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훈장의 追憶
‘원님 지나간 뒤에 나팔 분다’는 속담이 있다. 이미 지난 일을 놓고 이러쿵저러쿵해야 소용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정년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내가 무슨 미련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젊은 시절 구직(求職)을 위해서 잠시 헤매던 일이 떠올라서 언뜻 그런 생각을 해 본 것이다.
“8.15해방이 되었을 때 나는 이태원의 육군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는 중이었다.”
이 말은 전에도 몇 번 쓴 일이 있는데 나의 직장생활의 출발과 관련이 있어서 이런 글을 쓸 때면 어쩔 수 없이 되풀이하는 상투어구이다.
해방되고 열흘 만에 옥사에서 풀려나온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잠시 휴양을 하면서 소일했다. 몸이 회복이 되었을 때 나는 우선 적성에 맞는 직장을 하나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교직의 길이 적성에 맞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뚜렷한 근거는 없지만 어쩌면 학창 시절의 은사님들의 고고(孤高)한 모습에서 맡은 감화를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 군대에서 함께 고생하던 친구 가운데는 국방경비대 시절부터 일찌감치 군에 몸을 담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귀했던 시절이어서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행정기관이나 법조계, 정치계,금융계, 언론계, 경찰계, 실업계 등 어디에나 어렵지 않게 발을 붙일 수도 있는 실정이었다.
처음에 나는 어느 분의 소개로 교원의 인사를 담당한 도청의 계장을 찾아갔다. 중학교 교유직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아직 교사라는 말은 쓰지 않았고, 일제의 관습대로 훈도(訓導), 교유(敎諭)라는 어휘를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그때는 교육위원회니 교육청 같은 독립된 교육행정기관은 아직 태동도 되지 않았던 때였다. 그리하여 교직원들의 인사도 일반 행정공무원과 마찬가지로 도청에서 관장했던 것이다.
담당 계장은 나의 이력서를 받아보더니 탐탁잖은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대학 예과(大學豫科) 졸업’이라는 학력(學歷)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학력으로 어떻게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겠다는 것이냐고 은근히 면박을 주는 것이었다. 그때 학제는 아직 중 · 고등으로 분리되기 이전이어서 일제시대의 5년제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었다.
계장은 소개하는 분의 체면을 생각한 때문인지 마지 못한 표정으로 C 농업학교의 교장 앞으로 추천서를 한 장 써 주었다. 실상 인사 담당 계장은 대학 예과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대학에 들어가는 예비과정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학 예과는 단기로 전공과목을 이수하는 전문학교나 대학의 전문부와는 달리 교양과목에 중점을 두는 대학 학부의 기초과정이었다. 오늘날의 대학의 교양과정부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일제시대에는 졸업생들에게는 중학교 영어 교유(敎諭)의 자격증을 발급해 주었었다.
내가 다닌 대학은 일본의 수도 도쿄(東京)의 도심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얼마나 꿈에 부풀어서 이 학교의 문을 드나들었던가. 일본이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면서 나는 학도병으로 징집되었기 때문에 이 꿈은 중동무이 되고 만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지만, 우리의 경우는 새옹지마는커녕 뒤로 넘어졌는데도 코가 깨진 적이었다. 어렵게 일본까지 건너가서 대학에 다닌 것이 빌미가 되어서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남의 나라의 전쟁 놀음에 끼어들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예사 나라가 아닌 우리와는 원한이 사무친 나라의 군대가 아닌가.
그 군대에 복무한 대가로 연한(年限)이 한 해가 남았는데도 3년 수료의 졸업장을 보내 주었던 것이다. 그 당시 모든 학생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일본의 군수공장이나 군 시설의 작업장에 동원되는 날이 많아서 알찬 학업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또 1년간은 덤으로 얻은 것이어서 나의 졸업장은 상품으로 치면 과대포장 된 상품인 셈이다.
우리 세대는 그만치 어둡고 답답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다.
내용이야 어찌 되었건 그 졸업장을 신주 모시듯 들고 다니며 구직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런 속사정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계장은 은근히 면박을 주었던 것이다. 다소 주눅이 드는 느낌이었지만 그대로 밀어 붙였던 것이다. 실상 졸업장에는 털끝만치도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찾아간 C 농업학교의 교장은 출타 중이어서 대신 수석 교유를 만났다. 작달막한 키에 고지식하게 생긴 분이었는데 마침 실습지에서 작업 중이었다. 이력서까지 내밀었는지 어쩐지는 기억에 없는데 그는 공석이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것이었다. 직장도 가져 보기 전에 좌절이라면 이것도 하나의 좌절인 셈이었다. 예과 졸업장만으로는 어디에도 내놓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서울의 대학들이 학생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구직에서의 좌절이 계기가 되어서 향학열을 더 부채질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학업을 더 계속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이며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대학의 예과에서도 편입생을 모집했다. 나는 나라는 다르지만 일본에서 예과를 졸업한 학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 입학을 하려면 학부라야 맞는다. 그러나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전시(戰時)에 충실한 학창 생활을 못했기 때문에 다시 예과부터 다져나갈 셈이었다. 그리하여 몇 학년인지는 기억이 없지만 예과의 중간 학년에 편입시험을 치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시대가 바뀐 것을 생각하지 않고 졸업장만 믿고 내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시험문제가 전연 예상 밖이어서 도무지 땅띔도 못 하는 것들이었다. 국어 문제가 거의 우리나라 고어며 용비어천가, 고시조 등의 해석 문제였다. 용비어천가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는 주제였으니 해석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고어에서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아!’라는 감탄사 ‘어즈버’를 요행수만 믿고 ‘어버이’로 해석해 버린 것이다. 고문신답인 셈인데 어즈버, 동문서답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뒤에 학부의 법과와 영문과에서도 학생을 모집했기 때문에 두 곳에 다 원서를 냈다.
법과대학은 종전의 경성대학 법학부와 경성법전이 통합이 되어서 청량리의 구 법전 교사에서 시험을 실시했다. 여기서는 다행히 국어 같은 것은 시험 과목에 들어 있지 않았다. 면접형식으로 주로 대학 예과 졸업 수준의 교양과목을 테스트했다.
칸트철학에 대한 질문도 있었는데 나는 ‘순수이성 비판’이 언뜻 떠오르지 않아서 12범주설을 들어서 얼버무렸다. 동문남답 쯤은 된 셈이지 얼마 뒤에 합격증이 날라왔다. 그때는 경성대학 법과가 아니라 서울 법과대학장 명의로 된 합격증이었다. 법학에 큰 흥미가 없었지만 예과의 고배를 맛본 뒤여서 그 기쁨은 남다른 느낌이었다.
법과대학에 입학 수속을 마쳤지만 나는 약 20일 뒤에 치르게 되어 있는 영문과의 시험에 더 기대를 걸고 있었다. 준비에 골몰하고 있었는데 집안에 불가피한 일이 생겼다. 사촌 동생의 중학교 입학 문제로 동분서주하느라고 나의 시험은 기회를 잃었다. 지금껏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법학과가 별로 적성에 맞지 않아서 어정쩡한 학생 노릇을 하고 있었다. 학교는 국대안(國大案) 문제로 강의가 공전되는 날이 많았었다. 교사로 쓰고 있던 구 법전의 강당에서는 연일 국대안의 찬성과 반대파가 서로 성토에 열을 올렸었다. 그중에서도 지금껏 기억에 남는 것은 윤우홍(尹禹洪) 군이다. 중학교 동기생인 윤 군은 재학 중에는 온건하게만 생각되었었는데 어느새 반대파의 투사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의 변신에 놀라운 생각이 들었었는데 6·25동란 뒤에는 소식에 묘연하다. 성토가 한창이던 때는 서로 만나면 가벼운 인사만 나눌 뿐 윤 군은 나를 별로 그들 쪽으로 끌어들이고는 하지 않았다. 나의 내향적인 성격을 이해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학이 이런 와중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을 때 대전의 불교재단의 사립중학교가 개교를 했다. 마침 일제 말기에 학도병 신체검사를 함께 받은 R형이 교장의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사촌 동생의 편입학을 부탁하기 위해서 이 학교를 찾게 된다. 그 귀 나의 사촌은 다른 공립학교에 입학이 되었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나의 취직 말이 오갔다.
교직은 처음부터 마음먹은 일이어서 귀가 솔깃했다. 대학이 안정이 된 후에 다시 학업을 계속하라는 그의 권유를 받아들여서 나는 학적을 둔 채 교직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내가 찾아간 것은 취직을 의논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는데 R형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허리춤을 꼭 잡고 늘어졌다.”
“내가 찾아갔을 때는 이미 자리가 거의 다 채워져 있었다. 열 명이 채 안 되는 조촐한 진용으로 나의 첫 직장인 이 학교는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위의 두 글은 전에 내가 쓴 수필에서 인용한 것이다. 앞의 글은 ‘미련 없이 떠나간 그대’에서, 그리고 뒤의 것은 ‘첫눈’에서 따온 것인데, 내가 처음으로 교직에 발을 들여놓던 때의 상황을 적은 것이다.
R형이 나의 허리춤을 잡았던 것이 어제 일 같은데 벌써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그동안 몇 군데 학교는 바뀌었지만 외곬으로 한 길을 걸었다.
이제 곧 이 외길의 장막이 내린다는 생각을 하니 허전하기 이를 데 없다. 마치 연극 한마당에 출연하고 막 퇴장하는 느낌이다.
(198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