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까삘라왓투(36)
라자가하에서 까삘라왓투까지 60유순, 부처님은 멍에를 건 황소 걸음으로 꼬박 두 달 만에 까삘라왓투에 도착하셨다.
사꺄족 영웅의 귀환에 백성들은 왕궁으로 난 길을 청소하고 꽃을 뿌리며 환호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 길을 벗어나 성 밖 니그로다숲으로 향했다. 성대한 연회를 준비하고 왕궁에서 기다리던 숫도다나왕과 대신들은 당황하였다. 모두에게 마음의 상처를 덧나게 하였다. 하지만 숫도다나왕은 아들이 돌아왔으니 그것으로 되었다며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나름대로 까닭이 있겠지요. 자, 다들 니그로다숲으로 가봅시다.”
할아버지뻘, 삼촌뻘, 형뻘 되는 친족들을 두 걸음하게 한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황스러움은 곧 불쾌감으로 바뀌었다.
종족의 원로들이 몸소 왔건만 부처님을 숲 속 나무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반색은 켜녕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게다가 따가운 햇볕에 검게 그을리고 기나긴 여정에 지친 부처님과 제자들의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화려한 의복과 장신구로 예의를 갖추고 앞장서 달려갔던 원로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밤하늘의 별처럼 수행자들이 태자를 호위한다더니, 저들은 거지 떼나 다름없지 않은가? 깔루다이가 그 잘난 혓바닥으로 우리를 속였다. 너희들이나 저 사람에게 인사해라.”
고요한 숲 속이 소란스러워졌다. 젊은 왕자들의 등을 떠밀며 원로들이 뒤로 물러서던 참이었다. 숫도다나왕이 도착하였다. 말에서 내려서다 비구들의 행색을 본 늙은 왕은 다리를 휘청거렸다. 눈매가 일그러지고 고삐를 잡은 손이 부들거렸다. 숫도다나왕은 일산을 당겨 얼굴을 가렸다. 안타까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 아들아 .... ”
선 채로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던 숫도다나왕이 일산을 물렸다.
머리를 높이 세우고 입을 굳게 다문 숫도다나왕은 루비로 장식한 보검을 풀었다. 그런 뒤 불만이 가득한 원로들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겻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들에게 가가기 다가갈수록 숫도다나왕의 가슴에 쌓인 원망과 분노가 봄눈처럼 녹아 내렸다.
조용히 다가와 초라한 행색으로 고향을 찾은 아들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렸다. 일순간 숲에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네가 태어나던 날, 전륜성왕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선인들의 예언에 나는 너의 발아래 예배하였다. 어린 시절, 잠부나무 아래에 앉은 거룩한 너의 모습을 보고 나는 또 어의 발 아래 예배하였다. 오늘, 만개한 꽃처럼 밝고 깨끗한 너의 얼굴을 보니 내 마음 기쁘기 그지 없어 또 이렇게 발 아래 절을 하는구나.”
숫도다나왕의 예배에 놀란 장로들이 앞다퉈 다가가 꽃을 바치고 옛 태자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렸다.
자부심 강한 사꺄족의 정수리에서 부처님 발바닥에 묻었던 흙먼지가 날렸다.
수많은 대신과 장수, 백성들도 차례로 절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사꺄족이 교만을 꺽고 순백색 믿음의 천을 마련하자 부처님은 환한 미소를 보이며 고운 빛깔의 가르침으로 차례차례 그들의 마음을 염색하셨다.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고 욕됨을 참아내는 삶에 아름다운 과보가 기다리고 있음을 일러주고, 출가의 공덕을 찬탄하고 , 모든 고뇌와 속박에서 벗어나는 법을 설하셨다. 사꺄족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나서야 부처님은 갖가지 방편으로 사성제를 설하셨다.
오랜 시간 어어진 설법에도 사람들은 싫증내지 않았다. 본 적 없던 광경을 목격하고, 들은 적 없던 희유한 말씀을 들은 사꺄족은 모두 기쁨이 넘치는 얼굴로 그들의 영웅을 찬탄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을 거두고 조용히 선정에 드신 다음에도 사람들은 일어설 줄 몰랐다.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나고 숲에 다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이젠 숫도다나왕도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다시 찾아온 이별의 순간, 애써 군왕의 위의를 지키던 아버지는 사문이 된 아들의 두 발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슬픔과 오열이 조용한 숲을 휘저었다.
“아들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왕은 아들의 파르스름하게 깎은 머리와 이슬과 햇살에 거칠어진 얼굴을 바라보고 해진 옷자락을 쓰다듬으면서 끝없이 눈물지었다.
“보관도 버리고, 검푸른 머리카락도 자르고,볼품없는 모양새가 되었구나. 화려한 궁전에서 위엄을 떨치던 너에게 이런 남루한 누더기가 다 뭐냐.”
“마음속 교만을 버리기 위해, 감로법을 증득하기 위해 보관과 비단옷을 버린 것입니다. 언젠가 바래버릴 검푸른 머리카락을 자르는 저는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증득하였습니다.”
“네가 태어나던 날부터 나의 소원은 오직 하나, 네가 전륜성왕이 되는 것이었다. 대지와 산천을 호령하며 천 명의 아들을 둔 위대한 왕이 되길 바랐었다.”
“전륜성왕이 되어 만 가지를 얻는다 해도 마음에 만족이란 없습니다. 오래 오래 살며 온갖 영화를 누린다 해도 마음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지금 제 마음은 만족스러우며 자재하기 끝이 없습니다. 눈물을 거두십시오. 자식이 전륜성왕이 되길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숫도다나왕의 음성에 노기가 서렸다.
“가진 것이라곤 밥그릇 하나뿐인 이런 꼴이 자랑스럽기라도 하다는 것이냐. 사내대장부가 부끄럽지도 않느냐, 아비에게 보일 모습이 고작 이것이냐.”
부처님은 눈길을 낮추고 부왕의 거친 숨결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조용히 말씀하였다
지혜와 삼매는 저의 대지
천 명의 제자는 저의 아들
깨달음을 여는 일곱 가지 보석
왕이여, 저는 이미 모두 얻었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늙은 아버지의 슬픔과 분노도 잦아들었다. 숫도다나왕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저들은 누구냐?”
“ 이사람은 빔비사라왕의 존경을 받으려 오백 명의 제자를 거느리던 우루휄라깟사빠입니다.
이사람은 우빠띳사 마을 촌장의 아들 사리뿟따입니다.. 이 사람을 마하목갈라나입니다. 이들 모두 마가다국의 바라문 출신으로 학문이 출중한 인물들입니다.“
숫도다나왕은 말에 올라 숲을 떠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 아들 싯닷타는 순수 혈통의 찰제리(Ksatriya)이다. 찰제리인 나의 아들은 저런 바라문들이 감싸고 있다니.... ”
궁으로 돌아온 숫도다나왕은 사꺄족들을 대전으로 불러 들였다.
“나의 아들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여 신들과 인간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
싯닷타는 우리 사꺄족의 자랑이고 우리 왕족의 긍지이다.
나의 아들은 바라문이 아닌 잘제리의 호위와 시중을 받아야 마땅하다. 태자가 출가하지 않았다면 분명 전륜성왕이 되었을 것이고 그대들은 모두 태자의 신하가 되었을 것이다.
그대들은 모두 부처님께 귀의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