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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77권
63. 등학품(等學品)을 풀이함
【經】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배워야 할 평등한 법[等法]인지요?”
“수보리야, 내공이 바로 보살의 평등한 법이요 외공(外空) 내지는 자상공(自相空)이 바로 보살의 평등한 법이니라.
수보리야, 물질은 물질의 모양이 공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은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모양이 공하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모양이 공하나니,
수보리야, 이것을 바로 보살마하살의 평등한 법이라 하며 이 평등한 법에 머무르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물질이 다하기[盡] 때문에 배우면 살바야를 배우는 것이요,
물질이 여의기[離] 때문에 배우면 살바야를 배우는 것이며,
물질이 소멸하기[滅] 때문에 배우면 살바야를 배우는 것이요,
물질이 나지 않기[不生] 때문에 배우면 살바야를 배우는 것이니,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4념처 내지는 18불공법이 다하고 여의고 소멸하고 나지 않기 때문에 수행하며 배우면 살바야를 배우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가 말한 바와 같이 물질이 다하고 여의고 소멸하고 나지 않기 때문에 배우면 살바야를 배우는 것이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내지는 18불공법이 다하고 여의고 소멸하고 나지 않기 때문에 배우면 살바야를 배우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어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의 여(如)와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여,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여와 부처님의 여와 이 모든 여(如)는 다하여 소멸하고 끊어지는 것이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여를 배우면 살바야를 배우는 것이니, 이 여는 증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끊어지지도 않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여를 배우면 살바야를 배우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6바라밀을 배우는 것이요, 4념처 내지는 18불공법을 배우는 것이니,
만일 6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을 배우면 살바야를 배우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이와 같이 배우면 모든 배움[諸學]의 맨 끝을 다하는 것이요,
이와 같이 배우면 악마나 악마의 하늘이 파괴할 수 없는 바이며,
이와 같이 배우면 곧장 아비발치(阿鞞跋致)의 지위에 이르는 것이요,
이와 같이 배우면 부처님이 행할 바의 도를 배우는 것이며,
이와 같이 배우면 옹호(擁護)를 얻을 것이요 대자대비(大慈大悲)를 배우는 것이며,
부처님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는 일을 배우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이와 같이 배우면 3전(轉)12행(行)을 배우는 것이니, 법륜(法輪)을 굴리게 되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배우면 중생 제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요,
이와 같이 배우면 부처님 종자[佛種]를 끊지 않는 것을 배우는 것이며,
이와 같이 배우면 감로의 문[甘露門]을 여는 것을 배우는 것이요,
이와 같이 배우면 무위의 성품[無爲性]을 보이려 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하열(下劣)한 사람은 이렇게 배울 수도 없으니, 이렇게 배우는 것은 생사(生死)에 빠져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려 하는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끝내 지옥ㆍ아귀ㆍ축생 안에 떨어지지 않고,
끝내 변두리 땅에 나지 않으며 끝내 전다라(旃陀羅) 집에 가 태어나지 않고,
끝내 귀머거리ㆍ소경ㆍ벙어리나 팔이 굽거나 앉은뱅이가 되지 않으며,
모든 감관에 결함이 있는 일이 없고 권속이 성취되면서 끝내 외롭거나 빈궁하게 되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배우면 끝내 살생(殺生)하지 않으며, 나아가 끝내 사견(邪見)을 지니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배우면 삿된 생활로 살아가지 않고, 나쁜 사람이나 계를 깨뜨린 이[破戒者]에게 포섭되지 않으며,
이와 같이 배우면 방편의 힘 때문에 장수천(長壽天)에 나지 않느니라.
어떤 것이 방편의 힘인가?
「반야바라밀품(般若波羅蜜品)」에서 말한 것과 같이 보살마하살이 방편의 힘으로써 4선(禪)과 4무량심(無量心)과 4무색정(無色定)에 들면서도 4선ㆍ4무량심ㆍ4무색정에 따라 나지 않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온갖 법 가운데서 깨끗함을 얻나니, 이른바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을 청정케 하는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온갖 법은 본 성품[本性]이 청정하거늘 어떻게 보살은 온갖 법 가운데서 깨끗함을 얻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모든 법은 본 성품이 깨끗하느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런 법 가운데서 마음이 통달하여 침몰하지 않으면 곧 그것이 반야바라밀이니라.
이와 같은 모든 법은 범부들은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므로 보살마하살은 이런 중생들을 위하여 단바라밀 내지는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4념처 내지는 일체종지를 행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온갖 법 가운데서 지혜의 힘을 얻어 두려움이 없으며,
이와 같이 배우면 온갖 중생들의 마음이 향해 나가는[趣向] 바를 분명히 아느니라.
비유하건대 마치 대지(大地)의 조그만 처소에서 금은의 값진 보물이 나오는 것처럼,
수보리야,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아서 적은 사람만이 반야바라밀을 배울 수 있고 대부분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적은 사람만이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업을 받아 행하고 대부분은 소왕(小王)의 업을 받아 행하는 것처럼,
수보리야, 그와 같아서 조금의 중생만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일체지(一切智)를 구하고 대부분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니느라.
수보리야, 발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보살마하살 가운데서 적은 이만이 말한 그대로 행하고 있고, 대부분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머무르며,
많은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방편의 힘이 없기 때문에 적은 사람만이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르느니라.
수보리야,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이 아비발치 지위에 머무르려 하고 아비발치 무리 안에 있으려 하면 마땅히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 반야바라밀을 배울 때에는 간탐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계율을 깨뜨리거나 성을 내거나 게으름을 피우거나 산란하거나 어리석은 마음을 내지 않으며 그 밖의 다른 허물 있는 마음도 내지 않느니라.
물질의 모양을 취하거나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모양을 취하는 마음을 내지도 않고 4념처의 모양을 취하는 마음도 내지 않으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모양을 취하는 마음도 내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얻을 수 있는 어떤 법도 없으며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법에 대하여 마음을 내어 모양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배우면서 통틀어 모든 바라밀을 포섭하고 모든 바라밀을 더욱 자라게 하면서 모든 바라밀이 따르게 하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모든 바라밀을 그 안에 들게 하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아견(我見) 가운데는 62견(見)을 모두 포섭하는 것처럼,
수보리야, 이와 같아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도 모든 바라밀을 다 포섭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죽을 때에 목숨[命根]이 다하기 때문에 모든 감관[根]이 다 따라 없어지는 것처럼,
수보리야 이와 같아서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모든 바라밀이 다 따르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모든 바라밀로 하여금 저 언덕[彼岸]에 건너가게 하려면 마땅히 깊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로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배우는 이는 온갖 중생 위에 우뚝 서느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 안에 있는 중생들을 많다고 여기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한 염부제 안에 있는 중생도 오히려 많사온데 하물며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삼천대천세계 안의 중생들이 한꺼번에 모두 사람 몸이 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에, 어떤 보살이 몸과 수명이 다하기까지 그 많은 부처님께 의복ㆍ음식ㆍ침구ㆍ탕약과 살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양한다면,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은 이런 인연 때문에 많은 복을 얻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매우 많을 것입니다. 매우 많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선남자ㆍ선여인보다 반야바라밀을 배우면서 설한 대로 수행하고 바르게 기억한 이가 얻는 복이 더 많으니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세력이 있어서 보살마하살로 하여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이 온갖 중생 위에 우뚝 서려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며,
구호할 이 없는 중생에게 구호할 이가 되어 주려 하거나,
귀의할 데 없는 중생에게 귀의할 데가 되어 주려 하거나,
궁극의 도[究竟道]가 없는 중생에게 궁극의 도를 지어 주려 하거나,
눈이 먼 소경에게 눈이 되려고 하거나,
부처님의 공덕을 얻으려 하거나,
모든 부처님의 자유자재한 유희(遊戱)를 지으려 하거나,
부처님의 사자후(師子吼)를 지으려 하거나,
부처님의 종과 북을 치려고 하거나,
부처님의 법라[唄]를 불려고 하거나,
부처님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 설법하려 하거나,
온갖 중생들의 의심을 끊으려 하면,
마땅히 깊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만일 깊은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모든 착한 공덕을 얻지 못하는 일이 없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성문이나 벽지불의 공덕도 얻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성문과 벽지불의 공덕도 얻으나 다만 그 안에 머무르지 않을 뿐이니, 지혜로써 자세히 관찰한 뒤에 곧장 지나가 보살의 지위에 머무르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온갖 세간과 그리고 사람과 하늘들의 복전(福田)이 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의 복전보다 더 뛰어나며 빨리 살바야(薩婆若)에 가까워지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이것을 바로 반야바라밀을 버리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면서 항상 반야바라밀을 행한다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그가 바로 물러나지 않는[不退轉] 보살이요 살바야에 빨리 가까워지며 성문이나 벽지불을 멀리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워진 이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만일 생각하기를,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요, 나는 이 반야바라밀로써 일체종지를 얻는다’고 하면,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하지 못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요 이 사람에게는 반야바라밀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법이요,
이 사람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것을 바로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생각하기를,
‘이런 반야바라밀도 없고 이런 반야바라밀을 갖는 사람도 없으며,
이런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이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여(如)요 법성(法性)이요 실제(實際)로서 항상 머무르기[常住] 때문이다.’라고 하며,
이와 같이 행하면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니라.
【論】 해석한다.
위에서 아난이 다투는 일을 묻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동학(同學)은 청정하다.”라고 하셨고,
여기서는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매우 깊으며 마음을 같이하는 평등한 법[等法]이 바로 보살이 배워야 할 것인지요?”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내공(內空) 내지 자상공(自相空)을 바로 평등한 법이라 하느니라”라고 하신다.
두 가지의 평등한 인[等忍]이 있다. 위의 품(品) 끝에서 중생의 평등한 법을 말씀하고 이 품에서는 법의 평등한 인을 말씀하고 계신데 마치 저울의 양쪽 끝이 정지하면서 똑같아지듯이 이와 같이 내공 등의 모든 공은 모든 법 가운데서 평등하다.
안의 법[內法]과 같은 데서는 갖가지의 차별이 있지만 안의 공[內空]을 얻고 나면 모두가 평등해지면서 법이 없다.
나아가 자상공(自相空)에 이르면 온갖 법의 모양은 모두 스스로 공하다.
이때 마음이 곧 평등해지나니, 보살은 이 평등한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는 다시 여쭈기를,
“물질[色] 등이 다하기[盡] 때문에 살바야를 배우는지요?”라고 한다.
물질 등을 자세히 관찰하면 무상하여 생각생각마다 소멸하면서 머무르지 않는다.
만일 이 관(觀)을 얻으면 마음이 곧 물질을 여의고[離] 마음이 물질을 여의기 때문에 번뇌가 소멸하며[滅] 번뇌가 소멸하기 때문에 나지 않는[不生] 법을 얻는다.
수보리는 여쭈기를,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을 살바야를 배운다 하는지요?”라고 하며,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되받아서 물으시되,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 등 모든 법의 여(如)와 그리고 여래의 여는 다하여[盡] 소멸하고[滅] 끊어지는[斷] 것이더냐?”라고 하신다.
수보리는 말씀드리기를,
“아닙니다.”라고 한다.
이 여(如)는 본래부터 쌓이지도 않고 화합하지도 않거늘 어떻게 다함이 있겠으며, 본래부터 나지 않거늘 어떻게 소멸함이 있겠으며, 이 법은 본래 거짓이요 일정한 모양이 없거늘 어떻게 끊어질 수 있겠는가?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여(如)를 배우면 살바야를 배우는 것이니라.
이 여는 언제나 증득할 수도 없고 소멸할 수도 없고 끊어질 수도 없으며,
이 다하고 여의고 끊어진다는 것은 뒤바뀜[顚倒]을 제거하기 위해서요 이것은 마지막의 도[究竟道]가 아니니라”라고 하신다.
이 가운데서는 마지막의 일[究竟事]을 말씀하신다.
여기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찬탄하시면서,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이 비록 일정하게 어느 한 법 때문에 배우는 것은 아니로되 살바야를 배우는 것이니,
만일 살바야를 배우면 그것은 곧 6바라밀 등을 배우는 것이니라.
만일 6바라밀을 잘 배우면 이것이 바로 모든 배움[諸學]의 맨 끝까지 다하는 것이요,
만일 모든 배움의 맨 끝까지 다하면 이 사람은 한량없는 복덕과 지혜를 완전히 갖추기 때문에 악마나 악마의 백성이 그를 항복시킬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이 바르게 배우기 때문에 곧장 아비발치의 지위에 이르게 되며,
이와 같이 배우면 부처님이 행한 바의 도를 배우는 것이요,
이와 같이 배우면 모두가 시방의 부처님과 큰 보살과 그리고 모든 하늘과 착한 사람들의 수호를 받게 되며,
이와 같이 배우면 이 사람은 삿된 소견이 없고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온갖 중생들에게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일으키고 대자대비 때문에 중생을 잘 교화하느니라.
중생의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부처님 세계가 청정하고,
부처님 세계가 청정하면 벌써 부처님 도를 얻어 3전(轉)12행(行)의 법륜의 3승(乘)으로써 한량없는 중생들을 제도하며 대승(大乘)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기 때문에 부처님 종자를 끊지 않고,
부처님 종자를 끊지 않기 때문에 세간에 대하여 감로(甘露)의 법문을 열어 언제나 중생에게 무위의 성품[無爲性]을 보이느니라”라고 하신다.
무위의 성품이란 이른바 여(如)와 법성(法性)과 실제(實際)와 열반(涅槃)이요, 감로라 함은 무위의 성품이며, 문이라 함은 3해탈문(解脫門)이다.
‘하열(下劣)하다’ 함은,
게으르고 방일(放逸)하면서 부처님 법을 좋아하지 않고 일심으로 도를 수행하지 않으며 죄와 복의 잡다한 행을 하는 이를 말한다.
이러한 이들은 이 법을 배우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하열한 이는 생각하기를,
‘나의 몸과 친속(親屬)은 내가 보호해야 하지만 그 밖의 다른 중생이야 내가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
그리고는 머리와 눈과 골수와 뇌까지도 보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면서도
‘온갖 사람들은 모두가 방편을 써서 즐거움을 구하고 있는데 내가 이제 무엇 때문에 즐거움을 버리고 괴로움을 구하겠느냐’고 하기 때문이다.
혹은 삿된 소견을 내면서도 생각하기를,
‘중생들은 한량없고 끝이 없으므로 모조리 다 제도할 수는 없다.
만일 모두를 다 제도할 수 있다 한다면 그것은 곧 한량 있고 끝이 있는 것이므로 한 분의 부처님이 모두 다 제도하실 수 있다’고 하기도 한다.
혹은 또 생각하기를,
‘부처님께서는
≺온갖 법은 공이어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하셨거늘
난들 어떻게 제도하겠는가?
부처님 도를 구하든 부처님 도를 구하지 않든 똑같이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다’고 한다.
이와 같이 하열한 사람들은 갖가지 삿된 소견과 탐욕의 인연 때문에 이 큰 법을 배우지 못한다.
간혹 대인(大人)이 세간에 출현하여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헤아리고 생각하나니,
이른바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며,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도를 수행하면서 뒤바뀐 소견을 깨뜨리고 도리어 이 도(道)를 버리고 곧장 법성(法性)에 들어가 항상 이 청정한 법성 가운데에 머무른다.
온갖 중생들은 이런 일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大悲心]을 내어 그런 뒤에 6바라밀 등의 모든 공덕과 부처님의 신통지혜와 막힘없는 해탈[無礙解脫]을 닦고 쌓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갖가지 방편의 문으로 중생을 널리 제도하나니, 이와 같은 사람을 희유(希有)하다 한다.
【문】 먼저 말씀하신 바와 같이 “중생은 한량없고 끝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되, “중생은 공하거늘 다시 무엇을 제도할 것인가?”라고 하셨다.
그와 같거늘 어떻게 제도할 것이 있겠는가?
【답】 그것은 바로 하열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그런 말이 어찌 증거로 삼을 거리나 되겠는가?
또 먼저 말한 바는 삿된 소견과 탐욕의 인연 때문에 하열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중생은 끝이 있다, 끝이 없다. 온갖 법은 공하여 아무것도 없다. 온갖 법은 언제나 진실이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은 모두가 62견(見)에 들어간다.
대인(大人)은 생각하거나 헤아리고 싶어 함이 없으므로 이와 같은 허물을 여의고 법성(法性)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낸다.
비유하건대 마치 대인은 다만 보시할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재물을 주기만 하고 그 값을 받지 않거니와 탐욕 있는 사람은 어떤 인연을 구하면서 주는 것과 같다.
삿된 소견을 지닌 사람은 ‘끝이 있다, 끝이 없다’는 등에 의지하면서 가능성도 없고 이익되는 일이 없는 데도 일을 하는 것이니,
비유하건대 마치 소인(小人)이 시장에서 물건을 바꾸면서 이익이 있어야 주는 것과 같다.
또 대인인 보살은 바라거나 구하는 것 없이 머리ㆍ눈 등까지 중생들에게 베풀어 주고 얻게 된 과보도 또한 베풀어 주며 온갖 법이나 마음에 의지함이 없으면서 모든 공덕을 잘 쌓는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중생으로서 생사(生死)에 빠져 있는 이들을 구출하려고 이와 같이 배운다.”라고 하신다.
또 보살로서 이와 같이 배우는 이는 항상 자비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고 중생을 괴롭히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며,
언제나 인연(因緣)과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어리석은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며,
항상 보시를 행하면서 간탐하는 마음을 깨뜨리기 때문에 아귀 가운데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12부경(部經)과 8만 4천의 법무더기에 항상 아까와 함이 없기 때문에 변두리 땅에도 태어나지 않고,
항상 높은 어른과 착한 사람에게 공양하면서 교만을 깨뜨리기 때문에 전다라(旃陀羅) 등의 하천한 사람 가운데도 태어나지 않는다.
깊은 마음으로 중생을 사랑하고 골고루 이익되는 일을 행하기 때문에 몸을 받되 완전하고 착한 법으로써 많은 중생들을 교화하기 때문에 권속을 성취하면서 끝내 고단하거나 궁하지 않으며,
깊이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을 좋아하기 때문에 10악도(惡道)와 삿된 생활[邪命]을 행하지 않고 나라는 마음이 없으며,
다만 중생을 이익되게 하면서 자기 자신은 위하지 않기 때문에 나쁜 사람과 파계(破戒)한 이에게 포섭되지 않는다.
나쁜 사람이란 마음이 악한 이를 말하고,
파계는 몸과 입이 나쁜 이를 말한다.
또 세 가지 불선도(不善道)를 행하는 이를 나쁜 사람이라 하고,
일곱 가지 불선도를 행하는 이를 파계한 이라 한다.
또 보살이 만일 집에 살고 있으면서 나쁜 사람에게 포섭되면 나쁜 사람이라 하고,
출가(出家)하여 나쁜 사람에게 포섭되면 파계한 이라 한다.
【문】 보살은 마치 뛰어난 의사가 모든 질병을 치료하듯 나쁜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세간에 출현했거늘 무엇 때문에 나쁜 사람을 포섭하지 않는다 하는가?
【답】 나쁜 사람이나 파계한 사람 중에는 교화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교화할 수 없는 사람도 있는데 여기서는 다만 교화할 수 없는 사람에 한하여 말한 것이다.
만일 거두어 같이 살게 되면 곧 자기 자신은 도(道)를 파괴하고 그에게도 아무런 이익이 없나니,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에 자신이 물에 뜰 줄도 모르면서 그를 구제하려 하면 두 사람이 다 같이 빠져 죽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나쁜 사람을 멀리 여의라”라고 말한다.
욕계(欲界)에는 많은 악이 일어나지만 가엾이 여기는 마음 때문에 일부러 욕계 안에 태어나는 것이다.
비록 선(禪)을 수행하여 마음이 조화되고 유연하다 하더라도 방편의 힘 때문에 목숨을 마칠 때에는 선정에 따라가 나지 않는 것이니, 경에서 널리 설명한 것과 같다.
“수보리야,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온갖 법 가운데서 청정함을 얻나니, 이른바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을 청정케 하는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청정하다’는 것은 버리고 여의며 아무것도 없는 필경공을 말한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여쭈기를,
“만일 모든 법이 본래부터 공하여 청정하다면 어떻게 보살이 이와 같이 배워 온갖 법 가운데서 청정함을 얻는다고 하는지요?”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의 말을 옳다 하시고 그의 인연을 말씀하시되,
“만일 보살이 온갖 법은 본래부터 공하고 청정한 줄 알면 이 가운데에서 마음이 침몰하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않는다.”라고 하신다.
침몰하지 않는다[不沒]는 말은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삿된 소견을 내지도 않고 환히 통달하여 공과도 다투지 않는다. 이것을 바로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모든 범부는 이 청정한 법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6바라밀 등과 모든 도를 돕는 법[助道法]을 행하는 것이니, 보살은 마땅히 이런 중생을 교화해야 하니,
이것을 바로 ‘보살은 온갖 법 가운데서 청정함을 얻는다’고 한다.
이른바 삼계(三界)의 뒤바뀜을 버리고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를 지나 온갖 법 가운데서 청정한 지혜의 힘을 얻는 것이다.
이런 공덕을 얻기 때문에 3세(世) 시방(十方) 온갖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인 마음으로 행한 바의 갖가지 업을 일으키는 인연을 모두 다 알며,
안 뒤에는 그에 맞게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교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이익은 모두가 반야를 배우기 때문에 얻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배움[學]의 맨 끝[邊]을 다한다.”라고 말한다.
적은 이만이 이렇게 배울 수 있고 이런 사람은 만나기 어려우므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이치를 분명히 알게 하려고,
비유로 ‘금은과 전륜성왕의 업 등’을 말씀하신다.
또 보살은 이 반야를 배울 때에 간탐 등의 마음을 내지 않는다.
‘간탐 등의 마음을 내지 않는다’ 함은 보살은 반야바라밀 등을 배우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억제하며 번뇌가 비록 다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지을 일이 없다. 이 때문에
“내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다.
보살은 반야를 행하면서 온갖 법의 모양은 모두가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은 줄 알기 때문에 물질 내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모양을 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있다 없다’ 하는 소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싶기 때문이니, 곧장 중도(中道)를 행하면서 보살의 행을 쌓는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직접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보살이 반야를 행하면 온갖 법에서 얻는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기 때문에 착하다거나 착하지 않다거나 하는 등의 모양을 취할 수 있는 어떤 법도 없다.”라고 하신다.
보살이 만일 이와 같이 배우면 통틀어 모든 바라밀을 포섭하게 된다.
단(檀) 등의 모든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으며, 반야바라밀의 힘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바라밀로 하여금 모든 삿된 소견과 탐착을 여의고 저마다 더욱 자랄 수 있게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이치를 분명히 알게 하려고,
비유로 ‘나라는 소견[我見]과 목숨[命根] 등’에 관한 것을 말씀하셨다.
【문】 나라는 소견과 모든 소견들은 저마다 따로따로의 모양이 있거늘 어떻게 나라는 소견에 포함된다 하시는가?
【답】 비록 따로따로의 모양이 있다 하더라도 나라는 소견이 근본이 된다.
사람이 무명(無明)의 인연 때문에 공한 5중(衆) 가운데서 나라는 소견을 내는 것이며,
나라는 소견을 내기 때문에
‘이 몸이 죽는 것은 여여하게 가는 것[如去]이라거나 여여하게 가는 것이 아니다[不如去]’고 한다.
만일 여여하게 가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곧 항상하다는 소견[常見]이요,
만일 여여하게 가는 것이 아니라 하면 그것은 곧 아주 없다는 소견[斷見]이다.
만일 아주 없다[斷滅] 한다면 현재의 쾌락만을 받으면서 5욕(欲)에 집착하고 나쁜 법을 으뜸으로 삼으면서 견취(見取)를 내거니와,
만일 항상하다 한다면 출가하여 도를 배우고 계율을 지니며 고행(苦行)하는 등의 계취(戒取)를 낸다.
간혹 단견과 상견이 다 같이 허물이 있기 때문에 곧
“인(因)과 연(緣)과 결과[果]가 없다.”라고 하면서 삿된 소견을 내는 이가 있다.
이런 다섯 가지 소견 안에 머무르면서 세간이 항상하다, 무상하다는 것과 전제(前際)ㆍ후제(後際) 등의 57견(見)을 내고 있나니, 이 때문에
“몸에 대한 소견[身見]이 62견(見)을 포섭한다.”라고 말해도 허물은 없다.
이와 같은 등 갖가지 인연과 비유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모든 법 가운데서 맨 첫째임을 알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법 가운데서 맨 첫째이고,
보살은 이 반야를 배우기 때문에 중생들 가운데서 첫째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일로써 중생들을 잘 교화하시려고 비유로 말씀하셨으니, 곧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중생들은 많더냐?”는 등에서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바로 물러나지 않는[不退轉] 이어서 2승(乘)을 멀리 여의고 불승(佛乘)에 가까워진 줄 알아야 한다.”라고 하신 것에 이르기까지이다.
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만일 보살이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다.’라고 생각한다면”이라고 하셨는데,
이 반야바라밀이란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등으로 반야바라밀의 모양을 보임으로써 반야를 보고 반야를 얻고 반야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반야바라밀로써 일체종지를 얻는다’ 함은,
5중(衆)이 화합해서 임시로 보살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인데 보살은 임시로 붙인 이름을 따르면서 나라고 헤아리나니, 이 때문에 반야에 짓는 바가 있다.
반야는 얻거나 집착할 것이 없는 모양인데도 이 사람은 “모양이 있다.”라고 말한다.
반야는 바로 첫째가는 이치[第一義]인데도, 이 사람은 임시로 붙인 이름을 따르면서 나라는 마음을 낸다.
반야는 지음이 없는[無作] 모양인데도, 이 사람은 반야를 이용하여 짓는 바가 있게 하고 싶어하나니, 이른바 “나는 이 반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이는 반야를 행한다고 하지 못하며, 만일 이와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반야바라밀을 행한다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문】 ‘이런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모두 말씀하셨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세 번째의 말씀[第三說]이 있는가?
【답】 처음에는 바로 삿된 행의 모양[邪行相]이요,
두 번째는 삿된 행을 막으면서도 아직 바른 행의 모양[正行相]은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 때문에 세 번째로 바른 행의 모양을 말씀하신다.
또 처음에는 집착하는 마음[着心]으로 모양을 취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집착하는 모양을 깨뜨리면서도 어떤 것이 모든 법의 모양인가를 말씀하지 않았으며,
세 번째는 삿된 집착을 깨뜨리면서 역시 실상(實相)을 말씀하신 것이다.
보살은 생각하기를,
‘온갖 처소에서 반야바라밀의 모양을 드러내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나라는 마음≻도 ≺나는 반야바라밀로써 짓는 일이 있다≻는 마음도 내지 않고,
다만 온갖 법의 상주(常住)ㆍ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 가운데에서 알 뿐이다’고 한다. 여ㆍ법성ㆍ실제 안에서는 다투지 않으므로 이 때문에 세 번째를 설명해도 허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