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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라
성경본문: 이사야 6: 1-8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기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 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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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적인 그러나 불가능한 도전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야기하라면 ‘거룩’이라는 말로 대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참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늘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거룩’을 [blameless]라고 표현했는데 사람들 앞에서 욕먹을 짓을 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기 위해 사는 것이 거룩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는 것이지요.
성경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2절을 보세요.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이 말씀처럼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이상 어떻게 이 세상에서 욕을 먹지 않고 거룩하게 살 수 있으며,우리가 거룩하게 산다는 것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고 우리의 거룩함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기를 원하시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함으로 부르시며 그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늘 신앙생활을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영의 아들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라고 했던 권면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유효한 말씀입니다.
어떤 젊은 화가가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그림이 팔리지 않는다고, 원로 화가를 앞에 두고 푸념을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데 3일밖에 안 걸리는데, 이 그림 한 장 파는 데는 3년이나 걸려요."
이 말을 듣고 있던 원로 화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을 바꿔보게, 자네가 3년 동안 진지하게 그림을 그려본다면, 그 그림은 3일 안에 팔리게 될 걸세."
이 이야기를 통해 ‘거룩함’을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빨리 거룩해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없이 거룩한 삶의 실패를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함을 만들어가는 진지함과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진지함이 없는 노력은 쉽게 허물어집니다.
우리가 좀 더 진지하게 거룩함을 쌓아간다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거룩함은 아니지만, 남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는 거룩함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진지함 만큼, 삶의 거룩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모든 사람에게는 이 거룩함을 이루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의 진수는 나 홀로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는 이 없는 곳에서, 오직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나의 모습이 진정한 거룩함입니다.
사실 저는 목사로서 남을 의식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보다도 말입니다.
기도하는 내 모습, 성경을 보는 내 모습 등등. 나를 알아보는 교인이 없는 곳에서는 참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이 교인들 앞에서 조심스러워집니다.
하지만, 이런 거룩함이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무엇이 다를까요?
제가 목회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 중의 하나가 분당의 개척교회 시절 새벽예배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대충 시간이 되면 가 줘야 문을 잠그고 갈 텐데 너무 오래 기도하는 사람들 때문에 말입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단순히 힘들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 기다리는 시간 동안에 어떤 모습으로 앉아 있어야 하는지가 늘 고민스럽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홀로 있을 때, 이 거룩함을 위해 그렇게 힘들어하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의 거룩은 습관화되어 가지만, 정작 하나님 앞에서 홀로 있는 나의 모습에 거룩함이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거룩함의 정의를 내린다면…
오늘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명확하게 ‘거룩’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 중의 하나인 이사야를 생각할 때마다, 아니 그가 불림을 받는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말이 있다면 ‘거룩’입니다.
이사야 6장 3절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그런데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던 때가 언제냐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사 6:1)라고 기록합니다.
웃시야는 52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통치하며 많은 족적을 남겼던 사람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 경제적으로 발전된 나라.
역대하 26장 15절은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 짐이었더라”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웃시야가 권력에 도취되어 교만하여 지더니 성전을 더럽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영성을 관리하기로, 자기가 직접 성전을 관리하고 하나님을 나름대로 사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거룩한 제단에 자신의 취향과 욕망을 따라 일어난 변화를 보세요.
오직 제사장들만이 희생 제사를 들릴 수 있었는데,아사랴와 80명의 제사장이 깜짝 놀라 쫓아와서는 막으려 했던 신성 모독의 행위를 서슴지 않고 행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이제는 자신의 권력으로 자기가 원하는 때에 마음대로 대하겠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의 모독 행위는 즉시 ‘나병’이라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웃시야가 자신이 왕으로서 가질 수 있었던 특권이라고 항변하던 모든 일이 사실은 ‘신성모독’이었음을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선 것이 아니라 자신이 거룩함을 소유하려고 했지요.
아무리 우리가 위대하게 쓰임을 받아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은 단지 나를 겸손하게 만들 뿐입니다.
내가 거룩함을 좌우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위대한 왕이었지만, 스스로 거룩함을 소유하려다 거룩함을 상실하게 됩니다.
아니 성전에서 추방을 당하고 거룩한 백성의 공동체와도 접촉할 수 없게 됩니다.
유진 피터슨이 그의 책에서 아주 좋은 예화를 들어 거룩을 설명합니다.
미국의 몬태나 산맥의 아름다움을 보려고 노스캐롤라이나에서부터 운전하고 오다 병원에서 인터뷰하는 한 사람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다시는 여기에 안 올 겁니다!”
그는 하이킹을 하던 중 회색곰을 만나 심하게 다쳤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름다운 산을 보러 왔지만, 그 아름다움이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피터슨의 가족도 바로 1주일 후에 그 사람이 다쳤던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입구에는 이런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위험, 회색곰 출몰 지역. 이곳을 지나가는 자의 안전에 대해 당국은 책임 없음”
피터슨의 일행은 아름다운 지역을 긴장한 채로 지나가게 되었고 두 시간을 걸어가고 나서는 빙하가 흘러들어오는 보석같이 빛나는 호수를 만나게 외었습니다.
아름다웠지만 저 건너편에서 물장난하는 회색곰 가족을 보고는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두려움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주 적절한 예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 행하신 일을 바라보며 경외심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함에는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어떤 일에도, 우리의 만족함에도 그분의 거룩함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행하신 일에 직접 참여하는 우리가 어느 순간 교만하여 하나님을 향한 거룩함을 상실하는 순간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내가 이용하는 것, 내 마음대로 조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내가 서는 것입니다.
거룩함의 경험!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섰던 이사야가 던짐을 받은 곳은 거룩하지 못한 세상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가야 하는 세상과 그들이 맞닥뜨리는 사람들은 역시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거룩은 거룩하지 못한 곳에서의 만남이며, 그 만남 가운데서 드러납니다. 거룩하지 못한 곳에서 우리의 거룩함이 드러날 때, 거룩하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 강력한 도전은 또한, 우리에게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최하진의 [네 인생을 주님께 걸어라]라는 책에 보면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살아가기로 했을 때, 그래서 그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기로 하고 살아갔을 때,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 사건을 소개합니다.
“도대체 교수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류바이진에게서 받은 이 질문이야말로 정말 제대로 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하는 이 질문은 나의 정체성이 무엇이고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묻는 말이다.
다시 말해 내 삶을 주관하는,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내 삶에 대한 결정권을 쥔 존재가 무엇인지를 묻는 말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I’m a Christian.”(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즉 그리스도를 좇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 한가운데서 드러나는 우리의 거룩함은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누구를 쫓느냐에 따라 거룩한지 아닌지를 세상이 알게 되는 거룩함의 차원이 있습니다.
이번 BTD 39기에서 한 성도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직장에서 자신의 정체성은 "노는 사람"이었답니다.
갑자기 그의 삶이 변했을 때 사람들이 "저 사람 신 내렸네!"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고,가장 두려운 것은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을 다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이었답니다.
그런데 어둠의 영역에서 빛의 영역으로 돌아서니까 빛의 영역에 사는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어울리게 되었다고,그리고 2년 만에 처음으로 BTD에서 성찬식을 통해 잊었던 술 맛을 보았다고 합니다.
변화된 사람의 이야기는 늘 우리에게 도전되고 감동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사야의 거룩한 체험을 먼저 살펴보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이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의 전에 살았던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거룩” 그 자체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세가 만난 곳은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양을 치던 더럽고 불편한 돌산이었습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곳이 거룩한 곳이라고 선포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모세는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또한, 미디안 광야는 모세가 유배를 당한 곳이었습니다.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한다는 그가 버림을 받고 인생의 아픔을 경험한 곳이었습니다.
인생의 막장에서, 아무 예고도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거룩하지 못한 곳에서 가장 아픔 상처를 가진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제 이사야의 시대를 넘어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중 요한이 유배 생활을 하던 밧모 섬에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체험이 있었습니다.
세상과 단절된 곳, 유배당한 곳 가장 고독한 곳에서 요한은 거룩한 환상을 보게 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
하나님의 성전이 웃시야에 의해 모독당한 그곳에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하고 팽창하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한 것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이사야가 살던 때는 앗수르인들이 이스라엘을 강탈하고 거룩한 백성이 침략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예배의 장소에는 거룩함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어느 시대보다도 거룩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아니, 우리 주변의 많은 교회가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인본주의에 빠져버린, 교회에서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이용하는 교권주의가 팽배하고,정치권에서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또한, 어떤 이들은 자신의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이때에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사라지지 않으시며 예배하는 곳에서 거룩하심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거룩함을 본다는 것, 우리가 거룩함을 접한다는 것은 분명히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거룩함에 참여하지 않고 주변에 머물며 세상과 어울리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니 우리가 그 주변에 머물면서도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착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거룩하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거룩함 앞에 서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 자신이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죄를 인식하는 것”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죄를 인식한다는 것은 자비와 용서를 경험하고 깨끗함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오늘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6장 6-7절을 보세요.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계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그렇습니다.
거룩함 앞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심판이 아니고 “용서”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거룩함은 거절이 아니라 용납입니다. 비난이 아니라 대화입니다.
거룩함이 우리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거룩함 앞에서 우리가 참여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사야에게 나타난 거룩함의 체험, 숯불로 그의 부정함을 지지고 나서 일어난 대화를 보세요. 이사야 6장 8절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거룩함에 참여하게 되는 순간 하나님의 사명에 대화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거룩함 안에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거룩함의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참여하라고, 세상 속에서 거룩함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입니다.
또한, 거룩함에 참여한다는 것은 일어나는 결단과 변화 그것으로 발생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한 우리의 신앙에서 "거룩하게 산다는 것" = "불편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세속적인 영역입니다.
필연적인 갈등과 대립의 과정이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선교사로 사역하는 최하진 씨가 쓴 [네 인생을 주님께 걸어라]에 보면 그의 삶의 결단으로 필연적으로 겪어야 했던 식구들의 어려움과 불편함을 고백합니다.
1993년, 우리 부부는 유치원에 다니던 딸, 은혜를 데리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그마한 아파트를 얻었는데 그 집은 비만 오면 천장과 벽면에서 빗물이 새고 온 집 안이 습기로 가득 찼다.
수도를 틀면 흙탕물이 나오고 때로는 지렁이가 나올 때도 있었다. 우리에게는 절대 쉽지 않은 고강도 적응 훈련이 시작되었다.
어른들도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는데 어린 은혜는 오죽했을까. 은혜는 새로 다니게 된 중국 학교의 화장실에 적응을 못 하고 화장실 가기를 두려워했다.
재래식 화장실에서 양변기 대신 깊고 어두운 구멍을 내려다보면 그 구멍 안으로 빠질 것 같아 무섭다고 했다. 은혜는 학교에 있는 네 시간 내내 볼일을 참다가 노래진 얼굴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은혜가 학교에서 옷에 똥을 싼 것이다.
아침에 학교에 도착했을 때부터 변이 마려웠는데 참다가 그냥 옷에 싸버린 것이었다.
그렇다고 말이 잘 안 통하는 중국인 선생님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아이는 그냥 그 상태로 네 시간을 버티고 집에 돌아왔다.
나는 한겨울에 난방도 잘 안 되는 중국 학교에서 젖은 옷을 입고 추위에 벌벌 떨면서 똥 냄새와 사투를 벌였을 딸을 생각하니, 딸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런데 그때 아내가 딸에게 하는 말을 듣고 나는 나보다 아내가 훨씬 더 나은 선교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혜야, 엄마 아빠는 여기 중국에서 죽을지 몰라. 우리는 죽을 때까지 중국의 언니, 오빠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면서 살 것 같은데, 너도 우리 가족이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적응해야 하지 않겠니.”
아내의 말에 은혜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내와 딸을 보면서 나는 최고의 동역자를 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어떤 면에서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적응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불림을 받을 때까지 살아가는 세상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이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 거룩하지 못한 일 가운데서 거룩함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임은미 선교사님이 말씀을 전하면서 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딸을 현지인들이 다니는 학교에 보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흑인들 사이에서 백인인 딸이 얼마나 어려움을 당했는지 말입니다.
화장실을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래서 딸에게 물었답니다.
"이제 화장실 괜찮니?"
"엄마 잘 맞춰서 조준하면 돼!"
"학교에서 나오는 점심은 맛있니?"
"엄마 학교 밥은 그냥 먹는 거예요!"
그런데 그 딸이 지금 부른 노래가 차트 순위에 올랐습니다.
백인인 달이 아프리카를 사랑한다고, 케냐 사람을 사랑한다고, 우리 엄마 아빠도 사랑한다고 노래를 부릅니다.
그 딸이 이제 누구보다 케냐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이해하며 노래하고 선교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함은 우리의 삶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때로는 인내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살아가기
우리는 지금까지 말씀을 통해 거룩하게 산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다는 것, 거룩하게 살아가려면 삶의 헌신과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이기에 거룩을 이루려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임도 알았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살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의 삶에서 거룩을 방해하는 게으름을 제거해야 합니다.
게으름은 우리를 타락하게 하는 사단의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잠언 말씀에도 보면 "좀 더 자자, 좀 더 눕자"라고 속삭이는 사단의 음성을 경계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글을 읽다 보니까, [게으름의 8단계]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1단계: 희망을 잃지 않는다.
"이번만큼은 일찍 시작해야지."
2단계: 긴장한다.
"곧 시작해야 한다."
3단계: 죄의식이 든다.
"벌써 시작했어야 했는데…"
4단계: 그릇된 확신을 갖는다.
"아직 시간이 있어."
5단계: 절망하기 시작한다.
"나는 무엇이 문제일까?"
6단계: 심하게 고통을 느낀다.
"이젠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7단계: 드디어 시작한다.
"그냥 하는 거야."
8단계: 같은 일이 반복된다.
"다음에는 더 일찍 시작해야지."
배리 파버라는 사람의 말입니다.
"게으름은 교활한 적이다. 그것은 중독성이 있어서 모르는 사이에 끊기 어려운 습관이 된다. '오늘'이라는 단어를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놓으면, 게으름에서 비롯되는 이 파멸적인 습관을 피할 수 있다."
게으른 자는 "거룩"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게으른 자는 거룩이 얼마나 귀하고 어려운 일인지 알지 못합니다.
거룩하게 살아보려고 몸부림쳐보지 않은 크리스천에게 거룩은 아무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제가 [거룩 vs 게으름]을 연결한 이유입니다.
둘째, 거룩을 방해하는 "타협"을 경계해야 합니다.
게으름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타협'이라는 무서운 덫에 걸려들게 합니다.
타협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잠언 4장 23절을 보세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끊임없이 깨어 있어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타협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늘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하나님의 생각과 사단의 생각. 어느 것이 승리하느냐의 비결은 우리가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잠언을 기록한 솔로몬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께 지혜를 얻은 왕이었지만, 삶의 영화 가운데서 아주 작은 타협이 시작됩니다.
아마도 게으름의 이유였겠지요. 처음에서 산당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주목하세요!
그가 산당에서 한 행위는 우상 숭배가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열왕기 상 3장 3절과 민수기 33장 51-52절에 보면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런 작은 타협은 더 큰 타협을 가져옵니다. 결국, 말년에 솔로몬은 그의 부인들이 믿는 이방신들을 위한 성정을 짓고 자신마저 그 신들 앞에 경배합니다(왕상 11:3-6). 이러한 타협은 솔로몬의 문제가 아니라 거룩하지 못한 곳에서 사는 크리스천들이 언제나 받는 유혹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것과의 타협'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 타협이 결국, 우리를 파멸시킨다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죄 하나가 우리의 삶 전체를 오염시키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매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훈련과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우리의 부정함을 사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완전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단지 거룩함에서 서는 부지런함이 필요하다고, 더는 타협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셋째, 거룩하게 살려면 늘 삶의 근원을 묵상해야 합니다.
조안나 위버의 [마리아의 영성갖기]라는 책에서 아주 좋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스트리아 알프스에 에메랄드 빛 숲과 높은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한 마을이 있었다.
멋진 자연경관 덕분에 복잡한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고픈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았다.
마을 한가운데는 산꼭대기에서 흘러내려 온 물이 고여 만들어진 연못이 반짝거렸다.
여름이면 아름다운 백조가 물가에서 헤엄치고 마을 사람들과 방문객들은 풀밭에 앉아 햇볕을 즐겼다. 사람들이 천국이 따로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어느 날 저녁 시의회가 모여서 예산을 검토하는데 한 의원이 이제껏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비용을 지적했다. 바로 ‘수원 관리인’이라고 적혀 있는 항목이었다.
“이게 뭔가요?”
그가 질문했다.
“산꼭대기에 노인이 한 명 있습니다.”
누군가 대답했다.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수원과 우리 마을의 수도공급에 관련된 일을 하겠지요.”
그들은 이 부분에서 돈을 절약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노인에게 일을 그만해도 된다는 말을 전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연못이 이전만큼 맑지는 않았지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 백조들이 보이지 않자 여기저기서 말이 나왔다.
물이 갈색 빛이 돌고 날씨가 안 좋은 날은 악취가 난다는 말도 들려왔다.
거기에다 관광객의 예약마저 줄자 시의회에서는 전국방송에 광고를 내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산에서 일하던 노인을 떠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상황을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 몇몇이 수원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에 보니 바위와 돌멩이가 물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수원 그 자체에 있었다.
전에는 맑은 물이 계속 샘솟았지만, 지금은 썩은 잎과 숲에서 나온 찌꺼기 때문에 혼탁한 물이 고여 있었다. 여름 내내 풀을 열심히 제거하던 노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제야 모두가 깨달았다. 수원 관리인이야말로 그 마음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거룩의 근원이 우리의 삶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거룩을 더럽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오늘 한 가지 예화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남의 양을 훔친 괴로 "양 도둑(Sheep Thief)"이라는 두 글자의 약자 S. T.를 이마에 낙인찍힌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제 중 형은 모욕을 참을 수 없어 외국 땅에 가서 자신의 과거를 감추어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보는 사람마다 이마의 두 글자가 무슨 뜻이냐고 캐묻는 바람에 그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더 이상 비통함을 참을 길이 없어 방황하다가 결국은 먼 타향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내가 양을 훔친 사실은 내가 다른 곳으로 달아난다 해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 여기 남아서 내 이웃과 나 자신에게 다시 정직과 신용을 되찾도록 노력해야겠다.’라고 결심하였습니다.
해가 바뀌는 동안 그는 정직하다는 평판을 굳혀갔습니다. 물론 그가 많은 수모를 참아가며 노력을 하였던 것입니다.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이곳을 지나가던 낯선 사람이 이 노인의 이마에 있는 글자를 보고 동네 본토박이에게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동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인데 나는 그 일이 무슨 일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 글씨는 세인트(Saint)의 약자일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입니다.
거룩은 노력한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가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해지기를 기다리십니다.
거룩의 가치는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구원의 유산을 우리가 물려받기를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