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닥불 주위
류윤모
춘 삼월에도 눈이 석 자 두 치는 쌓인다는
전설 의 곰배령 바라기로
길 뜯어먹고 사는 주막집의,
마른 장작을 던져넣는
홧홧한 모닥불 주위로는
장삼이사, 쪼그려앉아 손바닥 공양들 펼치고 ....
눈발 희끗희끗 , 마당 한 켠에는 솥단지 걸어놓고
벌건 소고기 국을 설 설 설雪 雪 雪 끓여대겠다
한 켠에선 차일 아래 괴어놓은 삼발이에
가마솥 뚜껑 뒤집어 걸어 놓고
무 토막을 잘라만든 손잡이로
돼지비계기름 ㅆ 윽 ~ 한번 두른 뒤
칙` 치직, 노릇노릇 파전 배추전 동태전을
연신 척척 뒤집어 내는
투덕한 주모의 손길
막막한 눈발 속에
영 너머 가야할 머나 먼 길도
하염없이 기다릴 가솔들 걱정도 내려놓고
넉넉히 받아든 뚝배기 속에 코를 박고
기름 둥둥 벌건 소고기 국에 밥을 척척 말아
허기들 씻어 내겠지
초면에 권커니 자커니 탁배기 사발 한 순배 돌고나면
곳곳에서 연신 홍소哄笑들이 터지고
볼이 발그레 부끄럼 풀어진
반반한 女客에게 남정네들의 시선이 집중될
농도 짙은 어둠을 사르는 모닥불 반경
눈발은 여전히 칠흑같은 세상을
백색으로 부벽浮碧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듯
그칠 줄을 모르고 무지막지 퍼붓겠지
시나브로 , 괄괄하던 모닥불도 사그라들고
넉넉히 군불을 넣어둔 주막의
방방, 여각의 아랫목에 저마다 기어들어
어혈든 등을 지지고 나면
씻은 듯 그쳐 있을 눈발처럼
행려에 지친 몸들도 가뿐하것다
크고 작은 괘나리 봇짐에 보따리를 이고 진 보부의
하룻밤 지기 동행들과
각자 떼 놓았던 눈썹들 찾아 붙이고
가뭇이 지워진 길을 트며
서둘러 영 너머 갈 일만 남았것다
불의 반경, 인간의 반경
― 류윤모 〈모닥불 주위〉론
1. 이 시가 서 있는 자리
류윤모의 〈모닥불 주위〉는 ‘곰배령’이라는 지리적 실재 위에 서 있으면서도, 그곳을 단순한 산길이나 주막 풍경이 아닌 민중 삶의 집단적 기억이 축적된 공간으로 확장한다. 이 시는 이동과 정착, 허기와 환대, 외로움과 공동체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사라져가는 주막 문화의 정서를 서사적 밀도로 복원해낸다. 작품은 단순한 향토적 풍경 묘사를 넘어, 불의 반경 안에 모인 인간 군상의 생존 윤리와 공동체적 체온을 시의 핵심으로 삼는다.
2. 모닥불의 반경 – 공동체의 최소 단위
‘모닥불 주위’는 이 시의 중심 은유이다. 불은 추위를 견디게 하는 물리적 장치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정서적 구심점이다. 시 속에서 모닥불 반경 안에 모인 장삼이사, 여객, 보부상, 가솔들은 사회적 신분을 잠시 내려놓고 ‘같이 추운 사람’이라는 최소 단위의 공동체로 환원된다. 이 반경 안에서는 초면의 관계도 탁배기 사발 하나로 금세 허물어지고, 웃음과 시선과 수줍음이 오가며, 공동체는 일시적으로 재생된다.
3. 음식의 서사 – 생존의 미학
이 시의 가장 큰 미덕은 음식의 서사이다. ‘벌건 소고기 국’, ‘파전·배추전·동태전’, ‘탁배기’ 등은 단순한 먹거리 목록이 아니라, 행려의 허기를 씻어내는 생존의 의식으로 기능한다. 특히 “설 설 설雪 雪 雪 끓여대겠다”와 같은 언어 유희는 눈발과 국물의 열기를 병치하여, 혹독한 자연과 인간의 체온을 대비시키는 미학적 장치로 작동한다. 이는 자연의 폭설에 맞서는 인간의 작은 불과 솥단지라는, 연약하지만 끈질긴 생존의 풍경을 선명하게 부각한다.
4. 언어의 육체성 – 소리와 몸의 시
류윤모의 언어는 이 시에서 소리와 몸의 감각을 적극 호출한다. “칙 치직”, “홧홧한”, “척척”, “괄괄하던”과 같은 의성·의태어는 불과 기름, 손길과 웃음소리를 청각·촉각적으로 되살려내며, 시를 읽는 행위를 하나의 감각적 체험으로 전환시킨다. 이는 풍경을 ‘보는 것’에서 ‘몸으로 겪는 것’으로 확장시키는 시적 전략이다.
5. 이동의 시학 – 길 위의 인간들
이 시의 인물들은 모두 길 위에 있다. 보부상, 행려, 가솔, 여객 등은 머무르기보다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다. 모닥불은 그들이 영원히 머물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잠시 들러야 하는 ‘삶의 쉼표’이다. 시의 후반부에서 “각자 떼 놓았던 눈썹들 찾아 붙이고 / 가뭇이 지워진 길을 트며 / 서둘러 영 너머 갈 일만 남았것다”라는 결말은, 공동체의 따뜻함이 결국 다시 흩어짐으로 귀결되는 길 위의 숙명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6. 결론
〈모닥불 주위〉는 사라져가는 주막 문화와 행려 공동체를 통해, 인간이 인간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환대의 윤리를 복원한 작품이다. 이 시는 화려한 이념이나 거대 담론 없이도, 불 하나와 솥 하나, 사발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서로를 지탱할 수 있음을 증언한다. 모닥불의 반경은 단지 불의 반경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머무를 수 있는 마지막 체온의 반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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