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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3-4
놋뱀 / 채규현 목사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에서 가장 젊고, 가장 오래 살았던 분은 요한입니다.
그 요한이 마지막까지 편지를 쓴 것이 A. D. 90년에 나왔던 요한복음, 요한 계시록, 요한 1, 2, 3서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요한 1서 제일 마지막 구절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가장 마지막에 계속 강조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그래도 잊지 못해서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바로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입니다.
요한이 이렇게 이야기 한데에는 전혀 조건이나 제한이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명령입니다.
어떠한 형태이든지 우상이 될 수 있을만한 것들은 제하여 버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상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 개념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좋은 것과 거룩한 것을 바꾸어서 더러운 것과 타락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전부 우상입니다.
사실 사탄은 이 세상의 모든 악한 것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사탄은 오로지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하고 선한 것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그 안에서 그것을 변질시킬 수 있는 것이지, 그가 창조주 하나님처럼 뭘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좋은 것을 만들고 사탄은 나쁜 것을 만든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사탄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선하고 좋은 것들을 가지고 그것을 변질시켜서 타락시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천지만물을 하나님께서 선하고 완전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것을 다스리는 인간을 타락시켜서 천지만물을 타락시켰습니다.
인간을 타락시키는 방법도 그냥 인간이 잘 살고 있는데 무조건 와서 타락시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인간에게 임한 뒤에 바로 그 축복의 말씀을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
인간에게 임한 축복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라.”
이런 명령이 창세기 1장에서 나오고, 2장에서 보면 따로 에덴동산을 두셔서 거기에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십니다. 하와를 만들기 전에 아담이 그 에덴동산의 동산지기로 있을 때 하나님이 아담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는 네가 먹되 오직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드디어 하나님의 선하시고 하나님의 복된 말씀이 아담에게 임했을 때 그 말씀을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사탄이 역사할 능력이 없습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더냐?”
거기에서부터 출발하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을까 하노라.” 하고 하와가 대답할 때 “아니다. 네가 먹어도 정녕 죽지 않는다.” 정면으로 반대되는 말을 합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타락하고 그에게 맡겨진 온 땅도 저주받고, 지금도 그것 때문에 수없이 많은 고난을 받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것들이 바로 그렇게 처음의 의도는 하나님이 선하고 좋게 주셨는데도, 인간을 통해서 사탄이 변질시킵니다.
보십시오.
음악은 오직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변질시켜서 타락한 음악으로 만듭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 모든 것을 만들죠. 텔레비전도 만들고, 영화도 만들고, 전화도 만들고….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드디어 사탄이 역사해서 타락시킵니다.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포르노 영화라는 게 있을 수 없고 음란물이라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타락시킨 것입니다. 내용물을, 의미를 바꾸어서 그렇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초에 선하게 의도된 것들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타락시키고, 더럽게 만들고, 우상의 도구로 만드는 것이 사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 나오는 놋뱀도 마찬가지입니다.
놋뱀이 제일 먼저 나오는 곳이 민수기 21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걸어갑니다. 저도 광야라고 하면 무슨 사막처럼 생각했었습니다. 사우디에 있는 큰 모래만 있는 사막만 생각했었는데 막상 가 보니까 우리의 산과 다를 게 별로 없었습니다. 산도 있고, 구릉도 있고, 골짜기도 있고 한데, 거기에 물이 없기 때문에 나무가 하나도 없고 돌과 흙만 있습니다.
그런 데가 광야입니다.
그 광야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으면서 힘드니까 불평하죠. 그 광야를 걷는 기간이 40년이나 되지 않았습니까?
불평합니다.
거기서 먹는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라는 음식을 가지고 쪄서 먹고, 구워 먹고, 여러 가지 형태로 먹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박한 식물” 이라고 그랬어요
정말 맛없고 우리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고 불평할 때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십니다. 독사를 보낸 것이죠. 독사에게 물리면 점점 독이 퍼지지 않습니까? 독이 퍼져서 죽어가고 있는 가운데 다시 모세에게 어떻게 좀 해 달라고 붙들고 매달립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향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야기하시죠?
“ 그 불뱀과 똑같은 구리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달라. 그리고 장대에 달린 구리뱀을 본 자마다 살리라.”
여기서 믿음의 본질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독사에게 물려서 점점 독이 퍼져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소리가 들립니다.
“자, 누구든지 여기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보는 자마다 살리라. 하나님이 그렇게 이야기하셨으니 보기만 하면 살리라.”
이렇게 이야기할 때 그것을 보는 자마다 살았습니다.
그런데 일반 상식으로 생각하면, 그것을 보는 것하고 내 몸에 독이 퍼지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예요?
어쩌면 혹시 불에 달군 칼을 가지고 다니면서 “이 칼로 물린 자리를 X표시해서 째는 자마다 살리라.” 했으면 훨씬 많이 살았을지도 몰라요. 그것은 조금 이해가 되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죠? 전혀 관계없어요. “저기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보는 자마다 살리라.” 그런데 죽어가고 있는데 한번 매달려 보는 겁니다. 그래서 쳐다보는 사람은 살았고, “에이 그런 황당한 거짓말이 어디있냐?” 안 본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믿음의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면을 그대로 예수님이 가져와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요한복음 3장16절에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 바로 앞에 14절, 15절에 “인자도 광야에서 달렸던 놋뱀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그 말은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높이 들려야 한다는 거예요. 왜냐면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그래서 그 십자가를 보는 자마다 살게끔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광야의 놋뱀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연결시킨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일맥상통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사실 자기들의 신세를 모르지만,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님 믿는 사람이나, 예수님 안 믿는 사람이나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안 죽을 사람 있습니까?
다 죽어가고 있죠.
그런데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삽니다.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이 임박한,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전혀 없고, 오직 유일한 길-살아날 수 있는 길은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바라보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거부합니다.
믿기를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연계성이 없는 것 같으니까요. 내가 죽는 것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 하고 무슨 관계가 있냐는 것입니다. 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그 예수님의 의 앞에 내 삶을 맡기고,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간절히 구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살리라, 영생을 얻으리라 하는 말씀이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입니다. 혹시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어려서 주일학교에는 다녔는지 모르겠는데 점점 자라면서 고등학교로 대학교로 직장으로 멀리 가면서 “와, 드디어 해방이다.” 그래서 거기에서는 교회 안 다니던 사람들이 오늘 고향 집에 왔다가 할 수 없이 부모님께 끌려 온 사람 있죠? 추석이라 집에 안 올 수는 없고, 오면 꼭 부모님께 억지로 끌려서 교회 나오는 사람, 여러분들은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다시 한번 여러분이 주일학교 때 배웠던 것들을 일깨우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계속해서 영원히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 갈 것처럼 느끼지만 역시 사람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고, 그 뒤에는 심판이 기다립니다. 아무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오직 유일하게 피할 길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놋뱀을 바라보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그 십자가 앞에 여러분의 인생을 내려놓고 인생을 맡기고 주님의 인자한 생명의 구원을 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여러분의 부모님의 신앙을 배워서 여러분도 함께 영생을 얻는 축복을 얻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광야의 놋뱀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상징합니다.
후에 나오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형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바로 우리가 구원받는 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면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많은 사람을 살렸던 그 놋뱀이 그 사건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로 그 이후에 유일하게 그 놋뱀에 대해서 나오는 구절이 오늘 열왕기하 18장입니다.
3절, 4절을 봅시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그러니까 히스기야 왕 때까지는 그 놋뱀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냥 있는 것뿐만 아니고 그것을 성물로 여기고 제단 앞에 놓고 거기에 향을 놓고 절을 했단 말입니다.
출애굽 할 그 당시가 역사적으로 보면 B. C 1450년 경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 때는 B. C 600년 경입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이 거의 800년이 지났죠? 800여 년 동안 놋뱀을 우상숭배 한 것입니다.
그 놋뱀의 이름을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그랬습니다.
‘느후스단’이라는 말은 ‘한 조각의 놋’ 이라는 말이에요. 원래 은혜의 도구였던 그 한 조각의 놋이 이제는 바뀌어서 오히려 우상의 도구로 800여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란하게 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게도 에덴동산도 어디 있는지 모르게 만드셨고, 모세의 무덤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만드셨고, 이런 것들을 없애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그러한 놋뱀 같은 것이 아직도 우리의 믿음 가운데도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애초에 좋게 만드셨는데 그 좋게 만드신 것을 뒤집어서 음란하게 위하고 우상적으로 위하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로마에 가보면 옛날부터 내려오는 귀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빈꼴리” 라고 해서 베드로를 메었던 쇠사슬이 아직도 있는데 그 쇠사슬을 모셔 놓은 성당이 있습니다. 그 쇠사슬 하나를 보려고 줄 서서 들어가야 합니다. 또 다른 성당에 가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그 못을 모셔놓은 성당이 있습니다. 그 못 하나 보려면 또 줄서야 합니다
. 물론 귀한 것들인데 이것이 잘못 되면 오히려 그게 우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미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 고대의 것들뿐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아름다운 예배당 짓는 것 좋습니다. 그런데 예배당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데 오히려 예배당 자체가 우상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세의 교회에 가서 보면, 그 교회들은 으리으리하고 멋있습니다. 전부 고딕 양식으로 위로 뻗어있고 그 앞의 스테인드 글라스들은 굉장히 멋있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전부 위쪽으로만 뻗어있어서 음향은 아주 엉망입니다.
앞에서 “어” 하면 “어어어어어~” 하고 메아리치고, 앞에서 하는 말을 들을 수가 없어요. 유일하게 그 음향이 좋게 느껴질 때는 앞에서 시편 찬송을 하거나 아카펠라로 찬양 하면 울려서 아주 웅장하고 엄숙하게 잘 들립니다.
그런데 말은 정확하게 전달이 안 돼요. 그런데서 어떻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엄청나게 많은 돈을 들여서 아름답게 지었는데 소리는 안 들려요. 무슨 진정한 예배가 되겠느냐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고수하기 위해서 음향을 생각지 않습니다.
예배는 망쳐도 예배당은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배당이 우상이 된 것이죠.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들이 정말 아름답게 교회를 지어놓고 아름다움이 훼손될까봐 사람들이 못 쓰게 합니다. 오히려 예배당은 정말 자주 자주 사용되고 많이 사용되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훈련을 받고 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데에 사용된다면 그게 제일 좋은 거죠. 예배당도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교회의 그 어떤 것도 본질적인 목적에 반하게 되면 순식간에 우상이 됩니다.
본질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물건이나 조직이나 어떤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질적인 목적에 변질이 생기면 금방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쇠사슬이 어떻고, 무슨 잔이 어떻고, 무슨 상이 어떻고 이런 것들이 다 그런 문제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여러 가지로 복을 주십니다.
우리의 가족으로 복을 주시고, 우리의 자녀로 복을 주시고, 우리의 배우자로 복을 주시고, 우리의 친구들로 복을 주시고, 심지어는 우리에게 삶을 허락하셔서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직업도 허락하시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그런 것들을 본질적인 목표에 맞게 그 관계가 되어야 하고 그것들을 써야 하는데, 오히려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데 저해가 된다면 그것들은 순식간에 우상으로 변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들을 교육시키고 그들의 삶을 인도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녀가 우상이 되어서 그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데 부모들이 일조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배우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남편, 아내와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믿음에서 멀리 떠나는 일도 얼마든지 멀리 한다면 그것은 우상이죠.
오늘 추석인데 많은 사람들이 제사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줄 압니다. 온 가족이 예수님 믿는 가정은 정말 복된 가정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가정에 특히 며느리로 들어갔을 때 어떤 가정보다도 복된 가정에 들어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서로 안 맞는 것도 있고 어려운 일도 물론 있겠지만 한 신앙을 가진 온 가족이 있다는 사실은 정말 복된 가정입니다. 그런데 많은 가정들은 또 그렇지 않죠.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강력하게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부모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해서 몸과 마음을 다해서 그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탄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축복을 변질시켜서 우상으로 만드는 것처럼,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변질시켜서 우상으로 만듭니다.
차례상에서 절하는 것, 제사상에서 절하는 것, 이것들이 우상으로 변질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세상 누구보다도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더 부모를 공경하는 효자들, 효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런 명절날에 어려운 문제들이 생깁니다. 20년 전, 30년 전에 수많은 믿는 자매들이 안 믿는 가정에 시집을 가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런데 20년, 30년이 흐르면서 그 한 가정에 들어간 복음의 씨앗 때문에 온 가족 전체가 예수님 믿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많이 있습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수없이 많은 크리스챤 며느리들의 눈물과 기도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언제 그렇게 전도했느냐 하면, 그렇게 막 모여서 전도할 기회가 많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드러나는 때가 제사 때였습니다.
어떻게 드러납니까?
제일 먼저 갈등으로 드러납니다.
많은 가정에서 제사 문제가 갈등으로 드러났습니다.
또 아내의 기도와 아내의 설득으로 남편들이 믿게 될 때 그 갈등이 완전히 표면화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사상에 절하는 것은 남자들 문제가 제일 크니까요. 그런 갈등 속에서 완전히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표면화되면서 이제 심각하게 온 가족들이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고통받기도 하고 고민하기도 하죠.
그런데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그 제사 때의 갈등 말고 다른 모든 생활 속에서 예수님 믿는 며느리가 하는 행동을 보고, 예수님 믿는 아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전도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제사상에서 함께 절하지는 않지만, 이것과 효도는 별개라는 사실을 끝없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일들을 통해서 가정마다 예수님이 증거된 줄로 믿습니다.
사탄이 변질시킨 것을 바로 합시다.
원래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뜻으로 주신 것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바로 지킵시다.
평소에도 부모님에게 잘 못하면서 제사 때에도 안 온다면, 완전히 전도는 커녕 “저 사람 믿으니까 나는 더 안 믿는다.” 그렇게 됩니다.
수많은 며느리들, 수많은 아들들, 믿지 않는 가정에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평가받고 있습니까?
누구보다도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자녀들이 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그 가정마다 사탄의 궤계로 제사상에서 머리 숙여 절하는 것은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사실은 그것이 바로 우리 한국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는 초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초기에서부터 제사를 거부했습니다. 신사참배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온갖 핍박이 국가적으로, 가정적으로 있었지만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한국 교회의 신앙은 더 순수해졌고, 더 단단해졌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진정한 전도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초기에 중국에서는 천주교를 중심으로, 또 선교부들을 중심으로 해서 제사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갔습니다.
그 결과는 아주 참담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를 바로 보일 기회를 잃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초기의 복음 증거는 완전히 실패하게 됩니다.
무엇이 본질인가를 정확하게 지킵시다.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것,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풍습,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은 온전히 지킵시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 그것을 변질시켜서 우리를 넘어뜨리게 하는 것들은 과감하게 배격합시다.
여러분들도 여러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너희들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느냐?” 그러나 “우리는 누구보다도 부모를 공경합니다.” 바로 그것은 여러분들이 실제 삶에서 해야만 합니다. 어디서나 바로 그런 면들은 바로 보여져야만 합니다.
심지어는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을 가장 집약시켜 놓은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여기에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라는 물건이 어떤 영물은 아니죠. 마치 그런 식으로 다루는 일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오멘이나 무슨 악령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꼭 악령과 싸울 때 앞에 십자가를 대죠. 그 십자가가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내 속의 십자가가 더 큰 문제죠. 내 마음 속에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문제지, 이 물건의 십자가가 무슨 능력이 있냐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해요. 그러니까 그런 영화를 보고 나서 귀신 쫓아낸다 할 때도 귀신들린 사람 앞에서 십자가를 들이댑니다.
바로 그런 면 때문에 우리 총회에서는 결의까지 했습니다. 십자가가 우상화 된다는 면을 방지한다는 의
미에서 이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새겨놓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무시해서가 아니에요. 십자가의 의미는 이해해요. 다만 그것을 우상화시키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면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 본질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주님은 원래 우리에게 좋은 의미로 주셨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그 속에서 그것의 의미를 바꾸고 타락시키려 합니다.
오직 우리의 마음은 주님만을 향합시다.
오직 우리의 마음은 주님만을 향해서 주님만을 섬기고 주님의 뜻대로 하려는 그 목표를 잊지 마십니다.
그래서 먼저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구하는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모든 부모님과의 관계도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들도 채우시고, 우리의 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모든 것의 진정한 우선순위가 제대로 될 때 우리의 심령도 평안하고, 모든 관계도 어려움 중에서도 마침내 주님 안에서 다 회복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한 그러한 가정, 그러한 교회, 그러한 사회가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함께 그러한 은혜가 있어서 어디에 있든지 이러한 주님의 능력과 은혜가 충만한 삶을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