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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창 12:1-3
모든 인간은 복 받기를 간구합니다. 특히 우리 조상들은 복을 많이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보면 숟가락에도 복자, 젓가락에도 복자, 밥그릇에도 복자, 국그릇에도 복자, 이불에도 복자, 장롱에도 복자, 병풍에도 복자, 기둥에도 복자, 대문에도 복자, 온통 ‘복’자 투성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복’자를 많이 썼다고 해서 복을 누렸느냐는 것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는 진정한 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나라의 선교의 기원을, 1885년 미국의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의 입국보다 20년 전인, 1866년 영국의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의 대동강변 순교로 봅니다. 아무튼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진 후에, 우리나라는 진정으로 복을 누려서 개화가 되고, 근대화가 되고 민주화가 되고 복지화가 되고, 오늘의 세계화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이 될지라(you will be a blesssing)”고 선언하십니다. 과거 개역 성경에는 “복의 근원(the foundation of a blessing)이 될지라”고 잘못 번역이 되었지만, 복의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셔야, 우리가 진정으로 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진정으로 복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이 시간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함께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록펠러는 장래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첫 번째 여자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세계적으로 경이로운 기록을 세 개나 남기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역사상 가장 가난했던 사람이 가장 큰 부자가 된 것입니다. 둘째는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남에게 준 사람입니다. 셋째는 역사상 가장 건강하게 오래 산 사람입니다. 록펠러는 98세까지 살았는데, 치아가 하나도 썩지 않았고, 건강한 몸으로 인생을 즐겁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한 번도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업상 아무리 바빠도, 예배드리는 것이 그의 삶의 최우선 순위였습니다. 또한 록펠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우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매일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가 늙어서 눈이 어두워졌을 때는, 성경을 읽어 줄 사람을 채용해서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의 어머니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그에게 남긴 유산이 무엇인 줄 압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잘 섬길 것인가에 대한 열 가지 항목을 적은 종이였습니다. 록펠러는 이 열 가지 항목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1)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사는 날 동안 너의 모든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영적지도자와의 좋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 축복의 길이기 때문이다.
3) 오른쪽 주머니에는 항상 십일조를 준비하라.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먼저 구별하여 뗀 후에, 그 나머지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써라. 네가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면, 하나님은 너를 구별하여 축복하신다.
4) 누구도 원수를 만들지 마라. 상대방이 자신과의 생각과 다르다고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과는 다른 가치관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서 올바른 대인관계가 지속된다.
5) 예배를 드릴 때는 항상 앞자리에 앉아라. 예배의 성공이 곧 인생의 성공임을 잊지 말아라
6) 아침에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 드려라. 하나님의 말씀 없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등불이 없이 어두운 밤길로 나서는 것과 같은 것이다.
7) 아침에는 항상 그날의 목표를 세워라. 꿈은 크게 가지되, 목표는 작게 시작해서 하나씩 이루어가야만, 지치고 않고 이루어 낼 수가 있다.
8) 잠들기 전에는 반드시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드려라. 네가 죄를 짓고서야 어찌 형통하겠느냐, 가능한 빨리 회개하여 죄로 인한 어려움과 고통을 피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9) 남을 도울 수 있을 때 힘껏 도와라. 그리고 도와준 일에 대해 절대 나팔을 불지 마라.
10) 주일 예배는 반드시 본 교회에서 드려라.
인생의 일대 전환점을 맞았던 사람들은, 분명히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다. 사람이나 책 또는 종교를 통해서, 그리고 그 사람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준 특별한 사건이 없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가 언제였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였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만남으로, 우리가 ‘무의미한 인생’에서 ‘유의미한 인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옴으로, 우리는 ‘쓸모없는 존재’에서 ‘가치 있는 존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7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인생을 새로 시작합니다. 이전까지의 삶과는 전적으로 다른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 데라가 하란을 떠나지 않으려 하자 새로운 삶을 출발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의 생애는 75세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75세가 넘지 않은 분은 꾀부리지 않기 바랍니다. ‘이 나이에 뭘’ 이런 말은 아예 입밖에 내지 말기 바랍니다. 75세에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새로 출발한 아브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아브람의 75년은 무의미한 삶이었습니다. 그냥 하루 하루 산 것입니다. 인생 달력이 하루하루 의미 없이 넘어간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었는지에 대해, 별로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별다른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아브람은 더 이상 이전의 아브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란에 오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에 오기까지와, 하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그 이후의 삶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하란까지 오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 데라를 감동시키셨든지, 고향에서 도저히 살 수 없는 어려운 일이 있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기에 아브람이 하란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아브람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가 온 것은 아닙니다. 그의 삶에 획기적 변화를 맞았던 것은, 하란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순간입니다. 그 전에도 하나님을 알긴 알았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개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만 바뀌었지, 그의 생활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도대체 하란에서 아브람에게 어떤 말씀이 임했길래, 그의 삶에 그토록 큰 변화가 온 것입니까? 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우리는 너무 빨리 1절을 건너뛰고 2, 3절로 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이고, 복이 되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1절이 없이는 2, 3절이 없다는 것입니다. 1절에 순종할 때 2, 3절이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1절이 2, 3절의 조건이 되고, 2, 3절이 1절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브람은 분명히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하란에 머물고 있는데, 하나님은 너의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잡고 있는 삶의 기반을 떠나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살아왔던 곳 자신에게 익숙한 곳을 떠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 가지로 환경과 문화가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쉽게 결단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자신의 삶 보따리를 주섬주섬 챙겨서 떠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엔 어쩔 수 없이 모험이 동반됩니다. 누구나 현실에 안주하기를 좋아합니다. 웬만하면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있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갈등이 어디서 오는가요? 떠나지 않고 출발하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믿음의 세계로 가려고 하기보다, 어떻게든 현재의 삶을 안정시키려고 합니다. “내 자녀 잘 되게 해 주세요.” “내가 하는 일에 복을 주시고, 내가 가는 길을 지켜 주세요.” 그러나 참된 믿음이란 출발함에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갖고 있던,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진 채로, 새 출발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과거와 단절하지 않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해, 기득권과 옛사람을 버리라고 요구하십니다. 아브람과 그의 가족들은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믿음으로 떠날 채비를 한 것입니다. 떠나려면 목적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믿고 가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확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약속만 받은 것입니다. 믿음은 증거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보여 준 땅’이 아니라 ‘보여 줄 땅’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내용을 보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분이 나에게 어떤 명령을 하든지, 이해되지 않아도 유익이 없어도,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야~” 이게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본토인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게 하셨습니다. 또 아버지와 함께 얼마동안 살았던 하란 땅마저 떠나게 하셨습니다. 하란은 가나안 땅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곳입니다. 하란은 마치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에 가다가 만나는 휴게소와 같습니다. 서울에 가려고 하면, 휴게소는 들러야 합니다. 하지만 휴게소에서 살면 안 됩니다. 아브람 일행이 하란에서 자리 잡은 것은, 휴게소에서 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데라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약속의 땅으로 가지 못하고, 하란에 머물다 거기서 죽었습니다. 데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않아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은, 시작할 수 있지만 끝을 맺지 못합니다. 힘들고 어려우면, 도중에 포기하고 맙니다. 약속의 땅을 향해 가야하는 동기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갖기도 어렵지만, 끝까지 믿음 생활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은 존경받아야 하고, 교회에서도 존중해 주어야 마땅합니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이 데라처럼 살다가 죽습니다. 신앙의 경주에서 중간에 탈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불같이 믿다가, 서서히 식어가더니, 어느 날 재만 남습니다. 그 재는 언제라도 날아가 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와 듣지 않은 자의 차이는, 보통 때 모릅니다. 평상시에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말씀에 기본을 둔 신앙과 그렇지 않은 신앙은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기초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러나 기초만큼 무시를 당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럼 교회는 기본과 원칙이 통할까요? 통하는 교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도 많습니다. 교회가 기본만 잘 지키면, 적어도 사회에서 점수 까먹지는 않습니다.
1절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브람이 하나님을 찾아갔는가요, 아니면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오셨는가요?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이게 신구약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상입니다. 하란에 머물고 있는 아브람에게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과거를 다 버리라 하십니다. 지금까지 그려온 인생의 밑그림을 전부 버리라 하십니다. 그리고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지금 바로 떠나자’고, 그의 손을 잡아 이끄셨습니다. 믿음의 여행은 내가 떠나지만, 그 여행을 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이 길을 걷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장애물을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담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비록 그분의 음성이 내 귀에 들리지 않아도, 그분의 옷자락이 내 손에 잡히지 않아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 아브람이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을 만한 뭘 갖추고 있었습니까? 그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을 만큼 탁월한 뭔가가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아브람이나 우리나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온전하고 대단한 사람이어서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탁월한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에 택하신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물론 처음부터 믿음이 있어서 택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냥 택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택하셨다고 해서, 우연히 택하셨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즉흥적으로 택하셨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창세전에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믿음에는 약속이 있고 보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약속이 몇 가지로 나옵니까? 첫째,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둘째,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셋째, “너는 복이 될지라.” 세 가지를 약속을 유심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입니다. 영원한 문명도 영원한 민족이나 국가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을 통해 태어난 민족이 유대민족입니다. 유대인의 시조는 아브람입니다. 유대인이 한 때 나라 없이 2000년 가까이 세계에 떠돌아다녔지만, 민족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유대 민족은 지금까지도 건재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큰 민족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유대인이 강성해지고 제국을 이룬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메시야가 장차 유대인 가운데 태어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큰 민족이란 메시야를 통해 새롭게 이루어지는 민족입니다. 오히려 상징적인 의미가 더 강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조금 더 정리해보면, 아브람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태어나고, 이스라엘 자손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아브람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큰 가문을 이루는 꿈을 꾸면 좋겠습니다. 우리 자손 중에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믿음의 거장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사람들이 기도의 용사들이 우리 가문에서 배출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입니다. 홍수 후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왜 쌓았는지 혹 기억합니까?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한 가지 이유만 있습니까? 창 11:4절 ‘또 말하되 자, 성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우리 이름을 내고” 그들이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내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자기의 명성을 높이려는 자들의 욕망을 꺾으셨습니다. 반대로 주님은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내려고 애쓰셨습니까? 자기 PR하고 다니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았음에도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을 때,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자, 자기 힘으로 이름을 내려는 자는, 어김없이 낮추셨습니다. 오히려 무안만 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붙들리기 전 아브람은 철저히 무명이었습니다. 자기 이름을 내려고 노력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수줍음을 많이 타고, 자신 없어 하는 비겁한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높여주십니다. 단 그가 순종했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시니까, 그의 이름은 감당할 수 없이 높아진 것입니다.
셋째, “너는 복이 될지라”입니다. 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공)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네가 복의 사람이 될 거라는 말입니다. 복을 받아 나눠주는 사람이 될 거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① 우리가 먼저 복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먼저 복을 받아야 나눠주든지 말든지 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한국교회가 기복주의 신앙이라고 해서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복을 사모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물론이고, 땅의 기름진 복도 사모해야 합니다. 문제는 복을 사모하는데 믿음도 없이, 순종도 없이, 헌신도 없이, 노력도 없이, 수고도 없이, 복만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해야 할 일을 먼저 말씀하신 다음에, 덧붙여서 그가 받을 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복을 사모하는 것 자체만으로 기복주의 신앙으로 매도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복을 받았습니까?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았습니까? 땅의 기름진 복을 받았습니까? 그럼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복이 있습니까? 우리는 복의 주인공이 돼야 합니다. 후히 주시고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주시는 하나님의 복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② 우리가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각자는 내가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복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혹시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까? ‘그 복을 나 혼자 독차지해야 하는데...’ 하며, 혹 기분 나쁜 사람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독차지해서 안 될 뿐만 아니라, 독차지할 수도 없고, 독차지하게 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면서, 우리가 복의 통로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를 만난 사람은 다 복 받아라!” 한 번 따라해 보자. “나를 만난 사람은 다 복 받아라!” 나는 여러분이 복을 받는데 통로가 되고 싶습니다. 나를 통해서 여러분이 복 받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나도 여러분을 만난 것 때문에 복 받게 되기를 진정으로 원합니다. 더 나아가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 주위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에서 복의 통로로 축복의 유통자로 쓰임받기를 소원합니다.
③ 하나님이 우리를 편들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내편을 들어주신다...’ 얼마나 든든한 말씀입니까? 이 말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으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시인이 그랬습니다. 시 118:7절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편이 되어주심을 믿었습니다. 그랬기에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익히 잘 알려진 얘기입니다.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한 참모가 링컨을 찾아왔습니다. “각하, 하나님이 과연 우리 편일까요?” 그때 링컨이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하나님더러 우리 편이 돼달라고 하기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돼야지.”
3절 말씀은 다른 의미에서, ‘너는 축복의 대상이 되라’는 말입니다. 복 받을 대상으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복 받을 짓을 해야지, 저주받을 짓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축복의 대상으로 살아야 합니까?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칭찬감이 되어야 합니까? 그 사람들의 저주가 우리에게 임할까봐 그런가요? 아닙니다.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기분 나쁘면 천국도 안 간다는 세상 아닙니까? 그런데 이웃과의 관계가 나쁘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오는 길이 막히고 맙니다. 앞으로 얼마간 아브람과 함께 믿음의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도 아브람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여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축복이 따라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두가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의존해서 복을 받겠다고 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이 축복을 받아서 많은 사람을 도와주십시오.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은, 내가 복을 받아서 다른 사람도 복을 받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도 성공하고 당신도 성공하고, 나도 행복하고 당신도 행복합니다. 내 복을 다른 사람에게,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그런 역사가 나를 통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축복으로 가는 길에는 반드시 희생의 고개가 있습니다. 이 고개를 넘어야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희생의 고개를 넘어, 아브람과 같이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꿈을 가슴에 안고, 축복의 통로가 되는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새해가 되어 내가 받기를 소원하는 복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주신 복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이미 주님은 가장 큰 복인 영생의 복을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이 땅에서 부자로 살던지 가난하게 살던지, 건강하게 살던지 연약하게 살던지, 그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게 하옵소서. 그 어떠한 것도 능력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복되게 사용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새해 무엇보다도 아브람처럼 먼저 복의 사람, 곧 저희 자신이 복덩어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 자신을 통하여 복이 이웃들에게 흘러 넘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이처럼 복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올해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그래서 올해는 작년보다 더 거룩하고 더 겸손하고 더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하며, 받기 보다는 주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그래서 올해도 저희 모두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는 복된 한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말씀을 아브람이 따라가다. / 창 12:4-9
인류의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로 역사 속에 임재하시고, 역사는 하나님의 인도 아래서 흘러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들이 무화과 잎사귀로 가리고, 부끄러움에 숨어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히셨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노아 때 이르러서는, 온 땅에 악이 차고 넘쳤기에 하나님은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홍수 심판이 끝나고, 노아의 자손들이 다시 번성하니까, 그들은 옛날로 돌아갔습니다. 사람들은 홍수 심판으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바벨탑 사건을 계기로, 흩어짐의 심판을 당하고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사람으로 다시 시작하십니다.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새로운 씨앗,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손을 번성하게 하십니다. 그 민족으로 하여금 온 세상의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본문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약속으로 받고, 믿음의 출발을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믿음의 새 출발을 하면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과 순종을 통하여, 복을 받고 누리고 전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불러내어 복으로 삼으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의 인간적 조건이 좋아서나, 무슨 훌륭한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에 근거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람이 복의 사람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을 보게 됩니다. 4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복의 사람으로 부름 받고 첫발을 내딛는 아브람이, 어떻게 합니까?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그는 이제 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루하루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내던진 것입니다. 흔히 ‘복을 받았다’ 하면, 생활이 안정된 상태를 생각하는데, 아브람은 오히려 모험을 선택합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브람이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아브람이 말씀을 따라간 것입니다.
믿음 없이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곤욕입니다. 강연이나 강좌야, 부담 없이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교는 아닙니다. 믿음 없이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인내심 테스트입니다. 또 ‘뭘 하라’고 하지를 않나, ‘뭘 드리라’고 하지를 않나 하고 부담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는 것이 복입니다. 설교가 이 시간 나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는 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믿음과 말씀과의 관계를, 다른 측면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롬 10: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에 의하면, 믿음이 언제 생긴다고 합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이미 믿는 우리에게는, 믿음이 새로 ‘생긴다’는 의미보다는, ‘더해진다, 자라간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습니다. 믿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길 원한다면, 예배 때 말씀을 잘 듣기 바랍니다. 보다 믿음이 더해지길 원한다면, 설교자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잘 경청하기 바랍니다.
그렇담 어떻게 해야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롬 10:14절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파하는 자”를 꼭 설교자로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설교자가 세워진 일차적인 목적은, 교회 안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이라고 믿는 자들만 있는 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럼 교회 밖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세움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선교사인가? 그렇습니다. “휴,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러면 그렇지, 나야 내 내 믿음 지키는 것도 벅찬데...” 혹시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까? 생각이 너무 앞서 간 것입니다. 누가 선교사인지를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선교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는 선교사’이든지, ‘보내는 선교사’이든지, 둘 중에 하나여야 합니다. 해외에 나가서 선교사로 살든지, 국내에서 선교사로 살든지, 둘 중에 하나여야 합니다. “나는 우리 가정의 선교사입니다.” “나는 우리 일터의 선교사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데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 우리는 평생 복음의 빚진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빚을 갚아나가는 심정으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대조되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4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한 사람은 아브람이고, 다른 사람은 롯입니다. 아브람은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롯은 아브람과 함께 갔습니다. 곧 그는 사람을 따라간 것입니다. 두 사람이 가는 방식이 달랐던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말씀을 따르는 신앙이었고, 롯은 사람을 따라가는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당장 죽을 것만 같은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혹 잠깐 흔들리다가도 자리로 돌아오는데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따라가는 신앙은, 인생의 위기가 닥치고, 어떤 난관에 부딪혔을 때, 자칫 신앙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아브람처럼 말씀을 따라가기 바랍니다. 말씀에 뿌리 내린 신앙생활을 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힘들어도 “아멘”하고 따라가기 바랍니다. 롯처럼 사람 따라다니지 않기 바랍니다. 목회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만 따르기 바랍니다. 목회자는 말씀의 통로요 운반자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을 말씀으로 안내하는 가이드입니다. 성도들이 신앙 생활하는데 헬퍼요, 영혼의 동반자, 소울메이트입니다.
사람을 따라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받는 게 있습니다. 실망과 상처입니다. 목회자도 불완전한 사람인지라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를 가까이 하고 존중히 여기는 것은, 자기 영혼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목회자의 추종자가 돼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예수를 따르지 않고 바울을 따랐습니다. 또한 아볼로를 따랐고, 베드로를 따랐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고전 1:12절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교회 내에 분파가 생기고, 분쟁이 터지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봐야 하는데, 자꾸 자기를 보는 거 같으니까, 바울이 답답한 심정으로 토로했습니다. 고전 1:13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고린도교회 안에 오죽 분파와 분쟁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바울이 그런 편지를 보냈겠습니까? 유일한 구원자 예수만 바라보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기 바랍니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늦었다”는 말을 하지 않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고 말합니다. 아브람도 그런 류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칠십오 세에, 자기 삶의 터전을 훌쩍 떠나는 것은, 보통 결단이 아닙니다.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고,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점에 있어, 아브람의 자세는 높이 평가 받아 마땅합니다. 그로 하여금 모험의 나래를 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믿음의 힘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다시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삶을 홍해에 수장했듯이, 예수를 만나기 전의 우리의 삶은 십자가에 장사지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다시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주도권을 예수 그리스도께 넘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예수 길이 맞습니다. 우리가 붙잡은 예수 진리가 옳습니다. 우리가 얻은 예수 생명이 진짜 생명입니다. 그 길에서 끝까지 일탈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 진리에서 마지막까지 붙들고 가기 바랍니다. 그 생명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어있기 바랍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를 바랍니다. 다시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혹시 신앙 생활해오면서, 언제부터인가 중단하고 있는 것이 없습니까? 새벽기도회를 중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중보기도회를 중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 읽기를 중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개인기도를 중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십일조 생활을 중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중단하는 것을 중단하고, 다시 시작하기 바랍니다.
아브람의 순종의 질을 살펴보겠습니다. 5절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창 12: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러나 이 말씀에 비춰보면,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순종이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순종이었습니까? ① 아내 사래 ❷ 조카 롯 ③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사람들, ❷번입니다. 아브람이 왜 롯을 데리고 갔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자기가 큰 아버지로서, 아버지를 일찍 잃은 조카를 떼놓는 게 어려웠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미지의 세계를 떠나면서, 아무래도 롯이 같이 있으면 의지가 될 것 같아서였을지 모릅니다. 어떤 이유였든지, 아브람의 순종이 완전함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대로 본받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의 모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아브람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믿음은 하루아침에 성숙해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속성 신앙 같은 것은 없습니다. 속성 신앙은 부실 신앙이 될 뿐입니다. 나는 비약적 발전보다 단계적 발전을 더 신뢰합니다. 정상적인 과정을 밟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가듯이,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듯이, 믿음 생활도 비슷합니다.
아브람의 가나안까지의 여행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마침내”라는 단어를 통해서입니다. 아브람 일행이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한 것입니다. 당시 하란에서 남쪽인 가나안으로 내려오는 길은, 크게 두 길이 있었다고 합니다. 해변 길이 있었고, 왕의 대로가 있었습니다. 이 두 길 다 넓고 잘 다듬어진 길이었습니다. 고대로부터 이 길들은 약대상들이 이용하던 길입니다. 각 지역의 토산품을 비롯한 값진 물건들을 낙타에 싣고, 정기적으로 왕래하던 길이었습니다. 자연히 도로 주위에 많은 도시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렇지만 이 길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운이 나빠 길을 가다가 군인들이라도 만나면, 영락없이 ‘거지’를 낮잡아 이르는 말로, 비렁뱅이가 되기 십상인 위험한 길이기도 했습니다. 아브람은 이 두 길을 피하고, 당시 약대상들이 유사시에 비상 통로로 이용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요단 강 서편 산악지대를 관통하는 샛길을 따라 내려온 것입니다. 낙타나 나귀를 타기보다는 걸어야만 되는 길이었습니다. 숨도 차고 발도 부르텄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혼자 오는 것이 아니고, 식솔들과 딸린 것이 많기에, 아마 위험한 길보다 힘들어도 안전한 길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람 일행은 멀고 먼 길을 지나,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6절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대해, 아마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보니, 그를 환영해주는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대신 무엇이 있습니까? 가나안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죽을 고생을 해가면서 ‘마침내’ 도착했더니, 가나안 원주민들이 먼저 진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람을 향해, “야, 너희는 어디서 굴러먹던 인간이야” 하는 눈빛으로 쳐다봅니다. 아브람 일행은, 가나안 사람들이 보기에는 ‘위험한 뜨네기들’로 보였을 뿐입니다. 하나님께 속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브람이 처한 현실은 녹녹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상수리나무를 신성시했습니다. 날씨가 더운 지방에서, 그런 나무가 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레 상수리나무에서 “모레”는 ‘선생, 예언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모레 상수리나무를 ‘예언을 하는 신성한 나무’로 볼 수 있겠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나무 밑에서 제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호 4:13절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가나안 제사의 특성상, 음행과 간음이 나무 아래서 행해졌고, 그를 본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호세아가 책망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람이 도착한 가나안 땅은, 하란보다 나을 게 없어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지만, 뭐 크게 달라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이게 아브람의 딜레마였습니다. ‘내가 과연 이곳으로 온 것이 바른 결정이었는가?’하고 아브람의 머릿속은 다소 복잡했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서로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은,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갈등의 소지가 항상 있고, 언젠가는 폭발할 여지가 있습니다. 이래저래 아브람은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은 아직 자식도 없는 아브람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십니다. ‘아브람한테 네 자손이 생길 것이고, 그 자손들이 이 땅을 자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는 가나안 땅에 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람한테 믿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지에 승리의 깃발을 꽂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건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그런 것은 애초에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완제품을 주시지 않고, 원자재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조각품을 주시지 않고 원석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도자기를 주시지 않고 흙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밥을 주시지 않고 쌀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원자재를 가지고 완제품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원석을 가지고 조각을 새기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흙을 가지고 도자기를 빚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쌀을 가지고 밥을 짓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길에 지나가는 사람을, 보쌈을 해서 교회로 밀어 넣는 분이 아닙니다. 먼저 믿은 우리에게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신 분입니다. 손 안 대고 코 풀려고 하는 방식은, 십자가에 계시하신 하나님의 스타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확인시켜 주실 때, 아브람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겠습니다. 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인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람이 지금 좋은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맘 편히 예배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 예배드린 것입니다.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예배 가운데 머물기를 좋아합니다. 예배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예배만은 빠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가 있습니다. 그게 예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서비스가 있습니다. 그게 예배입니다. 우리가 하는 사역의 정신이 예배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하는 선교의 힘이 예배에서 나옵니다. 어떻게든 주일예배를 소중히 여기기 바랍니다. 주일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바랍니다. 예배 때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복을 누리기 바랍니다.
가나안의 종교는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예배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점점 자기중심적이 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예배자에겐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에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 마음 편하고, 자기 가족 건강하고, 자기 사업 잘되고 그러면 그만입니다. 그러다보니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면, 5분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하면, 한 2-3분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흔히 예배가 회복돼야 한다고 하는데, 무엇을 회복하자는 말인가요? 회복이라는 말이 돌아간다는 의미인데,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인가요? 자기중심적 예배에서, 하나님 중심적 예배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우리 자신이 드리는 예배가, 자기중심적 예배인가, 하나님 중심적 예배인가를 진지하게 점검해 보세요.
아브람은 가나안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들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8절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그는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을, 기도한 것으로 보면 됩니다. 아브람이 거기서 무슨 기도를 드렸을까요? 먼저는 자기를 복으로 불러주시고, 마침내 가나안 땅까지 도착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음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가 가나안 땅에 첫발을 내딛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불편한 게 어디 한 두 가지였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게 신앙인의 자세 아니겠습니까? 노아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가 방주에서 내렸을 때, 세상은 눈뜨고는 볼 수 없는 폐허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최초로 한 것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백성의 삶입니다. 이게 부름 받은 복의 사람의 태도입니다. 축복의 통로로 부름 받은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브람은 비록 지금은 조그만 땅에다 장막을 치고, 어찌 보면 난민 비슷한 신세지만, 하나님께서 그 땅을 자기 자손에게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자기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 23:19절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보통은 죽으면 고향에 묻는데, 아브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결정적일 때, 믿음의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그런 아브람에게도 믿음의 고비가 찾아왔습니다. 9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거주민들이 있으니 아브라함은 그들을 피해 조용히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냥 이동하지 않았습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현실이 때로 차이가 날 때도 있지만, 우리는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때 약속은 현실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도 아브람에게 주신 복이, 이 땅에 풍성하게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성도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참된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열심은 얼마가지 못합니다. 예배가 우선이요, 봉사가 그 다음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먼저 예배에서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쏟아놓을 때, 하나님만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첫 번째 남신도 헌신에배입니다. 올해는 제대로 신앙생활 하기 위하여 버릴 것은 버릴 줄 아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으로 채워지는 첫 단계입니다. 복을 달라고 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삶의 방향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조정해야 합니다. 세상 것을 비우면 비울수록, 하나님의 것으로 풍성히 채움 받게 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하여, 우상에 젖어든 과거의 삶은 청산해야 했듯이, 흐트러진 신앙의 자세를 바로 잡고, 주님이 세워주신 푯대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아브람이 진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삶을 살게 된 것은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릴 때였습니다. 그때부터의 아브람의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삶이 되었습니다.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믿은 자들은 아브람과 같은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갔어도, 가나안에는 많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땅은 아브람의 믿음을 연습하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은 때마다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큰 민족과 땅, 하나님의 복에 관한 자신의 약속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복과 약속을 누리는 조건으로 믿음의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아브람이 죽을 때까지 가나안 땅에서 차지한 것이라고는, 자기 가족을 매장하기 위하여 구입했던 막벨라 굴 하나밖에 없었지만, 아브람은 언젠가는 자기와 자기 후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주실 줄을 믿고, 순종의 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요, 믿음의 외적인 표현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순종할 때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아브람은 세상 안에 살면서도,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미 약속받은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우리의 삶의 내용이 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브람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아브람 같이 예배자의 삶을 살며, 아브람 같이 복을 받고 누리고, 아브람처럼 복의 통로가 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저희에게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저희는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며, 마치 떠돌이처럼 살아갈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이 세상의 죄의 유혹을 뿌리치기 보다는 오히려 즐기며, 우상을 섬기는 세상사람들처럼, 돈과 명예와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며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희가 이 세상을 단순히 구경하며 즐기는 떠돌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야 하는 순례자로 불러주셨음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그 땅은 빈 땅이 아니었으며, 또한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신전이 세워진 땅이었습니다. 저희들 또한 아브람처럼 이 세상을 순례자로 살아가면서, 이 세상이 이미 서로 경쟁하며 미워하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순례자로 살아갈 때, 때로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듯이, 우리도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우리의 믿음을 담대하게 표현하며 살게 하옵소서.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눔으로써, 불안과 두려움이 아니라 평안과 기쁨과 담대함으로, 순례자의 길을 끝까지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갔으니 / 창 12:10-20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이, 정계은퇴 후 80세가 넘어 파티에 참석했는데, 한 부인이 반가움을 표시하면서, 그에게 이런 짓궂은 질문을 했습니다. ‘어머, 총리님, 남대문이 열렸네요. 어떻게 해결하실거죠?’ 그러자 처칠은 이런 조크로 위기를 모면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냈다고 합니다. ‘굳이 해결하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 이미 죽은 새는 새장 문이 열렸다고, 밖으로 나올 수가 없으니까요.’ 처칠에게는 이처럼 위기관리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위기(危機)’라는 말은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때라고 합니다. 위기는 위험한 일만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개구리가 버터를 만든다’라는 서양속담이 있습니다. 개구리 두 마리가 우유통에 빠졌는데, 한 마리는 포기해서 죽고, 다른 개구리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다리를 저어, 우유가 버터로 굳어져 살아났다는 우화에서 나온 경구입니다. 문제는 처해진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위기가 기회가 되기도 하고, 위험한 일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은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온 대가는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좋게 말하면 모든 것을 버렸고, 나쁘게 말하면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땅도 친구도 심지어 친척마저도 잃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환영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을 먼저 차지하고 있었고, ‘웬 불청객이야’ 하는 눈빛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람에게 있어 믿음의 경주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믿음을 감상적으로 여기면, 믿음생활에 실패합니다. 한 사람이 믿음생활을 시작하여, 믿음의 완성에 이르기까지는, 인생의 기근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고난을 겪을 때 믿음이 순수해지고, 역경을 만날 때 믿음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를 처음에 믿을 때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나만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분은 나의 아버지만 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분은 내 어리광도 받아주시고, 약점도 수용해주시고, 부족함까지도 관용해주십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기도를 하고 시작한 일인데도 실패를 만납니다. 믿음으로 시작했는데도 좌절을 맛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기도했는데도, 거절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믿음의 경주에 있어, 이 무렵부터 낙오자가 생겨납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가 몇 살이라고 했습니까? 75세였습니다. 인생의 새로운 모험을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습니다. 75세라는 나이는, 새로운 것보다는 안정적인 것을 원하는 나이 임에 틀림없습니다.그런데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새로운 인생을 출발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람의 모험정신은 높이 사야 합니다. 한참 모험심이 강해야 할 20대 초반의 대학생들도, 벤처정신으로 사는 것이 힘든데, 75세에 삶의 터전을 훌쩍 뜬다고 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약속의 땅에 도착해 보니까, 그곳이 낙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기대했던 파라다이스와는 영 거리가 멀었습니다.
10절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가족들한테 더 좋은 곳으로 간다고 설득하여 데려왔는데, 그는 이제 할 말이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가나안 땅에 기근까지 들었습니다. 보통 기근이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될 정도로 극심한 기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과 양식이 있는 애굽으로 이주할 생각을 했습니다. 마치 예수를 믿고 나서의 현실이, 믿기 전의 현실보다 더 어려울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포기하고, 옛날로 돌아가는 이치와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에 혼란이 옵니다. ‘약속의 땅에도 기근이 있을 수 있는가?’ 입니다. 있을 수 있는가요, 있을 수 없는가요?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주님만 붙들기로 했는데, 왜 여기에 기근이 있는가?’ 이렇게 하소연 할 수 있지만, 약속의 땅에도 기근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교회에 나온다고, 당장에 먹고 살길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니다. 여전히 생존을 위한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현재의 처지를 보고, 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는데도, 모든 것이 잘 안될 때,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세상에 대한 미련이, 다시 일기 시작합니다. 아브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가 애굽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너는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가요? 없는가요? 그런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애굽으로 가려고 했던 아브람의 생각은, 잘된 선택인가요? 잘못된 선택인가요? 잘못된 선택입니다. 아브람이 살기가 좀 힘들다고, 약속의 땅을 버리고 양식을 찾아 애굽으로 떠난 것은, 하나님적인 생각인가요? 인간적인 생각인가요?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그럼 아브람은 굶어 죽어도 그곳에서, 부자가 되어도 그곳에서, 한 걸음도 떠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게 남의 이야기니까 그렇지, 실제로 내가 아브람의 상황에 처했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약속의 땅에 끝까지 남아 있을 거라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말씀대로의 신앙’이 쉬운 게 아닙니다. 우리가 남의 신앙에 대해, 함부로 입 떼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런 입 뗄 힘이 있으면, 그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만일 아브람이 정말 굶어죽기를 각오하고, 가나안에 머물렀다면, 어떻게 되었을 거 같은가요? 굶어죽었을 것 같은가요? 살았을 것 같은가요? 당연히 살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눈앞에 어려움이 닥치면, 우선 자기 살길부터 찾으려고 합니다. 일단 내가 살아야, 하나님도 있고, 신앙도 있고, 교회도 있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몇 수 앞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에 제대로 순종하지 않고도, 하나님 앞에 한 마디 말이라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도 내 입장이 되어보면 이해하실 겁니다.” 설교자를 통해 말씀이 심령에 부딪힐 때도, 무슨 대꾸라도 해보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도 사업해보면, 이런 일 당해보면, 그런 말씀 못하실 겁니다.” 맞습니다. 인정합니다. 나는 여러분보다 더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맞출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이 맞겠는가요? 우리 생각이 맞겠는가요? 그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하는가요? 우리 생각을 따라가야 하는가요? 믿음이란 환경을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환경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환경에 적응해 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내 생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아도, 당장 먹고살기 힘든 기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환경이 어렵다고 믿음의 진로를 바꾸면 안 됩니다. 애굽을 넘겨다보면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행복이 약속된 것처럼 보이는 곳은, 믿음의 함정이 가득 차 있는 애굽입니다.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가는 길은, 지리적으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신앙적으로도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애굽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그의 신앙은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믿음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다리는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다리를 헛디뎌 추락할 때는 순간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어느 날 미끄러지더니, 지금까지도 못 일어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없지 않습니다. 아브람이 막상 애굽에 가보니, 훨씬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소문에 듣자니, 애굽 사람들은 남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얼마나 겁먹었겠습니까?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이 없고, 기댈 곳이라고는 없는 아브람 입장에서, 최대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도 그렇고, 이거 어떻게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지, 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기억나지도 않았을지 모릅니다. 큰 일 당하면,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아브람은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지만, 애써 밝은 표정으로 사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11절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이 말을 들은 사래의 마음은 순간 콩닥콩닥해졌습니다. “아이, 당신답지 않게 왜 그러세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사래의 볼이 금새 빨개졌습니다. 행복했던 순간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아브람의 얼굴은 어두운 그림자로 덮였습니다. 그의 불안한 심기가 얼굴에 드리웠습니다. 사래는 걱정이 되어, 아브람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침을 한 번 꿀컥 삼킨 후, 아브람이 말을 이어갔습니다.
12절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몇 초 동안 무서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브람의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을 진정시키려고 했습니다. “여기도 법이 있고 사람 사는 곳인데, 그럴 리가 있겠어요? 당신 생각이 너무 앞서가는 것 아니예요?” 아브람은 풀죽은 목소리로 대꾸했습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내 귀로 분명히 들었다니까……” 하며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생각이 불안해지면,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마음이 불안하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헤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안정되고 여유가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다 사랑스러워집니다. 아브람도 평소 자기 아내가 예쁜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불안해진 후에, 아내의 얼굴을 보니 생각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도 예쁜데, 다른 남자들이 내 아내를 보고, 탐이 나 나를 죽이지 않을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아브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것일 뿐입니다. 소문은 진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누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입방아를 찧으면, 그동안 목마르게 찾아 헤매던 진리를 발견한 양, 눈동자가 빛나고 귀가 번쩍 뜨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일을, 소문만 듣고 불안해합니다. 미래는 우리에게 축복일 수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건 분명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축복입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아브람에게서 믿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당연히 그는 해결책을 찾을 때도, 하나님을 계산에서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계산에 넣느냐와 빼느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아브람은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그야말로 악수를 두고 맙니다. 13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굉장히 그럴 듯한 생각처럼 보입니다. 결혼 전 아브람과 사래는 사촌 누이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래가 엄연한 자기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사래 더러 “내 누이라고 하자”고 했습니다. 사래가 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생각해 보세요.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이 말을 들었을 때 사래는 남편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 사람이 저 살겠다고 나를 팔려고 하나?’ 이렇게 생각하니, 서운함을 넘어 배신감이 들었습니다.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기근을 만나봐야 합니다. 사랑이 진짜이지 가까인지도, 애굽에 가봐야 압니다. 보통 때의 “오! 나의 별이여, 달이여” 하는 말을 믿으면 안 됩니다. 예전 IMF 때, 남자들이 실직으로 길거리로 몰릴 때, 일방적으로 이혼 당한 남자들이 많았습니다. 굶어 죽을까봐 그랬는지, 자기의 사회적 품위에 손상을 입을까봐 그랬는지, 그래서 남편을 두 번 죽였습니다. 기근을 만나면 그 사람의 본 모습이 드러납니다.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밝혀지게 됩니다. 참 사랑과 거짓 사랑이 가려지게 됩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그래서 인생에게 기근을 허락하시는지 모릅니다.
14절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아브람은 자기가 우려했던 것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았습니다. 사래는 아브람의 눈에만 예뻤던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통하는 미인이었습니다. 애굽에 도착하니, 아니나 다를까 한 눈에 보기에도 ‘여자 밝힘증’이 있어 보이는 남자들이, 아브람에게 다가와 물었습니다. “이런 미인과 함께 하는 당신은 여자 복이 있는가 보다.” “어디에 가야 이런 미인을 만날 수 있는가?” 그들은 사래의 미모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습니다. 아브람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래에게 일러준 말을 되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사실 이 여자는 내 누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래가 그 정도의 미인일까 하는 의문점이 들긴 합니다. 20대 초반에 미인 아닌 여자가 있겠는가마는, 사래의 나이가 지금 몇 살입니까? 아브람과 몇 살 차이가 납니까? 10살 차이가 납니다. 그럼 현재 사래의 나이는 65세입니다. 사래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어떻게 회갑이 지났는데 그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일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은 미스테리입니다.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 사래가 아이를 낳지 않았기 때문에,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여자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많이 늙는 것 같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가 사래를 늙지 않게 지켜주셨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은혜 받은 사람은 잘 늙지 않습니다. 셋째, 종족의 문제로 보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함족이기 때문에 대개 피부색이 까무잡잡합니다. 사래는 셈족이기 때문에 함족에 비해 피부가 하얀 편입니다. 어느 설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아무튼 사래는 나이보다 젊고 미인이었던 것만은 확실했던 것 같습니다. 아브람은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좀 관심을 가지다가 비싼 지참금 때문에, 결국은 포기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엉뚱한데서 터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미인은 왕께 드려야 한다는 갸륵한 마음을 가진 백성들이, 왕궁에 연락을 한 것입니다. 왕궁에서 이 분야를 담당하는 자들이, 금새 연락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15절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드디어 사건이 터지고 만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기가 놓은 덫에 자기가 걸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세운 계획은 치밀하면 치밀할수록 위험합니다. 잘 세우면 잘 세울수록 문제가 더 커집니다. 규모가 크면 클수록 여러 사람에게 불행을 안겨다 줍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꾀가 통하지 않도록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16절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상황이 더 복잡하게 꼬이고 말았습니다. 이제 아브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여기 나오는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가 무엇입니까? 신부를 데려올 때, 신랑이 신부의 가족에게 주는 일종의 지참금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신부를 돈이나 물질을 주고 산다는 개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세운 인간의 계획이 결국은 어떻게 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닥쳤을 때, 세상적인 방법으로 풀려고 하면, 결국 아브람처럼 되고 맙니다. 나중에는 스스로 수습할 길이 없을 정도로, 엉망의 삶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세우는 계획에 하나님을 계산에 넣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아무리 양과 소와 노비와 나귀와 낙타가 많으면 뭐하겠습니까? 정말 있어야 할 아내가 없는데, 그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브람은 사래가 자기의 아들을 낳아줄 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아들이 약속의 자손이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 아내가 바로의 후궁이 될 위기에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구원계획에까지 차질을 가져올 수 있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브람이 무슨 수를 써서 아내를 구해올 수 있겠습니까? 그가 바로에게 빼앗긴 아내를 찾아올 수 있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냥 당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하시니까, 문제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포기하라고 하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아브람이 아내를 빼앗기고 나서, 무엇을 했을 것 같습니까? 결국엔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한 것을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아내를 구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다시는 말씀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철저히 말씀에 살고 말씀에 죽는 말씀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말씀을 떠나면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을, 그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야 알아냈습니다. 애굽에서 아내를 빼앗기고, 온갖 마음고생을 한 후에, 온 몸으로 깨달은 값비싼 경험이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자기 교회를 자기 무덤으로 만들고자 함이 없습니다. 안 되면 교회를 옮길 생각부터 합니다. 직분자 선거에서 떨어졌다고, 교회 옮기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항존직분자로 세움을 받는 것을, 그 교회에 뼈를 묻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직분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1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아브람은 믿음에서 실패하고, 남편으로서 망신을 당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실패가 곧 그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집에 개입하심으로, 아브람의 절박한 위기를 막아 주셨습니다. 아브람이 계획을 잘 세웠고, 그가 처신을 잘했기 때문입니다. 그를 불러내어 복이 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 몇 번 지었다고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마치 소모품처럼 일정 사용기간이 끝나면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혹 우리가 실패하고 실수했어도 기도해야 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기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개입을 바라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바로의 집에 어떤 식으로 개입하셨는지 보겠습니다. 1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사래를 데려간 후부터, 바로의 궁에서 이상한 질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사래와의 결혼식을 자꾸 연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침내 그 질병과 재앙의 원인이, 신의 분노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신이 분노한 이유가, 얼마 전 후궁으로 들어온 사래 때문이라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생각해 보면, 바로는 억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사래를 후궁으로 맞았습니다. 그는 분명 아브람 때문에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받은 것입니다. 아브람이 믿음을 버렸을 때, 주변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지 않으면, 주변의 사람이 고통을 겪게 됩니다. 우리 때문에 주변사람들이 복을 받게 해야지, 피해보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합니다.
18-19절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아브람은 바로에게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바로에게, 아브람이 호되게 야단을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회복시키시되, 부끄러운 일까지는 면제시켜주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완곡하게 표현해서 그렇지, 사실 바로가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아마 아브람을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20절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바로는 신하들 앞에 우스운 꼴을 당하고, 치밀어 오르는 분을 삭이지 못했지만, 안 될 일 앞에 깨끗이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이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살려고 애굽으로 왔다가,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정말 죽다가 살았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애굽에서 한시도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환경에서도 말씀을 붙들기 바랍니다. 기근의 상황에서도 말씀에 순종해 보기 바랍니다. 살겠다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순간, 그때부터 내리막길 인생, 추락하는 신앙이 되고 맙니다. 복의 통로는커녕, 본인도 수치를 당하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게 됩니다. 그때도 기도만은 포기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런저런 어려운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변 현실과 자기 한계만 생각하여, 요동하거나 쉽게 절망에 빠져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며, 잠잠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럴 때 자비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와 말씀하시며, 그 역경을 통해 주님의 전능하심과 자비하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주목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여겨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약속을 지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이심을 믿는 우리에게, 모든 죄의 용서와 구원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하나님이십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 하루도 두려움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인생의 기근이 심할 때, 내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지도와 인도를 받으면, 하나님이 반드시 해결책을 주실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인생의 기근이 심하다고 약속의 땅, 곧 교회를 떠나거나 예배를 빠뜨리지 말게 하옵소서. 바쁘다는 핑계로, 다른 어떤 이유로도 교회를 떠나거나, 예배를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하옵소서. 하나님을 잠시 떠났다가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때, 지체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내 일생 다하도록 항상 예수님 안에, 교회 안에서 머물고, 주님과 연합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아브라함처럼 복이 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