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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만성 열등감에서 벗어난 상쾌한 자유>의 줄거리:
인터넷상에서 유행했던 단어 중 ‘열폭’이 있습니다. ‘열등감 폭발’이라는 뜻의 ‘열폭’은 화를 내지 않아도 될만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터지는 분노와 짜증 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열등감은 이렇게 폭발의 형태뿐 아니라 훨씬 더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모든 순간에 살아 움직입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열등감의 이유와 탈출의 길을 살펴봅니다.
만성 열등감에서 벗어난 상쾌한 자유
(누가복음 22장 24절~27절)
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만성 열등감에서 벗어난 상쾌한 자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만성 열등감에서 벗어난 상쾌한 자유’
유월절 만찬이 끝날 때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 하나가 배반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가룟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아시고 계셨지만 이름을 명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 사이에서는 각자 예수님에 대한 충성심을 돌아보며 확신하고 다짐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충성심 자랑은 멈추지 않았고 더 나가서 공을 따져서 알맞은 상을 주는 논공행상의 다툼이 벌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셨을 때 누가 더 큰 자리에 올라서게 되느냐를 놓고 다투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다툼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누가복음 9장 46절 이하에서도 동일한 다툼이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과 같은 취지에서 교훈을 주기도 하셨습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젊은 자’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문을 보면 지극히 어린 자를 가리킵니다. 9장 46절 이하에서 어린 아이를 곁에 데려다 세우시고 하셨던 말씀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4장에서는 유월절 최후의 만찬 후에 예수님이 곧바로 감람산으로 가시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람산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가룟 유다가 이끌고 온 군사들에 의해 체포되십니다. 한편 누가복음에서는 최후의 만찬과 감람산으로 가신 행적 사이에 제자들의 다툼을 삽입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이 이제 막 시작되려는 때에 제자들이 논공행상을 놓고 다투는 모습은 참 기가 막히는 노릇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새삼스러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려니 하고 더 중요한 문제인 십자가 사건을 위해 기도에 집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마태나 마가처럼 다루었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중요한 때에 굳이 제자들의 다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최후의 만찬이 끝날쯤에 제자들 중에 배신할 자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배반하게 될 제자는 가룟 유다였으나 다른 제자들은 그 말씀에 자극을 받아서 누가 배반할 것인가를 두고 따지다가 충성심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충성심에 합당한 보상을 생각하다가 다툼을 벌였습니다.
만찬이 이루어진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기 위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나의 선민이고, 나는 선민의 하나님이다.”라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선민이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갖고, 하나님이 이들을 자기 백성으로 가지셨다는 것은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선민 각자는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가져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소개하십니다. 이것이 당시의 선민들은 물론이고 우리의 신앙과 구원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떻게 보자면 기독교의 모든 진리 중에 가장 중요한 사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있는 자라고 밝히셨다는 점에서 십자가 복음의 성격 또한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하여 누가가 제자들의 다툼을 기록하고 있는 근본취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월절 사건의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안으로 흡수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스스로 있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일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누가는 제자들의 다툼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된 사람이 “나 있음”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느냐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은 여러 가지 근거로부터 “나 있음”에 대한 느낌을 갖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스스로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십니다. 이러하신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때 가졌던 “나 있음”에 대한 느낌과,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나서 “나 있음”에 대한 느낌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는 이처럼 나 있음에 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시고, 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입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있게 된 자입니다. 있게 된 모든 자들은 운명적으로 있음의 이유를 자기 안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있음의 이유는 있게 하신 하나님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있는 자였다면 있음을 느끼기 위한 근거를 찾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있게 된 자이기 때문에 있음을 느끼기 위한 근거를 찾고자 합니다. 나 말고 다른 대상의 있음을 느끼는 것에 의지하여 나의 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만 본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첫 사람 아담은 타락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찢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과 밀착되어 있다가 찢어져서 격리되고 분리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외로울 때 옆구리가 시리다는 말을 합니다. 배우자를 먼저 보낸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옆구리가 시리다는 이유로 재혼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옆구리가 시린 이유는 배우자로부터 있음의 근거를 찾다가 배우자가 없어짐으로써 있음의 근거를 찾을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옆구리 시림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하나님과 격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왜 살아있는지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있다는 느낌을 가지기 위해 언제나 마음 붙일 곳을 찾습니다. 마음을 붙일 곳이 없다면 살아있어야 될 이유도 느낄 수 없고 살아있음 자체를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일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며 사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있음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있음의 문제는 무척 중요함에도 과소평가되어 왔습니다. 있음 뒤에 일어나는 이런 일 저런 일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나의 있음의 느낌 즉 존재감이 분명할 때에 다른 일에 의지하지 않고도 마음은 완전히 기쁘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있음의 느낌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함으로써 기쁘고 만족하고자 하는 것은 외부에서 나의 있음을 발견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있음의 느낌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바깥에서 있음의 느낌을 찾고 기쁘고 만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사람은 본래 그렇게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지는 동안에는 있기만 해도 만족하고 있기만 해도 기쁜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난 뒤에는 마음을 기대기 위한 다른 대상을 찾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있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는 있음의 근거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어린 아기를 보고 있으면 있음의 근거를 찾으려는 성향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아기는 언제나 부모와의 접촉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부모의 손가락을 꼭 쥐고 잠이 들고, 조금 크면 부모와 살을 맞대고 잠이 들고, 또 조금 더 크면 혼자 잠을 자지만 부모가 들어올 수 있게 문을 열어두고 잠을 잡니다. 그러다가 사춘기가 되면 문을 닫고 자기의 세계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부모가 아니라 동성의 친구들로부터 나의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더 나이를 먹으면 이성 친구에게 마음을 붙입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 직장이나 장사나 사업에 마음을 붙이다가 결혼을 하면 배우자나 자녀에게 마음을 붙이고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은 평생을 세상에 마음을 붙인 채 나의 있음을 느끼기 위하여 분주하게 쫓아다니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사람은 나의 있음을 느낄 수 없게 될 때 자살의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있음의 문제는 생사를 결정하는 것이기에 결코 간단하게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거울을 보면서 “오늘도 살아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찍이 성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또한 같은 문제를 느끼고 그에 대한 해답을 내놓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성인의 반열에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만 석가모니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는 결국 나의 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짜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 계시하지 않으셨기에 이들의 철학은 온전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소크라테스가 나의 있음의 이유를 밝히고자 했지만 도저히 이 세상에는 해답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고 말했던 바와 같습니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지혜자로 불리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있음의 문제를 두고 씨름하다가 그럴듯한 답을 하나 만들어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있음은 곧 없음이라는 의미의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본질적으로는 없는 것이기에 나의 있음 또한 없다는 것입니다. 즉 애초에 있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오답이었습니다.
공자는 나의 있음의 문제를 다른 어떤 대상으로부터 있음의 느낌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하늘을 끌어들이는 경천사상(敬天思想)을 주장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이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있음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대상이 있어야만 했기에 불완전한 세상 대신 하늘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님을 계시받지 못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는 오답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마음으로 어떤 대상과 접촉함으로써 그 느낌에 기대서 나의 있음을 느끼고자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접촉하여 있음을 느끼는 그 자리는 본래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과 접촉을 이루다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찢어져서 시리게 된 옆구리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결혼하여 배우자로 그 자리를 채워보고자 합니다. 배우자를 통해서 내가 있다는 느낌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떨어져 나간 흔적은 너무 커서 배우자로는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배우자가 붙으니까 나의 있음이 느껴지기 시작하니 좋습니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배우자가 나의 있음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작은 존재임을 느끼게 됩니다. 배우자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생겨나지만 그것도 없어지면 아쉽기에 쉽게 헤어질 수도 없습니다.
“나 있음”의 느낌이 너무 작을 때 열등감이 생겨납니다. 이 열등감이 부자라고 없는 것이 아니고 박사라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강남의 최고급 아파트에 산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채울 수 있는 대상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존재를 느끼는 존재감이 너무 작기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열등감은 세상을 판단하는 욕구의 기준이 됩니다. 결혼이라는 문제에서 더 좋은 신랑감 더 좋은 신부감을 찾고자 합니다. 결혼이라는 문제가 끝나면 이제는 사회에서 가능한 높아지고자 합니다. 가정이 있다면 배우자의 수입이 늘어나고 더 유명해지기를 바랍니다. 나의 마음이 배우자에 기대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배우자의 승진이나 수입증가를 나의 일로 바라보게 됩니다. 즉 나의 있음에 대한 느낌이 커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녀가 생기면 마음을 붙이는 대상이 자녀로 바뀌게 됩니다. 있음의 느낌을 충족시켜 달라는 요구를 계속해서 해나가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너를 통해 내 존재감을 높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과 오순절 사건 이후의 사도들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에게서는 도무지 이 세상에서 크고 높아지려는 모습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기 전의 제자들은 어떻게든 높아지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직전까지도 서로의 충성심을 두고 경쟁하며 열등감을 드러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마음을 하늘로 올려 보내게 되자 더는 그러한 모습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접촉하게 되자 세상에서 크려고도 하지 않고 높아지려고도 하지 않고 많이 가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열등감에서 완전히 벗어난 모습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잡혀서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왕이나 총독의 자리는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부러워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6장 29절을 보면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기에 바울은 열등감이 없다 못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신병자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왕과 총독을 향해 거지같은 자신처럼 되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아서 성도들이 안디옥까지 흩어지게 되었을 때를 떠올려봅니다. 이들은 평생 일구어 왔던 삶의 터전을 모두 잃어버린 채 유랑민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열등감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며 그 죽음의 의미를 전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열등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아닌 하나님과 접촉해서 하나님 있음의 느낌에서 나의 있음을 느끼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존재감의 근거를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찾게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접촉하고 있는 상태의 특징은 열등감의 소멸입니다.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무엇을 찾지 않습니다. 더 이상 크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높아지고자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많이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절대평강, 절대기쁨, 절대만족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열등감의 극복이고 열등감의 제거이며 열등감의 탈출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께 마음이 접촉되면 하나님의 있음의 느낌에 의지하여 나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 의지하여 느끼는 나의 있음에는 빈틈이 없이 충만합니다. 공자도 석가모니도 소크라테스도 답을 얻지 못했지만 우리는 답을 얻었습니다. 인류의 가장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인 “나 있음의 이유”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진다면 다른 모든 문제는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있음의 느낌만 온전해지면 모든 문제는 끝이 납니다. 있음의 느낌으로 다음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있음의 느낌에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은 완전히 끝이 나는 것입니다.
직장인들이 그토록 승진을 바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욕망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서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고 질문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욕망이 생기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합니다. 바로 열등감 때문입니다. “장사를 한다고 해서 꼭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에서 꼭 승진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면 미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치인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높아지고자 하는 욕구가 아닙니다. 나의 있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면 정치를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직장에 다니든지 기뻐하거나 만족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기쁨과 만족의 문제는 이미 나의 있음을 분명하게 느끼는 순간 끝나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이 권력을 갖고자 하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한 푼이라도 더 많이 벌고자 하고, 직장인들이 어떻게든 승진하고자 하는 이유는 열등감에 절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배움에 있어서도 나타납니다. 유학을 하고 박사 학위를 따려고 하는 이유가 학문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열등감에 절어있는 마음에서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자신의 일도 아니고 자녀를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를 시키지 못해 안달이 나있습니다. 최근 일본에서 딸을 의대에 보내기 위해 9수를 시켰다가 딸이 엄마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딸은 엄마를 악마라고 불렀습니다. 엄마가 악마처럼 굴면서 딸을 9수까지 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열등감이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명품에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목사님들이 큰 목회를 바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이 모두 열등감을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습을 보면 크려고도 하지 않고 높아지고자 하지 않으며 많이 가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핍박받아 흩어져 유랑민 신세가 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했습니다. 열등감이 없었기에 높아지고자 하지 않았고 크고자 하지 않았고 많이 가지려고 하지 않았고 오래 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열등감에 찌들어서 살 것입니까?
본문 25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라고 하셨습니다. ‘은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는 것은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아랫사람들에게 생색을 내는 모습을 일컫습니다. 나의 은혜와 덕을 입고 있음을 깨달아 알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열등감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26절을 보면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의 느낌에 의지하여 나의 있음을 느낄 때는 열등감이 없어집니다. 나의 있음을 느끼기 위해 더 이상 무엇도 동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나타날 수 있는 행동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동안 믿음생활을 하면서 들은 말 중에 가장 잘못된 말이 있다면 “주의 종을 잘 섬겨야 된다.”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말은 복음의 논리 안에서 있을 수가 없는 말입니다. 성도가 주의 종을 잘 섬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종이 성도를 잘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나를 섬기라.”가 아니라 “나를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주의 종이 성도들에게 바랄 수 있는 것 또한 섬김이 아닌 믿음입니다. “주의 종을 잘 섬겨야 된다.”가 아니라 “주의 종이 하는 말을 믿으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섬김은 주의 종이 성도를 섬기는 것이지 성도가 주의 종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더해 “주의 종을 잘 섬겨야 잘 된다.”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소리입니다. 오히려 성도의 책임과 의무는 주의 종의 섬김의 내용을 잘 받는 것입니다.
주의 종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기 위한 전제 조건은 하나님과 마음이 접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접촉된 상태의 사람의 몸과 의식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 종의 마음에는 열등감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있음의 느낌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성도들의 섬김을 요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성도가 주의 종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주의 종들이 성도를 섬길 수 있을 뿐입니다. 성도의 책임은 주의 종의 섬김의 내용을 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의 종의 섬김의 내용이란 바로 하나님과의 접촉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께 마음을 접촉하여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그 느낌에 기대어서 나의 있음의 느낌으로 충족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주의 종들은 성도들이 이것을 똑같이 경험하도록 하나님께 밀어붙이는 자들입니다. “나를 섬겨라, 나를 봐라, 나를 통해 하나님께 가라.”는 말은 결코 주의 종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갈 수 있도록 십자가의 주님을 전하고 밀어붙이는 것만이 주의 종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이를 수 있는 이상적인 상태는 어떠한 모습일까요? 다른 사람들은 놔두고 우리 이야기를 하자면 여러분이 십자가 복음방송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십자가 생활화가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은 암 치료제와 같습니다. 암 치료제는 좋은 것이지만 이상적인 상태는 암 치료제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의 섬김의 목표는 모순적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복음방송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십자가 생활화를 잘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제가 하는 일은 여러분의 등을 하나님께로 떠미는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저를 볼 필요가 없이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누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러한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논공행상을 벌이며 다투던 제자들이 십자가 사건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경험하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사도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들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승천하게 되면서 하나님과의 접촉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더 이상 누가 큰 자인지를 가리기 위한 다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높아지고자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가치들을 끌어 모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열등감이 완전히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는 열등감입니다. 열등감에 찌들게 된 이유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 마음이 접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 있음의 느낌에 기대서 나의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마음이 접촉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관계가 찢어진 그 자리에 세상의 대상으로 나의 있음을 느끼고자 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대상들은 스스로 있는 것들이 아니기에 결코 우리의 기댈 곳이 될 수 없고, 나의 있음 또한 온전히 느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느끼게 되는 열등감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문제가 됩니다.
공자도 석가모니도 소크라테스도 하나님을 계시받지 못했기에 이 열등감을 해소하는 근본적 방법을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이 열등감을 온전히 해결하고 유쾌함과 상쾌한 자유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만나는 사람마다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자 십자가의 수난을 시작하시려고 하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주님의 죽으심을 날마다 먹음으로써 이 세상 모든 대상에 대해 마음에 없음이 조성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 있음의 느낌을 통해 나의 있음을 느끼게 하여 주시고, 섬김만이 나타날 수 있는 충족한 상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