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강 그보다 더욱
믿음인가 느낌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의롭다는 선언을 받았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우리는 실제로 의롭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살펴본 '조화'입니다. 구원의 두 가지 측면을 인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시다.
여러분 중 일부는 여전히 계속 진행되는 성화의 경험을 중시하는 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곧 이미 확정된 사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인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점을 확실하게 해두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면, 그 결과로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계 베푸신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은 평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을 학대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려는 무모한 도전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총을 받을 수 있을 만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매일 점검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무거운 모든 짐들을 벗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죄를 자복하면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과정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죄인이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자마자 즉시 성숙해 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그런 사람들은 분명 아이를 길러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침례를 준비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의 성경 교리는 모두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려줍니다. 교리는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일련의 지침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리가 그리스도 중심적일 때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교리를 방어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의 지역 사회에 있는 죄인들을 재림교회로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자유와 생명과 승리를 찾도록 해야 합니다. 더욱이 일생 동안 죄의 종이 되지 않고 살 수 있는 능력을 받기 위해 재림교회로 나와야 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이 책을 멈추십시오. 적어도 잠시 동안 만이라도 읽던 책을 덮어 두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로마서 6장 전체를 읽기 바랍니다.
로마서 6장을 다 읽으셨습니까? 이제 6장 11절에 사용된 "여길지어다"라는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무엇을 여긴다고 말할 때 그것은 '믿음'입니까, 아니면 '느낌'입니까? 그것은 '믿음의 경험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그것으로 여기다 그것을 믿기로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흠정역 성경에는 어떤 단어가 사용되었습니까? 영어로 'reckon'인데, 이 단어에는 헤아리다' '판단하다'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몇 가지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판단하다 reckon', '헤아리다count', '간주하다 consider', 혹은 '믿기로 선택했다 choose to believe'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기로 선택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주어지는 모든 혜택이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서 우리가 십자가로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주 실제적인 단계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매일의 일상에서 우선적으로 형성해야 할 습관은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과 예수님의 죽으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해하고 감사하는 감정이 생기고 이어서 신앙의 고백이 뒤따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사람들에게 건전하고 좋은 감정을 허락하십니다. 믿음의 표현을 하면 할수록 표현한 것들이 우리 삶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더 나은 삶을 산다고 해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더 나은 삶을 사셨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한 삶을 사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무겁게 짓누르던 유죄 선고를 거두어 가셨습니다. 죄에 빠져 있었기에 우리는 그에 대한 죄책감을 여전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완전한 죄인이라는 취급을 받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의 고통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의로우신 그분의 죽음만이 온 세상의 죄를 속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오순절 당시 베드로가 일어나 강력한 설교를 하였을 때 삼천명이 회개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거기 모인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예수님을 죽였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베드로가 했던 설교입니다! 베드로는 소신 있게 말했고 회중들은 그들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 36~41의 사건을 살펴봅시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이것을 중심으로 삼지 못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우십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을 얼마나 재빨리 정죄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정죄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시종일관 올바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정죄에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마땅히 그렇게 살았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정죄에서 벗어난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에 정죄를 경험하시도록 할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로써 은혜가 무엇인지 온전히 알게 됩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을 토대로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깨닫기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인간적 행위에 기초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모든 혜택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신인적 행위에 기초한 것입니다.
설령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사실 우리는 모두 이런 경험을 해 보았습니다. 설령 매일의 삶이 너무 바빠서 그런 상태를 인식조차 못하고 산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시 정죄를 받거나 유죄 선고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너무나 완벽하게 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여러분이 이 한 가지 이유를 삶 속에 받아들인다면 영적 '요요' 현상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곧 하나님께서 그보다 '더욱 많은 것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을 기억하십시오. '더욱'이라는 단어가 마치 밤하늘을 수놓는 조명처럼 성경의 매장마다 약진하게 될 것입니다.
그보다 더욱
무엇보다 더욱이라는 뜻입니까? 10절 전체를 읽어 보십시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좋은 소식은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지라도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니요. 이 점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은 사형 선고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고 해도 이것은 대단한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형을 앞둔 사형수에게 사면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그보다 더한 것을 마련하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깨닫기 원하십니다. 개신교회가 십자가에서 멈추었을 때 뒤로 물러서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보다 '더욱 많은 것으로 향하는 관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용서받았다', '특별 사면되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완전하게 보신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려 하십니다!
그보다 '더'란 얼마나 '더'란 뜻입니까? 성경에 무엇이라고 쓰여있습니까?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회복을 제공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 원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은 피동적 경험이 아니라 역동적 경험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구원이 시작되었다면 그것은 영생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읽으신 내용을 통하여 이 점을 깨달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는 생명으로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이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장 24절).
생명으로 가는 길은 반드시 죽음을 통과해야 나옵니다. 이것을 기독교가 온전히 가르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용서를 베푸셨다는 것까지는 배웠으나 떨쳐버리지 못한 죄의 습관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좌절합니다.
하루는 나 역시 이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이 방법으론 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인내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얻은 것보다 더 많은 것, 다시 말해 그분의 생명을 통하여 회복된 것까지 받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값없이 얻게 되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닫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전히 정죄와 유죄 선고를 받은 상태에서 생명을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두 마음을 품은 아주 이상한 이중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토론도 하지만 교회 밖을 나서는 순간 다시 예전에 하던 대로 죄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아닙니다!
내용 복습
1. 어떻게 여러분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까?
2. 성경 교리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마찬가지로 교회의 교리나 가르침의 중심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3.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믿음과 느낌의 차이점을 설명해 보십시오.
5.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으셨습니까?
6. 매일의 삶 속에서 십자가의 복음으로부터 초점을 잃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 하실까요?
7. 여러분은 어떻게 삶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확신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8.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사실 만큼이나 중요한
것,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십자가 그보다 '더욱 많은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보다 '더욱'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9. 그보다 '더욱' 많은 것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이며, 왜 이것이 필요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