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씨년스러운 계묘국치에 우리는 -강미숙
1904년 2월 8일 인천항에 정박중이던 러시아 군함을 공격하며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는 2월 23일 “일본은 유사시 한국내 군사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용할 수 있다”는 내용의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했다. 일제는 이 의정서에 의거, 대한제국 각지의 1천만평에 이르는 땅을 마음대로 수용했다. 용산기지도 그중의 일부이고 독도를 군사적 목적으로 침탈한 것도 이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한일의정서가 대한제국의 안전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한국영토를 멋대로 점유하여 군사활동하는 것에 동의한 군사동맹이라면 현정부가 추진하는 '원활한' 한일 군사동맹은 제 2의 굴욕적인 한일의정서인 셈이다. 당시에는 나라가 힘이 없어서였다지만 선진국에 진입한 지금은 중국과의 무역을 포기하고 군사적 자주권을 내주면서까지 도대체 무엇을 위하고자 함인지 도무지 이해불가다.
그해 8월 일본인 재정고문을 두어 대한제국의 재정관련 실권을 장악하는 제 1차 한일협약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한국침략을 위한 사전포석이 한일의정서였음을 이해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그러니 망국은 경술국치를 기준으로 한 일제 36년이 아니라 군사자주권을 내준 1904년을 기준으로 42년이라고 헤아리는 것이 더 적확하다 하겠다.
일제는 다음해인 1905년 7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8월에는 2차 영일동맹으로 영국의 양해를 구했으며, 9월에는 러일전쟁 전후처리인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제거하며 한국을 고립무원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1월 17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행사한다는 제 2차 한일협약을 강제체결한다. 이른바 을사조약이다.
“한국 정부는 이후부터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기로 한다.”는 을사늑약 2조와 “일본인 통감을 두어 외교사항을 관리한다”는 3조에 따라 1905년 11월 17일 이후 한국내 모든 외교공관들이 철수하고 외국에 있던 한국공관도 철수했으며 1906년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통감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을 헤이그 특사파견을 빌미로 강제퇴위시키고 내정을 장악한 것이 1907년 정미년의 제 3차 한일협약이다.
을사년, 조선에 굴레를 씌워 자주성과 정체성을 제거한 이 늑약을 나는 일제의 어법대로 을사보호조약이라고 배웠다. 勒(늑), 힘으로 가죽굴레를 씌운다는 의미의 을사늑약이라고 정확하게 명명하게 된 것은 성인이 된 이후였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었으니 국가지도자의 승인도 없이 나라의 외교권을 강탈한 불법행위를 을사보호조약이라 교과서에 쓰고 가르친 세력들이 이 사회의 기득권이 되었고 보수를 참칭하며 지금까지도 사회발전과 통합을 저해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공짜가 없어 광복 78주년이 되도록 친일청산을 게을리한 죄과는 계묘년의 국치로 돌아왔다. 일제에 부역한 자들에게 부역하며 성장한 이들이 정부를 차지하고 제 4차 한일협약, 아니 양국간의 합의도 못되는 제 3자 대위변제라는 해괴한 방식을 국민은 커녕 피해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발표했다.
을사늑약은 고종이 인후염을 핑계로 불참한 가운데 외무대신 박제순의 도장을 찍었으니 불법성이라도 주장한다지만 118년이 지난 2023년 3월 6일은 일본의 하위국가나 할 법한 자발적 노예, 굴종의 끝판왕이다.
정상적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이고 외교부장관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2의 한일의정서라 할만한 군사적 굴종에 이어 자국 사법부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입법부를 유린하며 저들의 가랑이 밑을 기어들어가는 대통령이라는 자는 대한민국을 호구로 만들고 주권 시계를 30년이 아니라 1919년, 1904년으로 돌렸다.
을사년이 얼마나 절망적이었으면 백성들은 오늘처럼 싸늘한 먹장같은 날씨를 일러 을씨년스럽다고 했을까. 을사년의 국치는 경술년의 국치로 이어지고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을 제 3자 대위 변제라는 해괴한 해법으로 갖다바친 계묘년의 국치로 이어졌으니 을씨년스럽기는 을사년 못지 않다.
"근래에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 나라를 어느 큰 이웃 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 정신을 잃은 미친 놈이라고밖에 볼 길이 없다."고 일갈한 백범의 말처럼 제 정신을 잃은 미친 놈이라고밖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를 대통령이라 당당하게 부를 수 있는 자 나오라. 국민의 자존을 짓밟고 일본 제국주의 피해자들에게 굴레를 씌우는 자, 법과 국가조직을 사유화하며 대한민국 법통의 근간을 부정하는 根도 本도 없는 한마리 멧돼지를 그래도 국가원수라고 인정하는 자 나오라. 아니면 무슨 짓을 하든, 심지어 나라를 팔아먹을지언정 그 천박한 어퍼컷에 환호하는 그대들도 개돼지이며 제 정신을 잃은 미친 놈이라는 백범의 말을 돌려줄 밖에.
오늘은 1년전 정치 경험이라고는 가족관계에서조차도 없는 일개 칼잡이 출신 협잡꾼을 국민의 손으로 선출한 날이다. 마치 10년처럼 느껴지는 10개월 동안 경제도 외교도 군사도 나락으로 떨어지고 노동하는 국민을 적으로 규정하고 국민의 민족적 자존마저 짓밟았다.
이게 망국이 아니면 무엇이 망국인가. 총칼의 위협 없이도 다 내주는 자들이 앞으로 4년동안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지금 대한민국은 망명정부, 시민정부가 필요한 때다. 자신의 정치적 이해를 앞세워 헌법이 보장하는 불체포특권에 어깃장을 놓는 자들이 반민주세력이자 대한제국 말기 무능한 정치인들과 다름없는 반민족세력이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지만 동시에 난세에 협잡꾼들도 드러나는 법이다. 용산이든 여의도든 가짜를 박멸할 책임과 힘은 노예로 사느니 자유를 외치다 죽겠다며 을미의병, 정미의병을 일으키고 기미년이 저물도록 대한의 주권은 대한인에게 있다고 외친 이들의 후예인 주권시민들에게 있다. 대한민국은 '우리'나라니까.
※사진은 을사늑약 체결을 기념하는 한일 관료들. 누가 한국인이고 누가 일본인인지 구별이 안 된다. 2023년 3월 6일 굴종의 주역들도 일본인의 정체성을 가진 자들이며, 우리는 계묘년 국치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역사에 기록될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