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의 말을 듣고서야 의아함이 풀렸다. 이번에는 내가 목례를 하자 그녀가 답례를 했다.
집으로 돌아 오자 층계를 오르지 못할 만큼 다리가 아팠다. 다운타운의 오래된 집들이 대개 그렇듯이 층계는 협소하고 가팔랐다. 잡동사니를 넣은 손가방도 주체스러웠다. 할 수 없이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왼손은 난간을 잡은 채 오른손으로는 발을 받쳐 올리며 겨우 한 층계씩 올라갔다. 이런 모습은 가족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되도록 조용히 움직였다.
밤새껏 지렁이를 주무른 손은 열 번을 씻어도 비릿한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정말 냄새가 가시지 않는 건지 내 코가 그렇게 변했는지 구별되지 않았다. 변기에 앉을 때도 보조물에 의지해야 할 만큼 허벅지에도 알이 박혔다. 종아리에 알도 좀 주물러 뺏으면 시원하겠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알 밴 근육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빠질 텐데 그런 일로 아내 앞에 초라해 지기가 싫었다.
또 층계를 내려 가는 것도 문제였다. 산토끼가 그렇다더니 층계는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힘들었다. 무릎 관절이 잘 꺾이지 않아 양손으로 난간을 잡은 채 평행봉을 하듯 뻗정다리로 한 칸씩 내려 가야 했다.
예상대로 정형 부인은 보이지 않고 정형만 나왔다. 그런데 온 몸이 매를 맞은 사람처럼 아파 녹초가 된 나와는 달리 정형은 소풍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멀쩡했다. 정형 부인이 만들어 보내온 지렁이 자루는 규격을 맞추어 백화점에 납품하는 물품처럼 반듯이 정돈되어 있었다. 함부로 헤집어 지저분한 지렁이를 담기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젊었을 때 애인에게 선물을 받으면 이런 기뿐이었을까?
정형은 지렁이 잡이에 목을 매는 형편인 것 같지는 않았고, 나에게도 자잘한 신경을 쓰지 않게 만드는 게 편했다. 나는 영악해서 맺고 끊기를 잘하는 사람이나,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하는 사람에게는 긴장해서 주눅이 드는 편이다. 술자리에서도 중간에 자리를 뜰 일이 있으면 슬그머니 없어지거나, 그렇게 하는 성격의 사람들에게 호감이 갔다. 정형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렁이 잡이의 소득으로 친구 하나는 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정형은 내가 한 깡통을 채우고 <담배 한 대 핍시다> 하면, 자기 깡통은 개의치 않고 <그럽시다> 하는 편이었다. 그저 시간 죽이기나 하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나와 비슷한 숫자를 잡았고, 이상하게 힘들어 하는 기색도 없었다. 처음 얼마 간은 모두들 안 아픈 데가 없어 끙끙거리는데 정형은 그런 적이 없었다. 우린 수인사를 나누며 정식으로 인사를 튼 적은 없지만 가까운 사이가 되어 갔다.
바람이 불거나 달이 밝은 날은 지렁이가 나오지 않는다 했다. 그 말대로 보름 근처의 달이 구름도 없는 하늘에 떠 오르자 정말로 지렁이는 얼마 나와 있지 않았다. 그나마 가끔 눈에 띄는 것들도 겨우 손가락 한 마디쯤 나왔다가 불빛이 닿기가 무섭게 튕겨 들어갔다.
정형과 나는 큰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 안 되겠다 싶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 보니 사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치였다. 마침, 연못이 있어 장식용으로 조립한 돌에 걸쳐 앉으니 아늑했다. 연못에서는 조그만 도랑으로 물이 빠져 나가는 소리가 졸졸 들렸다. 한적한 시골에 온 것 같았다. 골프장의 잔디는 초원의 구릉처럼 물결 치며 달빛에 드러나 보였다. 군데군데 무리 져 있는 나무숲은 그래서 더 짙어 보였다. 그 동안 지렁이를 잡는데 쏠려 미처 둘러보지 못한 풍경들이었다.
“ 한 잔 하실라우? 술 좀 있는데.”
마침 위스키 750cc병을 갖고 온 게 있어 가방에서 꺼냈다.
눈만 감으면 지렁이가 우글거리는 환영 때문에 잠을 이를 수가 없어 작업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리 두어 잔 마셔 두려 갖고 온 위스키였다.
“그럽시다, 까진놈의 거! 그렇잖아도 생각이 나던 판인데.”
정형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먼저 한 잔을 따르니 사양하는 법도 없이 한 입에 털어 넣은 다음 답 잔을 보내 왔다. 아주 가까운 사이처럼 느껴졌다.
“ 독한데요, 이놈의 위스키는…...”
처음 파라과이로 이민 갔을 때가 떠올랐다. 날씨는 연일 40°C를 넘는 살인적인 더윈데 모든 게 심난해 술을 마실 때가 잦았다. 소주에 길들여진 나에게 맥주는 너무 싱겁고, 위스키는 너무 독해서 그것마저 심란했었다. 정형도 캐나다에 온 지가 불과 6개월밖에 안 되었다고 했다. 신상에 관한 얘기를 하다 보니 술잔이 매끄러웠다. 얼음도 없는 위스키가 미지근 해 더 독했지만 김밥 안주가 제격이었다.
“이깐 게 무슨 일이나 된다고요. 어떨 때 하루 종일 줄에 매달려 일을 할 때도 있었는데.”
정형은 한국에서 용접공이었다.
나는 학교와 다방 이야기, 정형은 공사판과 대폿집 얘기밖에 몰라 공통점이 없었지만 그게 오히려 흥미로웠다. 정형은 여섯 살, 전쟁 통에 부모형제를 모두 잃은 전쟁고아였다. 형님은 국방군으로 아우는 괴뢰군으로, 아버지는 피란 나가 돌아가시고, 집은 폭격에 맞아 가족과 간 곳이 없네...... 전쟁 때 유행하던 노랫말 그대로였다. 그런데도 내 짐작과는 달리 가족의 정을 그리워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니, 아예 그런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남의 말 하듯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으로 봐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깜부기도 씨는 남긴다는데…...”
늘 혀를 차며 안쓰러워하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반쯤은 큰아버지에 의탁하게 되었다. 독실한 카돌릭 신자인 큰아버지는 정형을 신부님으로 만들려 했는데 팔자가 그게 아니었던지 그 해에 마침 학생모집이 없었다. 그 시절엔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부터 신부의 길로 가는 학교가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다음 해까지 기다리며 슬그머니 노동판에 발을 붙였다.
“ 군대부터 다녀 오거라! 자리 잡는 대로 초청할 테니.”
큰아버지가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나게 되어 정형에게 한 악속이었다. 슬하에 떡대 같은 아들 여섯을 두었다 해서 <육형제 정씨네>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도 잘 알려진 어른이 바로 정형의 큰아버지였다. 거기에서 자리를 잡아 가자 이번에는 아들들이 하나씩 캐나다로 재 이민을 떠났다. 식구가 많다 보니 그 시간도 여러 해 걸리며 정형의 이민도 뒤로 미루어졌다. 안 갈 수도 있는 군대를 다녀 온 정형은 무작정 이민만을 기다리고 있기도 뭣해 시작한 용접일이 일류 기술자가 될 때까지도 이민 길은 감감이었다. 캐나다의 이민 문이 자꾸 좁아졌기 때문이다.
“ 아직 영주권은 없지만 사촌들 덕에 캐나다에 와서 장가까지 들었으니 웃기는 일이죠. 떠날 때 보니까 돈은 하나도 없는데, 또 빚도 없더라고요. 놀지도 않았는데 신기하게 딱 먹고만 산 셈이더라고요.”
정형은 말하고 나서 껄껄 웃었다. 술 먹은 돈을 빼니까 계산이 그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아니, 술 마신 돈은 떨어진 셈이었다.
“ 근데, 생전 떠돌다 가정이라는 걸 만나 보니 그게 미치게 답답한 거더라고요. 마누라는 낮 선 여자 같아 어색하기만 하구. 이렇게 지렁이를 잡는답시고 나오니 살 것 같습니다.”
정형이 지렁이 잡기에 유유자적한 이유였다. 정형은 이제 결혼 4개월의 신혼부부였다. 정형은 공사장의 간이 숙소나 기껏해야 두어 달 하숙을 해 봤을 뿐, 내 집이라고 어디다 거처를 정해 놓고 석 달 이상 살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랬는 데도 명절 같은 날, 식당들이 문을 닫아 쫄쫄 굶을 때를 빼고는 그리 처량한 날도 없었단다.
술이 바닥 나자 우리는 어느 새 오래 된 친구처럼 변해 있었다. 우리는 하루 공을 치기로 하고 일찍 나갔다. 다른 사람들도 사정은 우리와 비슷했던지 거의가 나와서 나머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처럼 완전히 공을 친 사람은 없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길을 떠나니 마치 오전 수업만 받고 집으로 돌아 가는 학생들처럼 마음이 들떴다.
“ 내일은 날씨가 좋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새벽에 돌아와 저녁에 다시 나가니 같은 날인데도, 구 사장은 저녁을 말할 때 꼭 내일이라는 말을 썼다.
“ 내일은 날씨가 좋답니다.”
구 사장은 돌아 오는 동안 이 말을 서너 번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