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건한 삶의 파노라마, 올곧은 삶의 압축파일
- 박태병의 수필세계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인간은 무엇인가에 자신을 몰입시켜 그 안에서 보람과 행복을 찾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박태병도 마찬가지다. 세 번째 수필집을 내면서, 희수를 맞은 작가는 수년간 본격수필의 세계에 몰입하여 얻은 수필나무열매를 수필집으로 선보이려 한다. 꽃이 열매를 열망하듯이, 좋은 작가는 좋은 작품집을 내는 게 꿈이다. 그런 까닭으로 박태병은 본격수필창작론을 몇 년간 배우면서 아마도 오늘을 기다려왔던 것 같다. 시인 보들레르는 인간은 어느 하나에 미쳐야 한다고 했다. 수필에 미친 동력으로 해서 박태병의 수필은 감동을 세포 속으로 실어 나른다. 물론 그 탄탄한 감동의 세계에는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진정성이, 올곧은 삶의 압축파일에는 진한 영혼이 서려 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인간의 열정이 뿜어내는 거친 호흡과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흡인력도 있다. 삶의 진경을 찾아나서는 그를 뒤따라 나서보면 어떨까.
은퇴한 장로로서 발을 딛고 있는 영역의 그 순수와 향기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그는 단독자나 소수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삶은 누구에게나 벅차고 힘든 것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혼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했다. 혼자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기 위해 인연이라는 끈을 통해 남과 나를 하나로 묶더라도, 열정이 없으면 그것은 애착에 지나지 않는다. 박태병의 지향점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소박하게 자기 본연의 자세를 다지겠다는 낮은 생각으로 향하고 있다. 작가가 수필을 고집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깊이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생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위기의 삶을 창조적으로 전환해야겠다고 피력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튼튼한 삶을 더 단단히 다지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인간화의 길이라 할 수 있겠다.
박태병 수필의 가장 큰 강점은 파편화된 사람들의 정서를 치유해 줄 유일한 통로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수필집은 인문학적 사유를 통한 진실의 추구와 그 진실의 세계를 형상화한 데에 그 특징이 있기에 우리 수필사에 독특한 위상을 갖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에게는 ‘문학은 인생에 대한 질문’이라고 하는 나름의 문학관이 있다. 제한된 지면 안에 주제를 내면화하고, 문장을 형상화해야 하기에 수필은 고도의 수련을 요구한다. 그러다 보니 수필에서 문학성을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박태병의 수필은 적절한 변주와 다양한 전개를 통해 문학적 성취를 담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여타 수필집의 한계를 잘 극복하고 있어 보인다. 수십 편의 수필에 담긴 문예성이 세포 속으로 스며들어 오면서 주던 그 감동의 순간과 즐거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II. 저항적 삶의 흔적을 담은 수필과 숨가쁘게 달려온 역사
수필은 일상에 보다 윤기 있는 터치를 통해 그 빛깔과 체취를 더함으로써 새로운 감동을 발아시키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수필의 윤기는 문학언어를 사용해서 화려하게 윤색을 하는 것으로 발생되지 않는다. 그것은 얼마나 진솔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느냐 하는 점과 인생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따뜻한 눈을 갖느냐는 기준에 의해 평가된다. 박태병에 있어서 수필을 쓰는 일은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한 모색의 일환이다. 이에 초점을 두고 메시지의 간접화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그의 수필을 올바르게 보고 평가할 수 있는 감상의 포인트라 하겠다. 수필을 읽어나가면, 그는 한정된 시간을 사는 동안 영원히 기억될 무엇인가를 위해 과거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달려온 역사 중에서도 유년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는 작품을 통해 그의 삶에 묻어나는 저항적 삶의 향기를 음미해 보자.
나는 능력 있는 아버지 덕택에 전쟁 전까지 서울에서 비교적 잘 살았다는 희미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넓고 커다란 한옥 기와집에서 마음껏 뛰어 놀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어렴풋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고 부상을 입은 그들이 우리집을 임시 병원으로 징발하여 사용하기도 하였으니 작은 집은 아니었던 것 같다. 9·28 수복 때 하늘을 맴돌던 미군 정찰기에 그들이 걸려 우리 집은 폭격의 대상이 되었다. 종적을 감추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우리를 지키시던 할아버지의 직감에 서둘러 그 집을 탈출하고 몇 시간 후 집은 폭격당하여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나를 여덟 살이 되도록 곱게 키워준 보금자리가 흔적 없이 사라진 것이다. 가족 모두가 폭사를 면한 것은 극진하신 할아버지의 보호 본능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소녀> 중에서 -
그는 어린 시절 부유한 집에서 성장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살던 집이 인민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사라지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가슴 아팠던 유년 시절을 향수처럼 동경하고 있다는 것은 수필 <그 소녀>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간직하고 싶은 어린 시절의 곱고 순결한 마음 때문이 아니겠는가. 전후를 극복하며 살벌한 경쟁의 시대를 겪은 그에게는 몹쓸 전쟁이 지우지 못하는 상처로 남아있지만, 그는 면소재지 작은 학교에서 만났던 이름 모를 예쁜 소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아직도 지우지 못하며 살고 있다. 이런 낭만적 성향은 그를 작가로 성장하게 했고, 어른이 되어서 갖게 된 고매한 인품과 작가로서의 탁월한 글솜씨는 이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박태병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것이라면 말과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지성적인 마음과 저항적 자세라 하겠다. 할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을 수필화한 데에서는 인간의 향기와 그 촉촉한 감동을 느낄 수가 있다. 깨달음의 느낌표를 찾아온 사람만이 지니는 품맛은 박태병 수필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하겠다.
광화문에서 밀려온 데모대가 경무대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들이 만든 어깨동무 스크럼은 태풍을 만난 파도처럼 중앙청을 돌아 마지막 코스로 질주하고 있었으니 누가 그 노도를 막을 수 있었을까. 탕! 탕! 탕! 소년에게 낯선 총성은 마지막 유언 같은 비명이었다. 곁에 있던 친구는 꼬꾸라졌고 소년은 체포되어 경찰서로 끌려갔다. 길바닥에 너부러진 사람과 사람의 아프도록 무거운 침묵, 독재를 옹호하는 구실을 제공한 반공회관이 불길에 휩싸였고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유치장에 가득 찬 비장한 분노의 눈초리는 냉소와 열기를 품은 채 삭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광장> 중에서 -
암울한 시대에서 영웅은 탄생하는 법이다. 그는 애국심이 충천한 열혈 청년으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독재타도를 외치면 광화문에서 데모대와 합류하며 민주주의를 외치다가 경찰서 유치장에서 일 주일 간 구류를 살다 나온 전력이 있다. 작가의 사회적 책무는 그릇된 현실타파를 외치고, 진실하고 정의로운 삶을 호소하는 것이다. 박태병은 지식인으로서 작가라는 공인으로서 수필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세태에 대한 간접적인 저항을 표시하고,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횡포에 대해 소극적이나마 ‘광장’이란 은유로 저항하려 했다. 사르트르가 말한 그대로 그는 애국심이 불타는 젊은이였다. 글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깨어있는 의식으로 세상의 보이지 않는 면을 발견하고자 하는 지성이 번득이는 청년이었다. 사회의 등불이 되지 못하고,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지 못하는 수필은 일반 수필은 될 수 있어도 사실상 훌륭한 수필은 결코 될 수 없다는 차원에서 박태병의 이 수필은 시공을 초월해 독자들의 가슴을 울려줄 것으로 기대된다.
‘쓴소리’할 수 있는 사람의 용기와 슬기를 존경하며 사랑하고 싶다. 시대가 바로 서려면 쓴소리하는 사람과 그 소리를 잘 들어 실천할 줄 아는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바르고 옳은 소리, 쓴소리를 거북하게 여기며 피하게 되면 닥치는 몰락을 막을 길이 없다. 듣기 좋은 말만 지껄이는 아부꾼을 멀리하고 쓴소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을 곁에 두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오히려 편하지 않을까. 열린 귀를 갖는 사람이 되어 편협하고 옹색한 삶을 풀어가는 여유를 가지고 싶다.
<쓴소리> 중에서 -
수필가 박태병은 일찍이 들뢰즈의 문학론, ‘문학은 차이를 가치화하는 주변부 타자의 담론’적 의미를 추구하는 수필가로서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의 용기와 슬기를 존경하며 살고 싶어한다. 본격적으로 수필을 쓰면서도 늘 지난날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며, 열린 귀를 갖는 사람이 되어 편협하고 옹색한 삶을 풀어가는 여유를 가지고 싶어 한다. 부지런한 작가로서 저력을 발휘하여 젊은 작가를 게을러 보이게 한, 그는 청년작가다. 작품집을 탈고하기 전부터 ‘세 번째 수필집은 교수님이 내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하면서 교통비도 안 되는 수강료를 받고 힘들게 서울까지 올라와서 강의하는 평자에게 어떻게든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려 하시는 어른이시다. 산업화의 물결로 인간이 기계화되고 인구급증에 따라 기존의 가치관도 많이 변모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한마디로 선비 정신이 그리운 시대다. 듣기 좋은 말만 지껄이는 아부꾼을 멀리하고 쓴소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을 곁에 두고 가난하게 사는 선비정신을 가지고, 의젓하게, 지성인의 자세로 살아가고 있기에 그는 모든 후배 작가들로부터 존경과 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섬김을 받지 않고 오히려 목숨 바쳐 섬기는 그리스도, 이웃 사랑하기를 너 자신같이 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당위성을 마치 무슨 자선사업 하듯이 생색을 내야하는 오늘의 우리 모습은 얼마나 어설픈 꼴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성경의 정의는 약자를 돌보라는 것이다. 손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새삼 이기적인 셈법에 익숙하여진 나 자신을 발견한다. 윤리나 정의가 사회적인 약자를 돌보고 보호하는 데 필요하다면 크리스천의 섬김과 나눔은 구체적인 하나님의 사랑, 그 정의를 실천하고 실행하는 방편이요 도구이다.
<똘레랑스> 중에서 -
나는 교회를 다니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경건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으니 세속적인 노래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음치에 속하는 나에겐 그나마 다행이었다. 취하도록 술 마실 이유도 없고 어울리는 친구나 이웃이 모두 같은 색깔이니 소리치며 흥겹게 노래를 부를 일이 거의 없었다. 단지 잘 부르는 노래가 있다면 거룩하기 그지없는 찬송가나 복음성가였을 뿐이다. 단조로운 삶 속에서 내가 구축한 나의 울타리 안에는 퇴폐 같은 불량기를 찾을 길이 없었으니, 해병대 군복무시절 배운 험한 행동거지와 속어가 섞인 노래들조차 잊어버렸다. 그 세월 속에 흘러가는 나를 보고 착실한 사람이라 했다. 그렇게 강물 곁에 누운 돛배처럼 바람에 이끌려 어느 나루에 닿자 나를 내려놓으려 했다.
<노래방> 중에서 -
박태병의 수필은 다양한 영역을 두루 포섭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특징은 개혁적이다. 이 <노래방>이란 작품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작가의 인생관이 담겨 있다. 경건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살아온 그는 신앙인으로서 구도자적 삶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수필이 구원의 문학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이유는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박태병은 이런 현실을 정확히 지적하며 믿음을 가진 자들이 각자 자기 본연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성찰하게 한 시도는 이 수필의 수준을 가늠해 보게 하는 단초가 된다고 하겠다. 어찌 이뿐이겠는가. <똘레랑스>를 통해 자기 성찰과 만족할 수 없는 종교의 어두운 색깔을 드러내었으며, 세태풍자와 현실비판 그리고 교훈을 안겨주었으며, 바른 생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위의 인용된 두 편처럼 지성이 번득이는 수필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지극한 배려가 있는 수필도 많이 썼다. 그만큼 그가 살아온 길은 올곧은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III. 변화와 개혁, 그리고 항거, 안주하는 삶에 대한 거부의 몸짓
문학은 어느 의미에서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인간 행위의 기록이다. 그 안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삶을 보다 견고히 구축해 나가려는 의지와 그 실천자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할 말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열등감이다. 문학은 단순한 자기애의 표현 수단이 아니다. 수필이 갖추어야 할 요건 중의 하나가 인식이다. 인식은 작가의 사회적 의식이요, 문학적인 힘이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문학 속에 내재하는 강력한 에너지다. <영혼에게 자유를>에는 자신의 수필관이 담겨 있다.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소망에는 인간의 근원적인 가치와 본질을 규명하려는 자세에 깃들어 있는 설득적 지성이 담겨 있고, 이것이 바로 문학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자유롭게 하는 복을 준다.’는 권언이 있다. 삶을 옭조이는 온갖 제재와 속박 속에서 내 영혼이 평안을 얻는 길은 무엇일까. 지금은 마치 포악한 권력 밑에서 신음하는 노예와 같이 살아가는 정신 불황의 시대가 아닌가. 잃은 자유를 목마르게 기다리는 넋나간 사람처럼 이 시대를 단지 살아 있다는 목숨만으로 이어가는 이들에게 담백한 혼의 자유를 불어넣고 싶다. 종교가 고백하지 못하는 위선, 정치가 베풀지 못하는 진정한 자유와 해방, 지식과 학문이 풀지 못하는 배고픔을 채워주는 여유와 극복의 도전정신을 백지 위에 그려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기름진 풍요함이 시대 속의 인간을 타락시키고 있지 않은가, 차츰 뜨거워지는 주전자 속의 개구리처럼.
<영혼에게 자유를 > 중에서 -
작가는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무에 부응해야만 한다는 것을 이 수필을 통해서 말한다. 그는 격변하는 현대를 곰곰이 반추하고 미래를 응시하고 분석하려는 문명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창작에 임한다. ‘종교가 고백하지 못하는 위선, 정치가 베풀지 못하는 진정한 자유와 해방, 지식과 학문이 풀지 못하는 배고픔을 채워주는 여유와 극복의 도전정신을 백지 위에 그려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작가는 우리 시대의 정신적 파수꾼이며 그 시대의 등대로 서 있기 때문에 그 역할은 오늘에 있어 중차대하다. 작가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기에 수신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박태병 수필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작가의 사상과 시대를 꿰뚫는 정신을 탐색할 수 있다. ‘기름진 풍요함이 시대 속의 인간을 타락시키고 있지 않은가, 차츰 뜨거워지는 주전자 속의 개구리처럼’ 이란 적확한 비유로,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위기의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 주고, 이 험난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소중한 조언을 던지고 있다.
소진시대 피로 사회를 사는 우리는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긍정의 마인드를 품어 도전하고 달려가야 하지 않을까요. 말만 무성하고 행함이 없는 무능은 사라져야 하겠지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거나 행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듯이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부실해집니다. 행복을 찾기 위해서 부단히 사색의 뇌를 움직여 뇌 근육을 단련하지 않으면 소멸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뿐입니다. 계절의 흐름 속에 간직한 당신의 속내를 얻고 싶습니다. 지금은 소진시대랍니다. 빈 깡통처럼 버려지는 신세가 되지 맙시다.
<소진시대> 중에서 -
세계가 아무리 속화되고 물화되더라도 훌륭한 문학 작품은 시대의식의 변화를 초월하여 존재의 원형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이끌어 내고 아울러 세계가 아무리 혼탁해진다 해도 현실의 모순을 자각케 하고 모순의 흔적을 쫓아 초월하며 피안의 세계를 사유케 한다. 진실된 역사의식이나 현실인식의 형상을 표현한 이 수필은 사람의 마음을 고요의 세계로 인도해 준다. 아주 잘 쓴 글, 풍부한 감성과 질 높은 사상이 담겨진 좋은 글이라 읽고 나면 기분이 아주 좋다. ‘빈 깡통처럼 버려지는 신세가 되지 말자.’는 박태병의 글에는 좋은 차를 마시고 있을 때처럼 향기가 묻어나고 높은 예술적 경지에 오른 미술이나 음악 작품처럼 감미롭고 선홍빛 아름다움이 넘친다. 그의 호소는 ‘소진시대’에 처한 지친 현대인에게 싱싱한 생명력을 혈맥 속에 휘돌게 해 삶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부풀어 오르게 한다. 문학작품은 곧 인생 그 자체다. 풍부한 지식과 상상력, 그리고 자기만의 개성 있는 영적 세계를 구축했기에 그는 당당하게 지금은 ‘소진시대’라 할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아픔은 우리의 삶이 안고 있는 불치병이다. 할 말을 다 하고 살 수 없는 세상이니 그 병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고달프다. 존경받고 칭찬 들어야 하는 정치인과 지식인 그리고 종교인들까지도 그들이 진실처럼 호소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니 불신의 병은 깊어 갈 수밖에 없다. 삶 속에서 경건을 지키려면 자기 혀에 재갈을 물리고 자기 마음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소통하며 화합하고 잘 살자는데 그것은 우리의 현실 속에 꿈같은 소리가 아닐까. 우리가 어떻게 할 말을 다 하고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모순이 낳은 부조리는 다시 모순을 보듬고 또 그렇게 적당히 살아갈 뿐이겠으니 말이다.
<말할 수 없는 존재의 아픔> 중에서 -
사유의 깊음이 없이, 좁은 견문과 평이한 지식만으로는 좋은 글을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의 작품들에는 인문학적 지식과 교양에 필요한 다양한 지식 자료가 예화와 삽화로 다루어져 있어 수필집 전체가 인문학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이 수필은 다양한 삶의 경험을 통해 진리의 본질을 관조하고, 인간에 대한 끝없는 고찰과 새로운 지각으로 사상의 폭을 넓혀 가려는 노력이 문학의 옷을 입고 있어서 좋다. ‘모순이 낳은 부조리는 다시 모순을 보듬고 또 그렇게 적당히 살아갈 뿐’인 우리 인간들에게 작가는 ‘삶 속에서 경건을 지키려면 자기 혀에 재갈을 물리고 자기 마음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고 설파한다. 사회를 정확하게 관통하는 지성이 내재되고 감명을 주는 내용들로 구성된 글이어서 이 수필도 좋은 글로 평가된다. 이런 사회비판적 글이 먹히는 이유는 박태병의 정신적 역량과 경건하게 살아온 삶과 직결된다. 사회구조적 문제를 ’불치병‘으로 진단하는 것과 같이 주제와 걸맞은 어휘들을 폭 넓게 선택하고 구사할 수 있는 수준에 오르기까지 그는 독서와 학문 연구의 줄을 놓지 않은 까닭으로 창작을 통해 소통과 화합을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입에서 “비겁”이란 단어가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이렇게 공들여 여기까지 온 선배들의 헌신과 투자를 무시하고 원점에서 시작하여 절차를 밟자는 말에 나는 함께 자리한 노 선배의 몫을 묶어 소리치고 만 것이다. “비겁하다! 장로들은 너무 비겁하다!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가 차근차근 시작하자니……” 나는 흥분하였고 후배에게 무시당한 무안을 극복하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시무 장로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더는 침해할 수 없었다. 그 자리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순간 나는 내가 사라지는 연습이 아직도 너무 부족하다는 깨달음에 도망치듯 회의실을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비겁> 중에서 -
진정한 삶의 가치는 물질을 통해 획득되고 정신에 의해서 결실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진면목은 자연의 내부에 그 뿌리를 서려 두며, 이를 근간으로 하여 잎을 피우고 꽃을 만들어 내야 한다. <비겁>이란 작품은 시무장으로 은퇴 후 교회 개혁에 앞장서서 일했던 때의 일화를 다루고 있는 글이다. 신앙인은 ‘비겁’해서는 안 된다. 문학은 이런 올곧은 정신을 근간으로 한다. “비겁하다! 장로들은 너무 비겁하다!” 장로들의 회의에서 교회 이전 신축 문제로 대화하면서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뜨거운 가슴의 자화상을 반성적 성찰로 수필화하고 있다. ‘비겁’이란 말은 종교가 본연의 가치를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회와 장로들은 본연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이 수필의 요지다. 순수로의 눈뜸은 상승 작용을 일으켜 또 다른 수필 <고백>에서 작가의식을 눈뜨게 한다. ‘시니어, 그들이 겪은 고독과 절망, 그 세계를 제대로 알고 도전하고 싶은’ 그의 지성적 정서는 종교 또는 작가정신과 밀착되어 있다. 이는 순수와 동화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수확인 것이다.
칠십여 년이 훌쩍 흘러갔다. 나는 갖은 풍상 속에서도 변하거나 버리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초가지붕 교회에서 가슴 깊이 품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를 품은 분은 어떻게 해서라도 소년을 놓아주지 않았다. 도시 개발에 밀려 초가 예배당도 사라졌고, 그 예배당을 지은 하얀 신선 같은 어르신도, 예배당에 가는 것을 몹시 싫어하던 동네 어른들도 모두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등짐을 풀어놓고 멀리 떠나고 말았다. 굵고 기다란 각목을 땅에 덥석 박아 놓은 것 같은 아파트, 그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한 고향 마을엔 운치 없이 지은 현대식 교회가 우람하게 버티고 있었다. 단지 소년이 회상하는 초가 예배당은 버릴 수 없는 어머니의 유품처럼 기억 속에 살아남아 그리움을 피우고 있었다.
- <초가 예배당> 중에서 -
그는 칠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초가지붕 교회를 지키던 청빈한 목사 한 분을 잊지 못하고 있다. 누가 관심 가지지 않으면 개혁이나 변화는 눈앞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대형 교회를 지향하고 있는 우리나라 기독교계가 아닌가. 박태병은 이런 교회 본연의 자세와 사명을 잃어가는 현재의 문제적 환경에 비판을 가한다. ‘초가 예배당’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간접화해서 그 비판이 표현됨으로써 문학적 향기가 배가되고 있다. 그는 수필을 통해서 드러내지 않은 채 비인간적인 수단으로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야만적인 신자유주의, 그 맨얼굴을 ‘굵고 기다란 각목을 땅에 덥석 박아 놓은 것 같은 아파트, 그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한 고향 마을엔 운치 없이 지은 현대식 교회가 우람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으로 제시하며, 은근히 이런 산업화의 물신주의 경향성에 경고를 보내고자 한다. 적절하게 자기 한계나 허점을 드러내어서 인간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기법이나 전략은 박태병 수필이 갖는 매력적 일면이라 하겠다.
지하자원을 아끼며 개발과 개방을 억제하는 나라가 있음을 안다. 문명의 발전으로 좁아진 지구에서 그들은 최후의 승자가 되려면 근검절약밖에는 다른 묘안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 않은가. 난개발로 폐허를 만들려면 종말이 멀지 않았음도 알았어야 했다. 넓은 대륙에 지닌 것이 아무리 많아도 정확히 파악도 못 하는 머리 숫자를 놓고 무시하는 버릇은 개탄스럽다. 나의 불신은 더 확실해졌으니 다시는 이 나라를 찾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자리하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 거기에 살아 숨 쉬는 곳, 그 신묘막측한 절경이 가여워서 절망하며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았다.
- <절경과 절망> 중에서 -
이 수필은 중국 장가계의 절경에서 생생한 감동을 느껴보고 싶었던 그가 장가계를 보고 절망을 안고 왔다는 소감문이다. 언어의 이화작용을 활용해서 절경과 절망을 대비구도로 짜낸 아이디어가 압권이다. 작가는 이 수필을 통해 중국 당국의 잘못된 생태관을 따갑게 꼬집는다. 그래서 이 수필에는 지성의 섬광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지적 작용의 밑거름이 된 비판적 사고가 수필의 고상성과 고결성을 불러일으킨다. 대상에 대한 인식의 창의성은 이 수필의 압권이다. 누가 ‘절경’에다가 이질적인 ‘절망’을 붙이겠는가. 작가는 난개발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문명의 폐해에 대한 무관심에 이의를 제기한다. 개발에는 ‘생명, 생태’ 따위는 없다. 있는 것은 돈뿐이다. 세계를 대하는 태도와 감수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준다. ‘난개발’의 경향이 스펙터클 사회와 맞물려 어떻게 진행되었고, 그 결과 통째로 우리가 어떻게 ‘생명부재’의 상태, 폭력과 야만의 사회로 진입하였으며, 이 이후 삶의 양식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같이 고민해 보려고 하는 데에서 이 수필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for earth is for us’란 말을 생각나게 하는 수필이다.
자녀 손들을 잘 키우신 장로님께 드리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다. 숲을 붉게 물들이던 나뭇잎들도 때가 되어 저물면 땅에 떨어져 쌓이고 마침내는 한 줌의 부엽토腐葉土가 되기 마련이다. 그 썩은 나뭇잎들은 숲을 울창하게 키우는 밑거름이 되어서 자연을 아름답게 성장시킨다. 장로님의 초록 봄과 청청하고 날렵하던 여름 그리고 붉던 열정의 가을이 지나면 떨어진 나뭇잎들은 그 나무들 발등을덮어주어 겨울이 춥지 않도록 보호하여 준다. 그렇게 해가 지나가면 부엽토가 되는, 흙으로 돌아가는, 창조주의 변함없는 섭리를 꼭 잊지 마시기를 감히 부탁드리고 싶다.
- <부엽토> 중에서 -
위에 인용된 <부엽토>는 한 장로가 만들고자 하는 가족신문에 들어갈 축사의 한 대목이다. 이 글은 삶의 지혜가 축사와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으로서, 비인간화된 인간과 순수를 잃어버린 우리네 삶의 순리를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점철된 소망의 결과물로 판단된다. 주제 지향성적인 측면에서 인생론적인 관점을 터치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작가는 인간의 이상적 삶을 창조주의 섭리에 따르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필은 성찰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 성찰의 대상이 무엇이고, 그것을 통해 행위의 주체가 무엇을 획득하고 상실했느냐에 따라 삶의 윤기와 습기, 평가는 달라질 수 있지만, 삶 자체가 반성적 성찰의 결과이듯 이 수필도 같은 것이다. 인생의 텃밭은 언제나 시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기억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무한한 삶의 의욕을 느끼게 되고, 생활의 지혜도 만날 수 있다. 박태병에게 있어서 ‘부엽토’로 상징되는 순리적 삶을 살아가라는 부탁은 장로에게 주는 최적의 축사라고 하겠다.
시대가 변하면 인물도 잊히고 가물가물 생존의 목마름에 갇힌 사람들은 동상의 전설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 검지로 스마트폰 작동에만 여념이 없다. 치켜든 손끝이 지향하는 목표에는 관심조차 없으니 어찌하랴. 꼿꼿이 세운 선생의 오른손 검지에 털장갑이라도 끼워주고 싶은 심정은 이 추운 겨울을 나는 나의 알량한 애국심이다. 진보와 보수가 경쟁적으로 열광하는 내 조국은 지금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도 민족도 조국도 ‘하나’라고 상징하는 검지를 뽑아들고 크게 소리치고 싶다. 저 동상 모습처럼…‥.
- <검지> 중에서 -
문학은 자신도 정화해야 하고 시대도 정화해야 한다. 마땅히 깨어있어야 할 젊은이들이 의식이 없이 일상에 매몰되어 있는 모습을 ‘검지’를 제재로 해서 잘 그려놓았다. 수필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야 하는 길을 비추는 등불이어야 하고, 동시에 현대인이 살아가는 사회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해야 한다고 할 때, 이 수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 기준에 딱 맞는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박태병의 작품은 자신을 구원하는 글로써 거울 같은 작품이면서 동시에, 그의 수필은 등불 같은 글이다. 진보 보수로 양극화된 시국을 반성적 성찰대 위에 세우는 일이나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동행자가 되어 숨겨진 삶의 아름다운 진실을 캐내는 일도 모두 중요한 일이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나름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목표도 없이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꿈을 갖게 하는 메시지를 전함에 있어서 ‘검지’는 멋진 제재다. ‘보이지 않는다’의 날카로운 응시를 통해 분열된 세상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일이나, 글을 쓰면서 현실을 따갑게 터치하는 모습은 지성인이자 공인으로서 수필가다운 면모를 보이는 일이라 하겠다.
봄이 오면 제비는 변치 않고 그들의 고향 연변을 찾을 것이다. 만주 간도에서 모멸을 떨치고 그 땅에 정착한 민족은 달라진 세상 한국에서도 적응하며 뜻을 이루고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그렇게 조선인의 저력을 보이며 한국인에게 제비를 노래하고 싶었을 것이다. 고향의 진달래가 그립고 인심 좋은 고향 사람들이 그리워도 가이드가 배운 조상이 가르쳐준 참음의 지혜는 꽃처럼 활짝 피어나지 않을까. 한민족과 조선족은 무엇이 다른가. 차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얼마나 걸릴까.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질감은 구성지게 부르는 가이드의 ‘제비’ 속에서도 오륙 십여 년 전 우리 한민족이 겪었던 한과 가난이 보이지 않던가.
.
- <제비> 중에서 -
이 수필은 중국여행에서 만난 가이드 이야기다. ‘제비’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잘 활용하여 주제를 간접화하는 전략은 문학을 미적 구도로 인식하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독자의 사랑과 관심을 끌 것이다. 현실의식을 가지고 수필을 연마하여 한 편의 글도 함부로 쓰지 않기에, 그의 글은 힘의 문학을 지향하면서, 수필문학의 위상도 함께 드높인다. 조선족들은 복잡하고도 삭막한 이국 생활과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본래적 자아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수가 많다. 이러한 자기 정체성의 상실은 곧잘 삶에 지친 사람들을 패배주의로 몰아가기 일쑤다. 현실적 자아와 본래적 자아라는 괴리감의 갈등 속에서 괴로워하는 조선족이 많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고, 그 간극을 어떠한 형태로든 극복하기 위한 절박한 노력은 가이드에게도 일생 동안 끊임없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작가에게 큰 울림을 주었으며, 상징과 함축으로 주제의식을 내면화한 점이 강점으로 돋보이는 이 수필은 현실의 온갖 유혹 속에서도 본래적 자아를 지켜 주고 회복시켜 주는 깨달음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는 측면에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마디바 만델라가 세상을 떠났어도 그의 유지를 따라 흑백 갈등을 풀고 공생을 나누는 길을 잘 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가 선언한 ‘가장 위대한 무기는 평화다.’ 인류 공존의 튼튼한 다리를 놓고 세계평화에 기여한 ‘넬슨 만델라’, 그의 죽음이 위대한 지도자에게 자유와 평화를 위한 제2의 머나먼 여정이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에게는 남북관계나 국내정치에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는 지도자의 본보기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보다 뒤지는 미개국이지만 얼마나 훌륭한 지도자를 그들은 품었던가.부럽기 그지없었다.
- <마디바> 중에서 -
사회의 모순에 대항하고, 현실의 부조리에 언어로 참여하는 것도 정치적 인간이 하는 일이다. 그는 선교 여행차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닷새를 머물면서 어렵게 방문한 먼 대륙 아프리카 땅을 관광이란 명목으로 일부 지역이나마 살펴보고 돌아올 수 있었다. 작가는 현실 정치의 도피자로서 언어로 말할 수밖에 없다. 작가란 말과 글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지식인이다. 박태병은 만델라의 삶을 통해 공생의 가치를 고양시키고자 ‘흑백갈등’이란 적절한 이슈를 잘 활용하고 있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작가의 기대가 만델라의 정신으로 다시 되살아난 작품이다. 수필가는 ‘보이지 않는다’의 눈으로 비뚤어진 현실을 차분한 눈으로 정조준하고 있어 공감을 준다. 현실의 모순과 억압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정의롭지 못한 무리들이 현실의 정치를 어지럽히고 있는데, 수필가가 입을 다물어서는 안 된다. 그런 사회는 암흑의 사회다. 오죽했으면, ‘미개국’과 우리 현실을 비교했겠는가.
‘아름다운 젊음은 우연한 자연 현상이지만,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 작품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난로의 미학을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노추, 노망, 노욕을 극복하고 하나뿐인 인생과 자연 속에서 꼭 한번 가게 되어 있는 길을 가을 낙엽 밟듯이 걷고 싶다.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전철에서 성깔 있는 젊은이와 다투다가 들이 받혀 코피 터트리는 서글픈 노인,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노인 지침서를 모른 척하려는 청로靑老의 궁상, 욕심을 버리고 비우고 또 비워야 비로소 채울 수 있는 시니어의 곧은 자세를 생각하여 본다. 무엇이 당신을 늙게 하였는가. 그것이 나이 듦의 결과라면 백세시대에 살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느끼는 새로움의 변화가 난로를 만들게 되지 않았을까.
<난로> 중에서 -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는 인생, 그 속에서 추한 시니어의 모습들에 대한 단상이 진솔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름다운 노인은 예술작품이다.’라는 이유와 당위성 때문에 작가는 작가로서의 사명에 불타야 한다. 더 나은 나라를 위해 바람직한 그림을 제시하는 것이 작가의 사명이 아닌가. 이 수필은 그런 작가정신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서 문학적 성취가 빛난다. 수필은 시대의식과 역사의식을 형상적으로 담아내는 그릇이어야 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언술하는 데만 급급한 문학은 일시적 배설의 도구와 수단은 될지언정 그 이상의 가치는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언어를 자기감정의 분출 수단이나 그를 위한 도구처럼 인식하지 않는다. 보다 견고한 가치를 지닌 문학이 되기 위해서 문학적 표현을 사랑한다. ‘난로의 미학’은 일상적인 사건이 문학적 사건으로 승화됨을 의미한다. 수필은 단순한 삶의 기록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수단이고, 노력의 흔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미적 쾌감을 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박태병의 수필이 주는 형상력의 힘은 이렇게 우리 모두의 가슴을 뜨겁게 적신다.
‘아버님은 왜 그 모자만 애용하세요?’ 너절한 모자를 쓰고 다니는 나에게 백화점에서 고급 모자를 구매해 선물한 둘째 자부의 항의성 질문이었다. 나는 며느리 앞에서 오천 원짜리 모자를 쓰고 모델처럼 무게를 잡아 보이며 ‘이제 내가 그 모자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겠느냐?’ 물었다. 머뭇거리던 자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 알겠습니다.’ 나의 결백을 증명한 쾌재를 느꼈지만, 자괴감에서 쉽게 풀려나질 못했다. 그를 눈치를 챈 자부의 역습이 재치가 있었다. ‘아버님, 그렇게 그 모자 쓰시고 파이프 담뱃대만 입에 무시면 더 멋있겠는데요. 빈 담뱃대만 물고 계셔도 헤밍웨이나 윈스턴 처칠처럼 근사하겠어요.’
- <모자철학> 중에서 -
문학은 한 시대의 구성원이 지닌 고유한 정신이며 체온이고, 도도한 흐름이어야 한다. 수필은 작가가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위해 희생을 소진하며, 무엇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이나 도구의 하나이기에, 솔직한 자기 모습을 견고하게 유지해야 한다. 박태병의 모자철학은 어쩌면 여러 수필 중에서도 가장 작가의 고상한 정신세계를 잘 드러낸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작가는 검소한 생활의 실천을 통해 사치스럽게 치장하는 것을 예의로 생각하는 한국인의 의식을 바로잡고자 한다. 그는 우리들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지고 있는 검소하게 사는 법을 ‘모자철학’으로 다시 소환한다. 여러 수필들 중에서 이 작품을 제일 앞에 위치시킨 것으로 볼 때, 아마도 작가는 이 작품에 애정이 많다고 봐도 될 듯싶다. 이 수필은 작가의 내면 풍경도 잘 드러냈지만 그의 형상화 전략도 감탄을 자아낸다. 자부가 던지는 여러 말들 중에서도 주제 구체화에 필요한 대목을 잘 뽑아낸 까닭으로 문학성이 짙다. 전제가 있긴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헤밍웨이나 윈스턴 처칠’로 이미지화한 대목은 수필의 상상력 부재를 해소시킨 측면에서 높게 평가해야 하리라 본다.
어떤 유명한 연예인 몇 사람이 반듯하지 못하게 산 삶을 변명하려고 자꾸만 상서롭지 못한 이유와 까닭을 자랑삼아 늘어놓는다. 그를 화제 삼아 빈 곳을 채우려는 매스컴은 상업주의의 극치이고 소재의 빈곤이다. 문화의 가난은 그들을 몰아낼 줄도 모른다. 이렇게 상업주의에 역이용당하는 반듯함, 그 반듯함이 조롱을 당하고 고지식하고 미련한 자는 놀잇거리가 되어야 하는 시대의 당신은 그래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하리라. 이런저런 이유로 천박하여지는 세속에서 우리는 그 곧은 반듯함으로 숨을 이어가야만 하지 않을까.
- <반듯함의 에스프리> 중에서 -
인생에 있어 반듯함을 외면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인생을 본질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진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삶은 허욕으로 가득차서 언젠가는 전진할 기력마저 빠지고 말 것이 아닌가. 이것은 바로 자아를 버리는 일이고 인생 전체를 포기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수필가란 일상적 삶을 영위하면서도 바른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천박해지는 세속에서 우리가 잡아야 할 것은 반듯함’이라는 작가의 주장이 서늘한 죽비로 다가선다. 고지식함에 애정을 주고자 하는 작가의 모습에 경건함이 묻어난다. 그는 ‘매스컴은 상업주의의 극치이고 소재의 빈곤이다.’라고 말한다. 참된 정신을 맛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참된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가 어렵다고 영국의 시인 키츠가 말했듯이 수필도 그러한 생활의 자세가 요구된다. ‘그 반듯함이 조롱을 당하고 고지식하고 미련한 자는 놀잇거리가 되어야 하는 시대의 당신은 그래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하리라.’라는 진술은 그의 맑고 바른 인생관과 정신세계를 잘 보여준다. 영혼을 바르게 갈고 닦아 더욱 빛내고자 하는 과정이 없으면 수필은 쓰일 수가 없으며, 반듯함을 향한 피나는 싸움이 없으면 문인은 될 수 있을지언정, 문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단지 오빠로서 누이가 쌓아놓은 대견한 모습에 감탄했을 뿐이다. 자고로 여인의 의지가 강하면 기적을 일으키고 한이 맺히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했으니 연약한 여인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하리라. 우리 어머니는 누이가 흘린 값진 눈물이 제물이 되어 기쁜 제사를 받으셨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은 오십 년을 참아온 누이의 고귀한 눈물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 딸 내 누이는 커피 좋아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 제단 위에 커피 두 잔을 올려놓고 절을 올리고 있다. 이제 나의 누이는 두 분의 어머니에게서 풀려났으나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함부로 표현하는 속세에서 무엇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 <누이의 눈물> 중에서 -
이 작품은 한마디로 ‘여자의 일생’이라 해도 될 정도로 한국적 삶 속에 희생과 헌신으로 점철한 여인의 삶을 승리의 역사로 그려놓은 수필이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한을 시댁 부모님을 위해 정성을 다하여 섬김으로 아픔을 극복하겠다는 야무진 다짐 속에 힘든 시집살이를 이어나간 누이의 삶을 잘 그려낸 글이다. 작가는 어머니의 산소 앞에 엎드린 누이의 모습을 주시하면서 누이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순간순간의 삶에 보다 성실하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원숙한 인생의 맛을 느끼며 살기 위해 그는 수필을 씀으로써 타자를 구원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나가고자 한다. 이는 건강한 생활인의 자연적 부화라는 측면에서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 나아가 국가적으로도 부가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인식의 공감대 위에서 작가가 누이의 삶을 아프게 조명해나가는 것은 매우 환영할 만하다고 하겠다. 산다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인연의 끈을 엮어 가는 일이다. 원근과 대소를 재면서 운명의 현재에 그 거점을 정하고 방향의 터를 잡아가는 하나의 흐름이다. 이 수필에서 읽히는 또 하나의 매력은 인정의 흘러넘침이다. 인간의 향기가 물씬 풍겨나는 수필, 그것이 박태병 수필의 또 다른 멋과 맛이리라.
IV. 로그아웃
문학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미덕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순수니 참여니 하는 논쟁은 의미가 없다. 무엇보다도 수필은 문학이 되어야 한다. 거울이니 등불이니 하는 변별은 그 다음의 문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기 때문에 호불호의 척도는 될 수 있지만 우열의 기준이 될 수가 없다. 박태병의 수필은 상상력이나 예리한 관조, 지적 통찰의 체로 걸러진 채로 쓰여 문학이 되고 있다는 것이 이 수필집의 서평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발언이다. 그의 수필은 단순한 체험의 나열도 아니고, 결코 관념의 퇴적장도 아니다. 그의 수필은 참된 삶과 반듯한 세계에 대한 고도의 세련된 지적 통찰이다. 이런 측면에 있어서 박태병의 작품은 본격수필이라는 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박태병은 삿되고 속된 것을 멀리하면서 오직 반듯함의 원리와 원형을 찾아내는 작가다. ‘글은 곧 그 사람이다’는 버폰의 표현에 정확히 맞는 언행일치의 삶을 사는 작가다. 장로로서 교회에 신념과 사상으로 헌신하며 쓴 그의 글은 잔잔한 교훈을 남기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인생을 달관한 삶의 원로로서 가볍게 살기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 담겨 있는가 하면, 한 가정을 편안하게 리드해가는 가장으로서 일상 속에서 느끼는 편편들에 대한 다소곳한 정감도 있다. 차분함과 여유에서 나오는 그의 글에는 오늘을 사는 생활인의 가슴 저린 애환이 있고, 따스한 정이 소리 없이 흐르며, 감사하는 생활의 미학이 녹아 있다. ‘황무지에 씨앗을 심어 물주고 거름을 주면서 잡초도 뽑아주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잘 자라는 모습에 자신이 지키려 했던 약속이 열매로 영글어 가는 과정은 대견하고 고마웠다.’라는 권두언에서 입증되듯 그는 삶의 승리자다.
작품이 주제 지향적 특성을 가져서 문학성을 확보하기도 하지만 그의 수필에서 가치 있는 것은 주제와 기교가 혼연 일체가 되어 ‘인식’과 ‘형상’의 복합체로서 하나로 변용되기 때문에, 작품성이 문학적 성취로 빛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수필을 삶의 체험에서 우려내었다는 점이다. 지식과 체험과 사상이 용해되어 예술적인 문장으로 표현될 때, 한 편의 멋진 수필이 탄생된다. 아름다움은 현란한 빛깔과 진한 향기를 통해서만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시대 현실과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이념에 따라 달리 정의되고 평가되지만, 어떠한 현실 속에서도 진실이 배제된 아름다움은 존재할 수 없고, 존재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 일반적 통론이다. 반듯함을 이야기하는 박태병의 수필은 잔잔한 사유의 삶이 곱게 물들여져 있기에 감동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조응과 교감의 세계를 속삭이듯 펼쳐내고 있는 이 수필집은 한마디로 인간적 온기로 충만하다고 하겠다.
작가에게 가장 돋보이는 것이 있다면, 삶터와 인간의 진실을 발견하는 모습이다. 그 진실을 삶에 반영하여 스스로의 정화 수단으로 삼으며, 창출된 미적 가치로 승화하는 것이 박태병 문학의 존재 가치를 확대하는 길이다. 작가의 이러한 면모는 반듯한 그의 삶 속에 잘 나타나 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삶의 질서를 발견하려는 작가의 의식이 투영된 박태병 수필이 주는 매력은 지성과 서정의 합일에 있다. ‘모자철학’을 비롯한 대상에 대한 세밀한 천착은 주제의식을 형상으로 이끌어내었고, 마지막에 가서 주제를 지배적 정황으로 이미지화하는 전략은 박태병 수필의 압권이라 하겠다. 지성이 정서화되고, 정서가 지성화되는 대목에서 작가의 문학적 역량이 빛나는 것이다. 짜임새 있는 발단-전개-결말의 논리 구조는 문학성을 견인하는 데 기여했다. 수필을 오래 배웠다는 것은 좋은 수필을 쓸 수 있었던 지름길이라 본다. 수필이 ‘누구나의 문학’이 아니라 ‘누군가의 문학’이라는 것을 보여준 데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