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혜문 소설집 『대암의 하늘』 작품론 ③
인간은 왜 하늘을 꿈꾸는가
― 『비행하는 자전거』의 자유와 비상의 서사
『비행하는 자전거』를 처음 읽으면 독자는 자전거 여행을 소재로 한 성장소설이라 생각하기 쉽다. 낙동강 자전거길을 따라 이어지는 풍경, 해외로 떠난 남편, 함께 자전거를 타는 민영, 그리고 활공장에서 만나는 '박쥐 사내'까지, 작품은 현실적인 일상의 풍경 속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독자는 처음 자신이 읽은 작품이 전혀 다른 소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자전거가 없다. 그 중심에는 '비행'이 있다. 홍혜문은 자전거를 이동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자전거는 삶의 균형이며, 상처를 견디는 방식이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의지의 형상이다. 그리고 그 자전거가 끝내 하늘을 난다는 설정은 현실을 벗어난 환상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하는 본능을 상징한다.
작품은 첫 문장부터 흥미로운 감각의 혼란을 제시한다. 주인공은 낙동강을 바라보다 강물이 자전거와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것처럼 느낀다. 이것은 단순한 착시가 아니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첫 번째 상징이다. 삶은 언제나 내가 가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앞으로 나아간다고 믿지만, 어느 순간 세상은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작은 감각의 어긋남은 이후 주인공의 삶 전체를 설명하는 은유가 된다.
남편은 해외로 떠나 있고, 아이는 끝내 품에 안지 못했다. 사랑은 멀어지고, 미래는 흐릿하다. 그녀는 자전거를 타며 앞으로 나아가지만, 마음은 여전히 과거에 붙잡혀 있다. 작품은 이 상실을 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물처럼 조용히 흘려보낸다. 그 절제가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만든다. 그러나 『비행하는 자전거』는 상실을 오래 응시하는 소설이 아니다. 홍혜문의 시선은 언제나 상처 이후를 향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의외로 민영이 아니다. 바로 '박쥐 사내'이다. 그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이다. 외발자전거를 타고, 장애인용 자전거를 만들고, 끝내 자전거를 하늘로 날게 하려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괴짜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품이 진행될수록 그는 단순한 발명가가 아니라 상처를 창조성으로 바꾸는 인간임이 드러난다.
특히 그의 삶은 홍혜문 문학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가치 하나를 드러낸다. 상처는 인간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되기도 한다. 쌍둥이 동생의 사고는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그는 절망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 장애인용 자전거를 만들고, 더 나아가 하늘을 나는 자전거를 연구한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홍혜문의 인물들은 고통을 복수로 돌려주지 않는다. 그들은 고통을 창조로 바꾼다. 『대암의 하늘』의 이태준은 식민의 절망 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의술을 선택하고, 『샤니와 라우나』는 서로 다른 종족의 두려움을 사랑으로 바꾸며, 『해장라면』의 민서는 기다림을 삶의 의지로 전환한다. 『비행하는 자전거』의 박쥐 사내 역시 상실을 발명으로 승화시킨다. 그래서 그는 현실의 인물이면서 동시에 상징적 존재이다. 그는 인간 안에 숨어 있는 '비상의 의지'를 형상화한 인물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자전거가 실제로 하늘을 나는 순간이다. 홍혜문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환상을 도입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더 깊이 설명하기 위해 환상을 선택했다. 문학에서 비행은 오래전부터 자유의 은유였다. 그러나 『비행하는 자전거』에서 비행은 자유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려움을 통과하는 용기이다.
흥미로운 것은 비행이 완벽한 성공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전거는 결국 추락한다. 박쥐 사내의 의족과 의수가 드러나고, 그는 숨기고 싶었던 상처를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된다.
이 장면은 작품의 결정적인 전환점이다. 하늘을 나는 인간도 결국 상처 입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작가는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추락 이후에야 인간은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홍혜문 문학에서 영웅은 상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감추지 않는 사람이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균형'이라는 개념이다. 외발자전거, 앞뒤 크기가 다른 자전거, 장애인용 자전거, 비행 자전거는 모두 균형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불완전한 구조 속에서 새로운 균형이 만들어진다. 이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이다.
인간은 완전하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서로를 붙들며 살아간다.
그래서 박쥐 사내는 주희에게 기술보다 먼저 삶을 가르친다. "밤은 보이지 않는 게 많아서 사람을 장님으로 만들죠. 마음의 눈도 종종 탁해지고요." 이 한마디는 『비행하는 자전거』 전체를 설명하는 문장이다.
밤은 단순한 시간대가 아니다. 상실의 시간이며, 불안의 시간이며, 인생의 가장 어두운 국면이다. 그러나 그 밤에도 자전거는 멈추지 않는다. 결국 작품의 마지막에서 주희는 가장 중요한 결심을 한다. 남편에게 이혼 서류를 보내기로 한다.이 장면은 단순한 이별이 아니다. 자기 삶을 다시 선택하는 선언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으로 남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비행하는 자전거』의 마지막 비는 절망의 비가 아니다. 폭우를 뚫고 달리는 자전거는 오히려 새로운 삶의 세례를 상징한다. 『안개그물』이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는 순간을 이야기했다면, 『비행하는 자전거』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순간을 이야기한다.
홍혜문은 이 작품에서 인간이 왜 하늘을 꿈꾸는지를 묻는다. 그 대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인간은 날 수 있기 때문에 하늘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상처 입고도 다시 일어서야 하기 때문에 하늘을 꿈꾼다.
비행은 현실을 떠나는 일이 아니라 현실을 견디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이것이 『비행하는 자전거』가 단순한 성장소설을 넘어, 상실 이후에도 삶을 선택하는 인간의 존엄을 그려낸 작품으로 읽혀야 하는 이유이다.
『안개그물』의 핵심어가 '이해'라면, 『비행하는 자전거』의 핵심어는 '비상(飛上)'이 아니다. 오히려 '균형'이다.
넘어질 듯하면서도 균형을 잡는 외발자전거, 크기가 다른 두 바퀴가 함께 굴러가는 자전거, 의족을 단 몸으로 다시 하늘을 꿈꾸는 박쥐 사내, 그리고 흔들리는 마음 끝에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주희. 이 모든 형상은 결국 하나의 주제로 수렴한다. 인간은 완전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한 균형을 끊임없이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관점이 『비행하는 자전거』를 다른 성장소설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문학적 성취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