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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탈리아 회화의 탄생//건축과 조각// 르네상스 회화/레오나드로 다빈치 1452-1519/ 미켈란젤로: 1475-1564/라파엘로 1483-1520// 베네치아파의 미술 *프랑스의 르네상스(La Renaissance)/ 영국의 르네상스/프랑스의 르네상스
르네상스의 초기 새로운 미술은 이탈리아적 국민미술을 의미. 성장배경: 교양을 지닌 시민계급의 지적성장으로 학문과 예술을 독점하였던 수도원세력에 도전하고 인간과 자연에 관심을 두면서 자신의 것을 창조하고자 함. 14세기 말 이탈리아의 미술은 고대 미술의 헬레니즘적 요소를 모방하는 고대 부흥의 경향을 보이면서 동로마의 비잔틴 미술의 지배에서 벗어나 순수한 이탈리아적 국민미술을 원함. 새로운 이탈리아 회화의 탄생: 피렌체파 (메디치가의 후원): Cimabue / Giotto (1276-1337) 등은 특히 성당과 사원의 벽화장식(성 프란치스코 사원의 벽화)을 통해 자신들의 주제를 인간성과 종교성의 융합(심리적 감동을 표현)에 두었다. 또한 르네상스의 회화의 선구역할은 시에나파가 담당하면서 서정성을 추구하고 현실적인면을 묘사함으로써 비잔틴풍을 탈피함. 두치오 Duccio 마르티니 Martini 1319/1344 등은 고딕의 미세한 선을 중시함.
건축과 조각 피렌체는 이탈리아의 “꽃동산”으로 14세기 문화의 중심도시로 조각 콩쿠르를 개최함. ( 상공업 조합주최: 6명의 조각가를 선발 시상) 부르넬레스키는 성모사원의 둥근지붕을 제작하여 (1421-36) 고딕과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양식을 창조한 위대한 건축가. 그는 르네상스 건축의 시조로 고전적 기하학적 원근법을 연구한 최초의 사람. 기베르티( 1403-24)는 성모사원의 북쪽 청동문짝에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부조했음. (1426-1452) 동쪽에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주제로 부조함(원근법이용). 그는 레오나드로 다빈치, 라파엘로 등에 큰영향을 미침. 도나텔로 Donatello (1386-1466)는 15세기 초 최초의 르네상스 조각을 확립한 대가로 고대로마의 조각을 연구하여 인간 육체미에 숨겨진 사실성을 조각함. (대리석, 청동, 목재이용). 특히 <다비드의 청동상>은 그의 걸작품. 건축과 조각의 성과: 고딕양식에서 탈피하여 내부에는 고대식 열주를 아아치로 연결하는 회랑을 만듦 알베르티 (1404-72)는 <건축론>, <회화론>, <조각론>의 저자이며, 특히 콜로세움, 개선문을 본떠 독창적인 기법으로 설계한 산타마리아의 노벨라사원은 유명한 그의 작품이다. 르네상스 회화
1425년 르네상스 회화가 확립됨.( 르네상스 건축, 조각보다 조금 늦다). 이유: 아비뇽의 국제고딕양식이 유행함(14말-15초). 마사치오 Masaccio (1401-28)는 피렌체파의 거장으로 지오토의 전통+ 부르넬레스키의 원근법+ 도나텔로의 인체조각의 방법을 집대성함. 그는 산타마리아 노벨라사원의 벽화에서 새로운 시대의 양식을 확립시킴. 이후 피렌체파의 후예들은 직관적으로 달성된 리얼리즘의 성과를 과학적으로 연구함. 예) 원급법: 고대 양식에 이용, 이를 르네상스는 보다 과학적인 양식으로 개발함. 또한 인체해부을 통해 근육의 기능을 연구하여 과학적인 정밀성을 바탕으로 한 사실주의의 화풍을 이어감. 보디첼리 (Botticelli 1444-1510)는 독자적인 세계를 묘사, 특히 고대의 자연과 인간미에 관심을 두고 날카로운 사실주의와 장식주의적 묘사에 관심을 둠. (애수어린 서정과 곡선미를 추구함.) 그의 이교적인 회화풍은 관능과 금욕의 모순요인을 결합한 걸작 <비너스의 탄생>, <프리마 벨라의 3미신>을 통해 비너스와 마돈나를 통한 여성미의 매력을 묘사함. 레오나드로 다빈치 1452-1519 수학, 기하학, 문학, 음악, 예술등 모든 분야에서 “만능의 사람”으로 시대를 앞선 예술가였다. “작가의 마음은 신의 마음이다”이라 표현함. 즉 작가의 의도와 상상력에 따라 작품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것을 전재함. 그는 자연관찰과 과학과의 접목을 예술에 반영시킴. <최후의 만찬>은 수도원 벽화을 통해 예술가의 상상력이 작품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을 보여줌. 미완성작이지만 그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작품에만 몰입할 정도로 새로운 벽화기술을 개발함. 그는 14세에 피렌체에 입문한 이래 피렌체의 귀족 부인의 초상화 <모나리자>를 24세 때 시작하여 4년만에 완성함 (1503). 30세이후 밀라노 17년간 체류하여 미완성의 <최후의 만찬>의 대벽화를 그림. 로마, 프랑스등지에서 교황과 왕실을 위해 일한 조각가로서 10년간 완성한 기마상을 주조함.( 황제 막시밀리안의 결혼 기념때 공개) 기마사은 7미터 높이와 2만 파운드의 무게의 엄청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남긴 건축도면은 르네상스 건축의 이상향을 묘사함. 그의 시대는 르네상스의 최전성기로 화가는 천재를 의미하여 교황, 군주와 제후의 절대적인 후원과 신분보장을 받기도 하였다.
미켈란젤로: 1475-1564 도나텔로의 화풍을 계승하고 메디치가에서 수집한 고대 조각품을 연구하고 조각과 인체해부에 몰두함. 피렌체시의 자유의 상징인 < 다비드상>(대리석 소재)을 1504년 완성함.자신의 초상과도 같은 작픔으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힘과 권력에의 승리와 정의를 위미한 최초의 대리석 조각작품이다. 독특한 방법(부조를 하듯 조각법)으로 “물위에 떠있는 밀납인형”처럼 그림 그리듯 조각하였다는 평가를 받음. <카시나의 수중전쟁도>는 피렌체 시청의 대회의실 벽화로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탁을 받고 고대 로마의 전통과 기독교의 권위를 접목시키는 예술작품을 완성함. <시스티나 교회의 천장화>는 구약성서 창세기를 바탕으로 “천지창조, 인간의 타락, 노아의 방주: 3장 9화면”을 묘사함. 이 작품은 역사상 가장 대담한 그림으로 평가된다. <최후의 심판> (1534)는 로마교황의 명으로 그린 시스티나 교회의 정면 벽화이다. 또한 1550년 바티칸성당의 벽화 등이 유명하다. 그의 건축술: 캄프리오광장을 설계함. 그는 72세 때 성베드로사원의 둥근지붕을 부라만테, 라파엘로에 이어 완성시킴.
라파엘로: Raffaello 1483-1520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창조성을, 미켈란젤로가 기백을 상징한다면, 라파엘로는 “르네상스의 조화정신”를 표방한 휴먼이스트이자, 쾌락주의자이며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37세로 요절하였지만 로마 팡테온에 묻힌 최초의 인간이다. 1504년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양대산맥의 풍을 익힘. 로마 바티간 궁의 장식과 모자이크풍의 천장화는 그이 작품이다. <율리우스 2세 상>, < 작은 의자의 성모> 등은 만년에 바로크풍의 양식경향을 나타냄. <그리스도의 변용: 변모하는 예수님>, <아테네 학당>을 통해 고대 인문주의 철학, 과학자등 인간을 주제로 함 (플라톤, 피파고라스, 유클리드 및 자신 포함) 그는 15세기 원근법에서 벗어나 밝고 다양한 색체를 사용하여 유동적이며, 개성이 뚜렸한 작품을 통해 르네상스회화의 백미를 이뤄냈다.
베네치아파의 미술 르네상스 미술은 16세기말 전성기 이후 쇠퇴하여 지중해-대서양(북유럽)으로 이동한다. 16세기 베네치아는 공화적 자유시로 외교술과 상업적 부를 누린 고대도시로 복고되여 영원한 이상적 자유도시상이 됨. 예술, 건축 등 고대 로마풍으로 거의 모든 도시를 장식함. 조각: 상수비노는 수많은 도시 건축물에 고대 그리스-로마신상을 조각함.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전성기를 누리지만 그 열매는 베네치아에서 맺음. 베네치아파는 회화의 형태가 아닌 색체의 완성을 통해 유체화의 선구역할을 함.(플랑드르 화풍과 비교할 때). 그들른 현실적 신앙, 개성적인 관능미, 향연도를 주제로 함. 티치아노: 수많은 비너스를 주제로 작품활동. <성모마리아의 승천>, 서민적 결혼관, 여성의 관능미, 사랑등 인간개성에 주목함. 그는 새를 성적충동, 유리속의 장미는 처녀성(마리아), 강아지는 속세의 울부짖음등으로 상징화하였다. 팔라디오는 그림을 통한 성서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가. 베네치아 저택의 건축물에는 온통 그림으로 장식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후 유럽 귀족들이 이를 모방하기도 하였다. 베네로제는 고대로마식 대저책의 밝고 화려한 그림장식으로 유명한 화가. 틴토레토는 영적인 것, 상징적인 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가.
프랑스의 르네상스(La Renaissance)
15세기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르네상스는 16세기 프랑스 국민문화의 성장에 결정적이며 지속적인 영향를 주었다. 프랑스의 르네상스 건축은 1530년대 (아재-르-리도(Azay-le-Rideau), 슈농쏘(Chenonceaux)와 같은 루아르(Loire) 강변의 성을 통해 그 특징을 살필 수 있다. 건축물은 특히 망루, 총안, 경사가 급한 지붕을 특징을 띄고 있다. 이후 퐁땐느블로(Fontainebleau)파가 등장하여 보다 세련되고 우아한 장식미술을 발전시켰다. 특히 나무, 화장벽토, 프레스코등을 조화와 균형의 바탕하에 기교적인 수법으로 화단을 지배하였다. 16세기 중엽경에는 그리스-로마의 전통에 따른 고전주의 양식이 발달하여 프랑스의 국민문화의 전통과 결합되었다. (루브르(Louvre) 궁과 뛰일르리(Tuileries)궁)
프랑스의 르네상스 문학은 이탈리아에 갔던 인문학자들이 이탈리아 문학을 들여오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라틴어로 글을 썼지만 F.라블레(1494?∼1553?)가 나타나 프랑스어로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을 써서, 교회와 소르본(파리대학 신학부)의 교조주의 및 위선을 민망할 정도로 조소하였다. 이어 1549년경부터 p.롱사르(1524∼1585)를 맹주로 하는 플레이아드 시파가 페트라르카풍의 서정시를 창작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종교전쟁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문학은 기울기 시작하였으나, 이 어려운 시대를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에 대해서 M.E.몽테뉴(1533∼1592)는 고대의 영지를 밑거름으로 하여 3권의 [수상록]을 집필, 인간성의 본질을 추구하였다.
르네상스음악의 숨결은 14세기 프랑스의 아소, 이탈리아의 란디니 등의 작품의 감미로움 속에서도 느낄 수 있으나, 15세기의 부르고뉴 악파의 음악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뒤파이 등의 궁정 샹송은 중세의 전통을 답습하면서도 그 인간적인 정감은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15세기 말 16세기에 전개되는 플랑드르 악파의 음악으로 르네상스음악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다. 오케겜, 오브레히트 등에 의한 폴리포니기법의 개척에 이어 조스캥 데 프레의 음악, 특히 그의 미사곡에 이르러 르네상스음악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성립된다. 그 일관된 모방양식과 명확한 악절구분, 가사와 음악과의 밀접한 연결, 균형잡힌 악곡구성, 완성된 순환 미사곡의 형태, 미사 각 부에서의 정선율의 유기적인 통일과 변용, 절도 있는 정적인 표출력 등은 음악에서의 르네상스적 요소로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 후에도 플랑드르악파에서 많은 대 작곡가들이 배출되었으며, 특히 16세기 후반 의 데 몽테와 라수스의 작품은 그 강렬한 표출의욕면에서도 중요한 작품이라 하겠다. 이들 16세기 후반의 후기 플랑드르 악파의 음악작품은 뒤에 나오는 제수알도나 몬테베르 디의 마드리갈 작품 등과 더불어, 미술사상에 있어서의 마니에리스모와 비교될 만한 것이다. 플랑드르 악파의 작곡가들은 유럽 전 지역에서 활약하였으며, 그들의 성악 폴리포니기법을 르네상스음악의 국제적 양식으로 삼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파리 등 도시 시민계급의 지위향상과 더불어 샹송이 궁정에서 시민들의 가정에가지 파고들어 잔캥 등의 다성(촌토)샹송과 류트반추를 곁들인 독창샹송이 등장하였다. 또, 구디멜 등의 위그노 시편가도 독일 프로테스탄트들의 코랄과 함게 주목할 만한 것들이다.
영국의 르네상스
영국 국민문학의 아버지 쵸서 (1340-1400)는 '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영국판 데까멜론을 구상하여 르네상스적인 면을 묘사하였다. 그의 전통은 15세기 계승되었고 특히 의학자 Linacre 리나커(1460-1524)는 이탈리아 여행이후 런던 의과대학을 창립하였다. 영국의 르네상스 문학은 1516년 Thomad More 토마스 모어( 1478-1535)의 저서 'Utopia'에서 급진적인 개혁(노동, 교육, 후생, 경제등)과 이상국가론을 묘사하였다. 그는 헨리 8세의 이혼에 반대하여 처형당한 독실한 카톨릭교도로 유명하다. 한또 한명의 옥스퍼드 개혁파 네덜란드 출신 Erasmus 에라스무스 (1466-1536)는 '우신예찬'을 통해 휴머니즘에 입각한 카톨릭교회의 개혁을 주장하여 루터와 캘빈에 영향을 주었다.
한편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에는 연극이 개화하여 W.세익스피어, 벤 존은 등이 출현하였다. 영국에서도 서민적인 관객의 세력이 컸기 때문에 막의 구분 없이 흐르듯이 상연되는 중세 성사극의 전통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극장도 여러 개 생겨나( 여인숙의 안뜰을 이용한 가건물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형편이었다) 국민적 정서를 고양하는 역할을 하였다. 연극의 종류에는 민중역사를 소재로한 사극, 배신과 잔학상을 경고하는 선정적인 비극, 이탈리아의 콩트 등에서 소재를 따온 희극, 동화의 세계라고까지 할 수 있는 공상희극 등 여러 가지가 있었고, 때로는 그것들이 한 편 속에 뒤섞여 있는 경우도 있었다. 영국 르네상스 연극에서 가장 빛나는작가는 역시 W.섹스피어지만, 그 외에도 C.말로, 웹스터, p.매신저, 벤 존은 등 많은 작가가 있었고, 이들을 총칭하여 엘리자베스 왕조의 극작가라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플레야드 시파가 이탈리아의 근대극 을 모방하여 격조있는 비극과 희극을 쓰려고 하였으나 시작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상업주의적인 극장을 정복하지는 못하였다. 독일에서는 한스 작스의 사육제극이 나왔으나 비극은 결실이 없었다.)
영국의 르네상스 음악은 15세기 말 16세기에 페어픽스, 태버너, 탤리스 등이 나타나 폴리포니 교회음악을 작곡 하였으며, 영국국교회의 성립으로 교회를 위한 새로운 음악이 나오게 되었다. 버드를 비롯한 이 시대의 영국 작곡가들은 가톨릭과 국교회의 양쪽 교회음악을 다 같이 작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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