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의에 대한 평가
將帥之才奸雄之志(장수지재간웅지지)
장수의 재능을 가지고 있으나 간웅의 뜻을 가지고 있고
得政專權見利忘義(득정전권견리망의)
정치의 전권을 얻으니 이익을 보면 의를 저버리네.
■ 삼국지의 마지막 승리자 사마의
묘호 고조(高祖)
시호 선황제(宣皇帝)
성 사마(司馬)
휘 의(懿)
자 중달(仲達)
생몰기간 179년 ~ 251년 8월 5일
엄밀하게 따지면 진나라는 무제 사마염부터 국사가 시작되었지만, 사마의는 진나라 시조로 추앙받는다.
사마의에 대한 평가글을 보면
"將帥之才奸雄之志(장수지재간웅지지) : 장수의 재능을 가지고 있으나 간웅의 뜻을 가지고 있어,
得政專權見利忘義(득정전권견리망의) : 정치의 전권을 얻으니 이익을 보면 의를 저버리네."
삼국지연의에 실린조조에 대한 평과 비슷하다.
망탁조의의 마지막 멤버이다.
중국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청류파의 위선을 보여주는 인물로 사마의를 꼽는다.
■ 삼국시대의 주인공 사마의와 그의 명언
중국 후한에서 서진 사이에 있었던 시대를 말한다. 중국의 통일 왕조인 후한이 멸망하면서 군벌들의 세력 싸움 끝에 조위(曹魏), 촉한(蜀漢), 손오(孫吳)라는 세 나라로 갈라졌으나], 결국 위나라를 계승한 서진이 천하를 통일시켜 삼국시대는 종식되었다. 중국사 중에서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덕분에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시대다.
삼국 중 위나라가 실질적으로 한나라를 계승했다는 점과 이후 위나라에서 건국된 서진이 삼국을 통일한 점으로 인해 한위교체기(漢魏交替期) 또는 한말위초(漢末魏初)라 부르기도 한다.
사마의 자는 중달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도주하게 만들다"
중국 삼국 시대 위의 정치가이자 군략가로 서진 건국의 기초를 세운 인물
후한 안제 때 정서장군을 지낸 사마균의 후손으로 대대로 명문 관료를 배출한 명문가의 후손이다
조조 , 조비 , 조예 , 조방 4대를 거쳐 조위를 섬겼고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은
위나라를 전복시키고 진나라를 건국하여 초대 황제에 올랐다. 사마염 즉위 후 무양후에 봉해졌다
충신과는 거리가 먼 야심가로 평가 되며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과의 라이벌 구도로 잘 알려져있다
고평릉의 변
사마의가 야심가일 수 밖에 없는 사건으로 일종의 군사 구테타다
조예가 죽기전 조상과 사마의를 불러 어린 조방을 보좌케 하는데 조상은 사마의를 두려워하여 그를 태부라는 군권이 전혀 없는 명예직으로 승진시키고 군권을 빼았는다
사마의는 조상의 견제를 피해 칩거 생활에 들어가며 엎친 데 덮친 겪으로 중풍에 까지 걸린다
조상은 수하를 보내 사마의의 상태를 계속 주시하는데 물 조차 스스로 힘으로 먹을 수 없는 사마의의 상태를 보고 받은 후 경계를 풀고 조방과 함께 선대 황제인 조예의 무덤인 고평릉에 대규모 참배를 나선다
그러나 사마의의 상태는 모두 거짓! 기가 막힌 메소드 연기로 조상을 속인 사마의는 조상과 조방이 고평릉으로 출발하자마자 자신의 아들인 사마사 사마소를 불러 쿠테타를 일으킨다
정변은 성공하였고 조상 일파는 모조리 숙청 당하였다
그 후로 위나라의 운명은 사마소 사마사의 수중에 들어 갔고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사마염의
진 건국과 천하통일..
사마의의 명언
적벽의 패전 직후 마등과 한수가 허창을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조조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허창으로 돌아온다, 허창에서 잡은 마등의 자객들의 처우를 문제로 네 아들을 시험하는 조조
다른 자식들과는 달리 자객들을 살려 보내 적에게 조조가 무사히 허창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알리자는 막내 조충
조조는 어린 나이에 형들보다 총명한 막내가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이런 조조와 조충의 눈치를 살피는 사마의!
위기감을 느낀 조비는 심복 진군을 보내 사마의에게 조조의 심중을 묻는데 조충이 아들들 중 가장 총명하다고 말하는 진군, 그러나 사마의는 아니라고 답한다
사마의 :
조충은 똑똑하지 않소. 진정 똑똑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법이지.
마치 사마의 자신의 속내를 나타내는 듯한 이 말은 후에 조상으로 하여금 방심에 빠지게 만들고 결국 천하를 손에 넣는 비법이 된다
사마의 명언
司马懿 :曹冲不是聪明的公子
caochong bushi congming de gongzi
真正聪明的公子 应该让人看不出他的聪明
zhenzheng de congming de gongzi yinggai rang ren kanbuchu ta de congming
견리사의(見利思義)와 견리망의(見利忘義)
글 : 김승종 기자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이익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고 (국가가)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바쳐라.’
『논어』「헌문憲問」
공자는 '눈 앞에 이로움을 보면 의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급할 때는 목숨을 바치며 오래된 약속일지라도 평소 그 말을 잊지 않으면 성인이라 할 수 있다(見利思義 見危授命 久要不忘平生之言 亦可以爲成人矣).'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가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뤼순 감옥에 투옥돼 있을 때 남긴 글로도 유명하다. 개인의 영달과 안녕을 뒤로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안 의사의 충정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적 인물 중 가장 존경받는 이순신 장군은 ‘견리사의 견위수명’을 실천한 대표적 위인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일화다. 한 번은 중앙에서 말직으로 근무할 때 같은 덕수 이씨 가문이었던 이조 판서 이이가 만나보고 싶어 했으나 만나지 않았다.
이이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막중한 요직에 있다 것이 그 이유였다. 사사로이 인사 혜택을 받고 싶지 않았던 때문일 것이다. 이 장군은 오히려 훈련원 봉사(종8품)시절, 상관인 병조정랑(정5품)이 자신의 지인을 특진시키려는 것을 반대했다가 좌천되기도 했다.
사적 이익을 멀리하고, 정당하지 않은 일에는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모함과 질시로 두 차례나 백의종군을 하면서도 한 몸을 바쳐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와 같이 후세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인물이 있는가 하면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고 제 살 길만 추구하는, 견리망의 각자도생(見利忘義 各自圖生)’으로 지탄받는 인물들도 우리 역사 속에 적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나 사회가 곤경 또는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부귀나 권력, 명예를 추구한다면 사회 불신과 갈등, 혼란만 키우게 된다. 특히 정치가나 고위 관료 등 지도자급 인사들이 사사로이 자신의 이익만 탐할 경우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