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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1-10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 - 다니엘)
성경본문 : 다니엘 6: 1-10
1. 다리오가 자기의 심원대로 방백 일백 이십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2. 또 그들 위에 총리 셋을 두었으니 다니엘이 그 중에 하나이라 이는 방백들로 총리에게 자기의 직무를 보고하게 하여 왕에게 손해가 없게 하려함이었더라
3.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4.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5. 그 사람들이 가로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그 틈을 얻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수 없으리라 하고
6.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모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말하되 다리오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7. 나라의 모든 총리와 수령과 방백과 모사와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율법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려 하였는데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8. 그런즉 왕이여 원컨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어인을 찍어서 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
9. 이에 다리오왕이 조서에 어인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
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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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조상호목사
최근 한국에서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병원을 건립하여 화제가 되고 있는 최일도 목사님의 글을 읽다가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가 있어 소개합니다. 최목사님은 아무도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청량리 588 사창가에서 '다일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사역하는 귀한 목사님이십니다. 그분은 원래 구라파쪽으로 유학을 가려다 '청량리로 가라!'는 하나님의 강한 음성을 느끼며 청량리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분이 처음 사창가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3년 6개월이 지나니까 동네 사람들 중에 한 두 사람이 묻기를 시작하더랍니다. "이 사람아, 도대체 예수가 얼마나 좋아서 그렇게 웃고 다니나? 정말 예수 믿으면 그렇게 기쁜가?" 나중에는 그 동네에서 은퇴한 포주 아주머니들, 평생을 버림받고 살아가던 이들이 이렇게 부탁을 하더랍니다. "최목사, 내가 죽으면 내 시체 염해 줄 사람은 최목사 밖에 없는 것 같구만. 내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할 사람은 자네밖에 없어. 꼭 부탁하네."하면서 한 두 사람씩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새벽 일찍 일어나 새벽기도를 마치고 그 지저분한 동네를 한바퀴 돌면서 청소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동네 한바퀴를 쓸고 나면 오전10시가 되는데 그때부터 버너로 물을 끓이고, 컵 라면에 물을 부으면, 그것이 무의탁 노인들을 지탱해주는 하루 한끼의 식사가 됩니다. 하루는 라면을 먹던 알콜 중독자가 갑자기 "삶은 무엇인가? 도대체 삶은 무엇인가?"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더랍니다. 그때 옆에서 라면을 함께 먹던 무의탁 노인 한 분이 "이 사람아, 삶은 라면이여. 여기 있는 삶은 라면. 삶은 라면을 두고 자꾸 삶은 뭐냐고 묻는 것이여! 어여 라면이나 먹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스운 말 같았지만, 최목사님은 이 얘기를 듣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노숙자들과 무의탁 행려자들에게는 "삶은 곧 라면"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라면 공동체'로 시작한 것이 지금의 '다일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최일도 목사님의 간증을 읽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삶은 무엇일까? 삶은 라면일까? 아니면 삶은 계란일까? 어떠한 삶이 가장 존귀한 삶일까?"
오래 동안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께 질문하겠습니다.
"삶은 무엇입니까?
가장 존귀한 삶은 무엇입니까?
먹는 것입니까? 아니면 좋은 집에서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좋은 조건의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돈 많이 버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녀 교육 잘 시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먹는 것이 어떻게 가장 존귀한 일이 될 수 있습니까?
돈이 어떻게 가장 존귀한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안정된 직장이 어떻게 가장 존귀한 것이 될 수 있습니까?
물론 배우자 잘 만나는 것은 나름대로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고, 자녀 교육 잘 시키는 것은 나름대로 보람된 일일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편리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가장 존귀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떠한 삶이 가장 존귀한 삶입니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이 가장 존귀한 삶인 줄로 믿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 바로 그 인생이 가장 존귀한 인생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가장 존귀한 인생을 살았던,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아름답게 쓰임 받았던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다니엘입니다. 오늘 다니엘의 네 가지 모습을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성령 충만한 사람
그는 성령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여기에서 '민첩하다'는 말을 언뜻 들으면 다니엘은 '몸이 굉장히 빠른 사람', 혹은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원어에는 '민첩하다'는 의미는 '영이 탁월하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영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에도 성령 충만했고, 늙어서도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4장 9절을 보면,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다니엘을 보면서 "자네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야. 자네야말로 내가 꾼 꿈을 해석할 수 있을 거야"라고 하면서 다니엘에게 꿈 해몽을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또 5장 12절을 보면, 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이라고 하는 왕이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쓴 글씨를 해석하지 못했을 때에, 태후가 다니엘을 가리키면서 "그 사람의 마음이 민첩하고, 즉 성령으로 충만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그자야말로 그 글씨를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인정한 걸 보면, 다니엘은 항상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다니엘을 다니엘 되게 했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머리 좋은 유전인자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두 총리들과 모든 방백들보다 뛰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뛰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지혜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저는 공부하는 학생들과 청년들의 학업 가운데 지혜의 영이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또 자녀를 양육하고 가정을 꾸려나가는 부모 여러분들의 삶 속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내 힘으로 하는 것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는 것은 다릅니다.
짐 그레이엄이라고 하는 영국의 한 침례교회의 목사님은 윌리엄 바클리 밑에서 공부한 사람으로 지성이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부인은 의사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2년 동안 목회를 했지만, 특별한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에서 온 젊은 목사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자기보다도 어리고 실력도 없고 부족한 것 같은데 자기에게 없는 그 무엇을 그에게서 발견했습니다. 그 젊은 목사에게는 진정한 평화와 기쁨이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선배 목사이고, 더 유명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혼자서 '저 사람에게 있는 설명할 수 없는 저 미소는 무엇일까? 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평안함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서재에서 조용히 앉아 설교를 준비하는데, 또 그 생각이 나면서 설교 준비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데 갑자기 성령께서 그를 만져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세례, 성령의 충만을 경험한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목회가 결정적으로 달라졌다고 합니다. 겉으로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뭔가 변한게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과 똑같이 설교를 하고 똑같이 기도를 하고 똑같이 목회를 합니다. 그러나 뭔가 변했습니다. 선포하는 설교에 힘이 넘치고 기도가 뜨거워지고 예배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지금 이러한 일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에도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사역현장과 예배 위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사업장과 직장 가운데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학업과 가정 위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성령의 충만한 사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2) 충성된 사람
4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다니엘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리 허물을 찾으려해도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충성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쓰십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주위를 보십시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외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쇼(Show)하는 시대입니다. 믿을 수 없는 시대입니다.
제가 지하철 사랑의 편지 모음에서 읽은 이야기인데, 어느 풋내기 변호사가 사무실을 새로 열었습니다. 막상 문을 열었으니 아무도 찾아오지 아니하다가,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변호사는 갑자기 전화 수화기를 들고 통화하는 시늉을 합니다. "죄송합니다만, 맡은 사건이 너무 많아서요. 어렵겠습니다." 그리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근엄한 목소리로 일을 열었습니다. "손님은 무슨 사건으로 오셨습니까?" 그 사람은 한 동안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입을 얼었습니다. "저- 사실은 전화국에서 나왔습니다. 선생님 사무실에서 신청하신 전화선을 놓아드리려고요."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바로 이렇게 쇼하는 시대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시대가 바로 이 시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쇼하는 사람을 결코 쓰시지 않습니다. 눈속임하듯 '척'하는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실하신 하나님입니다. 성실하신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충성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쓰십니다. 비록 그 일이 큰 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충성되이 감당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만약 다니엘의 별명을 붙인다면, 저는 그를 "충성스런 자"라고 붙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 중에 그만큼 충성한 자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 때에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벨사살 왕 시대에도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제국이 페르시아 제국에 멸망하여 다리오 왕이 등장했을 때에도 그에게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시대가 바뀌어도, 정권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다니엘과 같은 이러한 충성스러움이 우리에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다니엘과 같이 목사는 목사로서, 전도사는 전도사로서, 집사는 집사로서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학생은 학생으로서, 직장인은 직장인으로서, 가정 주부는 가정 주부로서 삶의 현장 가운데에서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그리고 충성스럽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3) 타협하지 않은 사람
다니엘이 지혜롭게 충성하자, 다리오 왕이 그를 극진히 사랑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 다니엘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이 이상한 법령 하나를 들고 왔습니다.
그게 바로 "이제부터 30일 동안 다리오 왕 외에 다른 어떤 신이나 대상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집어넣는다"는 법 같지도 않은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리오 왕은 자기를 칭찬하고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하는 무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덜컥 거기다 사인을 했습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왕의 도장인 어인이 찍힌 조서를 고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10절을 보십시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저는 이 10절을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니엘이 '30일 동안 왕 외에 어떤 다른 대상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그 법을 어겼을 때, 사자 굴에 던져져 사자 밥이 될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전에 행하던 대로 기도하고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사자 밥이 되는 한이 있어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쉽게 타협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3장에 나오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경우처럼 금신상에 절하라는 우상숭배의 위협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30일 동안 다리오 왕 외에 그 어떠한 것에 기도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다만 속으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30일 동안이니까 내가 마음속으로 기도해도 하나님이 다 들으시기 때문에 묵상 기도하자"라고 적당히 타협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의 창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공개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끓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다니엘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1980년도 초에 아카데미상의 주요부문을 휩쓴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의 제목은 "Chariot of Fire", 즉 "불병거"라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1924년 파리 올림픽의 영웅이었던 에릭 리델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에릭 리델은 선교사 부모로부터 태어나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후에는 육상에 남다른 재질을 보여 육상선수로의 그의 이름이 전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에릭은 당시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유태인 아브라함이라는 선수와 쌍벽을 이루었습니다. 두 선수는 칼 루이스와 벤 존슨과 같이 난형난제였습니다. 두 선수는 똑같이 파리 올림픽에 출전하였습니다. 모든 세계인들의 관심이 100미터 육상 결승전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런데 배로 도버 해협을 건너던 중에, 100미터 결승전이 주일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코치에게 '왜 처음부터 내가 주일 날 달려야 된다는 것을 말해 주지 않았느냐'고 항의했습니다.
그 때 코치는 "내가 너를 오늘까지 사랑으로 키워왔다. 코치의 명에와 권위를 걸고 너에게 요구한다. 너는 이번 100미터 대회에 영국을 위해서 꼭 출전해야된다"고 강권했습니다.
그 때 에릭은 "저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내 신앙의 양심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하고 거절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영국은 에드워드 황태자를 보냈습니다. 황태자가 직접 와서 당신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반드시 이 대회에 출전해야 한다고 명령했지만, 그는 "나는 내 조국 영국을 사랑하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을 더욱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며 100미터 결승전 출전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100미터 결승전에서 달려야 할 시간에 그 도시에 있는 한 교회에 가서 태평하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에릭의 친구가 400미터 경기에 출전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출전권을 에릭에게 넘겨주었습니다. 100미터에 출전을 못했으니 400미터에서 기량을 발휘해 보라는 뜻이었습니다. 100미터 달리기 주법과 400미터 달리기 주법이 판이하게 다르지만, 에릭은 400미터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출발하자마자 넘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일어나서 완주했고, 결국에는 제일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여 목에 금메달을 걸 수 있었습니다. 그가 세운 올림픽 400미터 기록은 신기록으로, 16년간이나 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야 할 것인지를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는 신앙의 경주,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잘 달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세월이 바뀌어도, 환경이 변하여도, 생명이 위태한데도, 그는 항상 믿음을 지켰습니다.
16절믈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왕이 명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일러 가로되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
다니엘은 이방 나라의 왕인 다리오 왕으로부터 '너는 항상 하나님을 섬기고 있구나! 너는 결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섬기고 있구나'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와같이 다니엘은 타협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여러분! 다니엘처럼 교회에서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항상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일이 잘 풀릴 때 뿐 아니라,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도 타협하지 않고 주님을 항상 섬기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만을 의뢰한 사람
다리오 왕의 엄청난 신임을 받고 있던 총리인 다니엘이라 할지라도, 왕의 명령을 어긴 죄로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은 몸에 사자 이빨 자국 하나 생기지 않고 살았습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상처 하나 나지 않고 그가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니엘이 하나님만을 의뢰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자기를 잡아먹기 위해 으르렁거리는 사자 굴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의뢰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이 기적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정쩡하게 믿기 때문입니다.
야구 선수들 중, 타자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야구 선수들의 표현대로 하자면, '손이 울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방망이를 꽉 잡고 때리면 홈런을 치기고 하고 안타를 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컨디션이 좀 나빠서 방망이를 약간 느슨하게 잡고 공을 치다보면 손이 울린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손목이 부러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삔 것도 아니고, 뼈에 금이 간 것도 아닌데, 오랫동안 손을 쓰지 못한다고 합니다. 심하면 손이 한번 울린 것으로 인해 시즌 내내 고생하다가 한 시즌을 망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야구선수들에게 중요한 모토가 있습니다. "꽉 잡든지 아니면 놓아버려라!"
저는 이 말이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도 주님을 꽉 붙들든지 놔 버리든지 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주님 아니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 주님만이 나의 힘입니다. 주님만이 나의 도움입니다. 나는 주님만을 믿겠습니다"라고 주님을 단단히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은 시험이 와도 손쉽게 이깁니다.
고민거리가 생겨도 그렇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항상 함께 하시는데, 뭘"하며 콧노래 부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날마다 근심과 걱정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어정쩡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에 고민하고 갈등을 합니다.
예수를 안 믿자니 지옥 갈 것 같고, 또 믿자니 걸리는 것이 많아, 이 사람도 걸리는 것 같고 저 사람도 걸리는 것 같고, 이것도 걸리는 것 같고 저것도 걸리는 것 같고, 모든 것이 걸리는 것 투성이 입니다. 그러다 보니 걱정거리만 생깁니다. 얼굴에 기쁨과 평강이 없습니다. 걱정이 많은 것이 어정쩡하게 믿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어정쩡하게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왔다 하지 말고, 믿을 바에야 다니엘처럼 앙팡지게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다니엘은 성령 충만한 사람, 충성된 사람, 타협하지 않은 사람, 하나님만을 의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 포로로 잡혀 왔을 때에나 나이가 들어 80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을 때에나 성령 충만하여 지혜롭게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나 바벨론 제국이 멸망하고 바사, 즉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오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나 변함없이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총리대신의 자리에 올랐을 때에나, 사자굴 속에 들어가서도 세상과 결코 타협하지 않는 불변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 바뀌어도, 나라가 바뀌어도, 시대가 흘러가도,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대 가운데에서 다니엘과 같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다니엘과 같은 사람을 쓰십니다.
바라기는 변하는 세상에서 불변하는 다니엘과 같은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