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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철학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세기의 기인, 비트겐슈타인
'정신과학클럽 모임에서 발표가 끝나고 토론이 시작되었을 때 누군가 더듬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
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옆 사람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굽니까?" 그는
"비트겐슈타인"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놀랐다. 《논리철학논고》(앞으로는 《논고》)의 그 유명한 저자가 ... 생각
보다 훨씬 젊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은 마르고 갈색이었으며, 독수리형의 뛰어나게 아름다운 옆모습과 숱이 많은 갈색 고수머리를 하고 있었다. ... 서두가 잘 안 풀리자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으나 무언가 골똘이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시선을 한
곳에 모으고, 마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이 갑작스런 손짓을 하기도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진지하고 기대에 찬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후 나는 이러한 진풍경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보았으며, 나중엔 거의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끔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제자 말콤이 그를 처음 만난 광경을 기술한 이 말은 생애와 철학 둘 다에서 보여준 그의 비범함이 어디서 비롯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4월 26일 비엔나에서 오스트리아 거대 강철 회사의 주인의 5남 3녀의 막내둥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있어 정교한 기계를 잘 만들었는데 그가 만든 모형 비행기나 재봉틀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17살 때 그는 볼츠만 밑에서 물리학 공부를 하려고 그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가 자살하는 바람에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헤르츠
에게서 물리학을 배웠다. 그 다음에 그는 영국의 맨체스트 공과대학에서 항공역학에 관한 연구를 했는데, 그때 그가 만든
정교한 제트 엔진 모형은 현재 제트 헬리콥터의 선구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의 관심은 기계엔진에서 유체역학으로 그리고 순수
수학으로, 점차 근본적인 문제로 옮아갔다.
제가 백치라면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아니면 철학자가 되겠습니다.
1910년경 수학의 기초에 관한 책으로 러셀의 《수학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찬양
하고 있는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독일의 프레게를 먼저 찾아가 공부를 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는 러셀을 찾아가 그에게 배우라고 권했다. 러셀은 프레게 철학의 기본 개념인 집합 개념에 치명적인 난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 프레게를 엄청난 충격에 빠트린 사람이었다. 러셀이 동료 교수인 무어에게 이 새로 들어온 학생이 천재냐 바보냐고 물었다. 그러자 무어는 천재라고 답했다.
그 이유를 무어는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내 강의를 들으면서 의문에 찬 표정을 나타내는 친구는 그 뿐이니까."
1912년 첫 학기가 끝나갈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을 찾아가 물었다. "제가 완전히 백치입니까 아닙니까? 만일 백치라면 저는
비행기 조종사나 되어야 되겠습니다. 백치가 아니면 철학자가 되겠습니다." 이에 러셀은 철학적 문제에 대해 논문을 하나 써
오라고 했다. 그리고 러셀은 그 논문의 첫 구절을 읽고 큰소리고 말했다고 한다. "안돼. 자네는 절대로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서는 안되네."
케임브리지에서 다섯 학기를 수강한 후 그는 노르웨이의 시골에 자기 손으로 오막살이를 하나 짓고 혼자 은거하는 동안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는 탈장으로 병역이 면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병장교가 되어 군에 참여했다가 이탈리아 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가 포로가 되었을 때 그의 배낭 속에는 《논고》의 원고가 들어있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논고》의 핵심 사상,
즉 '한 문장은 하나의 그림이다'란 생각이 이 때 군에 있으면서 떠올랐다고 한다. 그는 신문에서 어디선가 어떤 자동차 사건이
발생한 것을 도형인가 지도인가로 묘사해 놓은 기사를 읽게 되었는데, 이때 그에게 이 지도는 문장이고, 그 안에 문장의 본질,
즉 실재를 그려 보이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전쟁 포로에서 풀려 돌아온 그에게는 전쟁 직전 돌아가신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유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릴케
등에게 익명으로 돈을 희사하는 등, 가진 재산을 다 처분하고 평생을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지극히 단순하고 검약한 생활을 했다. 그의 옷차림은 극히 소박하여 넥타이나 모자를 쓴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며, 그의 가구란 고작해야 침대 하나, 책상 하나,
그리고 몇 개의 딱딱한 나무의자가 전부였다.
모든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고...
그에게 《논고》의 완성은 모든 철학적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논고》는 적어도 그에게는 2,500년에 걸친 서양
철학의 미로로부터 탈출이었다. 이제 더 골치를 썩혀야 할 철학적 문제란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그저 단순하게 사는 일 뿐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선생의 길을 택했다. 교사 양성교육을 받고 1920년 그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
지만 그 삶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교육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환영받는 교사가 되지 못했다. 사람을 다루는
일은 그에게 맞지 않았던 것 같다. 6년만에 교사직을 포기하고 다음으로 택한 일은 손발을 움직여 삶을 영위하는 것이었다.
그는 수도원의 정원사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건축설계사가 되어 비엔나에 있는 그의 누나 집을 2년여에 걸쳐 설계했다. 비엔나에 있는 동안 그는 비엔나 대학의
슐리크를 만나게 된다. 슐리크는 20세기초 영미철학을 풍미한 논리실증주의를 제창한 비엔나 서클의 영도자였는데, 1921년
출판된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를 읽고 감동되어 그를 찾아온 것이다. 이들의 접촉으로 《논고》의 사상은 논리실증주의의
뼈대를 형성하게 된다.
계속된 철학적 사유의 투쟁
1929년 초 그는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온다. 풍문에 의하면 그가 다시 철학을 시작하도록 자극을 받게 된 것은 1928년 3월에
직관주의 수학자인 브라우어의 강연을 듣고 난 후라고 한다. 이후 그는 자기의 《논고》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후기
철학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출판을 극히 꺼려 그 사색의 결과는 다만 그가 써 놓은 노트로만 남아있다. 이 노트는 나중에
그의 사후 정리되어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철학적 고찰》, 《철학적 문법》, 《청색본》, 《갈색본》,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 등의 책이 그것이다.
1936년 그는 노르웨이의 오막살이로 가 약 1년간 그의 후기 철학의 대표작인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의 집필에 몰두했다. 이 책은 그가 심각하게 출판을 고려했던 또 다른 유일한 책인데, 1949년에야 집필이 완료되어 결국 이 책도 사후에나 출판되었다. 1939년 그는 마침내 무어 후임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된다. 그의 강의는 독특했다. 강의는 그의 방이나 친구 방에서 했고, 청중은 엄격히 제한되어, 몇 년 동안 계속 듣는 사람에 한 했고, 시간은 엄수해야 했다. 강의는
노트도 원고도 없이 온 정신을 집중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다시 새로운 질문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진행
되었다. 그렇지만 대학사회 역시 그에겐 맞지가 않았다. 넥타이를 매고 높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 식당 분위기를 못 참아
자기 방에서만 식사를 했다. 마침내 1947년 사직서를 내고 아일랜드의 시골 농촌과 해안 가에서 은거하며 철학적 사유의 투쟁을 계속했다. 1951년 그는 2년여의 암과의 투쟁 끝에 삶을 마감했다. 그가 의식을 잃기 전 의사가 2-3일 밖에 더 못 살겠다고 하자
그는 마지막으로 다음의 말을 남겼다. "좋습니다. 나는 멋진 한 세상을 살고 간다고 내 친구들에게 전해주십시오."
참고 : 비트겐슈타인 연보
▣《논리철학논고》의 핵심적 의미
《논고》는 약 2만여 자로 이루어진 짧은 책이다. 이 책 서두에 비트겐슈타인은 많은 철학적 문제들이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하면서 스스로 이 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혀 놓고 있다.
이 책의 전체적 의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게 말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은 생각에, 아니 생각에가 아니라 생각들의 표현에 한계를 긋고자
한다. 왜냐하면 생각에 한계를 긋기 위해서 우리는 이 한계의 양쪽을 다 생각할 수 있어야 (다시 말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
조차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 되는데 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한계는 언어 속에만 그어질 수
있으며 그 한계 너머에 있는 것은 단순히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보다시피 《논고》의 목적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을 두 종류로 나누어 줄 어떤 한계선을 그어주겠다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바로 언어비판이다. 그 선을 그어줌으로써 우리는 그 선 안에 있는 언어적 표현들은 의미 있는 것으로, 그 선 너머에 있는 것을
의미 없는 것으로 분명히 구별할 수 있다. 이렇게 분명히 구분이 된 후에는 의미 있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의미 없는 것, 즉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 선을 긋는 기준이 무엇이냐?'이다. 그 대답이 바로 그의 언어의 '그림이론'(picture theory)이다.
언어는 실재의 논리적 그림이다. 사진이 실재의 모습을 색깔의 조합으로 그려내는 것처럼, 언어도 실재의 모습을 논리적으로
그려낸다는 것, 이것이 그의 그림이론의 핵심이다. 《논고》는 바로 그러한 그림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해명이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언어는 바로 이렇게 실재의 모습을 그려 보여주는 언어, 즉 자연과학의 언어이다. 그렇지 않은 언어, 예컨대 신, 옳고 그름, 가치 등을 다루는 언어는 경계 너머의 말들 즉 의미 없는 말들이다. 그것들은 '신비스러운 것들'이다. 이 신비
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들이다.
▣ 본문 내용 요약
《논고》의 내용은 화려한 문구나 친절한 설명이 없이 마치 수학적 증명처럼 엄격하게 설정된 단계들 속에서 표현되어 있다.
이 책은 장, 절로 나뉘어져 있지도 않고 단지 일련 번호가 붙여진 문단이나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번호는 아래 요약에서
보듯이 1, 1.1, 1.11, 1.12 ...의 형태로 되어있는데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1.1은 1의 부연 설명이고, 1.11, 1.12는 1.1의
부연 설명이다. 따라서 소수점이 붙지 않은 자연수를 번호로 가진 문장이 가장 중요한 문장이다. 그런 문장은 1에서 7번까지
일곱 개가 있다.
《논고》의 철학은 크게 언어의 그림 이론(picture theory of langauge)과 진리함수 이론(truth-function theory) 두 가지로
표현될 수 있다.
우선 그림 이론은 언어가 언어로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대답이다. 즉 언어는 그림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의 그림? 바로 세계의 그림이다. 언어는 세계를 그려 보일 때 언어로서 제대로 기능한다. 세계를 그려 보이지 못하는 언어는 의미 없는 언어이다. 그렇지만 '그림'이란 말은 비유적 표현이다. 그림은 여러 가지 색깔의 물감을 사용하여 세계의 모습을 붓으로 형상화해 내는 작업이다. 그렇지만 언어는 물감도 붓도 없다. 그렇다면 언어는 무엇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내는가? 그것은 바로 이름과 논리이다. 이 둘이 바로 언어가 사용하는 물감과 붓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이름은 물감처럼 독자적
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름은 항상 문장 속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이름을 물감으로 논리의 붓을 사용하여 세계를
그리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언어는 그러므로 세계의 '논리적 그림'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들은 이러한 그림 관계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제대로 살펴서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풀어야 한다. 그렇게 풀면 얼핏 간단해 보이는 것도 보다 더 단순한 문장
들이 복합되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렇게 복합적인 문장들을 구성하는 가장 단순한 문장을 '요소문장'
이라고 한다. 세계를 그리는 문장은 바로 이 요소 문장이다. 그리고 이 요소문장들이 진리함수적으로 연결되어 모든 복합문장
들이 만들어진다. 즉 모든 복합문장은 요소문장들의 진리함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요소문장의 안을 파고드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요소문장으로부터 복합문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피는 일이다.
첫째 요소문장의 안을 파고드는 일은 마치 살아있는 몸 안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몸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죽은 몸을 해부해서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살아있게 만드는 기본 요소가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마찬가지로 요소문장의 경우에도 문장의 의미를 그대로 살려둔 채 그 의미가 가능하기 위한 기본 단위인 이름을 찾아
내어야 한다. 이름을 찾아내는 일은 곧 이름이 가리키는 세계의 대상을 찾아내는 일이며, 이는 곧 세계의 본 모습을 밝히는
일이다.이것이 바로 자연과학자가 해야 할이다.
둘째 복합문장을 분석하는 일은 애매한 우리 일상언어의 구조를 명백히 밝히는 일이다. 그렇게 명백히 밝히다 보면 어떤 복합
문장들은 요소문장들의 진리함수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한 문장들은 언어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문장들, 즉 병든 언어들이다. 철학자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병든 언어를 찾아내어 치료하는 일이다. 이는 언어를 논리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행해진다.
그의 글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모든 군더더기를 뺀 채 그 알맹이만을 간결하게 표현해 놓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단 한
줄의 문장으로도 우리의 폐부를 관통하는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기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접근을 손쉽게 허용하지
않는 함축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 깊이를 맛보려면 그 내용을 반복해 읽고 반추하는 끈기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그럼 그의 글을 살펴보자.
1. 세계는 경우인 것들 전부이다
세계는 사물(Ding)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Tatsache)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을 180도 뒤집는 생각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세계는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우리가 살고 있는 집안을 살펴보더라도 집안은 텔레비젼, 냉장고, 전화기, 책상, 장롱, 의자 등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생각을 거부하고 예컨대 텔레비젼이 켜져 있다는 사실,
전화기가 울린다는 사실, 책상 위에 책이 있다는 사실, 등이 세계를 이루는 기본 요소임을 천명한다.
1. 세계는 경우인 것들 전부이다.
1.1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이다.
2. 경우인 것, 즉 사실은 원자사실들의 현존이다.
사실(Tatsache)과 원자사실(Sachverhalt), 대상(Gegendstand)간의 관계를 우선 해명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하나의 사실은 분해해 보면 여러 원자사실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예를들면 '배식한은
잘생겼다.' --> '배의 얼굴 모양은 xx한 형태의 타원이다.' '배의 두 눈 간격은 xxcm이다.' '배의 코 넓이는 xxcm이다.' '배의 코 높이는 xxcm이다.')
그리고 하나의 원자사실은 대상들이 결합된 것이다. 나의 눈, 코, 귀, 입 등을 대상이라고 해보자. 이들 대상들이 모여
나의 얼굴 모양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똑같은 나의 눈, 코, 귀, 입이라 하더라도 이것들 서로가 어떻게 배열되느냐에
따라, 즉 눈과 코 사이, 코와 입 사이 등의 간격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무수히 많은 얼굴 모양이 만들어 질 수 있다.
이러한 무수한 가능성이 바로 원자사실들이다. 즉 무수히 많은 얼굴 모양의 원자사실들을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 내 얼굴은 딱 하나이다. 내 얼굴과 꼭 맞아 들어가는 눈, 코, 귀, 입 등의 배열을 말하는 원자사실은 현존하는 원자사실
이고 그렇지 못한 원자사실은 현존하지 않은 원자사실이다.
원자사실이 대상들의 결합이지만, 대상은 또한 원자사실의 구성 요소로서만 대상일 수 있다. 즉 원자사실과 대상은
부분과 전체로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코가 우리 몸을 위해서 어떤 기능을 함으로서만 그것이 코의 자격을 가지는 것이지 만약 그것이 우리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다만 두 개의 구멍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몸과 코가 유기적으로 서로 뗄 수 없는 것처럼 사태와 대상도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2.0)
이 장에서는 또한 세계에 대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세계와 그림이 공통의 어떤 것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그림의 형식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세계를 그리는 언어의 형식은 바로 논리적 형식이다.(2.1) 이제 우리는 참과 거짓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
어떤 형식을 통해 그려진 그림이 현실과 일치하면 참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다.(2.2)
2. 경우인 것, 즉 사실은 원자사실들의 현존이다.
2.01 원자사실은 대상들(사물들)의 결합이다.
2.02 대상은 단순하다.
2.03 원자사실속에서 대상들은 사슬의 고리들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
2.1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사실의 그림을 그린다.
2.11 그림은 논리적 공간 속의 상황, 즉 원자사실들의 현존과 비현존을 표상한다.
2.16 사실이 그림이 되기 위해서는, 그려지는 것과 공통된 어떤 것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2.21 그림은 현실과 일치하거나 일치하지 않는다. 그림은 바르거나 바르지 않거나, 즉 참되거나 거짓되거나 이다.
3.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생각이다
앞에서 우리는 사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림에 무엇인지를 말했다. 이사실과 그림을 가지고 이제 우리는 생각(Gedanke)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 생각은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다. 사실을 붓과 물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논리를 가지고 그리는 그림이다. 가능한 생각들 중에서 사실과 맞아 들어가는 생각을 참이라고 한다.(3.0)
그리고 이 생각이 기호로 표현된 것이 문장(Satz)이다.
생각은 머리 속에 있는 것이고 문장은 종이 위에 쓰거나 입으로 발언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생각은 보이지 않지만 문장은 눈에 보인다.(3.1)
생각을 매개로 세계와 문장이 서로 대응한다. 그렇다면 세계와 문장이 대응하듯이 세계의 구성 요소인 대상은 문장의
구성 요소인 이름과 대응한다.
이름과 대응하는 그 대상을 우리는 이름의 지시체(Bedeutung)라고 한다.(3.2)
세계를 그려 보이는 것이 문장이므로,
이 문장을 구성하는데 쓰이는 기호들의 용법, 기호법 즉 논리적 구문론을 정확하고 엄밀하게 규정하는 것이 언어의
잘못된 사용에서 비롯되는 오해를 줄일 수 있는 지름길이다.(3.3)
이상에서 나타난 그림 이론을 도식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
언 어 세계
문장1 ..... 문장 n 사실1 ..... 사실n
요소문장1 ..... 요소문장n <-- 대응 --> 원자사실1 ..... 원자사실n
이름1 ..... 이름n <---- 대응 ----> 대상1 ..... 대상n
============================================================
그림에서 보듯이 언어와 세계의 직접적인 대응은 '요소문장-원자사실' 그리고 '이름-대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3.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생각이다.
3.1 문장에서 생각은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도록 표현된다.
3.12 우리가 생각을 표현하는데 쓰는 기호를 문장기호라 부른다.
3.14 문장기호는 그것의 요소들, 즉 낱말들이 그 속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하는데서 성립한다.
3.201 이러한 요소들을 나는 '단순기호들'이라고 부른다.
3.202 이 단순기호들은 이름이라 불린다.
3.203 이름은 대상을 지시한다(bedeuten). 대상이 이름의 지시체이다.
3.21 상황 속에서의 대상들의 배열은, 문장기호 속에서의 단순기호들의 배열에 대응한다.
3.26 이름은 어떠한 정의에 의해서도 더 이상 해부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원초기호이다.
3.3 오직 문장만이 의미를 갖는다. 문장의 문맥 속에서만 이름은 지시체를 갖는다.
4. 생각은 의미 있는 문장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은 눈에 보이는 문장을 통해 표현된다. 그리고 이 문장의 모임이 언어이다. 그렇다면 생각이
사실의 그림인 것처럼 문장도 사실의 그림이어야 한다. 그런데 문장은 문장 자체의 구문론적 구성 원리 때문에 생각을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즉 생각이 문장이라는 옷을 입으면서 생각의 본래 모습이 가려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철학이 해야 할 작업이 무엇인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철학은 언어비판이다. 우리의 언어 구성 능력은
잘못된 말들, 즉 낱말들이 지시체를 가지지 못하는 말들, 세계의 그림이 되지 못하는 말들, 참이나 거짓일 수 없는
말들을 만들어 낸다.(4.0) 이제 철학이 할 일과 자연과학이 할 일이 분명하게 구분된다. 철학은 자연과학 옆에 나란히
있지 않다. 철학은 자연과학의 위에 있다. 철학은 어떤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철학의 목표는 생각의 논리적 명료화이다. 철학은 주장이 아니라 활동이다. 철학의 결과는 '철학적 문장들'이 아니라, 문장들이 명료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은 이를테면 혼탁하고 흐릿한 생각을 명료하게 분명하게 경계짓는 것이다. 그러한 철학적 작업의 대상으로 논리적 형식이 있다. 논리적 형식은 문장을 통해 보여질(zeigen) 뿐, 문장을 통해 말해질 수 없다.(4.1) 논리적 형식은 다음과
같다. 가장 단순한 문장은 요소문장이다. 원자사실의 현존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 요소문장이다. 따라서 참인 요소
문장들이 모두 주어지면 세계는 완전히 기술된다. 그런데 이 요소문장은 이름들로 이루어져 있다. 즉 이름들의 연쇄이다. 또 반면에 모든 문장들은 요소문장들로 분해 가능하다. 즉 모든 문장들의 참, 거짓은 요소문장들의 참, 거짓에 의해
결정된다. 특별히 요소문장의 참, 거짓에 상관없이 항상 참이거나 항상 거짓인 문장들이 있는데 이런 문장들은
동어반복, 모순이라고 한다.(4.2-4.5)
4. 생각은 의미 있는 문장이다.
4.001 문장들의 총체가 언어이다.
4.002 인간은 각 낱말들이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지시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도 모든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 이는 사람들이 목소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르면서도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언어는 생각을 변장시킨다. 이는 옷의 겉모양으로부터 옷 아래 있는 생각의 형태를 추론하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그러
하다. 왜냐하면 옷의 겉모양은 신체의 형태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4.003 철학적 문제들에 관해 쓰여졌던 대부분의 문장들이나 물음들은 거짓된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unsinnig)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종류의 물음들에 대해서는 결코 대답할 수 없고, 단지 그것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확실히 해줄 수 있을 뿐이다. 철학자들의 문장들이나 물음들의 대부분은 우리가 우리의 언어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생겨난다.(예컨대 선(善)은 미(美)와 같은가, 같으면 얼마나 같은가? 와 같은 물음들)
그리고 가장 깊은 문제들이 실제로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4.004 모든 철학은 언어비판이다.
4.024 한 문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문장이 참일 때 원자시실이 어떠한지를 안다는 말이다.
4.03 문장은 그것이 하나의 그림인 한에서만 무엇인가를 말한다.
4.06 문장은 현실의 그림임으로 해서만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
4.11 참된 문장들의 총체가 전 자연과학(또는 자연과학들의 총체)이다.
4.111 철학은 자연과학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철학'이라는 낱말은 자연과학보다 위나 아래에 있는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것이지 옆에 있는 것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4.112 철학의 목표는 생각의 논리적 명료화이다. 철학은 교설이 아니라 활동이다. 철학적 저작은 본질적으로 해명들로
이루어진다. 철학의 결과는 '철학적 문장들'이 아니라, 문장들이 명료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은 이를테면 혼탁하고
흐릿한 생각을 명료하게 분명하게 경계짓는 것이다.
4.113 철학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자연과학의 영역을 한계 짓는다.
4.1212 보여질 수 있는 것은 말해질 수 없다.
4.2 문장의 의미는 사태의 현존과 비현존 가능성과 그 문장의 일치와 불일치이다.
4.21 가장 단순한 문장인 요소문장은 한 사태의 현존을 주장한다.
4.22 요소문장은 이름들로 이루어진다. 요소문장은 이름들의 한 연계, 한 연쇄이다.
4.25 요소 문장이 참이면 사태는 현존한다. 거짓이면 사태는 현존하지 않는다.
5. 문장은 요소문장들의 진리함수이다
모든 문장들은 요소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자기 자신이 요소문장이거나 또는 여러 요소문장들이 진리함수적으로
연결되어서 만들어진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문장은 의미 없는 문장들이다. 의미 있는 문장과 의미 없는 문장을
구별해 내기 위해 여기서 요소문장과 이것으로 이루어진 여타의 복합문장 간의 진리함수적 관계에 대한 논리학의
전문적이고 세부적인 논의가 상세히 이루어진다. 이 부분의 이해를 위해서는 논리학에 대한 사전 이해가 있어야 하니,
부담 없이 훑고 넘어가시길...
간단하게 진리함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사과는 크고 맛있다'(A)란 문장을 보자. 이 문장은 '이 사과는 크다'(B)와 '이 사과는 맛있다'(C)란 두 문장으로 분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과는 크고 맛있다'는 '이 사과는 크다. 그리고 이 사과는 맛있다.'와 같은 말이다. 다시 말해 'A'는 'B 그리고 C'와 같다. 그런데 A가 참이기 위해서는 B도 참이고 C도 참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B 그리고 C'에서의 '그리고'를 ''그리고' 양쪽의 문장이 모두 참이면 전체를 참으로 만드는 함수'로 볼 수 있다. 이를 함수 형태로 표현하면, '그리고(B,C)=A'가 된다. 이 식에서 B와 C 자리에 참을 집어넣으면 A도 참이
되고, B와 C 어느 쪽이든 거짓이 하나라도 있으면 A는 거짓이 된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A를 'B와 C가 '그리고'라는 진리
함수에 의해 연결된 것'이라고 부른다. (5.0-5.5)
이제 세계의 한계가 어디인지가 분명해진다. 논리는 세계에 대한 경험에 앞서 있는 것이므로 논리의 한계가 곧 생각의
한계이며, 생각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이다. 그런데 생각하는 나 자신은 나의 생각 너머에 있다. 이는 마치 각자의
눈으로 자기 자신의 눈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의 한계가 된다.(5.6)
5. 문장은 요소문장들의 진리함수이다.
5.3 모든 문장은 요소문장들에 대한 진리조작의 결과이다. 진리조작은 요소문장들로부터 진리함수가 생겨나는 방식이다.
5.4711 문장의 본질을 말하는 것은, 곧 모든 기술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세계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5.6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뜻한다.
5.63 나는 나의 세계이다.(소우주)
5.631 생각하고 표상하는 주체라는 것은 없다.
5.632 주체는 세계 속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한 한계이다.
6. 진리함수의 일반형식은 [p-, -, N( -)]이다
이제 세계의 그림인 언어의 엄밀한 논리적인 구조가 충분히 밝혀졌으므로 무엇이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무엇이 말할 수
없는 것인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논리학의 언어, 수학의 언어는 세계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윤리와 가치의
문제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 책에서 쓰여진 모든 글들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은 올라가고 난 다음에는 던져버려야 할 사다리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과학의 문장들뿐이다. 지시하는 바가 없는 공허한 말들에 대해
우리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6. 진리함수의 일반형식은 [p-, Վ-, N(Վ-)]이다. 이것은 문장의 일반형식이다.
6.1 논리학의 문장들은 동어반복들이다.
6.11 그러므로 논리학의 문장들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그것들은 분석문장들이다).
6.12 논리학의 문장들이 동어반복이라는 것, 이것은 언어의, 세계의 형식적-논리적-속성들을 보여준다.
6.13 논리학은 교설이 아니라 세계가 반영된 상이다. 논리학은 초월적이다.
6.2 수학은 하나의 논리적 방법이다. 수학의 문장들은 등식이며, 따라서 가짜 문장이다.
6.32 인과법칙은 법칙이 아니라 법칙의 형식이다.
6.34 근거율, 자연의 연속성, 자연에 있어 최소노력의 법칙 등 이 모든 문장들은 과학의 문장들이 가질 수 있는 형식에
대한 선천적인 통찰이다.
6.35 근거율과 같은 법칙들은 그물을 다루지, 그물이 기술하는 것을 다루지 않는다.
6.41 세계의 의미는 세계 바깥에 놓여 있어야 한다.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고, 일어나는 그대로 일어난다. 세계 속에 가치는 없다.
6.42 그렇기 때문에 윤리학의 문장도 있을 수 없다.
6.44 신비한 것은 세계가 어떠한가가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6.5 대답이 언표될 수 없으면, 그 물음 역시 언표될 수 없다. 수수께끼는 없다. 물음은 그것이 제기될 수 있으면, 대답
될 수도 있어야 한다.
6.53 철학의 올바른 방법은 본래 다음과 같은 것이리라: 말할 수 있는 것, 즉 자연과학의 문장들 - 즉 철학과는 무관한
것 -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 그리고 나서는 어떤 다른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것을 말하려고 할 때에는
언제나 그가 그의 문장들 속의 어떤 기호들에 아무런 지시체도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해 주기. 이 방법이 그 사람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하겠지만 - 그는 우리가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것이다 - 이것이야말로 엄밀
하게 올바른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6.54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는 던져버려야 한다. 나를 이해한 사람은 이 문장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때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보게 된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이 한 줄의 문장이 7번의 유일한 문장이다. 그리고 이 문장이 비트겐슈타인의 책 《논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
이다. 이 말을 끝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침묵 속으로 침잠한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논리철학논고》의 의의 ================================================
사람은 말을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인간의 말은 동물들의 말과도 다르다. 동물들은 단지 위험한 적이 출몰했음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거나, 먹이를 찾고 획득하는 등 본능적,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신호를 교환한다.
그에 반해 인간은 생존에 긴급하지 않은 용도로도 언어를 사용한다. 이와 같이 생존과 비교적 관련이 없는 다양한 의사
소통의 방식(말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을 구사한다는 것, 다시 말해 문화적 활동을 한다는 것이 어쩌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해주는 척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는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윤택하게 해주는 긍정적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에게 굴레가 되기도 하는 부정적 측면도 가지고 있다. 단 한마디의 말이 한 사람의 일생을 뒤바꾸어 놓을 수도 있고, 한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 학교에서 도둑의 누명을 썼다고 한 여학생이 자살하기도 했다. 도둑이란 한마디에, 또 순결을 읽었다는 이유로, 또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동물이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경우는 없다. 인간을 인간답게 해준다는 그 문화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의 엄청난 굴레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그처럼 큰 영향력을 지닌 그 문화가 만약 생산적인 쪽으로 쓰이지 못하고 오히려 소비적, 퇴폐적 허영과 과시, 기만, 그리고 스스로를 묶는 굴레로 쓰인다면 어떻게 될까?
"밥 먹자", "자자" "애는?"으로만 살수도 없지만 삶의 진실에 정직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우회적이고, 애매한 자칭 귀족적인 품격이 구역질나기만 한다. 갑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비트겐슈타인은 당시 유럽 귀족들의 그와
같은 문화 나락 속에서 성장하고 또 그것에 염증을 느낀 사람이었다. 그의 철학은 《논고》의 전기와 《철학적 탐구》
의 후기 사이에 커다란 사고의 전환이 있었지만, 철학의 역할에 대해서는 끝까지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언어의 질병"을 치료하는 치료사가 바로 철학자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을 지킬 수 있도록,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나누어주자. 우리가 지금
일상적으로 쓰는 말은 너무도 애매한 구석이 많아서 악용될 소지가 너무도 많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다. 그러니
우리의 언어를 개혁하자. 사악하거나 허황된 이들이 오용할 여지가 없도록 오해나 애매한 구석이 없는 분명한 언어를
만들어내자. 이걸 만들어낼 수 있다면 철학자로서 내가 할 일은 다 끝났다. 더 이상 철학은 필요 없다.
이러한 야심에서 만들어진 《논고》는 전통 철학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새로운 철학의 방향을 열어주는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의 시발점이 된다.
당시의 철학을 지배하던 사조는 헤겔류의 관념론이었다. 이들의 형이상학적 주장은 세계 전체의 일반적 특성을 기술
하는 도도하고 과장된 언어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또한 의미의 막연함과 애매함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참, 거짓이 분명치 않았으며 그것을 확인할 방법도 주어지지 않았다. 우선 급한 것은 그것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는 일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이들의 이러한 주장들이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것들은 철학적 분석을 거치면 결국 거품처럼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논고》는 이러한 비판적 작업과 더불어 새로운 철학 사조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전통 철학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근대 이후 발전해 온 과학의 눈부신 발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논고》는 철학이 자연과학의 옆이
아니라 자연과학 위에 있는 학문이며, 자연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그것의 논리적 구조를 분석하는 언어 비판의 메타적 작업이라고 함으로써 새로이 철학의 위상을 정립한다. 이러한 정신을 비엔나 서클이 물려받으면서 《논고》는 20세기
초 영미 철학계를 풍미한 논리실증주의의 시조로 추앙 받게 되었던 것이다.
▣ 참고도서 및 웹사이트 ==================================================
비트겐슈타인, 박영식,최세만 옮김, 《논리철학논고》, 정음사,
이영철 옮김, 《논리철학논고》, 천지사, 1991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철학적 탐구》, 서광사, 1994
비트겐슈타인, 박정일 옮김,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 서광사, 1997
K.T.Fann, 황경식, 이운형 옮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삼일당, 1983
서광선, 정대현, 《비트겐슈타인》, 이화여대출판부, 1980
레이 몽크, 남기창(역),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1 - 천재의 의무, 문화과학, 2001
쿠르트 부흐테를 외, 《비트겐슈타인》, 한길사, 1999
데이비드 피어스, 《비트겐슈타인》 , 시공사, 2000
비트겐슈타인 http://myhome.netsgo.com/nalm/
법과 언어 http://my.netian.com/~shannie/law01/law0107.htm
Welcome to way2u http://myhome.thrunet.com/~way2u/lud.htm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hypertext edition,
http://www.kfs.org/~jonathan/witt/tlph.html
Wittgenstein the Philosopher
http://philo-sophia.uhome.net/wittgenstein.htm
Ludwig Wittgenstein http://www.knuten.liu.se/~bjoch509/philosophers/wit.html
Ludwig Wittgenstein http://www.ags.uci.edu/~bcarver/ludwig.html
(김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