소리를 남기고 수평선으로 사라진다. 산행 길이 파랑길로 이어지는데 한 팔 넓이의 형광색 현수막 내용이 기분을 언짢게 만든다. 이번 달 말이면 나무 계단을 철거한다는 안내문이다. 철거 후의 계획은 시장에 내다 팔았는지 연락처만 보인다. 도시에 살면서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산이 곁에 있어 좋다. 코앞에 마음만 먹으면 누릴 수 있는 자연이 풍성해서 즐겁다.
사람들은 접하기 쉽고 흔한 것의 혜택을 깨닫지 못하고 함부로 대하는 듯 하다. 하나 둘 줄어들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에야 복원하느라 야단법석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하지만 이것도 미치지 않는다. 소홀히 한 까닭에 많은 시간과 예산이 뒤따르는 경우를 흔하게 접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나 또한 몇 번 생각하고 결정한 일이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선택을 되돌리고 싶어한다. 홀가분하게 나선 새벽길이 기나긴 세월을 더듬어 나가는 전자시계처럼 가다 멈추기를 반복한다.
솟아오른 태양을 등에 업고 하산길이다. 겨울 채비를 위한 나뭇가지는 잎들을 떨구고 몸을 가볍게 한다. 옷차림도 색소따라 달리 갈아 입는다. 고개를 들어보니 바닥을 보였던 국가 지질공원 앞자락이 밀물로 무릎까지 채워진다. 공룡의 전성시대였던 백악기말의 환경을 한 눈에 보여주는 지질 명소다. 당시 지진이 기록된 다양한 산출 상태의 쇄설성 암맥과 고지질 바위 관찰이 가능하다. 억겁의 흔적을 어렴풋이 학창 시절과 맞닿아 본다. 암반으로 둘러 쌓인 무인도는 파도를 무수히 받아들였다가 떠나보낸다.
주말의 시작이 새의 깃털처럼 이어진다. 텅 빈 놀이터에는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 소리가 다가왔다. 쉼터 팔각정 마루 판에 강아지와 개 주인이 입구 문구에는 아랑곳 없이 자리 잡았다. 먹구름은 사라지고 파란 하늘 아래 햇살이 따뜻하게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