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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9:5-7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오늘은 야곱의 두 번째 축복을 저주로 포장된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올려진 사진은 어머니의 저주로 돌이 되었다는 딸로 알려진 인도네시아의 전설이 있는 사진입니다.
엄마의 저주로 딸이 돌이 되었다.
세상에 엄마가 딸을 저주해요? 성경에도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번에 함께 살펴본 장자 르으벤을 향한 축복도 저주로 포장된 축복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오늘은 그런 말씀의 의미들을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르으벤을 저주처럼 들리는 축복의 말씀을 하고 난 다음 야곱은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의 이름을 함께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라고 합니다.
제가 칼을 갈고 칼을 판매하고 합니다.
한번은 칼을 갈고 있는데 한 분이 칼을 여러 자루를 들고 오시어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날처럼 이런 시대에는 칼을 들고 다니면 안 되는데 라는 말을 하면서 칼을 주는 것을 받았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렵고 불경기 시절에 칼을 들고 다니면 무엇처럼 보인다는 말입니까? 폭도처럼 보임
저도 칼을 받으면 가방에 넣고 바구니에 넣어 다니는데 그냥 칼을 들고 다닐 때는 저도 그런 모습으로 보일까 신중을 하면서 칼을 들고 다닙니다.
제가 지난 번에 하나님께서도 칼을 갈으신다 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시는 분들 계시나요?
신 32:41 “내가 내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이 정의를 붙들고 내 대적들에게 복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할 것이라”
하나님 예수님 하면 그림과 같은 이런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칼을 갈고 복수를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도 있습니다.
이런 말씀이 성경에 여러번 나옵니다.
하나님도 칼을 갈으신다. 하나님은 어떨 때 칼을 손에 드실까요?
상징적인 표현이지만 어떨 때 상징의 칼을 손에 드실까?
신명기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을 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그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칼을 갈으시고 손에 잡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칼을 갈으시고 잡으시니 하나님의 백성들도 칼을 손에 잡고 다녀야 할까요?
우리는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심판을 하여서는 안되죠?
우리 성도님들 심판하는 칼을 잡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누구는 손에 칼을 잡았다고 성경은 말합니까?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시므온과 레위가 분노대로 사람을 죽였다.
지금 야곱은 어느 때를 회상하면서 그 같은 말을 합니까?
창세기 34장의 사건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경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창 34:25-26 “제 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가요?
창 34장 1절부터 보면 그 내용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아람에서 외삼촌의 집을 떠난 야곱과 그의 가족과 일행은 얍복강을 지나 세겜 가까운 곳에서 형 에서를 만납니다.
분노의 칼을 갈았던 에서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심으로 에서의 분노는 사라지고 환도뼈가 위골되어 절룩 거리며 오는 야곱을 측은히 여기고 기쁨으로 반겨 줍니다.
그리고 에서는 돌아가고 야곱은 세겜 성 숙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천막을 치고 우리를 짓고 잠간 쉬어 가자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쉬는 중에 야곱의 딸 디나가 그 땅에 살고 있는 여인들을 보러 나갔다가 그곳 추장의 눈에 띠었고 추장은 한눈에 반하여 강제로 욕심을 채웁니다,
그리고는 야곱을 찾아갑니다.
딸을 주시면 어떤 빙패와 예물이라도 청구하면 다 들어주겠다고 요구를 합니다.
그런 말을 들은 야곱은 자녀들이 양을 치고 있어서 들어오면 의논하여 답을 하겠다고 하여 돌려 보냅니다.
그리고 아들들이 왔을 때 타협점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 남자들은 다 할례를 행함으로 특별한 사람들임을 강조하면서 할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들과는 상종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만약 할례를 다 받으면 함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들도 그 말을 좋다고 하고는 성으로 돌아가서 모든 사람들을 모와 놓고 이런 말을 합니다.
창 34:20-23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그들의 성읍 문에 이르러 그들의 성읍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이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데려오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그러나 우리 중의 모든 남자가 그들이 할례를 받음 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들의 말대로 하자 그러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
이들의 속셈이 들어났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그들의 제산이 다 우리의 재산이 될 것이라 합니다.
그 말을 좋게 여긴 그 성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습니다.
할례는 오늘날 표현으로는 남자들 포경 수술을 의식적으로 하는 것을 할례라고 합니다.
그 수술을 받으면 삼일 정도 지내면 움직일 수 없는 고통이 따른다고 합니다.
오늘날은 마취제가 있어서 아픈 통증은 가볍게 할 수가 있지만 3.000년전 의술은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을 때가 아닙니까?
바로 그때 세겜 모든 남자들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을 때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성안에 들어가서 아파서 꼼짝하지 못하고 고통 중에 있는 세겜성의 남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지금 아들들을 축복하는 자리에서 야곱은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때 그 사건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잘 했다는 것입니까? 잘못했다는 것입니까?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고 그렇게 보복을 하면 된다는 것입니까? 안된다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런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원한이 있을지라도 뭐 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원수 갚지 말아라.
그리고 어떻게 해 주시겠다고 합니까? 내가 갚으리라.
우리 성도님들 혹 세상을 살아가다가 원망스럽고 원수처럼 느껴지는 일들이 있을지라도 원수 갚으려고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원수를 갚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좀 그러하여도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시는 삶이 되길 축복합니다.
동생이 강간을 당하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그런 더러운 일을 당하였다고 분개할 만 합니까?
제가 그 당시 디나의 오라버지니였다고 하여도 아마도 시므온과 레위처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러지 말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한 야곱은 자기의 두 아들들에게 이어서 말을 합니다.
7절입니다.
창 49: 7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무엇을 받을 것이라고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같은 내용을 두 번이나 다르게 표현을 합니다.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화나는 일이 있다고 화내지 않길 바랍니다.
분 나는 일이 맹렬하게 일어날 찌라도 분 내지 말길 바랍니다.
그러한 것은 제가 참 잘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화를 내어 놓고 후회를 하고 분노를 발하고는 후회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후회를 합니다.
그래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화도 내지 않고 분도 참고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가재도 게 편이라고 하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저주 하다니요? 심한 거 아닙니까?
아들과 딸이 잘못된 길을 가면 저주 같은 선언을 하여야 할까요?
아니면 모르는 체 해야 할까요? 그런 것을 잘 했다고는 할 수가 없겠죠?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저주와 같은 것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저주와 같은 것이 무엇이 되었다고요? 축복이 되었다.
자식들이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에 따라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저주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주와 같은 말씀을 들은 레위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성경에 그의 삶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녀들의 모습을 통하여서 레위가 어떻게 살았는지 희미하지만 엿볼 수가 있습니까?
요셉의 믿음의 삶을 통하여 애굽으로 이주온 야곱의 아들들은 너무나 행복한 꿈 같았던 생활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만이 좋은 생활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머지 않아 애굽을 떠나야 되는데 그런 행복함에 빠져 있으면 가나안땅 그 척박한 땅으로 가려고 할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정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그냥 두셨습니다.
4대도 내려가지 않아서 대우받던 민족이 하루 아침에 종 살이를 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6장에는 야곱의 아들 레위로부터 모세까지의 기록이 있습니다.
출 6:16 “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들의 족보대로 이러하니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요 레위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게르손의 아들들은 그들의 가족대로 립니와 시므이요 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고핫의 나이는 백삼십삼 세였으며 므라리의 아들들은 마흘리와 무시니 이들은 그들의 족보대로 레위의 족장이요 아므람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무슨 내용입니까?
야곱의 아들 레위로부터 모세까지의 기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위가 고핫을 낳고요. 고핫은 다시 아므람을 낳았고요.
아므람은 요게벳에게서 아론과 모세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으로부터 몇 대입니까? 야곱-레위-고핫-아므람=모세 4대입니까?
그들의 모습을 보니까 믿음의 가정 같아 보입니까?
세상역사의 그리스도인 가정중에서도 자녀교육에 가장 성공한 가정으로 아므람과 요게벳의 가정을 언급합니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아버지의 저주처럼 정말 저주 받은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하면서 자녀교육에 철저하게 마음을 쓰면서 기도하면서 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의 예언을 따라 이스라엘 중에 흩어서 살게 되었지만 목적있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흩어짐이었습니다.
레위의 자손들이 어떻게 흩어지게 되었습니까?
제사장의 지파로서 성전 봉사하는 지파로서 흩어져서 성소를 봉사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아버지의 저주와 같은 축복이 무엇이 되었다는 말씀입니까? 약이 되었다.
반면에 같은 저주와 같은 축복을 받은 시므온은 그렇게 살지 못한 거 같습니다.
그 지파는 가나안에 들어갈 때 약한 지파가 되어서 다른 지파들은 다 기업을 얻었는데 시므온 지파는 유다에 속한 땅을 분배 받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야곱의 조상 중 한 사람이 또한 야곱과 같은 그런 저주와 같은 축복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굽니까?
창 9:25-27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은 함과 그의 아들 가나안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역사는 흑인들의 고난사를 많이 이야기 합니다.
그들이 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똑 같이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은 레위는 축복의 지파가 되었는데 함의 자손은 정말 아버지의 말 그대로 저주의 자손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 이유를 생각하면서 사울과 다윗을 생각하였습니다.
레위도 잘못하였고 함도 잘못하였고요.
사울도 잘못하였고 다윗도 잘못하였습니다.
죄의 크기를 우리가 말할 수 없지만 죄의 크기를 우리의 이해로 본다면 함보다 레위의 죄의 무개가 더 무거운 것 같고요.
사울보다 다윗의 죄의 무개가 더 무거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죄의 무개가 더 무겁게 보이는 사람들이 용서를 받고 축복의 사람들처럼 보이는가 하는 것이죠. 우리 성도님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답을 다 아시죠.
죄의 지적을 받았을 때 다윗은 회개하였고요.
사울은 죄를 지적 받았을 때 더 큰 죄 가운데로 빠져 갔습니다.
이제 이해하시겠습니까?
레위는 아버지로부터 죄의 지적을 받은 후 그의 자손들이 죄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하려고 말씀으로 바르게 서도록 가르쳤을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시내산에서 배도가 있을 때도 대부분이 우상숭배에 빠졌지만 레위 자손들은 말씀의 편에 섰습니다.
우리의 세대가 지나고 주님의 재림이 연장이 된다면 우리의 아들과 딸들의 자녀들이 또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사람들로 살아갈까?
레위 지파의 사람들이 아니면 함의 자손들입니다.
그 크기가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론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정말 믿음의 사람들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타협하는 신앙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자녀들은 불신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고요. 그 자녀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로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적당한 신앙은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모습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순종하면 우리의 가정에 식물이 끊어지는 것처럼 보일 찌라도 돈 줄이 끊어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자.
회개와 순종만이 답입니다.
그것이 나를 위해 생명을 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증거들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우리 자녀들의 구원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날마다 생각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적당한 믿음이 아닌 온전한 믿음으로 살다가 레위가 받은 복을 다 받아 우리 주님 오시는 날에 레위의 자손들처럼 우리 자손들이 구원받는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