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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를 다녀왔습니다. (2007.08.04~08.12) 그 중에서도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신강 위구르 자치구)를 여행했습니다.
'신장'은 중국의 서북쪽 끝에 위치한 자치구입니다.
고대 중국인들이 타림분지에 산재해 있던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을 지칭하여 '서역36국'이라고 부르던 비단길의 일부분입니다.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흉노족, 돌궐족, 몽골족 등 유목민족에게 피의 지배를 받았던 땅입니다.
현재는 인구 2500만, 49개 민족이 살고 있으며 중국 전체 면적의 6분의 1입니다.
지형은 '3산 2협' 이라고 부르는데..맨 위쪽에 내 몽골과 접경한 알타이 산맥이 있고 그 아래 중가리아분지 그 아래 천산산맥
그 아래 타림분지(타클라마칸 사막) 그 아래 군륜산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구글어스의 위성 사진을 이용하여 여행 경로를 살펴보겠습니다.
위성 사진이 증명하듯이 신장 지역은 지구상의 가장 깊은 내륙입니다. 바다와 가장 격리된 지역이란 뜻입니다.
오른쪽 주황색 시작점이 '우루무치'입니다. 순서대로 '트루판'...'쿠처'...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하여 '민펑'...'허티엔'
...그리고 맨 마지막이 중국의 최 서단 도시 '커스(카슈가르)'입니다. 대략 2,200Km 쯤... 나름대로 긴 여정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실크로드 여행은 우루무치와 둔황을 중심으로 유적을 살펴보는 정도이지만
우리 일행은 일반인들이 잘 선호하지 않는,길고 긴 험로를 선택했습니다.
삼장법사나 혜초스님의 고행에 견주어 만분의 1일이라도 몸으로 느껴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객기는 우루무치에 한 밤에 도착했습니다. 8월 5일 아침에 호텔에서 내려다 본 우루무치의 전경입니다.
우루무치가 광주보다 훨씬 큰 도시라는 것을 깨달은 아침이었습니다.
'우루무치'는 몽골어로 '아름다운 목장'이란 뜻입니다. 14세기말 서몽골이 이 곳을 지배할 때의 지명이 지끔까지 이어져왔습니다.
면적은 12,000평방미터, 인구는 유동인구포함 230만의 공업도시입니다.
우루무치는 신장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이번 여행지 중에서 한족(75%)이 가장 많이 사는 곳입니다.(한족은 보통의 중국인종)
참고로 트루판은 위구르족70%, 허이텐은 위구르족96%, 커스는 위구르족89%입니다.
신장에는 위구르족이 주류입니다. 위구르족 45%, 한족 40%
홍복호텔 앞 길입니다. 아침 식사 전에 스케치했습니다.
우루무치는 얼마전만해도 8층 건물이 최고였으나 지난 5년간 눈부신 성장을 했다고 합니다.
첫번 째 관광코스(?)인 남산목장을 향하는 길입니다. 한국에서 온 불청객들을 호락호락 통과시키지는 않을 모양이군요.^^
나중에야 알았지만 우루무치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이 길이 신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천산산맥이 보입니다.
남산목장의 전경입니다.
이곳 남산목장에서는 카자흐족들이 관강객을 상대로 말을 태워주는 수입으로 살고 있습니다.
신장에는 15,000명 정도의 카자흐족들이 살고있습니다.
카자흐족은 주로 카자흐스탄과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인접 지역에 거주하는 기마유목민족입니다.
남산목장 스케치
이곳 카지흐족들은 주로 게르에서 생활합니다.
관광객들이 목장에 도착하면 우선 모두에게 말의 채찍이 주어집니다.
받아 든 채찍을 들고 있으면 채찍의 주인들이 찾아와 자신의 말을 태워줍니다.
"아자씨, 제가 아자씨 채찍의 주인이요. 갑시다!" "머시여, 꼬마 니가???"
보통은 젊은 사람들인데 저는 맨 막둥이 10살박이 카자흐 꼬마가 당첨되었습니다.
"뭐해요? 빨리 올라 타세요" 카자흐족들은 10살이 되면 승마로 돈을 번다더니 정말이군요.
제가 안장에 타고 꼬마는 저의 뒤에 타고 남산목장을 올라갑니다. "이랴!!!"
제가 탄 말은 늙은말이기도 하거니와 엊그제 비가 많이 와서 바닥은 곤죽이 되어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낙마를 하게되면 진흙탕에 빠지는 신세가 됩니다.
앞에 탄 사람들이 관광객, 뒤에 탄 사람들이 카자흐족들입니다. "끼랴!!!"
숨막히는 긴장 속에 목장 중턱에 올랐습니다. 숨이 확 트이네요.^^
이보다 푸른 하늘이 지구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루무치 지역에는 연간 강수량이 200mm가 채 되지 않습니다.
연간 강수량이 200mm 이하면 사막으로 분류되고, 200~500mm이면 초원으로 분류됩니다.
이곳에선 강수량이 부족하여 벼농사는 짓지 못합니다. 주로 해바라기, 깨, 감자를 재배합니다.
우리 일행은 벌써 우루무치를 벗어나 투루판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가는 길목에 풍력발전소 지대를 답사했습니다.
이곳은 독일 다음으로 세계 제 2위의 풍력발전 지대입니다.
뒤로는 수백개의 발전기가 있고 앞으로는 천산산맥과 만년설이 드러나고있습니다.
이곳은 1년에 바람이 딱 한번만 분다고합니다. 바람이 그치지 않으니까요.^^
우리가 머무는 동안에도 바람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투루판으로 가는 길은 완전한 고비사막지대입니다.
여기서 고비사막이란 몽골과 내몽골 사이의 사막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주로 모래가 아닌 자갈로 이루어진 사막 또한 '고비사막'으로 부른다고합니다.
고속도로로 접어들었습니다.
312도로라고 불리는 이 고속도로는 길이가 5,000Km에 이르며 멀리 상하이까지 연결된다고합니다.
우루무치와 투루판 사이에는 천산 산맥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일행이 탄 버스는 천산 산맥을 유유히 넘어가고 있습니다.
3~4시간을 달려 트루판에 도착했습니다. 트루판이란 돌궐어로 '풍요로운 곳'을 뜻합니다.
트루판은 신장에서 가장 무더운 분지형 오아시스 도시입니다.
지표가 해수면보다 낮고 사방이 산맥으로 애워싸져 있기 때문에 더운 공기가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여름철 한 때는 채감온도가 70도까지 오른다고 하니 가히 살인적인 더위입니다.
트루판의 별명은 '문명의 용광로'입니다. (실크로드 문명기행 -정수일 저)
천산도 식후경이라...식당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등나무 그늘이 잘 조성되었군요.
잠시 후에 알게되었지만 포도나무 그늘이었습니다.^^투루판은 포도와 면화의 최대 산지입니다.
청포도가 주렁주렁 열려있습니다만 호기심에 따면 벌금을 물게된답니다.
포도나무 그늘의 관광마차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투루판의 유명 식당입니다. 빨간색은 곧 중국을 상징합니다.
중국의 공공기관, 식당, 호텔 등의 간판은 대부분 빨간색으로 씌여져있습니다.
투루판의 전통과 현대미를 잘 조화시킨 건물입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맛보는 중국식 식단입니다. 시작부터 기름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저는 담배를 끊었기 때문에 식후 연초 대신 식후 스케치입니다.^^ 식당 앞 나무...
식사를 마치고 '카레즈'를 관람하기 위해 이동했습니다.
트루판 시내 곳곳에는 청포도와 건포도를 파는 상인들로 가득차있습니다.
카레즈 입구입니다. 무지 덥지만 참을만 하군요.^^
'카레즈'는 전 세계에 중앙아시아 지역 세나라 밖에 없는 전무후무한 관개시설입니다.
연평균 강우량은 16mm인데 증발량은 3,000mm인 이곳에서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위대한 '카레즈'를 건설했습니다.
카레즈를 설명하겠습니다. 위의 사진을 유심히 보십시오.
맨 위에 천산 산맥이 있고 그 아래 사막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막 아래에 트루판이 있습니다.
이곳의 용광로 더위는 천산의 만년설이나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트루판에 채 도착하기전에 하늘로 증발시키고맙니다.
이에 분한 인간들은 땅굴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땅굴 속으로 천산 산맥의 차가운 물이 증발하지 않고 흘러내려 트루판 호수까지 흘러 들어옵니다.
배꼽처럼 길게 이어진 선의 보이지 않는 지하 수로가 카레즈입니다.
땅굴이 막히거나 하면 배꼽처럼 생긴 구멍으로 인부가 들어가 보수를 하게 됩니다.
카레즈의 단면입니다. 아래쪽이 수로이고 위쪽이 보수를 위한 통로(배꼽)입니다.
카레즈의 내부입니다. 실제 카레즈에 모형도가 설치되어있습니다.
비계를 받치지 않은 이 구조물은 건조한 땅이기에 가능한 일일것이라고 저는 생각해봤습니다.
카레즈 답사를 마치고 천년 고성 '교하고성(交河古成)'을 방문했습니다.
교하고성의 모형도입니다. 교하고성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버들잎 모양의 오래된 성입니다.
트루판 제 1의 관광 명소입니다.
성의 높이는 30미터의 벼랑 위에 지어졌으며 양쪽으로 강이 흘러 아래쪽에서 하나로 만납니다.
(지금은 모형에서 보는것처럼 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결국 사방이 하천형 방어벽으로 애워싼 안전 요새인 셈입니다.
2천년 전 차사전국의 수도로 불교 사원 구역이었습니다. 인도식 불교건축양식이 많이 발견되는 곳입니다.
교하고성의 남문입니다. 당나라때는 이곳에 6,000여명이 거주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의 위쪽입니다. 위에서 보면 평평한 교하고성은 쌓아서 지어진 성이 성이 아닙니다.
30미터 높이의 분지를 기준으로 땅을 파서 아래쪽으로 형성된 성터입니다.
민간 주택 단지입니다. 역시 기존의 땅을 파해쳐 이룩된것입니다. 2천년 전의 아파트로 생각하심이...
사진에 없는 왼편으로는 '애기묘' 터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유골 200여개가 발견되었는데...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질병의 설, 점령군 몽골족의 씨말리기 정책, 몽골과의 패전 직전 자진 교사설 등이 있습니다.
몽골 군사들은 이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주변을 포위하여 오랫동안 고립시킨 후,
항복을 받고 대부분을 학살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교하고성에서 멀리 보이는 상자 같은 구조물이 있습니다. 건포도를 만드는 건조 시설입니다.
투루판의 농가를 방문했습니다. 삼륜차를 보니 어렸을 적 생각이 나는군요.^^
농가의 입구 천장은 포도 천지였습니다.
노인 한분이 양을 도살하고 있습니다.
몽골도 마찬가지이지만, 이곳에서 주식인 양 한마리를 도살하는데는
칼 한자루, 바닥 천 조금, 약간의 시간, 그리고 물은 한방울도 필요없습니다.
몽골 여행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양을 도살 할 때는 양을 반듯이 눕히고, 목 아랫 부분을 날카로운 칼로 5cm 정도 절개한 다음
손을 가볍게 집어 넣습니다. 이 순간도 양은 눈을 뜨고 주인을 황당하게 바라봅니다.
손이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양의 따뜻한 심장을 매만질 수 있습니다.
팔닥 팔닥 움직이는 심장의 동맥을 찾아 힘껏 쥐면 양은 즉사합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우리 일행에게 과일 한상을 차려 귀빈 대접을 하더니 집주인의 딸들이 나와 위구르족 전통 춤을 춥니다.
위구르족 여성들은 뛰어난 미모를 지녔습니다. 대한민국 여성들과 마찬가지로...(무사히 귀환하기 위하여^^)
정식 공연이 끝나자 이게 또 웬일입니까? 동내 꼬마 녀석들이 모두 나와 춤을 춥니다. 솜씨가 섬뜩하군요.^^
과일상에 포도주와 건포도...그리고 춤까지...공짜~우리 일행은 한 순간에 양심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건포도입니다. 니들이 안사고 배겨? .... 전혀 밉지가 않군요.^^대한민국 장사하는 분들이 꼭 배워야 할 덕목입니다.
건포도를 사는 풍경 스케치입니다.
저는 건포도를 사지 않았습니다. 건포도를 건조할 때 황을 사용한다는 속삭임을 버스 안에서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달디 단 건포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녁식사는 현지 한국 식당에서 김치와 삽겹살을 먹었습니다. 식당 앞에는 거대한 포도 그늘막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쿠처를 가기 위해 트루판 기차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트루판역은 시내에서 무려 1시간을 차로 달려야합니다.
이유는 트루판 시내(분지)에 기차가 오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합니다.
트루판 역입니다. 역사는 이곳 중앙아시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건축물입니다.
중앙아시아의 건축물에는 하늘을 배경으로 한 투조식 건축물 또는 간판이 많습니다.
투조란? 조각의 장르에서 배경 부분을 떼어내어 여백을 나타내는 기법입니다.
중앙아시아의 간판 또는 시설물에서는 틈틈히 뚫어진 틈새로 하늘이 드러납니다.
그들의 삶과 영혼이 곧 맑은 하늘인 샘입니다. 제 생각이었습니다.^^
새벽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트루판 역전에서 모두 모여 정겨운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역전의 상큼한 바람이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었습니다.
이번 여행 식구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전교조 전남 교사들 9명, 전국 각지에서 신청한 네분....그래서 합이 13명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고생스러운 코스이다보니 황금 휴가철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겨우 13명이 모였습니다.^^
저는 술 기운을 벗 삼아 일행들의 모습을 스케치했습니다.
그 중 가장 잘 그려진 스케치인데 이 친구 아내가 보아서는 안됩니다. 담배를 끊었던 친구입니다.^^
술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열차는 쿠처역을 향해 힘차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가는 길 내내 회색빛 모래밭일 뿐이었습니다.
00:50 트루판 출발~13:40 쿠처 도착 예정입니다.
트루판역에서 야간 열차를 이용할때는 몇 가지 상식이 있어야합니다.
기차에 오르기 전, 또는 오른 즉시 세수를 해야합니다.
출발하고 몇시간이 지나면 열차의 물이 고갈되기 때문입니다.
차내식은 맛이 없어 먹질 못합니다. 뜨거운 물이 준비되었으니 컵라면도 필수입니다.
그리고 손목시계가 없어 매우 불편하군요. 시차가 있는 해외 여행때는 반드시 손목시계를 차야겠군요.
올해 4월 이 지역에서는 사막광풍에 기차가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트루판을 떠나 30분 쯤 가면 '노풍구'라는 곳이 있는데 '늘 바람이 부는 어귀'라는 뜻입니다.
천산의 만년설에서 발생한 강한 서북풍이 지나는 길목입니다.
열차 안에는 에어컨 시설이 잘 돼있습니다. 기온 차로 인해 물병이 완전 쪼그라들었습니다.
4인 1실의 객차인데 전 운이 좋게도 현지인과 한 방을 쓰게되었습니다.
위구르족 노인인데 어린 손자를 데리고 있었습니다. 외국인인 저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공손했습니다.
잠자는 아기의 모습을 스케치하여 선물로 주었더니 무척 좋아하시더군요.
열차는 12시간을 달려 쿠처에 거의 다달았습니다.
흙벽돌로 지은 현지 농가입니다. 이곳에선 큰 건물을 지을 때만 구운 벽돌을 사용합니다.
러시아 여행 때보다 훨씬 깨끗한 시설의 열차였습니다.
쿠처역입니다. 신장 지역의 모든 시설물에는 한문과 위구르문자가 함께 사용됩니다.
그렇지만 이는 정부에서 지시한 의무사항일 뿐 위구르족들은 대부분 중국어를 사용하지않고 위구르족언어를 사용합니다.
쿠처는 과거 당나라 때 서역도호부 36개 중에서 2번째로 규모가 큰 나라였으며
신라 혜초스님은 인도에서 돌아오는길에 이곳을 경유하게되었는데
'왕오천축국전'중에서 유일하게 행적의 시간을 밝힌 곳이기도합니다.
혜초의 말씀입니다.
다시 소륵(카슈가르)에서 동쪽으로 한달을 가면 '구자국'(쿠처)에이른다. 이곳이 바로 안서대도호부로서 중국 군사의 대규모 집결처이다. 이 구자국에는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소승법이 행해지고 있다.
고구려 유민 장군 '고선지'의 쿠처와의 인연은 혜초보다도 더욱 끈끈합니다.
그가 3만 안서군의 주둔지인 쿠처에서 그의 부친 '고서계'를 따라 유년시절을 보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약관 20세에 유격장군으로 발탁되었으며 절도사로 승격해 다섯차례나 대군을 이끌고 세계 전쟁사에서 보기드문 서역원정을 단행한다. 그런데 그 출발지와 개선지가 패전의 고배를 마신 마지막 탈라스 전쟁을 빼고서는 모두 이곳 쿠처이다. -실크로드 문명기행-정수일 저-
쿠처 역전의 풍경. 쿠처는 면적 1.5만 평방킬로미터, 인구 45만에 84%가 위구르족입니다.
농업과 유전이 주이고 유채와 함께 건조한 기후 관계로 중국 최고의 목화산지입니다.
교차로 신호등에 시간 표시가 있는게 눈길을 끕니다. 최근 중국은 자동차 값은 내리고 유류값은 올리는 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의 도로 건설 속도를 함께 생각하면 중국도 곧 마이카시대가 도래할것입니다.
우리가 묵을 쿠처 호텔입니다.
신장 지역의 평균 밥상입니다.^^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때문에 대부분 양고기와 닭고기입니다.
한국인들을 위해 향료는 사용하지 않도록 사전 주문합니다.
처음엔 적응하려고 애썼지만 며칠이 지나도 똑같은 음식이다보니 조금 힘들었습니다.^^
음식들 사이로 우리가 준비해간 김치,고추장,깻잎 등이 보입니다.
함께 여행했던 여류 화가 한 분께서는 은박으로 잘 포장된 김치를 냉동실에서
얼린 후 조그만 아이스 박스에 냉매와 함께 준비해오셨습니다. 시원한 김치맛을 보여준 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점심을 먹고 곧바로 키질천불동을 답사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사막에 조성된 유전입니다.
이곳 신장 지역은 상당한 양의 원유를 매장하고 있어 중국의 미래를 밝혀주고있습니다.
쿠웨이트 매장량의 2분의 1에 달하며, 중국 전체의 4분의 1이 신장에 뭍혀있습니다.
이곳으로부터 상해까지 도로 옆 8m 지하의 송유관을 통해 수송됩니다.
공동묘지입니다. 이른바 '토장'이라고 합니다.
일반인들은 우리나라 봉분처럼 모래를 쌓아올리고,부잣집들은 작은 집을 지어 그 아래에 매장합니다.
특별한것은, 이곳의 시신들은 썩지 않는다는것입니다. 수분이 없기 때문에 자연미이라가 되고맙니다.
키질천불동을 가는 길목에 '아단지모(雅丹地貌)'라고 불리는 이상지형지대입니다.
이곳은 본디 호수지대였습니다. 호수가 융기되고 풍화되면서 괴이한 형상의 지형으로 바뀌었다합니다.
'염수골'이라고 불리는 지형입니다.
염수골은 바닷물 호수가 말라서 형성된 골짜기입니다. 하얗게 응고된 것이 소금입니다.
우리 일행 중 한 분이 손가락으로 찍어 물맛을 보고있습니다.
이곳 쿠처와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는 과거에 바다였다는 증거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아단지모'의 형세들입니다. 한자로는 아담할 '雅' 붉을 '丹' 땅'地' 모양 '貌'입니다.
'아단'이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음차된것입니다.
쿠처에서 2시간을 달려 '키질천불동'에 도착했습니다.
쿠처에는 10여개의 석굴이 널려있어 신장 전체 석굴의 5분의 3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키질석굴은 둔황석굴, 룽먼석굴, 윈강석굴과 함께 중국 4대 석굴중 하나이며 그 중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입니다.
'구마라습'의 청동 좌상입니다.
스님은 쿠처에서 태어나 불교의 불씨를 장안에 가서 경론 74부 300여 권을 번역해 동아시아 불교 삼종론의 조사가 된 명승입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석굴만도 236개가 되며 300개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합니다.
석굴내부는 7개만 공개하고 있으며 사진 촬영을 절대 금한답니다.
저같은 환쟁이는 이럴 때 오히려 신이납니다. 손 사진기(?)를 들고 유유히 들어갔습니다.^^
석굴 내부입니다. 별것이 없는 석굴 내부를 보고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도 러시아나 독일 일본 등지에서 온 도굴꾼들에게 입은 상처뿐이었습니다.
본디 불상이 박혀있던 자리인데 도굴 당하고 빈 공간만 애처롭게 남아있습니다.
이곳은 승려들의 휴식 공간입니다. 왼쪽으로 창이 있고 가운데가 벽난로입니다.
8번 석굴속에 군데 군데 남은 벽화들을 모아 스케치해봤습니다.
비교적 원본이 잘 보존된 17호 석굴의 탱화입니다. 동양미와 서양미가 잘 접목된 선이 나타납니다.
구입한 도록에서 벽화 한 점을 스캔하여 소개합니다.
38번 동굴의 천장 벽화입니다. 원숭이 무리들을 구하고 있는 임금 원숭이에 관한 내용입니다.
서유기가 떠오르는 벽화입니다.^^
10호굴 안쪽엔 빛바랜 동양인 사진 한장이 놓여있습니다. 연변 출신의 조선족 화가 한락연의 자화상입니다.
프랑스 유학 후, 한 때 그림을 접고 항일구국투쟁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른 후 다시 중국 석굴을 찾아 다니며 복원 운동에 앞장 섰던 분입니다. '키질 벽화와 둔황 벽화와의 관계'라는 논문을 발표했으며 1947년 비행기 사고로 숨졌습니다. 중국의 피카소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 독립운동가 포상을 받았습니다.
이곳 쿠처는 우리나라와 끈끈한 관계를 가진 곳이 분명한것 같습니다.
'홍유'라는 나무입니다. 사막의 대표적 식물 중 하나인데 우리말로는 홍버들이라 부릅니다.
붉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데, 뿌리가 5m가 넘도록 워낙 깊이 파고들기 때문에
이 나무가 서식하는 곳을 파 들어가면 물을 구할 수가 있답니다.
다시 쿠처로 돌아가는 길에 화력발전소가 눈에 띕니다.
신장에는 엄청난 석탄이 매장되어있기도합니다. 온 종일 석탄을 실은 차들이 발전소로 들어갑니다.
위구르족 어린아이입니다. 뒤에 보이는 나무가 미루나무 종류인데 이곳의 대표적인 가로수입니다.
미루나무(혹은 백양나무) 가로수는 한줄이 아닙니다. 어떤 곳은 5줄이 넘도록 겹겹히 조성되어 장관을 이룹니다.
쿠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랑'이라고 부르는 빵입니다. 이곳 사람들의 주식입니다.
저는 여행을 떠나기 전 구글 위성을 통해 그 지역을 답사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구글 위성을 통해 이 지역을 보았을 땐 산맥과 사막지대가 워낙 황폐해보였기 때문에 좋은 잠자리는 아예 포기했었습니다.
그러나 호텔은 깨끗했고 몽골의 게르에 비하면 너무나 황송하고 고마울뿐입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에어컨을 비롯한 모든게 다 있지만 냉장고만큼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드디어.........죽음의 바다 '타클라마칸'사막을 건너 민펑으로 향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사막 중의 하나로서 면적은 약 40만 평방 킬로미터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점 4개는 자동차유리가 깨진 것을 때운 흔적입니다.
트럭이 많은 이곳 도로 상황에서는 유리값을 당하지 못한답니다.^^
'탑리목사막공로' 타클라마칸 사막 공로의 출발선입니다.
쿠처에서 민펑까지는 750Km, 세계에서 가장 긴 이 312번 사막공로는 522Km입니다.
속도제한은 시속 80킬로...예상 소요시간은 12시간, 중간에 휴게실은 물론 여자용 화장실도 없습니다.^^
자동차가 고장이라도 나면 끔찍한 회오리 돌풍 '카리부란'에 휩쓸리거나 붉은 개미때의 습격을 받고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한여름 대낮 기온은 70도를 웃돌고 평균 강우량은 연간 16mm에 불과합니다.
644년 현장스님이 인도에 다녀오는 길에 '대당서역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합니다.
"행인들이 지나간 후에 발자국이 남지 않으니 왕왕 길을 잃고 죽게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죽은자가 남긴 해골을 모아 길 표지로 삼는다."
그래서 위구르인들은 '돌아올수 없다'는 뜻의 '타클라마칸'이라 명명한 것입니다. 으~~~~~쩔린다. 쩔려!
공로의 출발점 바로 앞에서 한 노인이 과일을 팔고 있습니다. 강산도 식후경, 하미과를 사먹었습니다.
이 양반은 두개 36원에 폭리를 취하고 있습니다. 시장에서는 한개 6원(한국돈 780원)입니다.
맛이요? 한 입 먹으면 희한하고, 두 입째는 몽롱하고, 세 입째는 그대로 쓰러집니다.
과자처럼 사각사각거리고 당도도 엄청 높고 정말 죽입니다.
여행사 사장께서는 호텔에서 하미과씨를 밤새 씻어 공항을 몰래 통과했습니다.
현대판 문익점이 되신거죠. 시골에 수박 재배하는 친척에게 맡겨 수확하면 저에게도 한 통 주기로 했습니다.
성공한다면 때부자 되시겠죠.^^
식량도 미리 준비해야죠. '랑'입니다.
화덕의 안쪽 벽에 밀가루를 붙여 구워냅니다. 담백하고 맛있습니다.
드디어 공로로 들어섰습니다. 여기서 부터가 타클라마칸사막입니다.
한시간 쯤 지나자 저는 한가지 사실을 깨닫고 실의에 빠지고 맙니다.
이 죽음의 바다를 평지나 버스에서 촬영하는것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서적을 통해 보아왔던 멋진 사막 사진들은 사실 비행기가 있어야 촬영이 가능하다는거죠.
거금을 투자하여 구입한 도록에서 스캔한 사막풍경입니다. 타클라마칸에 직접 가셔도 이런 풍경은 보지 못합니다.^^
312번 사막공로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어떻습니까? 상상하신 도로가 맞습니까?
사막 공로의 양쪽에는 눈에 보이다시피 넓이 20~30미터의 수목지대가 522킬로미터 끝까지 계속 이어져 있습니다.
사막의 모래가 바람에 의해 도로에 쌓이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성된 이 수목지대는 실로 중국인들의 담대함이었습니다.
수목지대를 잘 살펴보십시오.
지름 1cm정도의 검정색 고무호스가 수목 밑으로 모두 연결되어있습니다.
이 고무호스 들은 사진에 보이는 수정방(우물집)과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수정방들은 대략 2~5Km 간격으로 끝도같도없이 이어집니다.
이 우물집을 일명 '부부방'이라고도 부른답니다. 그 이유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당국의 조처에 따라 젊은 신혼부부들은 결혼 한 후 이곳에 와서 의무적으로 일정 기간동안 이 집을 관리하고
정해진 시간마다 수목에 물을 주어야합니다. 허~참.
말이 턱 막혀 안나오네...죽음의 바다에서의 신혼여행이라...? 그나저나 둘 사이의 정은 징허게 들겄네.ㅠㅠ
소변을 보기 위해 갓길에 정차했는데 신혼부부가 물주는 장치를 가동했나 봅니다.
고무 호스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작은 구멍이 뚫려있어 수목에 물을 뿌려줍니다. 소변 자국이 절대 아닙니다.^^
신장 생태연구소에서는 10년간의 연구 끝에 사막에서 방풍림으로 쓸 수 있는 수종 네가지를 찾아냈습니다. 멀리 보이는 제법 큰 나무들이 '호양나무'(서역 버드나무)입니다. 키가 3~4미터나 되는 이 나무들은 살아서 천년, 죽어가는데 천년, 죽어서도 천년을 서있다고합니다.
중간에 코스모스처럼 보이는 나무가 '홍류'입니다. 키질석굴에서 보았던 나무인데 아직 꽃이 피지 않았습니다. 맨 앞의 작은 나무가 '사사나무' 그리고 야생대추나무인 '사괴조'가 있다고합니다.
2005년 한 해만 해도 이 네가지 나무를 200만 그루나 심었다고합니다.
모래를 직접 밟아봤습니다. 밀가루처럼 매우 곱고 발이 쑥쑥 빠지는 바람에 걷기가 힘들군요.
황사가 이런 미세한 먼지로 이루어졌기때문에 호흡기 깊숙히 흡입되는가봅니다.
영상 70도도 별것아니군요. 정확한 온도는 모르지만 사막기온은 건조하기 때문에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았습니다.
휴게소가 없다고 했는데 거짓말이 되고 말았습니다.^^사막공로와 다른 도로가 교차되는 지점에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 식당 주인은 원래 흑룡강이 고향인데 부인을 따라 이곳에 온 후 음식장사를 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고합니다.
지금은 마을 식당이 여러개 생겨났습니다.
처음으로 먹어보는 현지식입니다.^^양고기와 야채로 만든 소스에 조금 덜 익은 면을 비벼서 먹었는데 꿀맛이었습니다.
가도 가도 똑같은 사막길입니다. 지루함도 달랠 겸 앞 좌석에서 사이드미러에 비친 저를 찍어봤습니다.^^
이제 민펑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막공로가 끝날 무렵 중국 경찰차의 수행을 받는 고위 관리들이 고속으로 우리 버스를 추월해갔습니다. "휭~~ "
벌금이 무서워서 시속80킬로를 내내 준수하던 기사와 우리 일행은 멍하니 그놈의 차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주유소에 내려 용변을 보려는데 이곳에서 주유하지 않았으니 화장실을 이용하지 말라는군요.
할 수 없이 주유소 옆에다 갈겼습니다. 인심한번이라곤....퇘!
드디어 초원지대가 나타났습니다. 어느사이 11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타클라마칸사막 횡단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민펑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이번 여행 기간 동안 유일하게 현지 가이드가 없는 곳입니다.
뭐야? 저건...내참. 사막공로에서 요란하게 우리를 앞질러갔던 고관대작 일행입니다. 같은 지붕에서 자겠군요.
유심히 살펴보니 중국 검찰의 고위 간부 가족들이 휴가차 온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냥반들 식사가 끝난 후에야 저녁식사가 준비된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쪽팔리는군요...
그들은 식후에 악단을 불러, 온 동네가 울리도록 음주가무를 벌리며 놀아났습니다.
내 참 더러워서..한국만 같았으면 내 카메라 사냥감인데...말로만 들었던 사회주의국가의 몹쓸 관리를 직접보았습니다.
민펑은 작은 도시였습니다. 이제 이곳 쯤에서 오아시스로에 대한 개념이 정리되기 시작하는군요. 실크로드 서역 길은 천산이나 군륜산맥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오아시스도시를 잇는 선 임을 알게되었습니다.
가이드의 권고를 무시하고 시장 쪽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우와, 물이다! 어른은 안받아주나?
이곳 소도시들은 나귀차가 소중한 교통수단입니다. 오토바이에 수래를 단 택시와 나귀차가 대부분입니다. 한번 타보고 싶군요...
야시장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고 있습니다. 암벽 등반입니다. 이런 놀이 시설은 우리나라에서도 힛트 예감입니다.
놀랍습니다. 커다란 야시장이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음식을 사먹습니다.
뭐가 놀랍냐고요? 양고기와 기름진음식을 먹으면서 술을 마시는 사람이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역시 무슬림들은 알라신 앞에 충실했습니다.
언젠가 제 아내가 저에게 귀뜀해준 말이 생각납니다.
독교는 '사랑', 불교는 '자비', 이슬람은 '인내' 제발 이런 사람들에게 함부로 다른 종교를 들이대서는 안되겠지요.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8월 8일 아침 일찍 민펑을 출발 허티엔(호텐)으로 향합니다.
8월 4일밤 한국에서 출발했으니 날짜로는 벌써 5일째로군요. 허티엔까지는 315Km. 5시간 예상합니다.
제법 피곤해진 몸을 버스 의자에 의지해 잠을 청해보지만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 머리에 충격이 전해지는군요.
허티엔으로 가는 길 역시 고비사막(자갈사막)길입니다.
'위텐'이라는 작은 도시를 지나치는 순간 양쪽으로 낮익은 푸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저게 뭐야! 나락이잖아" 나락은 벼의 사투리입니다. 신장에 와서 처음으로 벼농사 현장을 보았습니다.^^
서역길에서 물이 가장 풍부한 곳입니다.
평화롭게 보이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이곳에서 한가지 에피소드가 발생합니다.
일행 중 한 분이 식당 여주인과 아들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촬영해 인화지를 건냈습니다.
반응요? 상을 초월했습니다. 너무나 신기해하고 좋아 해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덕분에 우리도 마음껏 셔터를 누를 수 있었습니다. 여행 때는 현지인의 마음을 여는 그 무었이 필요합니다.
작은 선물, 폴라로이드, 그리고 저는 스케치입니다.^^
허티엔 외곽에 다달았을 때, 넓은 강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강 어귀에는 뜨거운 햇살에도 아랑곳 않고 현지인들이 옥을 줍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온대성 건조기후대로서 추위나 더위가 심하지 않으며,
쿨룬산맥에서 흐르는 '백옥하'와 '묵옥하'가 양쪽으로 흘러 매우 기름진 땅을 가지고 있답니다.
백옥하에서는 백옥이 묵옥하에서는 검정색 옥이 많이 나는가 봅니다.
과거에 이곳 허티엔을 '우기'라고 부른 적이 있었습니다. 티벳어로 '옥이 나는 곳'이란 뜻입니다.
허티엔현의 인구는 120만, 허티엔시는 20만 정도입니다. 위구르족이 95%입니다.
신장 사람들은 청소를 열심히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기 집 앞부터 깨끗이 쓸고
보시다시피 큰 길에서도 하루 종일 비질이 멈추지 않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도 아침이면 모두 나와 집 앞을 쓸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청소차가 생긴 이후로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집 앞에 눈이 쌓여도 나몰라라합니다.
이제 그런 집에 벌금을 물린다니 잘 된 정책입니다.
사회주의 국가의 인상을 짙게 풍기는 동상입니다. 힘찬 모습이군요.
신장 지역은 작은 도시들도 길이 굉장히 넓습니다.
눈에 보이는 차선 말고도 바깥쪽으로 주차차선이 한 줄 더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넓은 땅이 부럽기도 하군요.
우리가 묵을 호텔 앞의 이슬람 성전 모양을 한 백화점 건물입니다. 제가 보기엔 지붕을 동으로 만든것 같은데 아름답군요.^^
맛있는 점심을 먹고...
호텔 로비에 나왔더니 이번 여행에서 발견한 최초의 한글이 우릴 반겼습니다.
이거, 웃어야 할지...찡그려야 할지...날쌘돌이 일행 한 분이 조사를 하고 왔습니다.
"보통 싸우나는 아닌것 같구만이라." 위대한 대한민국의 손길이 이곳을 주름잡는 때도 멀지 않았군요...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백옥하 주변의 고성 터를 찾아 나섰습니다.
이곳에서 드디어 나귀차를 탈 수 있다고 합니다. 마을 주민들이 비교적 반가운 얼굴로 이방인들을 반깁니다.
목적지 까지 나귀차의 요금은 1인당 10원입니다. 신장의 작은 마을에서는 차보다 나귀차가 훨씬 많습니다.
앞의 남자가 쓰고 있는 위구르 전통 모자는 '도빠'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풍부한 자외선 지대에서 하필 차양이 없는 모자를 택한 그들의 선택은 무었일까요?
나귀차 값을 지불하니 덤으로 사진 촬영의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위구르인들도 세가지 계열로 나누어진답니다.
러시아계, 아랍계, 그리고 한족계. 제 안목으로 두 여자 아이는 러시아계로 생각됩니다.
'위구르'는 단결 또는 단합의 뜻을 가집니다.
맨 오른쪽 일행 분은 화가이신데 태극기 머리 수건을 만나는 아이들마다 머리에 묶어주었습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힘을 압도하는듯 합니다.^^
제가 선택한 나귀차의 주인 여성입니다. 하지만 매우 다부지고 아름다운 눈썹을 가졌군요.^^
이슬람은 철저한 남존 여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히잡을 두르고 있는 어머니와 아들의 대조적 운명이 느껴집니다.
'히잡'은 이슬람 여성들이 외출할 때 얼굴이나 가슴을 가리기 위해 머리에 쓰는 가리개(쓰개)를 말합니다. 색깔은 화려하며, 다른 이슬람권 여성들이 몸에 두르는 망토보다 쓰고 벗기가 쉽습니다. 이란 등지의 시아파 여성들이 입는 검은색 차도르(chaddor),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이 입는 검은색 아바야(abayah),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아라비아반도 일부와 베두인족(族) 일부 여성들이 입는 부르카(burqah) 등이 신체의 대부분을 가리는 것과 달리 머리와 가슴 일부만을 가린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이 어린아이는 제가 탄 나귀차에 무임 승차를 한 녀석입니다.
우리가 탄 나귀차가 맨 나중에 출발을 했는데 글쎄 한 여성이 이 아이를 안고 나귀차 뒤에서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나귀차를 정지시키고 어린애를 안아서 실어줬습니다. 그 여인은 고맙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잠시 그러다 보니 우리 나귀차가 뒤로 쳐지고 말았습니다. 어이쿠, 빨라가자. 이랴!
재미있었냐고요? 글쎄요. 재미있는 만큼 마음도 무거웠습니다.
이십여분을 나귀차와 함께 달린 이 여인들은 모두 플라스틱 슬리퍼 차림이었습니다.
겨우 앞차를 잡았는데 거기에도 젖먹이 아기가... 위구르족 아이들은 대부분 머리가 마빡이입니다.^^ 우리도 그랬었지요.
위생적으로는 그만이지요.
고성 지대에 도착했습니다.
허,,,이게 고성이라고?...
옛 고성의 찬란한 흔적은 사막의 모래바람에 의해 이렇게 파묻치고 말았습니다.
한 나귀차를 끌고 왔던 어린아이입니다. 짜식이 미모에 자신이 있더군요. 사진기를 들이대도 꿈쩍을 안합니다.^^
이번 여행 중 이슬람계 미모의 여성들과 단 한번도 사진 촬영을 하지 않은 사람이 딱 한명 있었습니다. 바로 저입니다.^^
몽골 여행 때 미모의 호텔 프론트 아가씨에 대한 연민의 글을 제 블로그에 올렸다가 아내에게 된장 혼줄이 났었기 때문입니다.^^
천년의 고성 위에서...
갑자기 나귀차 주인들이 옥을 파는 상인으로 변했습니다. "옥 사시오 옥을 사!"
저에게 아기를 맡기고 땀을 뻘뻘 흘리며 뒤따라온 여인의 속내를 뒤늦게 알게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사지 않으면 나쁜 놈이죠.^^
30원을 주고 샀습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왈 "우리 애기에게도 10원만 주세요"...
몸짓이지만 다 알아들었습니다. 조금 당황했지만 까짓것 10원을 주었습니다.
아뿔사! 근처에 있던 아주머니들이 모두 애를 데리고 와서 10원 씩 달랍니다.
에이, 까짓것 하고 3명에게 주었습니다.
완전 아뿔사!!! 이번엔 멀쩡한 남자어른들까지 몰려와 10원씩 달랍니다.
36계~~~~줄행랑.^^ 결국 옥값보다 많은 40원을 치르고도 원성만 사고 말았습니다.
이곳은 허티엔 박물관입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솥과 물단지입니다. 이곳에서도 사진 촬영은 금지입니다.
나야유적지, 라와크 불사유적 등에서 도굴 당하고 남은 몇몇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세계사에서 강탈했거나 도굴한 유물들은 제 나라에 반납해야 하는 것이 도리 아닙니까?
일본과 유럽 등지에 있는 우리나라 유물들도 마찬가지죠. 어디에 하소연을 해야합니까?
유엔? 나토? WTO? 탈레반? 부시? 아베? 야쿠자? 차라리 칠성파가 나을까요?
정답은 '국력'입니다.
옥으로 새긴 조각품입니다.
이건 돌로 만든 상입니다.
2층 민속실은 사진 촬영이 허락되었습니다.
비단길에 왔으니 비단은 꼭 봐야죠.^^굉장히 질이 좋고 섬세한 복장입니다.
왕서방 생각이 나는 비단입니다.^^
이곳은 카페트의 주요 산지이기도 합니다.
쇼핑점에서 질 좋은 카페트의 가격을 물었다가 입이 다물어지질 못했습니다.
이제 1000년 수령의 호도나무를 구경하러 가는 길입니다.
앞에서도 소개했던 미루나무 군락지인데 정수일 교수의 책에서는 백양나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인터넷 백과사전 검색을 해보니 백양나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안내판에는 1500년 가까운 호두나무라고 소개되었습니다. 우람하긴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이 정도 고목은 많습니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 허티엔 인민광장을 살펴봤습니다. 마오쩌뚱이 지방 종교 지도자였던 꾸얼반을 맞이하는 동상입니다.
신장 지역은 과거 소규모 독립운동이 있었지만 아직 대세는 아닌 듯 합니다.
아래 문구를 대충 내려치면 '우리 모두 단결해 나가자!' 뭐 이정도 아닐까요.^^
동상에서 바라본 인민광장입니다. 국기대 밑 부분 뒤 쪽으로 커다란 옥석을 위에 둔 첨성대 정도 크기의 조형물이 보입니다.
기억해두세요.^^
허티엔 인민광장 스케치입니다.
스케치를 하는동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을 하더군요. 아이들 몇명의 얼굴을 간단히 그려주었는데도 매우 좋아했습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비슷한 위력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조형물 주위에 서 있다가 갑자기 바닥에서 분수가 분출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습니다.
외지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물벼락을 맞고 카메라를 버릴 위험이 클 것 같군요.^^
저녁 식사 후 본격적으로 옥 제품을 구경하기 위해 쇼핑점을 방문했습니다.
제품의 차이는 있었지만 오전에 나귀차 주인들에게 산 가격보다 훨씬 비쌌습니다.
허티엔에서 옥을 싸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하우 머치?" "1000원 달라"
"무시기? 100원에 달라" "웃기고 있네. 그냥 가라."
---이 때 정말 나가는 모션을 취합니다.---
"아,,,잠깐 잠깐,,,300원 달라 달라." "200원에 달라"
"쩝, 가져가라. 퇘!" "땡큐" 아시겠죠?^^
다섯번 째 잠을 자고 대장정(?)의 마지막 종착지 커스(카슈가르)를 향해 힘차게 출발합니다.
"너희들 어디 가니?" "보면 몰라요? 학교 가잖아요."
"방학 아니니?" "보충수업 모르세요?" "헉!"
이제 커스까지는 11시간이 예상됩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길이 되겠군요....
대한민국은 변소의 천국입니다. 신장에 오셔야 깨닫습니다.
대~충 이렇습니다. 지형이 적당히 굴곡진 곳에 차를 세우고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습니다.
"남성분들은 오른 쪽, 여성분들은 왼쪽에서 알아서 해결하세요."
예쁜 처녀들은 반드시 결혼 후, 아이까지 낳고 신장에 오세요.^^
고비사막의 표면입니다.
일직선...그리고 지평선...
커스여 내가 가노라...
가는 길에 허기를 달래기 위해 양고기 꼬치를 샀습니다. 왠일입니까? 꿀벌들이 수도 없이 달겨붙는군요.
꿀벌과 함께 드시면 좋습니다.^^
폴라로이드의 위력이 또 다시 발휘되고 있습니다.^^
신장에 가실 때는 폴라로이드 꼭 챙겨가세요.^^
쿤륜산맥에서 만년설이 녹아 흘러내립니다.
장이 들어섰군요.
전형적인 위구르족 가옥입니다. 미루나무(백양나무?)가 있고 흰 페인트칠을 한 담장입니다.
집앞은 항상 반들반들하게 쓸어놓습니다. 그래야 알라신이 편히 들어오신답니다.
또다른 형태의 묘지입니다. 각 도시들 마다 매장 풍습이 다채롭군요.
커스로 가는 길목에 '잉지사(영길사)' 칼 시장에 들렸습니다.
이곳에선 주로 조폭용 칼이 성업을 이룹니다. 전 가운데 넙적하게 번쩍이는 칼이 가장 마음에 드는군요.
농담이고요. 주로 양을 잡을 때 쓰는 칼입니다.
위구르인 남자들은 머리엔 '도빠'를 쓰고 허리엔 멋진 칼을 차는 것이 전통의 모습입니다.
칼을 잘 못 사시면 공항 검색에서 모두 빼앗깁니다. 길이가 30cm를 넘으면 안됩니다.
일행 중 한분이 칼 한자루를 그만 배낭에 넣고 비행기 탑승 검색을 받다가 혼줄이 났습니다.
칼을 직접 제작하고 있습니다.
칼 제작소에서 심부름하는 아이입니다.
이곳 잉지사는 상당히 큰 규모의 칼 시장이 형성되어있습니다. 섬뜩하시죠? 저도 착한 일 하겠습니다.^^
커스에 거의 다다를 무렵 길 양쪽에 만개한 홍유나무가 아름답게 우릴 반깁니다.
세번째 이야기를 접습니다...
이번 여행의 종착지 카스(카슈가르)의 품으로 들어가는 길목입니다. 맨 먼저 우리를 반긴 것은 결혼식 행렬이었습니다.
도심으로 들어서면서 결혼식 차량을 다섯대 정도 만났습니다.
오늘은 8월 9일 목요일입니다. 평일날인데 아마도 이 날이 길일(吉日)인듯 싶습니다.
위구르인들은 결혼식을 치루면 친지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호텔에서 첫날 밤을 지내는 것으로 그만입니다.
신혼여행 따위는 없습니다.
카슈가르란 위구르어로 '처음으로 창조된'이라는 뜻입니다.
중국 최 서단의 오아시스 도시로 동쪽으로는 타클라마칸사막, 서쪽으로는 파미르 고원, 남쪽으로는 쿨룬산맥으로 에워싸여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도 바로 옆입니다.
다른 도시와는 달리 오토바이 행렬이 눈에 띄는군요. 인근 현 지역까지 합하면 인구 500만, 카슈가르시는 35만 정도입니다.
택시도 많고 도시가 솔차니 산뜻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 창 밖의 풍경을 스케치했습니다. 여느 오아시스 도시와 달리 규모도 크고 생기가 있어보입니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남들이 잘 다니지 않는 커스행을 고집한 이유는 정수일 교수가 쓴 실크로드 문명기행이란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행선지가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카슈가르는 신장의 모든 것을 응축한 축도이다. 이곳을 보면 신장을 알 수 있다.
카슈가르에 오지 않고는 신장에 왔다고 할 수 없다.'
이러니 이곳에 오지 않고 배겨낼 수 있었겠습니까?^^
커스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신장에서 규모가 가장 큰 이슬람 사원인 '에티칼 마스지드'입니다.
'마스지드'란 이마를 땅에 대고 절을 하는 곳이란 뜻입니다. 이슬람 사원을 또한 '모스크'라고도 부릅니다.
에티칼 마스지드는 정원을 포함하여 16,800평방미터이며 평일에는 2~3천명, 금요예배때는 6~7천명,
9월 단식월이 끝난 개재절 때는 수만명의 예배자들이 발디딜 틈 없이 몰려든다 합니다.
참고로 중국은 주 5일제를 오래 전부터 시행하고 있습니다.
에티칼 마스지드 광장 반대쪽 풍경입니다.
모스크 입구에 무화과 나무 화분이 있습니다.
이 더위에 긴 코트와 장화를 신고 있는 노인의 표정에서 인내심을 발견할 수 있군요.^^
이곳이 예배를 드리는 장소입니다. 여기에서 퀴즈 한 문제 내겠습니다.
절에 가면 부처님을 보고 절을 합니다. 성당에 가면 예수나 마리아상을 보고 기도를 합니다.
모스크에서는 누구를 보고 기도를 하겠습니까?
정답은 잠시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모스크를 방문했을 때는 신자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한 신자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모스크 안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어떤 기념이 될만한...혹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여길만한 그 어떤 상징물도 없었습니다.
딱 한 곳, 꾸며진 이 곳은 지붕이 달린 화려한 의자과 세계 각지의 시간이 표시된 시계들이 있습니다.
퀴즈의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슬람교의 유일신 알라신은 형상이 없습니다.
때문에 무슬림들은 가정이나 모스크에서 또는 아무 곳에서 보이지 않는 유일신에게 기도를 올립니다.
무신론자인 저의 생각을 말해보겠습니다. 마호메트의 사상에 경의를 표하고싶습니다.
"신은 형상이 없다" 제가 보기엔 매우 철학적이고 매우 종교적이고 매우 인간적이군요...
세상에,,, 여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동네 담장에서 즐겨 따먹었던...추억의...꼬마에게 1개를 사서 맛보았습니다.
세상의 과일 중, 여자 속보다 더 붉은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바크 호자 묘당' 입니다. 신장 사람들의 자존심을 담고 있는 이슬람 건축술의 상징입니다.
묘당의 출입문은 이런 종류의 수많은 타일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묘당 본 건물입니다. 이곳 역시 정교한 타일로 화려하기 그지 없게 장식되어있습니다. 마치 비단으로 에워 싼 것 같군요.^^
묘당 내부입니다. 사실 이곳은 이슬람 지도자 아바크 호자보다도 그의 몇 대 손녀인 향비의 묘가 더 유명합니다.
그래서 '향비묘'라고도 불리웁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몸에서 향내가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향비가 26세 때 청나라 건륭황제에게 바쳐졌지만 절개를 지키다가 요절했다고 전합니다.
이곳의 무덤들은 흡사 텐트 모양의 천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맨 오른 쪽 위, 멀리 꽃 모양이 달린 작은 묘가 향비묘입니다.
걸어가는 일행들의 뒤를 걸으며 스케치를 하려니 가랑이가 아닌 손가락이 찢어질 것 같군요.^^
묘당 내의 중간 문입니다.
이곳 커스의 명물로는 거대한 시장 '바자르'가 존재합니다.
중국과 서역을 오가는 교역물이나 사람들은 모두 이곳을 경유하였답니다.
현장스님이나 마르코 폴로는 물론, 많은 탐험가들이 이곳을 통해 중국에 침투하였으며
혜초스님도 727년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들러 귀중한 현지견문록을 남겼으며,
고선지 장군도 서역 원정을 단행할 때 모두 이곳을 경유하였다 합니다.
우리 일행도 바자르에 침투했습니다. 앞으로 30분 후 이곳에서 은밀히 만난다. 오바!
남대문 시장 정도의 규모랄까? 남대문에 가본지가 꽤 돼서 잘 모르겠군요.^^
하여튼 일요일이면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 난리가 나는 곳이랍니다.
온갖 잡화들이 이곳에 다 모여있군요. 그렇지만 제 욕망를 채우는 물건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전 짐승의 뿔을 손잡이로 만든 말의 채찍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용도는 매일 아침 둘째 형석이를 깨우는 것으로 말입니다.
녀석이 요즘 정신 상태가 헤이해져 물총을 쏘아도 이불로 막으며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욱 고단위 처방이 필요합니다.
채찍 한 방이면 벌~떡 일어날텐데...^^ 짝!!!!!!!!!
비단 코너
진열장 위의 채찍을 들고 "꼬마야, 이거 얼마니?" " 나 몰라 해"
"머시여? 주인장 어디갔냐?...아니 사장님 어디 갔냐?" "기도하러 갔어라..."
아니 이냥반들 장사도 안하고 기도를 혀? 바자르 한 쪽에서 상인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무슬림들은 하루 다섯번 씩, 어떤 이유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올립니다.
첫번째 기도 : FAJR(파즈르) 새벽에서 해뜨기 사이에
두번 째 기도 : ZUHR(주흐르) 정오에서 오후중반 사이에
세번 째 기도 : ASR(아스르) 오후중반에서 해지기 사이에
네번 째 기도 : MAGHRIB(마그리브) 해진 직후에
다섯번 째 기도 : ISHA(이샤) 밤에서 새벽사이에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런 사람들을, 겨우 일주일에 한 두번 교회가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뭘 어쩌겠다는건지...?
제발, 타 종교를 깨부시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배타적 종교관 때문에 지금도 지구는 피로 얼룩져 가고 있습니다.
카슈가르를 떠납니다. 이제 우리 여행은 지리적으로는 끝이 났습니다.
"커스여, 안녕." 제 평생 아마도 다시는 못오겠지요...
커스 공항을 이륙한 중국 국내선 여객기는 우루무치를 향했습니다. 항로는 천산산맥 위을 고스란히 종주합니다.
만년설에 덮인 봉우리들이 황홀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다시 우루무치로 돌아왔습니다. 우루무치에는 나귀마차가 없었습니다. 우루무치에는 히잡을 쓴 위구르여인도 없었습니다.
한국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인솔자이신 여행사 사장님의 이상한 행동이 있었습니다. 제 옆에 앉아 있던 선생님을 다른 쪽으로 강제로 보내더군요.
그러더니 한참 후 케익을 가져와서 제 옆에 놓고서 제 머리에 종이 왕관을 턱 씌우더니 저와 모든 일행들에게 그러더군요.
"박철우선생님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라고요 저는 "멍"하고 말았습니다. "멍" "멍" "멍"
식당 사장님이 미역국까지 특별 서비스하더군요.
제 인생의 신조는 적어도 생일 따위로 남들에게 불편을 끼치지는 않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부로 신조가 깨지고 마는군요.
사연은, 아내가 여행사 사장님의 로밍 된 전화기에 생일 축하 메세지를 보냈고,
제 생일 임을 알게된 사장님이 과잉 서비스(?)를 한 것입니다.
고마운 답으로 친절한 여행사를 공개하겠습니다.
광주 유니버스 여행사 (이정상 사장님)^^
전화번호도 적을까요? ㅎㅎㅎ 062-522-2255
호텔 근처 야시장인데 대낮부터 겁나군요. 확실히 중국인들은 한국인보다 노는 일에 몰두합니다.
한국인은 일본인에 비해 그렇고요.^^
이 날 밤에 우리 일행도 야시장에서 한 잔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이곳 상인들 흉 좀 보겠습니다.
하미과를 파는 어떤 젊은이는 우리가 하미과를 사지 않자
하미과를 자르던 칼을 탁자에 위협적으로 놓으며 협박을 하더군요.
그리고 이곳에 오면 총을 쏘는 게임 같은 것은 절대로 하지마십시오.
갯수를 조작한 후 벌 떼 같이 달려들어 협박을 합니다.
경찰이 왔지만 그들도 한 패나 다름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 일행은 크댐한 바가지를 쓰고 말았습니다.
우루무치 야시장은 서울의 밤보다 무섭습니다.
호텔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천산천지를 향했습니다.
천산천지는 우루무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산 중턱의 큰 호수입니다.
타클라마칸 사막 지대 보다는 물이 풍부하군요. 천산산맥의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수입니다.
무주리조트의 곤돌라를 연상시키는군요.
전기 자동차와 곤돌라를 타고 쉽게 천지에 올랐습니다.
이곳 '천산 천지'는 백두산 천지와는 좀 다릅니다.
백두산 천지는 산의 정상에 호수가 발생됐지만 이곳은 산의 중턱에 발생된 호수입니다. 대궐모양의 유람선이 보입니다.
멀리 보이는 만년설을 빼고는 백두산 천지 보다 왠지 영감이 없어 보입니다.
많은 관광객과 유람선 때문에 오염된 물이 걱정스러웠습니다.
여기는 우루무치 박물관입니다. 신장지역의 유물과 특히 한족을 비롯, 소수 민족들의 문화와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상당히 잘 보존된 미이라입니다.
미이라가 출토된 석관의 구조입니다.
우루무치 시내의 홍산공원입니다. 우루무치시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아마도 우루무치 전경 중, 이 곳이 으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5년 전만 해도 8층 건물이 최고였던 우루무치가 초 고속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중국의 겁 없는 발전을 보고 겁이 나십니까?
머지 않아 중국도 껍질보다 속까지 채워진다면...정말 겁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경제에 올인 중입니다.
이런걸 보면 가끔은 왜 슬퍼집니까?
.......
유럽을 가도 벗고, 중국을 가도 벗고, 저도 찜통 기후인 요즘 반바지를 입고 출근하고 싶습니다.
우리 학교 여학생들 치마 길이는 날이 갈수록 짧아지는데 선생님들 바지 길이는 不動입니다.^^
이제 9일간의 긴 여정,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신장의 민속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특단의 야외 부페에 들렸습니다.
이런 야외 부페는 처음입니다. 공연 무대를 배경으로 1000석 정도의 식탁이 놓여있고 야외 부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관람객들은 마음껏 음식을 먹으면서 민속 공연을 즐기게됩니다.
공연은 신장 소수민족들의 춤과 음악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분위기가 산만하여 공연에 집중하기 어려운 점이 아쉬웠습니다.
객석 위로 시선이 집중되며 줄을 타는 광대가 나타났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이별의 손짓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공연이 끝나면 공항으로 향하고 9일간의 실크로드 답사를 마칩니다.
'실크로드는 문명을 낳아 키우고 오가게 한 길이다.
지구의 동서남북을 소통시키고 인류역사의 어제을 오늘로 이어주는 길이다.
사막이나 바닷물에 묻혀버린 죽은 길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길이다.'
우리 팀들이 실크로드 여행을 준비하던 올 해 6월 쯤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열린 역사교사 모임에 정수일 교수가 초청되었습니다.
저희들은 교과에 상관없이 모두 참여하여 그 강연을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길잡이가 되어주신 정수일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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