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초, 조사 추도하는 불사 성대하게 이뤄져
나말여초 선종 부도 탑비 조성
교종에선 조사 추도결사 행해
고려시대 해인사 희랑조사상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상 조각
조사 추도 12세기까지 이어져
원효 의상 도선 진표스님 4인
왕실서 성인으로 여기고 숭배
…눈을 뜨게 하고 귀를 열게 해 준 한없는 자비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항상 조사 생각에 정성을 다하고 스승을 존경하는 예를 다해야…
- ‘해동화엄초조기신원문(海東華嚴初祖忌晨願文)’
희랑조사상, 높이 82.4cm, 무릎폭 66.6cm.
통일신라시대 9세기가 되면, 조사(祖師)들을 추도하는 행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원효(元曉, 617~686)스님을 기리는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가 김언승(金彦昇)의 주선으로 800년에 경주 고선사(高仙寺)에서 건립되었으며, 염촉(厭髑, 이차돈 異次頓, 506~527)을 추도하는 모임이 817년에 흥륜사(興輪寺)에서 있었는데, 이때 염촉의 무덤을 보수하고 ‘촉향분례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을 새긴 석당(石幢)을 백률사(栢栗寺)에 세워 그의 업적을 기렸다.
이 무렵, 염촉의 추도 모임이 있었던 흥륜사에서는 그를 포함한 신라 불교의 십성(十聖)을 만들어 금당(불전)에 모셨는데, 금당 속 서쪽에는 아도(我道), 염촉, 혜숙(惠宿), 안함(安含), 의상(義相)을, 동쪽에는 표훈(表訓), 사파(蛇巴), 원효(元曉), 혜공(惠空), 자장(慈藏)을 봉안하였다.
한편 9세기 중엽부터 입지가 점점 커진 선종 불교계에서 선사(禪師)가 입적한 후, 승탑(僧塔, 부도 浮屠, 사리 봉안처)과 그의 행장을 기록한 탑비를 세우는 등 조사 추도 불사(佛事)가 성대하게 이루어지자, 교종 불교계에서도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리(敎理)를 다듬고 조사 추도를 통하여 교단을 재정비하였다.
즉 교학적인 면에 치우친 것에서 벗어나 선종의 실천적인 면을 수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엄 사상의 토대를 이룬 의상(義湘, 義相)스님과 법장(法藏)스님 등 화엄 조사를 추도하는 결사가 이루어졌다. 화엄종의 추도 결사는 9세기 후반 경문왕계 왕실의 원찰인 해인사를 중심으로 행해졌다.
희랑조사상 얼굴.
이러한 상황은 화엄 승려 성기(性起) 등이 스승 의상스님을 추도하고 그 법은(法恩, 가르침의 은혜)을 갚기 위해 조직한 결사의 ‘해동화엄초조기신원문(海東華嚴初祖忌晨願文)’에서 확인되며, 또한 결언(決言), 현준(賢俊)스님 등이 884년에 당나라 화엄 승려 지엄(智儼)을 추도하고 그의 법은에 보답하기 위해 구성한 결사의 ‘종남산엄화상보은사회원문(終南山儼和尙報恩社會願文)’에서도 보인다.
해인사의 조사 추도 행위는 고려 초기에도 계속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조성된 것이 해인사 희랑조사상(希朗祖師像)이다. 희랑조사상은 두 손을 배 앞에 모은 채 가부좌하고 있으며, 적색, 녹색, 황색의 동심원 형태의 점문(點文)이 있는 흰색의 장삼을 입고, 그 위에 녹색으로 분할된 붉은색의 가사를 걸치고 있다. 왼쪽 어깨 위에는 가사를 고정하는 끈과 삼각형의 술 장식이 표현되어 있다.
희랑조사상은 실제 희랑조사(889~?)를 모델로 한 듯이 유난히 솟구친 정수리와 마른 체형 등 특정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쌍꺼풀이 있는 작은 눈, 커다란 코, 가늘고 얇은 입술, 여러 개로 나 있는 입가의 주름, 얇은 귀, 움푹 들어간 양 뺨, 튀어나온 광대뼈, 좁고 뾰족한 턱, 돌출된 목젖과 쇄골, 굽은 어깨, 마디가 드러난 울퉁불퉁한 긴 손가락을 가지고 있는 영락없는 노승의 모습이다.
희랑조사상은 아랫면과 뒷면을 나무로 이어서 고정하였는데, 앞면은 여러 재료가 혼합된 건칠(乾漆) 기법으로 조성되었다. 장삼의 점문과 가사의 색은 조선 후기 불화에서 보이는 표현과 유사하고, 붉은색 가사의 녹색 분할선이 조사상의 조각과 전혀 유기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채색은 조선시대 18세기 이후에 다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희랑조사상 얼굴.
이러한 상황은 화엄 승려 성기(性起) 등이 스승 의상스님을 추도하고 그 법은(法恩, 가르침의 은혜)을 갚기 위해 조직한 결사의 ‘해동화엄초조기신원문(海東華嚴初祖忌晨願文)’에서 확인되며, 또한 결언(決言), 현준(賢俊)스님 등이 884년에 당나라 화엄 승려 지엄(智儼)을 추도하고 그의 법은에 보답하기 위해 구성한 결사의 ‘종남산엄화상보은사회원문(終南山儼和尙報恩社會願文)’에서도 보인다.
해인사의 조사 추도 행위는 고려 초기에도 계속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조성된 것이 해인사 희랑조사상(希朗祖師像)이다. 희랑조사상은 두 손을 배 앞에 모은 채 가부좌하고 있으며, 적색, 녹색, 황색의 동심원 형태의 점문(點文)이 있는 흰색의 장삼을 입고, 그 위에 녹색으로 분할된 붉은색의 가사를 걸치고 있다. 왼쪽 어깨 위에는 가사를 고정하는 끈과 삼각형의 술 장식이 표현되어 있다.
희랑조사상은 실제 희랑조사(889~?)를 모델로 한 듯이 유난히 솟구친 정수리와 마른 체형 등 특정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쌍꺼풀이 있는 작은 눈, 커다란 코, 가늘고 얇은 입술, 여러 개로 나 있는 입가의 주름, 얇은 귀, 움푹 들어간 양 뺨, 튀어나온 광대뼈, 좁고 뾰족한 턱, 돌출된 목젖과 쇄골, 굽은 어깨, 마디가 드러난 울퉁불퉁한 긴 손가락을 가지고 있는 영락없는 노승의 모습이다.
희랑조사상은 아랫면과 뒷면을 나무로 이어서 고정하였는데, 앞면은 여러 재료가 혼합된 건칠(乾漆) 기법으로 조성되었다. 장삼의 점문과 가사의 색은 조선 후기 불화에서 보이는 표현과 유사하고, 붉은색 가사의 녹색 분할선이 조사상의 조각과 전혀 유기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채색은 조선시대 18세기 이후에 다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승가대사상, 높이 82.5cm, 무릎 폭 92cm, 광배 높이 142.5cm.
석조승가대사상에서는 “승가대사”라고 특정할 만한 명문이 확인되지 않으나 승가대사상이 봉안된 곳을 ‘삼각산중수승가굴기’에서 “승가굴”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유례가 많이 남아 있는 중국의 승가대사상과 같이 풍모(風帽)를 쓰고 가부좌하고 있다는 점에서 승가대사를 모델로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중국의 승가대사상들이 모두 두 손을 가사의 소매 속에 넣은 채 복부 앞에 둔 반면, 석조승가대사상은 드러난 오른손 검지가 위를 향한 손 자세를 취하고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이는 중국의 승가대사상을 본 적이 없는 수태스님이 승가대사의 행적만을 듣고 그를 추도하면서 상상 속에서 만들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석조승가대사상은 양감이 생략된 밋밋한 몸, 지나칠 정도로 넓게 펼쳐진 하체, 깊게 파인 이마 주름살, 살짝 튀어나온 광대뼈, 돌출된 목뼈와 쇄골, 갈비뼈가 드러난 앙상한 가슴, 유난히 큰 오른손과 뼈가 뚜렷이 불거져 나온 손등, 몸 안쪽으로 살짝 꺾인 손목 등에서 나말여초 존상에서 확인되는 세속적인 사실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조형미와 함께 넓은 띠 주름을 가진 가사(袈裟)도 이 시기 불교 존상의 특징 중 하나이다. 광배는 연꽃을 둘러싸고 연당초문, 모란문, 연주문(連珠文)이 표현된 두광(頭光)과 연당초문, 보상화문, 연주문, 화염문으로 장엄된 신광(身光)으로 구성되었다.
석조 광배에는 1024년(태평 太平 4, 고려 현종 15)에 지광(智光)이 주도하고 광유(光儒)가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사실 광배는 승가대사상과 조각 기법이 다르고, 승려상(승가상) 중에서 거신광배(擧身光背)를 갖춘 예가 거의 없어서 원래부터 한 세트였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어 왔다. 승가대사상을 광배와 같이 만들었다면, 그 크기로 보아 상과 광배를 따로 만들기보다 하나의 돌에 함께 표현하는 것이 상례이다.
한편 광배가 제작된 지 80여 년 후에 찬술되었지만, 승가대사의 정수리에 구멍(정혈 頂穴)이 있다는 ‘삼각산중수승가굴기’의 기록은 당시 사람들이 승가대사의 독특한 신체적 특징을 잘 알고 있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만약 광배와 함께 승가대사상이 조성되었다면, 승가대사의 정혈을 표현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승가대사상의 정수리에는 풍모 위에 새겨진 연화문 장식만 남아 있을 뿐 희랑조사상의 가슴 앞에 나 있는 흉혈(凶穴, 가슴 구멍)과 같은 구멍, 즉 정혈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광배는 삼각산(북한산) 신혈사(神穴寺) 승려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대량군(大良君)이 현종(顯宗, 1009~1031년 재위)으로 즉위한 후, 승가사 중수를 후원하는 과정에 추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조사 추도는 고려시대 12세기에도 계속되었다. 숙종(肅宗, 1095~1105년 재위)은 원효와 의상스님을 각각 대성인(大聖人) 화쟁국사(和諍國師)와 대성인 원교국사(圓敎國師)로 추증하였다. 인종(仁宗, 1122~1146년 재위)은 도선(道詵)스님에게 봉작(封爵)을 추증하였으며, 명종(明宗, 1170~1197 재위) 때에는 진표(眞表)스님을 기리는 비가 세워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고려 중기 왕실에서는 원효, 의상, 도선, 진표스님을 4대 성인으로 여겨 숭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