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나 선생님의 學歷은 전편에서 살펴보았듯이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이시다.
그러나 선생님을 學歷의 잣대로만 재단하려든다면 그것은 크나 큰 망발을 저지르는 일이다.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지가 선생님의 학자적 재질과 소양, 학구열을 실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건강 때문에 3년제 실업전수학교 이수를 포기하고 양주에서 건강을 추스를 때,
이미 우리글을 몰라 불편을 겪는 아녀자들을 위해 야학활동을 전개했다.
전차(電車) 팻말 읽기, 세금 고지서, 달력, 교통신호 읽는 방법, 경조사 봉투 쓰는 방법 등
당장 실생활에 쓸 수 있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93년 「우리교육」 44호에서)
이런 일로 자연히 조선어 학회를 찾게 되었고
거기서 이윤재 선생을 만나 훗날 조선어학회의 일원이 된다.
학회에서 선생님의 직책은 "출판부 부원"으로
"한글"지의 편집과 교정, 발송, 조선어 사전 편찬 지원 등이 기본 업무였다.
그러나 선생님이 이 정도에서 그쳤다면
"한글"지에서 선생님의 함자를 결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한글학회가 발행한 "한글"의 색인지(한글 ‘차례’의 족보기 : 2013년 발간)에 따르면
선생님은 1935년 25호와 28호의 독자 투고란에 기고한 두 편의 글 말고도
1972년 4월 149호에 이르기까지 무려 42편의 논문과 시리즈물을 싣는다.
선생님의 논문을 보면 우선 연구 분야가 다양함을 알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보자.
29호 "띄어쓰기는 우리글의 생명이다"
46호 "통일안의 한자음 처리는 과연 평안도 방언을 무시한 것인가"
47호 "고서에 나타나는 셋받침"
59호 "한자의 원음이란 어떤 음인가"
107호 "한자를 폐지하라"
110호 "겹수를 나타내는 ‘-들’의 연구"
127호 "잡음씨 ‘-이다’에 대하여"
134호 "우리말의 명사에 격어미설이 적용되지 않는다"
139호 "Case Ending설과 Postposition설의 모순에 대하여"
특히 29호의 글은 선생님이 조선어학회 부원으로 발령 나기 한 해 전의 글로서,
대외 학술 활동을 할 수 있는 학문적 깊이를 일러주고 있다.
또한 선생님은 속담에 많은 정성을 쏟으셨다.
73호 "속담 주해 초(1)"을 시작으로 81호 "속담(9)"에 이르기까지,
한 호에 30~40수씩 가나다순으로 소개하면서 해설을 곁들였다.
선생님은 여기서 끝내는 것이 아니었다.
"87호-속담으로 본 밥", "88호-속담으로 본 저승", "89호-인생을 말하는 속담",
"91호-속담에 나타난 종교관" 등
한 가지 주제어를 중심으로 여러 속담을 엮어서 분석하는 순서를 가졌다.
또 "정인승" 선생님과 함께 "속담딱지"를 만들어 어린이들이 쉽게 우리의 속담을
익힐 수 있게 하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그 실물을 찾아 볼 수 없고 광고만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면 선생님은 왜 이처럼 속담에 많은 심혈을 기울이셨을까?
추론해 보건데 그 때는 "맞춤법 통일안"이 완성되어가던 시기였기때문에,
제대로 된 맞춤법과 철자법을 익히게 하기 위함에서 일듯하기도 했다.
또한 속담에는 그 나라의 역사적 상황과 생활 방식, 문화 등이 언어 형태로 녹아 있는 만큼,
민족정신을 전수하는 쉬운 방법으로 속담을 선택하신 것은 아닐는지.
선생님은 양정고등학교 근무시절에도 한글학회에 자주 기고하시며 학자적인 자세를 견지해 나가셨다.
이번 연구 대상은 "한글"이 아니라 "일본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어 연구자가 드물지만 일본에는 한국어 연구자가 많다.
이래서는 안 된다. 우리도 그들을 알아야 한다”
1993년 7월 당시 신목교 국어교사였던 박용규 박사에게 하신 말씀이다.
선생님은 한 때 숙명여대 앞에 야간반 일본어 강습소를 차린 일도 있었다.
집필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숙직을 도맡아서 하시기도 하고,
한창 일본어 연구에 몰두 할 때는 점심 드시는 것을 잊는 일이 종종 잊었다고 한다.
따님이 왜 도시락을 들지 않았냐고 물으면
“어쩐지 도시락이 무겁더라” 라고만 말씀하신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연구 결과물이 "혁신 일본어 문법"이다.
안타깝게도 집필은 끝났으나 원고 상태로 따님 이제원 女史가 보관하고 있다.
또나 이석린 선생님은 養正으로 전근오신지 30년째인 1984년 70세에 은퇴하신다.
함께 고초를 겪었던 선배, 동료들이 30년 전에 이미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갖가지 포상과 혜택을 받았으나 또나 이석린 선생님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로 인해 선생님은 평생을 궁핍하게 사셨다.
주변의 뜻있는 사람들이 나섰지만 정부의 대답은 "실형(實刑)을 산 전과 자료가 없어서",
아니면 "직책이 서기(書記)에 불과해서" 유공자 지정이 곤란하다는 것 뿐이었다.
이에 대해 또나 선생님은
“독립 운동가들이 뭐 포상받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했나?.
양심 있고 민족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강도 일본에게 어찌 그냥 있을 수 있겠는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인데 뭘”
“내가 좋아서 한 보잘것 없는 일인데 나라가 보상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유공자 비인정"문제가 제기된 지 4년이 지난 1997년에서야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建國勳章 愛族章)을 수여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2년 뒤인 1999년 5월 10일 타계하셨다.
"이윤재", "한징", "최현배", "정인승", "이인", "이강래", "이은상", "서민호", "신현모",
"안호상"선생 등 조선어학회 11분의 선열들과 함께 "대전국립현충원"에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