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5
지난 가을, 드라마 ‘불새’가 리메이크된다는 기사를 읽었다. 2004년에는 미니시리즈였지만 이번에는 아침드라마라고 한다. 기사는 2004년 정혜영 씨(윤미란 역)의 신들린 악역 연기를 얼마나 재현할 수 있을까를 시청 포인트로 삼았다. 당시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정 씨가 깨진 유리 조각이 널린 바닥을 맨발로 걸으며 피를 철철 흘리던 충격적인 장면은 얼핏 기억이 났다.
혹시나 해서 한 OTT 서비스 사이트에서 ‘불새’를 검색해봤는데 있었다. 드라마는 꽤 재미있었는데, 정 씨의 연기도 뛰어났지만(단순히 악역이라기보다는 ‘미저리’의 애니 윌킨스의 자학 버전 아닐까) 메인 주인공인 이은주 씨의 연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불과 스물네 살의 나이에 이토록 강렬한 자기만의 색깔을 보여줬다는 게 놀라웠다. “향기가 없는 여성은 미래가 없다”는 코코 샤넬의 말에 따르면 이 씨는 분명 앞날이 밝은 배우일 텐데 그 이듬해 자살했다는 게 새삼 안타까웠다. 이 씨 역시 다른 많은 사례처럼 우울증이 깊어진 게 배경이라고 한다.
/ 픽사베이 제공
우울증 환자 연평균 7% 늘어
자살이라는 최악의 결말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울증은 당사자뿐 아니라 주변인들의 삶에 깊은 그늘을 드리운다. 힘들게 치료가 돼도 80%는 5년 이내에 재발하고 우울증 환자의 30% 이상은 기존 약물이 듣지 않는다. 지구촌의 우울증 환자는 매년 늘고 있고 우리나라는 증가율이 연평균 7%에 이른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우울증은 사회 경제적 부담이 두 번째로 큰 질병이다.
그렇다고 우울증과 관련된 얘기가 모두 우울한 건 아니다. 지난달 강력한 차세대 우울증 치료제가 국내에서 출시됐다. 이 약은 기존 약물에 제대로 반응하지 않는 치료 저항성 우울증(TRD) 환자의 치료에 쓰인다고 한다. 참고로 TRD 환자의 자살률은 일반인의 20배에 이른다. 무려 30년 만에 완전히 새로운 메커니즘을 지닌 항우울제 신약이 나온 것이라고 하니 기대가 된다.
‘프로작’이 대표하는 기존의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제’가 뇌의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의 수치를 높여 효과를 내는 약물이라면(과연 그런지 논란이 있지만), 이번 신약은 우울증과 관련된 뇌의 신경회로를 재구축해 효과를 내는 정신가소제라고 한다. 이 약물 외에도 현재 다양한 정신가소제가 개발되고 있어 머지않아 우울증이나 중독을 치료하는데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이름도 낯선 정신가소제의 세계에 들어가 보자.
치료 당일부터 효과 나타나
▲ 지난 2000년 마취제인 케타민을 저용량으로 쓰면 우울증에 효과가 크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졌고 19년 만에 광학이성질체인 에스케타민이 항우울제로 출시됐다. 에스케타민은 기존 항우울제와는 달리 전전두엽 뉴런의 신경가소성을 활성화해 신경회로를 정상으로 회복시켜 효과를 낸다. 예를 들어 지속적인 스트레스로 뉴런 수상돌기 가시(spine)의 일부가 손상된 상태에서 케타민을 투여하면 손상이 복원되고 새로 생기기도 해 정상적인 신경회로가 복원된다. / 사이언스 제공
이번에 국내에서 허가가 난 신약의 성분은 에스케타민(esketamine)으로 지난해 미국식품의약국(FDA)에서 항우울제로 처음 허가가 난 약물이다. FDA는 지난 8월 에스케타민을 자살 충동을 막는 약물로 추가 승인했다.
에스케타민은 마취제인 케타민의 광학이성질체다. 분자를 장갑이라고 치면 케타민은 오른손 장갑과 왼손 장갑이 섞여 있는 상태이고 에스케타민은 왼손 장갑만 있는 상태다. 광학이성질체 하나로 이뤄진 약물은 약효는 높아지고 부작용은 줄어드는 장점이 있지만 대신 값이 훨씬 비싸진다(수율이 절반으로 떨어지고 분리하기도 어렵다).
1970년부터 마취제로 쓰이던 케타민이 항우울제 특성이 있다는 건 2000년 처음 알려졌다. 저용량을 정맥주사하자 즉각적으로 우울증 증상이 개선됐고 그 효과가 꽤 오래 지속됐다. 그 뒤 많은 연구가 이어졌고 19년 만인 지난해 에스케타민이 항우울제로 승인이 난 것이다. 다만 에스케타민은 기존 항우울제와는 달리 병원에서만 투약할 수 있다. 의식 분열(해리), 중독성 등 여전히 부작용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스케타민은 어떻게 즉각적이고 효과가 오래 가는 항우울 특성을 보이는 걸까.
지난해 학술지 ‘사이언스’에는 케타민의 작동 메커니즘을 밝힌 미국 코넬대 연구팀의 논문이 실렸다. 연구자들은 생쥐에게 수 주 동안 스트레스를 줘 우울증을 유발한 뒤 케타민을 투여했다.
놀랍게도 약물을 투여하고 불과 3~6시간이 지나자 전전두엽의 뉴런 활성 패턴이 바뀌고 우울증 행동이 개선됐다(활동성이 늘어났다). 그리고 12~24시간 뒤에는 뉴런의 수상돌기 가시(dendrite spine)가 스트레스 이전 패턴에 가깝게 복원됐다. 수상돌기 가시는 다른 뉴런과 시냅스를 형성하는 부위다. 케타민은 뉴런의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을 높여 신경회로의 정상기능을 회복시키는 약물이다.
지속적인 스트레스로 수상돌기 가시 일부가 파괴되면서 신경회로가 바뀌어 우울증이 유발됐는데 케타민이 이를 하루 만에 복원시켰다는 것이다. 게다가 복원된 신경회로는 한동안 유지되므로 기존 항우울제처럼 지속적으로 복용할 필요가 없다.
사실 한두 번 투약으로 우울 증상을 바로 개선시키는 약물은 케타민 말고도 또 있다. 바로 사이키델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환각제(hallucinogen)라고 부르는 사이키델릭(psychedelic)은 정신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약물로 LSD가 가장 유명하다. (사이키델릭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과학카페 447, ‘LSD의 르네상스를 꿈꾸는 사람들’ 참조.)
그런데 최근 수년 사이 케타민이나 사이키델릭의 즉각적인 우울증 개선 효과가 전전두엽의 신경회로를 바꾼 결과임을 시사하는 연구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지난해 발표된 케타민 논문은 이를 엄밀하게 입증한 것이다). 사이키델릭 연구자인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화학과 데이비드 올슨 교수는 2018년 발표한 논문에서 신경가소성에 작용해 정신 활동을 변화시키는 약물에 ‘psychoplastoge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직 공식 번역어가 없어 필자가 ‘정신가소제’로 번역했다.)
지난해(국내는 지난달) 에스케타민이 승인을 받으며 새로운 항우울제 시대가 열리기는 했지만 아직은 널리 쓰이기 어렵다. 정신가소제는 다들 부작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작용을 없애거나 줄인 정신가소제가 개발돼야 우울증이나 중독 치료제의 진정한 혁신이 일어날 것이다.
분자구조 바꿔 부작용 100분의 1로
▲ 아프리카 자생 식물인 이보가의 뿌리에서 추출한 알칼로이드 이보가인(위)은 사이키델릭으로 우울증과 중독을 완화하는 효과도 있지만 환각이나 심장부정맥 같은 부작용이 문제다. 최근 연구자들은 기능적 지향 합성(FOS) 접근법으로 효과는 유지하면서도 부작용은 크게 줄인 약물(오른쪽)을 개발했다. / 네이처 제공
지난 9일 학술지 ‘네이처’ 사이트에는 사이키델릭 이보가인(ibogaine)의 분자구조를 바꿔 약효는 유지하면서 부작용은 100분의 1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는 연구결과를 담은 올슨 교수팀의 논문이 미리 공개됐다. 이보가인은 아프리카에 자생하는 나무인 이보가(학명 Tabernanthe iboga)의 뿌리에 존재하는 알칼로이드 분자다.
아프리카 부시맨은 이보가 뿌리 추출물을 집단의식이나 치료에 써왔다. 19세기에 이보가는 유럽에 소개됐고 그 주성분인 이보가인이 우울증이나 중독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중독 역시 뇌 보상회로의 변형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이보가인이 이를 복원하는 게 치료 효과를 낸 것일 수 있다.
이보가인은 특히 알코올중독이나 마약중독에 효과가 커서 한때 프랑스에서는 치료제로 쓰이기도 했지만, 부작용이 심해 지금은 사용이 금지된 약물이다. 환각 작용과 함께 심장에도 악영향을 미쳐 약물 투여 뒤 심부전으로 사망 사례도 여럿 보고됐다. 그러나 버리기에는 아까운 약물이다.
▲ 아프리카에 자생하는 이보가 (학명 Tabernanthe iboga). / 위키피디아 제공
올슨 교수팀은 ‘기능성-지향 합성’ 접근법으로 이보가인에서 부작용을 최소화한 분자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기능성-지향 합성(function-oriented synthesis)이란 분자의 구조와 기능을 연관시켜 구조를 바꿈으로써 특정 기능(부작용)을 더하거나 빼는 합성법이다. 이보가인은 세 부분(인돌, 테트라하이드로아제핀, 이소퀴누클리딘)으로 이뤄진 분자다.
인돌은 많은 사이키델릭 분자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부분이라 연구자들은 인돌과 이소퀴누클리딘을 골격으로 한 일련의 분자와 인돌과 데트라하이드로아제핀을 골격으로 한 일련의 분자를 만들었다. 시험 결과 이보가인에서 이소퀴누클리딘 부분을 뺀 분자(IBG)는 환각성이 약해졌고 심장에 미치는 악영향도 10분의 1 수준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추가로 IBG의 구조를 살짝 바꿔 만든 분자(TBG)는 환각성이 더 약해졌고 심장 독성도 1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TBG는 이보가인에 비해 환각성이 미약하고 심장 독성은 10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신경가소성을 높이는 활성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연구자들은 TBG의 항우울제 가능성을 보기 위해 우울증 상태로 만든 생쥐를 대상으로 강제헤엄시험을 실시했다. 강제헤엄시험이란 생쥐를 물에 빠뜨렸을 때 벗어나려는 노력을 측정하는 방법으로 우울증인 생쥐는 금방 자포자기하는 경향을 보인다. 우울증 생쥐는 TBG를 투여하고 하루 뒤 시험에는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활발했지만, 일주일 뒤에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반면 케타민을 투여한 그룹은 일주일 뒤에도 움직임이 활발했다. 항우울제로서는 약효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말이다.
다음으로 중독 치료제 가능성을 보는 실험을 했다. 먼저 알코올중독으로, 처음 술(에탄올 20%를 함유한 물)을 접한 생쥐는 쓴맛에 피하지만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결국 중독이 된다. 이런 생쥐에 TBG를 투여하자 알코올 섭취량이 2일차까지는 유의미하게 줄었고 5일차에는 원래 수준으로 돌아갔다. 한번 투여로 약효가 이틀은 간다는 말이다. 한편 헤로인 중독 실험을 한 결과 약효가 12~14일 지속됐다. 따라서 TBG는 약물 중독에 효과적인 치료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 LSD를 비롯한 여러 사이키델릭은 정신가소제(psychoplastogen)로 신경돌기(neurite) 성장과 가시(spine) 밀도, 시냅스생성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다. 현재 이들 물질의 부작용을 줄인 약물을 설계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 셀 리포츠 제공
겨울에 접어들면서 예상대로 코로나19 3차 유행이 시작됐고 겨울이 끝날 때까지 이어질 것 같다. 그나마 몇 건 안 되는 연말모임도 다 취소하다 보니 ‘이러다 나도 코로나 블루에 걸리는 거 아닌가’하는 우울한 생각이 든다. 아마 올해와 내년 우울증 환자가 많이 늘어날 것이다. 지난달 에스케타민 출시를 시작으로 효과는 크면서도 부작용은 작은 정신가소제가 속속 개발돼 우울증의 덫에 걸린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데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
강석기 /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동아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