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 외 4편
김연종
불현듯 하고 싶다 갑자기 목이 탄다 가슴이 뛴다 잠도 오지 않는다 감정은 넘치는데 몸이 부족하다 무엇을 할까 어디로 갈까 크레타 섬 카리브 해 노르웨이 숲 갑자기 이불을 걷어찬다 새벽 잠을 포기하고 노트북을 연다 모니터에 접어둔 페이지를 검색한다 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한다 출근 시간을 알리는 경고음이다 詩름에 빠져 몇 번 지각한 후로 새로 맞추어 둔 알람이다 게르마늄 목걸이가 목을 조른다 두통에 효과가 있다고 아내가 채워 놓은 족쇄다 그 후로 자꾸 악몽에 시달린다 병원 옥상에서 추락한다 누군가 미투로 나를 고발한다 의료사고 주범으로 지면에 오르내린다 바지를 내리지 않고 소변을 본다 부르르 몸을 떤다 요즘 들어 부단히 손이 떨린다 왼손이 더 심한 걸 보면 게르마늄 팔찌때문임이 분명하다 홈쇼핑을 맹신한 탓이다 나는 무작정 달리고 싶다 내 몸엔 보조 바퀴도 브레이크도 없다 원고청탁도 없는데 마감시간에 쫒긴다 이제 거짓말 탐지기를 풀어 놓아야겠다
*ADHD (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코드블루
새벽마다 벌떡벌떡 일어나는 건
관성에 따른 것인가
증력을 거스르는 것인가
멀쩡한 침대가 접이의자처럼 몸을 세운다
갑자기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인공호흡기는 가쁜 숨소리를 낸다
산소 포화도가 적색등을 켠다
코드블루 코드블루
간호사는 신호음을 잘못 듣고
의사는 활력징후를 잘못 읽고
간병인은 기상 시간을 잘못 맞추었다
다급해진 타이머가
촉촉한 아침을 불끈 들어 올린다
형광등이 저절로 눈을 뜨고
비데는 스스로 물을 내린다
헤어드라이가 요란하게 소리를 낸다
번호키는 재빠르게 현관문을 연다
잘못 입력된 알람소리에
휴일 아침이 발칵 뒤집어졌다
다한증 소녀
생의 연약지반에 물방울이 맺혀있다가슴에 새겨진 멍울이 배꼽까지 흘러내린다한쪽 가슴이 사라진 여자가허전한 벽면에 꽃과 리본을 붙인다스카프와 타투와 고통이 한데 엉켜 있다항암을 마치기도 전에 블라우스가 헐렁하다
알약 같은 물방울무늬가 흠뻑 젖는다
가슴을 적시는 것이눈물인지 땀인지 분간할 수 없다귓등을 찍어대는 목소리가 마른 꽃잎처럼 툭, 툭 끊어진다고작 한 마디를 위해저렇게 많은 땀을 쏟아 내다니긴 머리카락과 아까시나무 그늘과 목수건이 필요하다
미궁에 대한 돌팔이 처방
쓸쓸한 쪽지를 건넸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동네 의사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상한 것 같다며 의뢰서를 써주었다 나는 점점 시들었고 마침내 절망했다
우울한 쪽지를 건넸다 요리저리 살피던 변방의 시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위태로워지는 순간 詩가 탄생한다고 했다 나는 시들시들 앓았고 마침내 절필했다
날씨에는 늘 예민했다 관상대는 어감이 좋지 않아 기상청으로 개명했다 입춘이 지나면서부터 황사와 미세먼지와 두려움이 동시에 펄럭인다
점점 흐릿해지다 어느 순간 또렷해진 문장이 연필심처럼 눈을 찌른다 무럭무럭 자라 지우개로도 지워지지 않는 강박을 처방전에 옮겨 적는다
미투
나도 당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끼쳐 하필 둘 밖에 없었어 갑자기 침대에 내동댕이치는데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거 있지 벌써 십년도 더 지난 일이야 한 동안 곁에 얼씬도 못하더니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그놈의 오촉짜리 알전구, 어두운 홍등가에나 있음직한 그 불을 켜야 발동이 걸린다며 나를 깨웠던 거야 지옥 같은 날이었어 그래도 리즈시절이 없었냐고? 뽕 같은 시절이 있었지 하필이면 뽕나무 밭이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미쳤지 미친년이 속 차리면 행주로 요강을 닦는다더니 라일락 향처럼 살랑거리는 휘파람 소리가 나를 구원할 환청으로 들렸다니까 봄날은 오래 가지 않았어 라일락은 한 철을 버티지 못하고 누에처럼 사라져 버렸지 부드럽던 새 순마저 어느새 우악스런 가지로 바뀌었어 이제 내 몸에 남아있는 감각은 봄빛에 허덕이는 치욕뿐이야 그렇게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 지나갔어 그런데 요즘 들어 무슨 힘이 생겼는지 자꾸 내 손을 끌어당기는데 온 몸에 가시가 돋아 미칠 지경이야 저 영감탱이 곁에 갈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는데 자꾸 피하다가 해코지라도 하면 어쩔거야 문지방 넘을 힘도 없는 주제에 나 원 참 팔팔한 스무 살 언저리에서 팔순이 다 된 지금까지 이러는데 더는 참을 수 없어 오죽하면 젊은 의사양반한테 이렇게 하소연 하겠어 미안하지만 그 약 좀 처방해줘 노인정에서 그러던데 의사 처방 받아야 된다고 그래 맞아 정력감퇴제 근데 이런 말하는 내가 주책이지 또 나한테만 이상하다고 그러겠지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자식들한테는 비밀로 해 줘요즘 미투 미투 그러는데 나만 당한거야? 나도 당한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