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09
공급 부족이 물가 자극…슬로플레이션에 그칠 듯
최근 글로벌 경제에서 가장 큰 화두는 인플레이션이다. 미국의 물가상승률은 지난 3월 전년 동기 대비 2.6%를 기록한 후 5월부터 9월까지 5개월 연속 5% 이상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유럽연합(EU)의 경우 7월 2.2%를 나타낸 이후 계속 증가해 10월에는 4.1%를 기록했다. 우리나라 역시 10월 3.2%로 9년 9개월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어쩌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속된 저물가로 인해 눈앞의 글로벌 인플레이션은 생경한 풍경이다. 그 원인을 살펴보자. 코로나19 역병은 질병학적으로 치명적이지만 경제적으로도 파괴적이다. 전방위적으로 양극화를 재촉하기 때문이다. 백신 접종률 역시 마찬가지다. 선진국 대부분은 접종률이 60%를 넘어섰지만, 저개발국은 20% 언저리다. 그런데 1990년 이후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저개발국은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글로벌 공급망에서 생산의 주요 기능을 담당해왔고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은 이렇게 생산된 값싼 제품을 소비해왔다. 그렇다 보니 선진국의 경우 ‘위드 코로나’로 방역 체계가 전환되면서 소비가 정상화한 반면에 저개발국은 아직도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면서 생산체계가 불안정한 상태다. 즉 접종률 양극화에 따른 수요와 공급의 회복 속도에 엇박자가 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격이다.
저개발국 생산체계 아직 정상화 안돼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결국 공급 부진의 주요 원인은 글로벌 공급망의 붕괴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제조업은 생산체계를 전 세계로 분화시키고 이를 물류로 연결했다. 예를 들면 생산 공정의 ABC에서 A는 베트남, B는 한국, C는 중국이 분담한다. 이런 국제적 분화에서 필수 조건은 물류가 원활히 작동해 사슬을 지탱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한 곳에서 생산이 차질을 빚게 되면 사슬 전체가 무력화된다. 또한 이들을 연결하는 국가 간 물류에서 장애가 생기면 역시 사슬이 멈추게 된다. 값싼 노동력에 의존해 부품 조립을 담당하는 저개발국에서는 방역 취약으로 인해 생산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커진다.
물류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의 경우 이전부터 우려됐던 물류창고 부족이 문제였다. 특히 트럼프 정부 시절,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강력한 규제로 하역 노동자와 트럭 운전사의 부족, 더불어 코로나 이전보다 10배 정도 폭등한 해상운임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배송 지연이 발생하고 물류비는 급증했다. 제조업자 입장에서는 원자재비·인건비·물류비 등 전방위적으로 비용이 상승하게 됐고, 이러한 비용상승을 가격으로 전이시키면서 ‘비용 인상 인플레이션(cost-push inflation)’이 촉발됐다. 〈그림1〉에서 보듯 미국에선 소비자물가지수·근원소비자물가지수보다 생산자물가지수가 훨씬 큰 폭으로 증가했다.
재택근무 여파로 내구재 소비 급증
또 다른 요인은 코로나19가 빚은 소비 포트폴리오의 변화다. 내구재 소비가 증폭한 것이다. 재화는 음식료품과 같이 일회성 소비재인 비내구재(non-durable goods)와 가전제품과 같이 일정 기간 사용하는 내구재(durable goods)로 분류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내구재는 비내구재보다 소득탄력성이 높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기침체라면 내구재 소비가 비내구재보다 훨씬 더 추락했어야 한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자택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출퇴근용 카셰어링과 같은 공유경제 체제가 무너지면서 컴퓨터나 스마트폰, 가전제품과 자동차 수요가 이례적으로 높아지면서 반도체 부족 사태까지 불러왔다.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된 것 역시 한몫했다. 즉, 사람들의 공급과 수요의 결이 어긋나게 되면서 내구재 가격이 상승했고, 이렇게 초래된 인플레이션이 위드 코로나로 인해 비내구재까지 번졌다. 〈그림 2〉에서 보듯 미국의 비내구재 소비가 먼저 큰 폭으로 반등한 후 이후 내구재 소비가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다.
장기적 인플레이션 요인도 있다. 원유가 대표적이다. 원유 가격은 현재 배럴당 80달러를 상회하고 있다. 2014년 이후 최고치다. 이전에는 원유가가 60달러에서 65달러 사이에 도달하면 셰일가스와 사유(沙油)가 출회해 추가적 가격 상승을 막았다. 그러나 최근 강화된 글로벌 환경규제나 ESG(환경·사회·지배구조)와 같은 시장규율 강화로 인해 이들의 생산 단가가 높아지면서 많은 생산업체가 도산했고 이로 인해 유가 상승을 막아줄 방패막이 약화하는 구조적 원인으로 원유 가격이 상승하고 있다.
문제는 공급 측면에서 초래된 인플레이션은 수요 견인 인플레이션(demand-pulling inflation)보다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수요 견인 인플레이션의 경우 대부분 인플레이션과 경제성장률 간 상관성이 높다. 경기 과열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물가와 경제성장률이란 두 마리 토끼가 같은 방향으로 뛴다. 따라서 수요를 진정시키도록 금리를 인상하거나 재정을 긴축하면 된다.
스태그플레이션과는 거리 멀어
공급 측면에서 초래된 인플레이션은 수요가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과 경제성장률 간 상관성이 약하다. 최근 일각에서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즉 경기침체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최악의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스태그플레이션은 지난 1978년 제2차 유가 파동으로 초래되어 8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를 그야말로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다. 이 경우 처방이 어렵다. 두 마리 토끼가 다른 방향으로 뛰기 때문에 한 마리를 잡으면 다른 한 마리는 포기해야 한다.
예컨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높이면 경기침체가 깊어지고, 반대로 금리를 낮춰 경기를 진작시키면 인플레이션이 더 악화한다. 1970년대 말 스태그플레이션 때 당시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으로 재작년 작고한 폴 볼커는 경기진작을 포기하고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한시적으로 통화정책의 중간목표를 이자율에서 통화량으로 전환해 한때 3개월짜리 국채금리가 20%를 상회하기도 했다. 미 학계에서는 이 기간을 ‘미 연준의 실험 기간 (Fed experimental period)’으로 부른다. 이로 인해 이를 수용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기업 도살자’란 오명까지 뒤집어썼지만 결국 이러한 극약처방을 통해 1983년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 성공했다.
지금 상황은 스태그플레이션과는 아직 거리가 있다. 미국의 경제회복이 인플레이션에 비해 둔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경기후퇴를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 인플레이션과 경기회복 속도에 차이가 나는 만큼 최근 새롭게 이름이 붙은 ‘슬로플레이션(slowflation)’ 정도로 진단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 경우에도 미 연준이나 한국은행과 같은 중앙은행은 살얼음판 걷듯이 통화정책을 운용할 수밖에 없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 인상이나 테이퍼링 속도가 너무 빠를 경우 경기회복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의 수요는 비정상적 수요가 아니다. 이제 겨우 코로나 이전의 추세를 회복했을 뿐인데 부족한 공급을 맞추기 위해 수요를 인위적으로 줄이는 만큼 체감하는 고통이 클 수밖에 없다.
안동현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중앙일보
물류대란 해결, 2년 안에 어려워
현재의 인플레이션은 통화나 재정정책보다 공급 측면과 글로벌 공급망이라는 근본적 문제가 해결돼야 문제를 풀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저개발국의 백신 접종률을 높이고 물류 쪽의 변비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저개발국 백신 접종률은 당사자가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만큼 국제 공조가 필수적이다. 이번 주요 20개국(G20) 미팅에서 뭔가 구체적인 결과를 기대했지만 공염불이었다.
더불어 물류 문제는 하역이나 운송 트럭 문제는 조만간 해결이 가능하더라도 해운 쪽의 고질적인 선박 부족 문제가 해결되려면 건조 기간을 고려할 때 적어도 2년 내 해결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생산자 비용의 증가는 일정 기간의 시차를 가지고 소비자 가격으로 전이된다. 〈그림 1〉에서 보듯 생산자 물가지수의 고공행진은 현재진행형인 만큼 소비자 물가가 안정되는 데는 시간이 더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최소 내년 상반기까지는 물가가 안정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슬로우플레이션은 교과서적 대응이 쉽지 않은 만큼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대응해야 한다. 즉, 스마트(smart)가 아닌 스트릿 스마트(street smart)한 대응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미 연준을 비롯한 각국 중앙은행이 진짜 실력을 보여줘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