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1103 반야암 일요가족법회 지안대종사 법문 전문
種豆生豆影隨形(종두생두영수형)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그림자는 물체의 모양을 따르나니
三時業果如鏡照(삼시업과여경조)
삼시 업과가 거울이 물체를 비춰주는 것과 같네
自作自受無回避(자작자수무회피)
스스로 지어 스스로 받는 것이라 회피할 수 없거늘
那得怨天更尤人(나득원천갱우인)
어찌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리오.
벌써 11월이 되었습니다. 가을이 깊어지고 영축산에는 단풍이 짙게 물들었습니다.
唐(당)나라 때 淸凉國師(청량국사)는 일곱 임금의 국사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七帝門師(칠제문사)라고 했습니다.
청량국사가 쓴 화엄경 서문을 往復序(왕복서)라 하는데 첫 구절이‘往復無際 動靜一源(왕복무제 동정일원)’이라는 말입니다. 往復無際(왕복무제)라는 말은 가고 옴이 때(짬)이 없다는 것으로 가고 옴이 그칠 때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제와 그제는 지나간 날이고 내일과 모레는 다가올 날이므로 가는 세월은 계속 가고 있고 오는 세월은 계속 오고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 往復無際(왕복무제)입니다. 動靜一源(동정일원)은 움직이는 것이나 고요한 것이 그 근원은 한 가지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루 하루 살아간다는 말을 하지요.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속에 나이는 기억하지만 살아온 날 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강물이 쉬지 않고 흘러가듯이 하루하루도 쉬지 않고 지나가 가는 세월 오는 세월이 끝이 없어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는 것은 계속 가고 오는 것은 계속 온다는 뜻이 ‘往復無際(왕복무제)’입니다.
이어 動靜(동정)이 一源(일원)이라 했습니다. 움직이고 고요한 것이 한 가지 근원이라는 이 말은 간다 온다 하는 것은 움직이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만 시간 자체는 움직이지 않는 고요한 것일 뿐입니다.
고요한 법성의 이치에서 보면 끝없이 오고 가지만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습니다. 至至發處(지지발처)요 行行本處(행행본처)라는 말처럼 이르고 이르러도 출발한 그 자리요, 가고 가도 본래의 자리입니다.
납자십게(衲子十偈) 중 인과(因果)의 이치를 말한 게송입니다.
種豆生豆影隨形(종두생두영수형)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그림자는 물체의 모양을 따르나니
種豆生豆(종두생두)는 누구나 알고 있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우리 속담과 같은 말이지요. 影隨形(영수형)은 그림자는 모양을 따른다. 즉, 그림자는 본체의 모양대로 생긴다는 말입니다. 원인에 따라 결과가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무의 그림자는 나무 모습대로, 집 그림자는 집 모습대로 생기는 것이죠.
이 因果(인과)라는 것이 因緣果報(인연과보) 네 글자를 줄여서 하는 말입니다. 원인과 결과라는 뜻으로 우리는 그냥 일반적으로 因果(인과)라고 많이 쓰는 말인데 본래 불교 말에 因緣(인연)이라는 말이 쓰이는데, 그 반대말이 果報(과보)예요. 因(인)은 원인이고 果(과)는 결과인데 반댓말이지요 緣(연)은 조건이고 조건이 만들어지면 그에 상응하는 報(보)가 와요. 因緣果報(인연과보)라는 말을 줄여서 因果(인과)라고 씁니다.
三時業果如鏡照(삼시업과여경조)
삼시 업과가 거울이 물체를 비춰주는 것과 같네
이 세상 모든 것은 因果(인과)관계예요. 부처님이 처음 설법을 시작하실 때 人天敎(인천교)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人天敎(인천교)라는 말은 사람이 착하게 살면 다음 생에 다시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날 수 있고 또 천상세계에 갈 수 있다고 하여 주로 선업을 닦아 인간과 천상에서 복을 누리는 이야기를 해놓은 법문을 人天敎(인천교) 법문이라 합니다. 제일 먼저 이 법문을 설하셨는데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면 그 뒤에 果報(과보)가 분명히 따라오는데 이 果報(과보)가 오는 때에 따라 그 시기를 두고 ‘三時業(삼시업)’ 혹은 ‘三時報(삼시보)’라고 해요. 이는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시기가 금생에 지어 금생에 받는 것을 順現業(순현업)이라 하고, 내생에 받는 것을 順生業(순생업)이라 하며, 현생에 업을 짓고 차후생에 과보를 받는 것을 順後業(순후업)이라 합니다. 이것을 ‘三時業(삼시업)’ 혹은 ‘三時報(삼시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거울이 물체의 모습을 비추어주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自作自受無回避(자작자수무회피)
스스로 지어 스스로 받는 것이라 회피할 수 없거늘
인생의 책임을 불교에서는 自作自受(자작자수)라 합니다. 自作自受(자작자수)라는 말은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果報(과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自作自受(자작자수)하는 것이에요. 이 말은 불교 공부에서 반드시 알아둬야 할 말입니다. 스스로 지어 스스로 받는 것이라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因果(인과)를 벗어날 길은 이 세상에 없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因果(인과)입니다. 그런데 요즘 因果(인과)를 잘 안 믿지요. 정치도 因果(인과)예요. 경제도 因果(인과)예요. 사회도 因果(인과)고 문화도 因果(인과)예요. 뿐만 아니라 인간이 因果(인과)적인 존재입니다. 사람 관계가 전부 因果(인과)예요. 가족들끼리도 - 한 지붕 밑에 사는 가족끼리도 因果(인과)관계로 구성되어 사는 거죠. 그런데 요즘 난세가 돼서 부처님의 因果(인과)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大乘(대승)에서는 불법을 크게 훼손하는 죄를 역적죄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여서 五逆罪(오역죄)라 부릅니다. 옛날 왕조시대에는 역적은 滅門之禍(멸문지화)를 당했는데요, 大乘(대승)에서의 五逆罪(오역죄) 중 다섯 번째가 撥無因果(발무인과)입니다. 因果(인과)의 도리를 부정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가 因果(인과)를 무시하고 잘 믿지 않는 그런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因果法(인과법)을 다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那得怨天更尤人(나득원천갱우인)
어찌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리오.
업을 한번 지어 놓으면 그 果報(과보) 내가 받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늘을 원망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하리오’라는 뜻입니다. 那(나)는 ‘어찌“라는 뜻입니다. 자기 탓을 안 하고 다른 곳인 하늘이나 남에 대해 원망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는 인연이 맺어지면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이 관계가 언제나 인과관계에 의해서 유지됩니다. 사람과 사람 관계도 모두 인과 관계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세 가지 법입니다. 인과법이요 인연법이요 일심법입니다.
우리가 절에 와서 기도하는 것을 흔히 ‘祈福(기복)’이라 하여 ‘복을 빈다’는 말로 표현을 하지요. 가끔 지성인들이 불교를 비판하면서 ”祈福(기복) 행위가 불교의 본질은 아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지요.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소박하고 기본적인 것이 祈福心(기복심)이 있어야 선(善)한 마음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1993년 마산에서 대마도의 이즈하라까지 가는 배가 개통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 항로가 없어져 운항을 하지 않지만 그때 동국대 교수로 계시던 호진 스님과 그 배를 타고 대마도에 가서 민박을 2박을 하고 온 적이 있습니다. 대마도에 가면 한국절이라고 부르는 修善寺(수선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애국지사 勉庵(면암) 崔益鉉(최익현:1833~1906) 선생의 유허지인 절입니다. 고종 때의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면암은 병자수호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했습니다. 유배생활 중 서당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그는 결국 일제에 의해 대마도로 잡혀가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수선사를 찾아가 보려고 수퍼마켓 같은 가게에 들려 길을 물었습니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분이 가게 밖으로 나와 약 70~80m의 거리를 걸어지나 친절하게 수선사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친절에 우리는 감동을 했습니다. 감탄하여 “너무나 친절하십니다. 어떻게 이리 친절할 수 있습니까?”라 하니 “오늘 한국에서 오신 두 스님을 위해서 길을 안내하는 선행을 하나 하면 ふくじん(福神 복신)이 내게 복을 줄 것 같아서요.”라 대답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한 편으로는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좀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복을 받기 위한 마음으로 길을 가르쳐 준 것 같은 생각도 순간적으로 해 봤습니다마는 복을 받기 위해서 좋은 일을 하나 했다는 이 말이 굉장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선행을 하면 ふくじん(福神 복신)이 복을 줄 것이라고 믿는 마음은 바로 因果(인과)를 믿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세이를 써서 알리기도 하고 책에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좋은 일을 해서 복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절에 와서 기도하는 마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면 흔히 말하는 加被(가피)를 입게 됩니다. 이 加被(가피)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顯加(현가)와 冥加(명가)라 하여 알게 입혀주고 모르게 입혀주는 경우입니다.
『華嚴經(화엄경)』 같은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 일시적으로 加被(가피)를 주시어 보살들이 설법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각 품마다 說主(설주)가 다릅니다. 이처럼 보이게끔 加被(가피)를 주는 것을 顯加(현가)라 합니다.
冥加(명가)는 冥熏加被(명훈가피)를 말하는 것으로 불보살께서 몰래 가피를 준다고 하여 언제 어떻게 가피를 받았는지도 모르게 가피를 입는 것입니다.
절에 오면 布施函(보시함)이 있는데 이것을 福田函(복전함) 또는 喜捨函(희사함)이라고도 하지요. 달리 명가함(冥加函)이라고도 합니다.
복을 빈다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이고 원형적인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나라를 지키는 군대의 장수들을 구분해 부르는 특별 명칭이 있었습니다. 용맹이 뛰어난 장수를 勇將(용장)이라 하였고 智略(지략)이 뛰어난 장수를 智將(지장)이라 했고 세 번 째는 德將(덕장)이라 하여 勇將(용장)이나 智將(지장)보다 더 훌륭한 장수라 하였어요. 서로 비교하여 勇將(용장)이 智將(지장)만 못하고 智將(지장)이 德將(덕장)만 못하다 합니다. 그런데 이 三將(삼장)의 장수 다음에 福將(복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글자 그대로 복 있는 장수라는 말이지요. 이 복 있는 장수가 등장하면 적과 싸우지 않고도 승리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장수 호칭에도 福將(복장)이라는 말이 나오듯이 사람도 용기 있는 사람·지혜 있는 사람 덕이 있는 사람·복이 있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사람은 누구나 福力(복력)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겁니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지식도 많이 갖춰야 되고 기술도 많이 갖춰야 되고 여러 가지 사람이 익혀야 될 분야가 많지만 박복해지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박복해지면 불우해지는 거예요. 복을 누리는 건 행복해지는 것이고 불우해지면 불행해지는 것 아닙니까. 복을 누리는 건 좋은 인연 속에서 공덕을 성취하면서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렸듯이 용기 있는 사람·지혜 있는 사람 덕이 있는 사람·복이 있는 사람으로 사람의 인격적인 특징을 묘사하는 말들이 있는데, 궁극적으로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을 비는 祈福(기복)을 부정적으로 보면 안 되는 거예요. 복 있는 사람 옆에 있으면 나도 그 덕을 본다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에는 중국 고전 같은 데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옛날엔 수레를 타고 다니던 시절에 수레를 모는 사람이 있었어요. 중간에 누가 길 가다 피곤해서 수레를 타고 가자고 주인에게 청을 했습니다. 그러자 수레를 모는 사람이 그 사람 얼굴을 빤히 살핍니다. 말하자면, 관상을 보는 거예요. 관상에도 그 사람이 福相(복상)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게 있어요. 수레를 타겠다는 사람이 福相(복상)이라면 태워주고 福相(복상)이 아닌 사람은 안 태워 주었다고 해요. 福相(복상)이 있는 사람을 태워주면 수레를 모는 사람에게도 이로운 일이 생긴다는 거예요. 복이 없는 사람을 태워주면 탄 사람이 박복하기 때문에 수레를 모는 사람에게도 안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설명을 해놨어요. 옛날 중국의 고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복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이 마음을 잘 다스리고 만들어가면서 살아야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복을 많이 지으시고, 또 항상 내 복에 대해서 나름대로 도움을 받도록 이익을 얻도록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게 보살행입니다.
오늘 법문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
고맙습니다 _()_
🙏🙏🙏
고맙습니다 _()_
_()()()_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_()_
좋은 것을 받을 자격이 되어야 받는다
또 그렇게 되는 것이 합당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다
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각기 제자리가 있다
각자 자기몫도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이 100% 정해진 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그러니 이 세계는 열린 세계이고 요지경세상이기도 하다
자기 것이 아닌데 가지면 그렇다
물건과 지위 그리고 일도 마찬가지이다
탐내어 차지하면 꼭 탈이 난다
자신도 더 힘들어진다
자기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얼마나 힘드나
수치가 큰 옷
예를 들어 100수치의 옷을 입어야 하는데 200수치의 옷을 입으면 어떻게 되나
거동이 어렵다
아무리 금으로 된 옷이고 보석이 달려있더라도 마음이 편치 않다
자기 분수껏 사는 것이 좋다
뱁새가 황새처럼 사는 것도 제비가 독수리처럼 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싸우지 않고 이기면 얼마나 좋은가
물론 쉽지 않다
이기지 않더라도 싸우지 않아야 한다
좀 빼앗기더라도 좀 손해보더라도 그것이 나을 수도 있다
꼭 이익을 보고 승리를 하는것에 촛점을 맞출 필요는 없다
명의는 사람들이 아프지 않게 하고,
수술을 하지 않고도 약을 먹지 않고도 아프지 않게 하는 의사아닌가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_()_
인과법, 인연법, 일심법을 명심하겠습니다.
자업자득, 자작자수를 깊이 깨달아
세세생생 보살행하기를 기도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잘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_()_
🙏🙏🙏
고맙습니다 _()_
_()()()_
감사합니다 _(())_
_()()()_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