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죄인 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죄악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 보응이 있는 것을 볼 때 인생은 죄인이다. 하나님의 보응은 현세 뿐 아니라 내세에서도 이루어진다. 외모가 아니라 내용적으로 볼 때 인생은 죄인이다. 아무리 고상하고 거룩해 보여도 율법 앞에서 인생은 죄인임이 판명난다. 호소하는 소리로 보아 인생은 죄인이다. 백성들의 호소와 자기 영혼의 탄식소리가 하나님께 들려온다. 그리고 자신을 죄인이라 시인하지 않기에 더욱 구제 받지 못할 죄인인 것이다.
(강해)
어리석은 사람들은 모이면 그 특징이 남 말하기 좋아하는데 남 말하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남 말 제대로 하려면 충분히 그 사람의 위치에 서보고 그 사람이 당한 일을 해보면 그 입장이 되어보아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에 ‘이해하다’라는 단어가 understand입니다. 이 언더스텐드라는 단어는 아래라는 뜻의 under와 서다는 뜻의 stand라는 단어가 합성된 용어로서 그 자리에 서 보아야 진정 알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본문에 엘리후가 욥을 신랄하게 고소하고 정죄하고 있는데 욥의 중심은 알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욥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기 때문입니다. 욥기 34장은 엘리후가 욥을 고소하고 재판하는 형식으로 공격하는 내용입니다. 내용을 분해해 보면 1-9절에 고소의 내용이 나오고, 10-30절에서는 욥의 주장이 터무니없음을 입증하고, 31-37절에서는 욥을 정죄하고 저주합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말은 오해로서 욥은 자신이 죄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그 엄청난 고난을 당할 만큼 죄 지은 것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말이지 인생으로서 무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이 말은 욥에게가 아니라 죄인들에게 적용하면 아주 좋을 말입니다. 특히 죄인이면서도 죄 없다 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적절한 교훈입니다. 자기를 죄 없다 하는 사람은 인생을 죄인으로 규정하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여기는 죄입니다. 그래서 요일1:10에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죄인인 줄 모르면 예수를 믿지 않아 구원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죄인으로 철저히 규명하는 일은 무엇보다 앞서야 할 중요한 작업입니다.
그럼 인생이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죄악의 열매를 맺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7-9절입니다. “어느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훼방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사귀며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이처럼 엘리후는 욥이 훼방하기를 물마시듯이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반론하는 것조차 악인과 상종으로 보았습니다.
이처럼 죄 없다는 사람들 보세요. 죄를 물마시듯 하면서 죄 없다고 합니다. 자신은 알 것입니다. 법 없이 살 사람도 마음으로 죄는 죄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욕심 없는 사람 어디 있어요. 한 편에 잘하면 다른 편에는 못하고, 다른 한 편에 잘하면 다른 한 편에는 못하고, 좋은 것 같아도 자세히 보면 숨은 죄악이 있습니다. 잘 잘못을 떠나 악인과 상종한다는 것 자체가 죄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마7:16-18에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범죄합니다. 그러니까 죄는 죄인의 열매인 것입니다.
2. 보응이 있는 것을 볼 때 인생은 죄인입니다.
11절에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그 보응이 정확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응은 현세에서도 이루어지지만 내세에서도 이루어집니다. 내세에서 받는 심판이 오히려 더 두렵고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박용규 목사에게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신 이야기 한 적 있지요. 주님께서 천국도 보여주시고 지옥도 보여주시는데 지옥의 색깔은 온통 붉은 색과 검은 색뿐이었습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지옥은 두 종류의 사람들이 오는데 첫째는 불신자들과 우상숭배자들이요. 둘째는 교회를 다니기는 하였으나 형식적으로 다니면서 탐욕을 좇아 산 자들이 지옥에 간다."고 하더랍니다. 왜 그러겠어요? 예수 믿는다면서도 천국 가는 십자가의 길은 가지 않고 세상 넓은 길로만 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유황 불 못에서 고생하는 영혼들을 보았는데 땅에서 성경 말씀을 믿지 않고 교회와 교인들을 업신여기며 조롱하고 핍박하던 자들 뿐 아니라 세상의 부귀와 권세를 위해 신앙을 저버리고 주일을 범하는 등 교회 안에서 분열과 분쟁을 조작하고 교회를 자기 세력을 행사하는 장소로 삼아 싸움을 일삼았던 자들이 거기 오더랍니다. 그래서 개혁측으로 분열한 정규오 목사님이 죽기 전에 교단을 합동시키고 눈을 감으려고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그래서 후배들을 설득하고 또 설득하고 혼수상태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나 또 다시 합동을 외쳤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실수로 큰 분열로 갔지만 다 합동시킨 후에 눈을 감으신 것을 볼 때 우리는 그 분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증거를 봅니다.
그러나 성도를 아끼지 않고 교회와 교단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은 마음에 예수님이 계신지 의심스럽습니다. 솔로몬에게 친모의 진위를 구별해 달라는 아이에 대한 재판이 있었을 때 솔로몬에게 친모는 내가 키우지 않아도 좋으니 저 아이를 죽이지 말라고 애원했습니다. 이것이 성도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의 마음입니다. 다툼으로 끝까지 싸워 나는 승리했다 할지 모르지만 교회를 풍지 박산내고 무수한 사람들이 실족 당했는데 몇 사람 남은 것 가지고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단과의 싸움이 아니라면 한 영혼 실족할 것을 먼저 생각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권력으로 사람들을 죽인 독재자들도 보았고 교인들을 많이 죽인 대원군과 조대비 일본의 이등박문과 중공의 모택동 소련의 레닌과 스탈린 독일의 히틀러 우리나라의 역대 왕들도 지옥 불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더랍니다. 이런 보응을 볼 때 인간은 죄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 잘 믿어 천국 가시기 바랍니다.
3. 외모가 아니라 내용적으로 볼 때 죄인입니다.
18-19절에 “그는 왕에게라도 비루하다 하시며 귀인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 했습니다. 아무리 권세가 있어도, 아무리 영리해도, 아무리 학식이 많아도, 아무리 건강해도,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리 부자여도, 그리고 아무리 고상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다 죄인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의사가 쓴 글에 암은 사람의 얼굴이나 직업 보고 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의사에게도 암은 온다는 것입니다. 겉모양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겉모양이 그럴싸하다고 죄 없는 것 아닙니다. 말이나 몸가짐 하나에도 흐트러짐이 없는 지성이 넘치는 신사 숙녀들도 산에서 물만 마시며 도를 닦는 수행자도 다 내용적으로 다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4. 호소하는 소리로 보아 인생은 죄인입니다.
28절 “그들이 이와 같이 하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상달케 하며 환난 받는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들리게 하느니라” 예를 들어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아무리 시치미 떼고 있었으나 하나님께 호소하는 아벨의 피소리가 하나님께 들렸습니다. 잠29:2에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시대의 사람들의 호소나 소돔성의 호소나 모두 죄악이 있는 곳에 호소가 있었습니다. 이 탄식소리가 들린다면 악인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각인의 심령은 어떻습니까? 자기 영혼의 탄식하는 소리가 안 들립니까? 영혼이 원하는 일은 하지 않고 육신이 원하는 일만 하면 영혼이 탄식합니다. 이 탄식이 바로 죄 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5.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지 않기에 죄인입니다.
31-32절에 “누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 다시는 범죄치 아니하겠나이다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한 자가 있느냐” 했습니다. “내가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내가 악을 행했습니다. 맞아서 당연합니다. 다시는 죄 짓지 않으렵니다.” 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겸손한 성도들이나 이런 고백하지 세상에서 이런 고백하는 사람 어디 있어요. 과연 그렇다면 이미 성도이겠지요. 신앙생활 한다는 사람 중에도 징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 많지 않는데요. 그래서 사람은 두 종류랍니다. 자기를 죄인이라고 하는 의인과 자기를 의인라고 하는 죄인이 있답니다. 일제시대에 순사들이 교회 가면 죄인들이 많다는 제보가 들어와서 가 봤더니 교인들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하고 있더랍니다. 가만히 다가가서 들어본 순사는 이런 죄인은 잡아갈 죄인이 아니라고 하면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죄인임을 부정하고 징계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자기가 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자신을 죄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는 진정 속죄의 주님을 믿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어 구원 받아 이제는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변화 되어 외형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의로운 열매가 가득한 참된 의인의 생애를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