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미첨 (Robert Mitchum,1917~1997)
'로버트 미첨' 은 어느 쟝르에 갖다 놓아도 제 몫을 충분히 했던 그는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의 무관심으로 인해 헐리웃 역사상 가장 과소평가된 배우 중 한명이다.
그리고 그는 헐리웃 역사상 "영웅과 악당을 동시에 연기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배우"로
자신에 대한 무관심을 뛰어난 재능으로 극복해 나갔다.
특히 그가 출연한 <The Night of the Hunter, 1955년>과 <Cape Fear, 1962년>에서
보여준 섬뜩하고 오싹한 악인(惡人)의 모습은 훗날 '잭 니콜슨', '숀 펜' 등이 자신의
연기에 '롤 모델'로 삼을만큼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는 철도노동자였던 아버지를 어려서 기차 사고로 잃고, 계부 슬하에서 자라면서
청소년기에는 다소 반항적인 아이였다. 가난뱅이 노동자였던 아버지의 불행한 죽음을
성장하면서 알게된 그는 체제와 사회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不信)이 가슴 밑바닥에
잔재했으며 그것은 훗날 그의 남다른 연기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린 시절 이미 한 편의 드라마같은 삶을 시작한 그는 캘리포니아의 롱비치에 거주하던
여동생 집에서 거주하며 새로운 직업을 물색했다. 그리고 좀 더 스트레스를 적게 받을 수
있는 직업을 얻기위해 1942년 '알프레드 히치콕'이 연출한 <Saboteur>에 엑스트라로
출연하였다.
1944년 ' 머빈 르로이 감독'의 전쟁 드라마 <Thirty Seconds Over Tokyo>에 출연
할 때까지 다양한 스튜디오를 통해 겨우 끼니만 해결 할 수 있는 숱한 단역을 전전
했다. 다행히 자신을 눈여겨본 RKO스튜디오와 7년간의 정식계약을 맺은 그는
'에드워드 킬리' 감독의 B급 서부극인 <Nevada, 1944년>로 스타덤에 올라섰다.
이듬해 그는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 양도되어 <Story of G.I. Joe, 1945년>에 출연
하여 전쟁 영웅을 연기함으로써 데뷔 3년만에 오스카상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B급 스릴러인 윌리엄 캐슬의 <When Strangers Marry, 1944년>를 시작
으로 자신의 전매 특허라 할 수 있는 '필름느와르(암흑가 영화) '쟝르에서 진정한 스타로
거듭났다. <Undercurrent, 1946년>, <The Locket, 1946년>, <Pursued, 1947년>,
<Crossfire, 1947년>, 1940년대 최고의 '느와르' 작품으로 평가받는 <Out of the Past,
1947년>등은 그의 연기 인생 전반을 지배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한창 절정의 기량을 꽃피우던 1948년 그는 파티 석상에서 만난 여배우
'Lila Leeds' 와 마리화나를 복용하다 적발되어 세인들의 지탄을 받게되고 한편
으로는 배우 인생의 중요한 위기에 직면했다. 결국 그는 약 40여일간 감옥 신세를
지고난 후 다시 헐리웃에 돌아오지만 여론은 냉담하기만 했다.
영화상에서 신사답고 정의로운 남성 성(Sexual)의 대표적 아이콘이었던 그에게
많은 팬들은 극도의 실망감을 드러 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는 서부극 <Rachel and the Stranger, 1948년>과 <The Red Pony,
1949년>, 두 편의 상업적 성공을 보장해준 서부극을 통해 자신 스스로 위기를
헤쳐 나갔다.
1940년대 말 그는 돈 시겔 감독의 <The Big Steal>과 함께 느와르 쟝르로 돌아왔고
<Where Danger Lives, 1950년>, <The Racket, 1951년>은 '미스 캐스팅' 이라는
악평 속에 상업적으로도 큰 실패를 맛보았다. 그러나 느와르 영화에 대한 그의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마카오, 1952년>, <Angel Face, 1952년>에 출연을
이어갔고, 일생일대 최고의 명연을 펼쳐보인 <사냥꾼의 밤, 1955년>으로 전작의 실패를
보상받았다. 그의 양손가락 위에 아로히 새겨졌던 'LOVE' 와 'HATE' 라는 이니셜은
한동안 영화팬들의 기억 속을 헤집어 놓았다.
한편, 그는 코메디 서부극인 < River of No Return, 1954년>에서 세기의 섹스심볼인
'마릴린 먼로'를 품에 안는 영광을 누렸고, 멜로 드라마 <Not as a Stranger, 1955년>
에서는 평범한 사람과 의사라는 직업 사이에서 번민하는 이상주의자를 연기하여 호평을
받았다.
1955년 그는 아내 도로시와 함께 'DRM' 이라는 개인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UA를 통해
다섯 편의 작품을 배급하는 사업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하였는데 서부극 <Bandido,
1956년>가 첫 작품이었다.
그는 1950년대 후반부터 액션 모험극과 범죄물에 등장하면서 자신의 개인 프로덕션을
확장시켜 나갔으며 <The Sundowners, 1960년>, <The Grass Is Greener, 1960년>
그리고, 1962년 그는 역사상 가장 가공할만한 캐릭터인 '맥스 캐디' 역으로 등장한
<케이프 피어>에서 열연을 펼쳤지만 불행히도 '오스카'로부터는 지명조차 받지 못했다.
이후 그는 <The Longest Day, 1962년>, <What a Way to Go!, 1964년>,
<리오 브라보, 1959년>를 리메이크한 하워드 혹스의 <엘도라도, 1966년>처럼
전쟁드라마, 뮤지컬, 서부극 등 다양한 쟝르를 넘나 들었다.
1970년대 접어들면서 그는 데이빗 린의 걸작 <Ryan's Daughter, 1970년>,
<Farewell, My Lovely, 1975년>, 전쟁 드라마 <미드웨이, 1976년>, 그리고
'험프리 보거트' 의 성공작을 리메이크한 <빅 슬립, 1978년>등으로 자신의 조용
하지만 화려한 경력을 이어 나갔다.
그는 생애 단 한차례 오스카상 남우조연상 후보에 지명받았을 뿐, 늘 오스카로부터
푸대접을 받은 비운(悲運)의 스타였다. 비평가들은 그를 가르켜 '필름느와르의 영혼'
이라고 불렀을 만큼 그는 '필름느와르' 쟝르의 가장 훌륭한 전수자이자 파수꾼이었다.
깊고 활기찬 목소리가 매력인 그는 1991년 '산타바바라'에서 폐암(肺癌)을 이겨내지
못하고 79살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