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고려사는 1392년 편찬을 시작, 62년만인 1454년(단종 2) 간행됐다. 이로부터 566년 지나 문화재청은 2021년 2월17일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했다. 고려사는 세가(世家) 46권, 열전(列傳) 50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목록(目錄) 2권 등 모두 13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서는 전 왕조가 멸망하고 그 뒤를 이은 왕조에서 전 왕조의 역사서를 기전체로 편찬하는 전통이 있어왔다. 그렇게 편찬된 전대 왕조의 역사서를 正史라 한다.
숱한 난제 속에서 편찬된 고려사를 정사라 하여 내놓았으나, 그 신뢰성에 의문을 떨쳐 버릴 수는 없다. 그 이유는 편찬과정이 심각하게 왜곡되었으며, 참고자료로 써진 고사서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 진위를 모르게 덮어 버렸다는데 있다. ‘흔적도 없다’란 말은 ‘불질러 없앴다’라는 뜻으로 함축된다.
대륙에서 본 고조선 하늘의 별자리가 반도의 별자리로 둔갑된 천상열차분야지도처럼 승자의 기록이 정당화되어 인정받는 속성 때문일 것이다. 흔히 인간은 정보를 기억하는 능력과 더불어 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첫 간행 때도 시시비비가 많았다는 기록이 살아있음에도 애써 잊어버리려는 욕구가 천년 세월을 외면하여 망각의 늪으로 빠져 드는 것은 아닌가 안타깝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논리는 그들의 쓸 권리 행사였다. 개국공신들의 막강한 힘 앞에 사관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조선은 고려실록과 고려말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 정가신(鄭可臣)의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 민지(閔漬)의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를 고려사 편찬의 주요 참고자료로 삼았다. 1392년 개국과 함께 고려사 편찬에 착수한 정도전 등은 1395년(태조 5) 이제현의 사략(史略), 이색과 이인복의 금경록(金鏡錄)을 모아 37권의 고려국사(高麗國史)와 진고려국사전(進高麗國史箋), 고려국사서(高麗國史序)를 편찬했다.(국조보감 제5권) 자료집 성격이었다. 그러나 편찬 자료는 현존하지 않는다.
편찬과정을 살펴보자.
1392년 착수, 1414년 개수, 이후 1419년 9월 2차 개수, 1423년 제3차 개수, 1438년 4차 개수하여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이라 했다. 그러나 1446년 세종은 지나치게 고려왕조를 깎아내렸다 하여 5차로 개찬했다. 재위 32년 노심초사하여 편찬했다던 고려사는 세종 사후인 1451년(문종 원년) 8월에서야 완성되었다.
그러나 완성되었다는 고려사는 3년 후인 1454년 (단종 2) 검상(檢詳) 이극감(李克堪)이 당상(堂上)에서 “고려전사(高麗全史)가 출간(出刊)되면 사람들이 모두 시비(是非)를 알까 두려워하여 다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만을 인간(印刊)하여 반사(頒賜)하고, 고려전사는 조금 인간하여 다만 내부(內府)에만 간직하였습니다”(단종실록 10월 13일)라는 황당한 이 보고서를 보면, 고려사 내용이 얼마나 왜곡되었는가를 보여준 극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는 고려전기의 용어에서 국왕의 기록을 본기(本紀)가 아닌 세가(世家)로, 帝王에 관련된 용어는 모두 삭제하여 ‘王’이라고 하였으며, 皇后를 王后로, 皇子를 王子로 바꾸어 기록하였다. 이처럼 정도전이 황제국의 용어를 제후국 용어로 바꿔놓은 사실을 윤회가 세종에게 보고된다. (6년 8월 11일 춘정속집 제4권)
조선은 고구려, 고려처럼 천자(天子, 大王)나라가 아니라 명의 제후국(王)을 자처하였기 때문이다. 고려의 그 찬란했던 경전과 문화서적을 전부 태워버리고, 명 숭상 사대주의 토대를 구축한 장본인이 세종이었다.
“지나치게 고려왕조를 깎아내렸다” 하여 5차 개찬을 명한 세종은 정도전이 편찬의 주요 참고자료로 삼았다는 고려의 사서들을 왜 없앴을까?. 고려실록은 고려왕조실록(高麗王朝實錄)으로 고려 왕조에서 편찬한 실록이다. 고려의 태조 왕건부터 34대 공양왕까지 474년간(918년~1392년)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였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어 현전하지 않는다고 변명하나 1414년 개수 당시 황제국 고려의 위상과 찬란했던 문화와 방대한 역사서, 영토 기록이 사실적으로 담기가 두려웠던 것은 아닌가?. 예를 보자. 1123년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고려의 창고마다 서책이 가득하여 헤아리기 어렵다고 했다. 또한 기서(奇書)와 이서(異書) 많으며, 宋나라는 이중 128종(種)을 요청했다고 기록했다. 해동역사(海東繹史)는 “고려의 임천각(臨川閣)은 회경전(會慶殿)의 서쪽 회동문(會同門) 안에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장서(藏書)가 수만 권이나 된다”고 썼다. 또 1103년 손목(孫穆)의 계림유사(鷄林類事)에는 총 361개의 고려 어휘가 보인다.
고려 잔재 말살과 편찬과정에서 오는 논쟁거리를 말끔히 없애고자 이러한 사실(史實) 관계는 무시했다. 거리낌 없이 그리고 서서히 조선조 내내 진행된 고사서 말살은 사대주의 신봉자들과 정권에 아부하는 상하간 부하뇌동이었다.
또 한 예를 보자.
「고려사(高麗史)」의 서문에 정가신(鄭可臣)의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은 고려태조(太祖)의 5대 조상인 호경대왕(虎景大王)으로부터 고려 24대왕인 원종(元宗 재위 1259∼1274)에 이르기까지의 사서(史書)로 총 7권이며 세계도(世系圖)를 붙였다고 했다. 6백 년을 되짚어 볼 수 있는 방대한 고려 역사다.
또한 고려 왕실의 가계도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고려성원록(高麗聖源錄)이 왜 조선 후기인 1798년(정조 22년)에 와서야 편찬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406년 동안 비밀 속에 감추어진 내막이다. 상식적으로 王系에는 지리지명은 물론 문명의 발자취가 남아 있기 마련이다. 4백여 년 동안 절대자들에 의해 이러한 기록들을 감추고 뭉개기 위해 감시 감독했다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는 선초(鮮初) 강화도와 삼척, 거제도에서 고려의 왕족과 왕씨들을 몰살, 氏를 밀살시킨 것(태조실록)과도 무관치 않다. 이는 구전으로 나마 후대에 전해질 역사를 차단시키기 위한 전략적 방편으로 보인다.
태백일사 고려국본기를 보자. “천수 태조(왕건)께서 창업을 바탕으로 고구려가 다물국을 세우신 풍습을 계승하사, 온 세상을 평정하시고, 나라의 명성을 크게 떨치었다”고 했다. 고려는 다물의 국시를 계승했고, 이씨조선은 이를 철저히 감추었던 나라다. 한문명은 고려 시대에 절정을 맞이했다. 고려는 한문화, 한문명의 최 절정기를 구가했던 초강대국이었다. 선진사회의 문명인 금속활자, 고려자기를 비롯 높은 수준의 천문학이다.
조선이 본 고려는 황음무도한 나라였다. 선진사회도 아니었다. 최소한 그렇게 몰아가 역성의 당위성을 만들었다. 찬란한 문명을 일구었던 단군조선의 다물정신과 고구려를 이어받은 고려를 뭉개어 파렴치한(破廉恥漢)의 나라로 전락시켰다. 고려사 편찬과정에서 단군을 배제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고려는 918년부터 474년 존속했던 나라다.
단군 기록이 유일하게 고려사에 남아 있는 부분을 보자.
백문보(白文寶, 1303년~1374년)가 공민왕에게 올린 상소 내용에, “우리 동방은 단군으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3,600년이 경과하여 주원(周元)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吾東方 自檀君至今 已三千六百年 乃爲周元之會, 고려사 열전 권 제25)라 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를 통틀어 유일하게 ‘단군’에 대해 언급했고 ‘단기’를 계산하였다.
조선은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내세워 불교교세의 인적 기반을 제약하여 불교를 억압하고 국가통치에 예속시키려는 목적으로 이용하였다. 불교를 배척할 것을 주장한 척불소(斥佛疏)는 조선 개국의 정당성 논리에 가장 적합했고, 백문보의 단군 기록을 넣어 합리화시켰음이다. 1432년 세종은 유교와 반하는 불서는 불태웠다.(세종실록 55권) “마리산 산꼭대기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다.” “왕이 묘지사로 거처를 옮기고 마리산 참성에 초제를 지내다” (고려사 권56, 고려사 권26)라는 일부 기록으로 고려도 단군을 국조로 모셨다는 일부의 평가가 안타깝다.
세종은 고려사 편찬자들에게 고려 역사를 왜곡하지 말라 지시하는 반면 고려왕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위선을 자행했다. 세종은 도화원(圖畵院)에 보관하던 고려 역대 군주들과 후비들의 초상화를 모두 불태우고 전국 각지의 어진들과 개국공신들의 영정을 땅에 묻도록 명한다. (세종실록 32권 1426년 세종 8년 5월 19일), (제60권 세종 15년 1433년 6월 15일).
모화사관(慕華史觀)으로 기록되었다 지탄받는 삼국사기는 “하윤(河崙)ㆍ이첨(李詹)ㆍ권근(權近) 등이 《삼국사기》에 수정을 가하여 속된 것과 번잡스러운 것을 삭제했다."고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54권) 앙엽기(盎葉記)에 삼국사략(三國史略)을 설명하면서 기록한 부분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정하지 못해 더럽고 거짓말 투성이며, 뒤숭숭하고 복잡하다는 의미일 게다. 김부식을 매개로 하여 의도적으로 재 편찬, 위조하면서 단군 기록마져 삭제했다는 의미이다. 조선은 결코 고려를 승계(承繼)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 나라의 관찬사서를 수정, 삭제하여 망신주고 때리고 부수었다. 김부식의 일부 유교사관(儒敎史觀)을 볼모삼아 사대(事大)에 편승한 사서로 변조(變造), 김부식에게 덤터기를 씌웠다는 뜻이 담겨있다. 삼국사기를 손질한 해가 1403년 (태종 3)이니, 고려사 편찬과정과 맞물려 있다. 김부식이 편찬했으되, 이름만 빌려 왔을 뿐 그의 작품이 아니게 되었다. 삼국사기나 고려사는 의도적으로 전면 개편, 개찬되어 날조되었다. 이 역사서를 어디까지 수긍해야 할까?.
사관은 삼장(三長) 즉 재(才)와 학(學), 식(識)을 겸비해야 한다”는 말이 신당서 ‘유자현전에 보인다. ‘재’는 문장력, ‘학’은 학문, ‘식’은 통찰력, 즉 사관(史觀)을 가리킨다고 했다. 고려사 편찬과정에서 이 세 가지 덕목에 단 하나라도 겸비된 부분이 있을까?.
동사강목에 기록된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 한마디를 빌어 보자.
“정 하동(鄭河東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 및 《동국통감(東國通鑑)》은 의례(義例)가 많이 틀리고 호오(好惡)가 공평하지 않아 후인들이 또한 예사(穢史)라고 칭한다. 그러나 명색이 전사(全史)이고 다른 책은 상고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세상에서는 많이들 믿는다.” (순암집 제18권) 라 했다.
예사(穢史)에 대해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는 앞서 계곡만필(谿谷漫筆)에 ‘진수(陳壽)나 위수(魏收)가 역사를 팔아먹은 것’을 예로 들었다. 이는 ‘진(陳) 나라 진수가 지은 《삼국지(三國志)》는 사(私)로 공(公)을 폐하고 부당하게 포폄(褒貶)하는 등 사가(史家)의 직필(直筆)이 못 된다는 평을 받고, 북제(北齊)의 위수(魏收)가 지은 《위서(魏書)》는 자신의 원한을 사서(史書)에 마구 개입시켜 ‘더러운 역사책[穢史]’이라는 극단적인 비평을 받고 있다.‘고 풀이했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시문집 제8권 지리책(地理策)에서 “정인지의 고려사지리지는 잘못된 데를 이루 다 셀 수 없다”고 비판했다. 예(穢)는 ‘더러운 것’을 뜻하는 말이다.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에 매몰된 조선 유학자들 마져 정확도나 공정성이 전체적으로 낮고 거칠고 왜곡이 많다는 평에 거침이 없다. 고려사와 그 지리지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하지만 이를 역인용하여 진실인양 호도하고 현실에 영합하려는 내용들이 참으로 두렵다.
이는 고려사가 근래 국가지정 보물이 된다하여 이를 “세종의 숨은 통찰과 고뇌가 담긴 것”이란 일부의 평가가 안타까운 것은 왜일까?. 시대적 배경에 편승해 세종을 성군화하려는 일말의 부화뇌동이 아닌가 싶다.
한문수/ 역사칼럼니스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