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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열전(20, 끝) 정조대왕
황원갑 <한국사인물연구회장>
조선의 문예부흥기 이끈 문화군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의 지상과제는 부국강병(富國强兵)과 국리민복(國利民福)이다. 부국강병과 국리민복은 무엇보다도 국가지도자의 리더십에 성패가 달려 있다. 이는 최고지도자의 칭호가 제왕이 되었든 대통령이나 수상이 되었든 만고불변의 원칙이다.
역사의 주체에 대해 몇몇 지도자나 영웅호걸이 아니라 이름 없는 수많은 백성이라는 이른바 민중사관이란 게 있기는 하지만, 왕조시대건 민주화시대건 출중한 민족적 지도자에 의해 국가의 역사가 이어져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백성의 힘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 힘을 하나로 결집시켜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지도자의 탁월한 리더십 없이는 국가의 성장과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반증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최고지도자의 리더십이 출중한가, 아니면 용렬한가에 따라 수많은 나라의 명운이 좌우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는 정치․경제․사회․외교․문화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비상한 난국에 처했다. 그 가운데 가장 시급한 당면문제가 북핵소동이다. 2006년부터 본격화한 이 문제가 단순히 소동으로 끝날지, 아니면 대폭발의 재앙으로 끝날지 아무도 앞날을 점칠 수 없고, 언제 어떤 식으로 돌변할지 아무도 모르므로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급박한 요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를 둘러싼 주변 각국 지도자의 리더십이 비상한 관심 속에서 세계의 이목을 모으고 있다.
이제 두 번 다시 위정자가 독선과 아집으로 나라를 그릇된 길로 이끌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 국민 모두의 몫이다. 또다시 역사의 교훈을 강조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무슨 교훈을 찾을 것인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 누구에게 배우는 것이 좋을까. 조선왕조의 문예부흥기를 이끈 중흥조 정조대왕(正祖大王)에게 배우는 것이 좋다.
실사구시 정신으로 과감한 개혁정치
정조는 조선 후기 사회전환기에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급변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정책을 펼쳤다. 그렇다고 해서 정조가 개혁을 빌미로 온갖 여론을 무시한 채 터무니없이 제 고집만 옳다고 밀어붙인 것은 아니었다.
훌륭한 군주의 자질을 갖춘 데다 당대의 어떤 학자에 비해도 손색없는 학문적 소양을 지닌 정조는 기존의 정부조직 외에 별도로 규장각(奎章閣)이라는 새 기구를 설치하고 새로운 학문사상으로 부각된 북학(北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것이 바로 실사구시 정신이다.
실사구시란 당시 청나라 고증학자들이 내세운 학문방식으로 사실에 입각해 진리를 탐구하려는 과학적 학문태도였다. 청나라 초기의 고증학자들이 공리공론을 일삼던 송ㆍ명의 주관적 학풍을 배격해 객관적이며 귀납법적 과학정신을 내세운 것이었다. 이처럼 관념론적 성리학을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실용주의 실학으로 사상적 재무장을 한 것이었다. 그 결과 이익(李瀷)ㆍ이가환(李家煥)ㆍ이중환(李重煥)ㆍ안정복(安鼎福)ㆍ정약용(丁若鏞) 같은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 홍대용(洪大容)ㆍ박지원(朴趾源)ㆍ박제가(朴齊家)ㆍ이덕무(李德懋)ㆍ김정희(金正喜)ㆍ박규수(朴珪壽) 같은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의 출중한 실학자들이 나타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사구시 이론을 만개할 수 있었다.
정조는 무슨 일이든 말부터 앞세우지 않고 세밀히 분석 검토한 뒤 계획을 세워 실천에 옮겼다. 그는 뒷감당도 제대로 못하면서 매사에 큰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고 반드시 학문적 뒷받침을 구해 일의 앞뒤를 미리 살폈으며, 그렇게 결정된 정책은 꾸준히 추진했다. 그런 정치 스타일이 가장 잘 반영된 것이 규장각이었다. 규장각은 본래 역대 임금의 어제ㆍ어필을 봉안하고 수만 권의 서적을 수집ㆍ편찬해 표면은 왕실도서관이나 실상은 학술과 문화의 중심이었고, 인재 양성의 요람이었다. 규장각은 관료의 기강쇄신, 인재의 배양, 통치 보좌의 기능과 역할을 맡아 세종(世宗) 때의 집현전, 성종(成宗) 때의 홍문관 이상 가는 개혁의 산실 노릇을 했다.
정조는 모든 정파를 망라한 인재를 규장각 각신(閣臣)으로 선발했으며 당하관 중 37세 이하의 우수인재를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해 국가의 동량으로 양성했으니 근래의 명분 없는 자기사람심기나 신세갚기식, 또는 회전문인사니 코드맞추기식 인사니 하는 것과는 천지차이가 있었다. 정조는 또 외척을 제거하고 규장각을 중심으로 한 학문정치를 펼친 데 이어 노론ㆍ소론ㆍ남인ㆍ북인을 차별하지 않고 탁월한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씀으로써 보수ㆍ중도ㆍ개혁의 대연합을 이끌어냈다. 여기에는 그 어떤 권모술수도 없었다.
이어서 정조는 신분제도의 개혁을 단행해 서얼을 등용하고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을 폐지하는 등 사회적 변화를 수용함으로써 사회적 통합을 시도했다. 또한 공직사회의 중단 없는 기강쇄신을 위해 재위 24년간 역대 어느 왕보다도 많은 기록인 60회에 걸친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정조시대의 실학은 이런 정치ㆍ경제ㆍ제도적 개혁과 안정의 바탕 위에서 화려하게 피어날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해서 세종대왕의 치세 이후 조선왕조 최고의 화려한 문예부흥기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의 르네상스를 이룩한 개혁군주 정조, 그러나 그는 그에 앞서서 보기 드문 효자였다. 그의 부친이 바로 저 유명한 사도세자(思悼世子), 부왕 영조(英祖)의 눈 밖에 나서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목숨을 빼앗긴 사도세자였다.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1776년 3월 10일 할아버지 영조가 재위 52년 만에 죽자 경희궁 숭정문에서 조선왕조 제22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정조실록>의 기록이다.
- 왕은 영종(영조) 28년(1752년) 9월 22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탄생하였다. 처음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가 신룡(神龍)이 구슬을 안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꿈을 깬 다음에 손수 꿈속에서 본 대로 그림을 그려 궁중 벽에 걸어 놓았었다.
탄생하면서 영특한 음성이 큰 종이 울리듯 하므로 궁중 안의 사람들이 모두 놀랐는데, 영종이 친림하여 보고서 매우 기뻐하며 혜빈(惠嬪:혜경궁 홍씨)에게 하교하기를, “이 아이는 너무도 나를 닮았다. 이런 아이를 얻었으니 종사가 근심이 없게 되지 않겠느냐?” 하고, 그날로 원손(元孫)으로 호를 정하였다. -
정조는 영조 35년(1759년) 2월에 왕세손으로 책립되었고, 영조 38년(1762년) 2월에 가례(嘉禮)를 거행하니 빈(嬪)은 청풍 김씨(淸風金氏), 청원부원군 김시묵(金時默)의 딸이다. 그해 5월에 장헌세자가 죽어 7월에 동궁으로 칭했고, 영조 40년(1764년) 2월에 효장세자(孝莊世子)의 후사로 삼아 종통(宗統)을 이어받도록 했다. 그리고 영조 51년(1775년) 12월에 대리청정을 하다가 영조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러면 정조의 일생과 업적을 되돌아보자.
정조는 돌잔치 때 돌상에서 맨 처음 붓과 먹을 만지고 책을 펼쳐 읽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다고 전한다. 그는 세손 시절에 자기만의 독서실을 마련하여 수많은 책을 읽었으니 요즘 말로 한다면 못 말리는 독서광이었다. 그는 또 천성이 검소하여 화려한 겉꾸밈을 싫어했고, 무슨 일이든 꼼꼼히 살핀 다음에 행동으로 옮겼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비참한 죽임을 당할 때 정조는 불과 열한 살 철부지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철부지라 하더라도 열한 살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평생 기억할 수 있는 나이다. 더군다나 그 사건이 아버지가 참혹하게 목숨을 빼앗긴 사건이고, 그것도 할아버지의 명령에 따른 일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따라서 정조의 일생을 이야기할 때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사도세자의 이름은 선(渲). 영조 11년(1735년) 1월 11일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暎嬪李氏) 선희궁(宣禧宮). 불과 아홉 살에 왕세자로 봉했던 첫아들 효장세자를 잃은 지 6년 만의 경사였다. 영조는 이 귀한 아들이 첫돌을 맞자 왕세자로 책봉하고, 열 살이 되던 영조 20년(1744년)에는 홍봉한(洪鳳漢)의 딸을 세자빈으로 짝지어주었으니 이 동갑내기 세자빈이 바로 뒷날 저 유명한 <한중록(閑中錄)>을 남긴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이다.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너그럽고 그림그리기와 글씨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또 점점 자라면서는 장난감 창검으로 군사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10여 세가 되면서부터는 학문보다는 검술과 궁술 연마를 더 좋아했다고 전한다. 그렇게 궁중에서만 자라다가 15세가 되던 영조 25년(1749년)부터 부왕의 명령에 따라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겉으로는 영조가 몸이 불편해 정양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영조가 필생의 과업인 탕평정치를 세자에게 일찍부터 익히게 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대리청정이 화근이 되어 인생을 참극으로 마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맡을 때 있었던 중요한 사건은 세금수취제도를 개혁한 균역법(均役法) 시행과 소론의 강경파를 숙청한 이른바 을해옥사(乙亥獄事)였다. 사도세자는 노론과 소론이 격렬히 맞서던 당시 소론 쪽에 가까운 편이었다. 그런데 그의 장인인 홍봉한과 처삼촌 홍인한(洪麟漢) 등은 반대당인 노론의 핵심인물이었다. 여기에 비극의 싹이 숨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부인인 세자빈 혜경궁 홍씨도 남편인 사도세자의 편을 들지 않고 친정아버지인 홍봉한과 노론의 편을 들었다. 따라서 이들 부부 사이는 자연히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시아버지 영조와 남편 사도세자의 사이가 갈라진 원인으로 두 부자의 성격이 정반대였다고 썼다. 영조는 세심하고 민첩한 데 반해 사도세자는 소심하고 과묵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부왕의 하문에 세자는 한 번도 시원시원하게 대답을 하지 못해 영조가 늘 답답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자의 대리청정 기간 중에도 중요한 국사는 대부분 비변사의 논의를 거쳐 처리했으며, 또 그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사안은 영조가 직접 처결했으므로 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3, 4년이 지났다. 그러다가 영조 24년(1758년) 겨울에 사도세자는 당론을 잘못 처리했다고 하여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홍역을 앓는 상태에서 빙판 위에 꿇어앉아 석고대죄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영조는 세자가 자신의 탕평책을 무시하는 것으로 오해해 양위소동을 벌이는 등 세자를 미워하기 시작했고, 사도세자는 나름대로 부왕의 오해를 풀기 위해 여러 차례 석고대죄를 하던 끝에 마침내 심신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심화된 홧병이 결국은 정신질환으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부자간의 사이는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아들에 대한 미움을 참을 수 없었던 영조는 재위 34년(1758년)에 세자폐위의 전교까지 내렸는데, 이는 당시 도승지였던 채제공(蔡濟恭)의 간곡한 만류로 중도에 없었던 일이 되었다. 그러나 영조 38년(1762년) 봄에 세자의 평안도여행이 빌미가 되어 마침내 끔찍한 뒤주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는 나경언(羅景彦)이란 자의 고변에서 촉발되었다. <영조실록>을 비롯한 사료들은 나경언의 고변 내용을 모두 삭제했지만 영조가 세자에게 직접 사실 확인한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세자가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비구니를 궁 안으로 불러들였다, 시전상인의 재물을 빌려 쓰고 갚지 않았다, 몰래 평안도 여행을 다녀왔다는 등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정조와 사도세자는 경종(景宗)의 석연치 않은 죽음을 둘러싸고도 미묘한 긴장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영조가 이복형 경종(景宗)의 왕세제 때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가 빌미였다. 숙종(肅宗)의 후궁 장희빈(張禧嬪) 소생인 경종은 하초가 부실해서 후사가 없었다. 이에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해서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이 일은 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래 등 노론 4대신이 주도했다. 이때 소론들은 시기상조론을 내세워 이를 반대하고 노론 4대신을 무고하여 몰락시킨 것이 신임사화였다.
그러한 우여곡절 끝에 등극한 영조는 신임사화를 주동한 노론을 모두 쫓아내고 당시 자신을 위하다가 숙청당한 노론의 의리를 두둔한 입장이었다. 그리고 당쟁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쓰긴 했으나 아무래도 전일의 의리를 잊을 수 없어 노론 쪽으로 좀 더 기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자 위기를 절감한 소론 쪽에서 반격의 무기로 들고 나선 것이 이른바 경종독살설‘이었다.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궁녀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경종독살설에 깊은 관심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영조와 사도세자 간에는 매우 깊은 골이 패여져 있었던 셈이다.
사도세자는 사람을 죽인 사실은 인정했으나 나머지는 모두 부인했다. 영조의 세자에 대한 불신과 증오는 갈수록 심화되어갔다. 특히 사람을 마구 죽인 것은 임금 자격이 없는 것이고, 몰래 평안도를 다녀온 것은 쿠데타를 위한 정지작업이라고 보았다. 영조는 결국 사도세자가 왕위를 물려줄 그릇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이른바 뒤주사건으로 죽임을 당하기 전에 사도세자는 무슨 예감이 들었던지 세자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중록>은 전한다.
“(부왕께서) 나는 폐하고 세손은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으면 어찌할거나.”
그런데, 사도세자의 예감대로 그가 죽은 뒤 일은 그렇게 돌아갔다.
영조와 사도세간 부자간의 사이가 악화된 데에는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과 처삼촌인 홍인한 등이 주축이 된 노론들의 이간질과 음해공작도 큰 역할을 했다. 여기에 부인인 세자빈 홍씨까지 남편보다는 친정집과 노론의 편을 들고 나섰으니 당시 사도세자의 처지야 말로 사면초가 그대로였다. 영조 38년(1762년) 음력 윤 5월 13일.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위시키고 자살할 것을 명했다. 신하들이 극력 만류하자 영조는 쌀뒤주에 가둬버렸다. 그렇게 하여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 지 7일 만인 5월 21일에 굶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이른바 임오화변(壬午禍變)- 뒤주사건의 전말이다. 그렇게 외아들을 죽인 영조는 이렇게 말했다.
“내 어찌 30년 가까운 부자간의 인연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사도세자라고 시호하고 직접 장례절차를 지시했다. 또 영조는 나중에 세손에게 이렇게 유시했다고 사서는 전한다.
“부자간의 정은 정으로 남기고, 의리는 의리대로 지켜야 하느니라.”
사도세자는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이 된 뒤인 광무 3년(1899년)에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숭되었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널리 알려진 바이므로 이 정도로 소개하고, <한중록>에 관해 잠깐 언급하고 넘어간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정조 19년(1795년) 홍씨의 환갑 때 친정조카의 요청으로 쓴 것인데, 순조 원년(1801년)과 그 이듬해, 또 1805년 등 세 차례에 걸쳐 고쳐 쓴 것이다. 그 동안 한글로 된 궁중문학의 대표적 걸작으로 평가받았지만 그 내용은 남편보다 시집과 노론의 편을 들어 사실을 적지 않게 은폐 왜곡했다는 재평가를 받고 있다.
노론의 반발로 우여곡절 끝에 즉위
그렇게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은 정조는 두 달 뒤인 그해 7월에 동궁이 되었지만 그의 즉위도 순탄치는 않았다. 뒷날 왕세손이 즉위하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참혹한 사건의 추궁을 벗어날 수 없다고 여긴 노론 일파 때문이었다.
노론 핵심들은 후환이 두려운 나머지 기회만 있으면 왕세손을 제거하려고 했다. 허수아비 임금으로 내세울 왕족은 또 있었던 것이다. 영조 51년(1775년) 정월에 나이 80이 넘어 노약한 임금이 왕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고 하자 노론들은 이른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내세워 대리청정을 반대했다. 그것은 ‘동궁은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니 병조판서니 하는 것도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도 알 필요가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그야말로 오로지 반대를 위한 반대였다.
정조는 1776년 3월 5일에 무서운 할아버지 영조가 재위 52년, 향년 83세로 죽자 닷새 뒤에 그 뒤를 이어 조선왕조 제22대 임금으로 즉위하여 마침내 조선의 문예부흥시대를 개막했다. 당시 그의 나이 25세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의 개혁정치가 순탄하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노론들의 집요한 증오 때문이었다.
정조는 즉위 즉시 뒤주사건의 책임을 물어 홍봉한과 홍인한 형제, 정후겸 등 노론 탕평당을 일소하고 숙의 문씨와 문성국 남매를 처벌했으며, 정순왕후 김씨 일가 등 외척을 제거했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탕평당은 국왕암살기도로 맞대응했다. 조선왕조 300년 사상 전무후무한 국왕암살기도였다. 노론인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이 궁궐 안으로 자객을 보내 정조의 암살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것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홍계희의 8촌인 홍계능이 아들 홍신해와 조카 홍이해 등과 반란을 모의했으나 이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은전군을 추대하려던 이 역모사건에는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의 친동생, 그러니까 외삼촌 홍낙임도 관련이 되었다. 정조는 은전군을 자결토록 하고 주동자 23명을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홍낙임은 모친을 고려해 유배형에 처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홍국영(洪國榮)을 언급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홍국영은 25세에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다. 그는 정조가 왕세손 시절 동궁을 보좌하는 춘방(春坊)- 세자시강원 사서로 임명되어 이후 여러 차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정조를 보호한 공로가 있었다. 또한 정조의 즉위 직후에도 신변 보호와 더불어 탕평당과 외척을 제거하는데 앞장서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그런데 홍국영은 욕심이 지나쳐 자신의 공로와 국왕의 신임을 과신한 나머지 오만방자한 천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에게 밉보인 신하들을 마구 내쫓고 노론의 우두머리가 되려고 했으며, 자신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내 외척이 되어 세도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정조 3년(1779년) 9월 홍국영에 대한 탄핵상소가 잇따르자 정조는 미련없이 그를 조정에서 내쫓아버렸다. 그리고 재산을 몰수한 뒤 도성출입까지 금해버렸다. 이런 사건들을 거쳐 정조 즉위 초의 혼란은 점차 가라앉았다. 정조는 비로소 자신이 품어오던 새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규장각을 통한 인재양성과 문예부흥
그러면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이룩했던 정조의 치세를 살펴본다. 가장 먼저 손꼽을 것이 규장각을 통한 통치이다. 정조는 본래부터 학문을 사랑하고, 또 해박한 지식을 지닌 사람이었다. 왕세손 시절에는 ‘모든 것이 있는 움집’이란 뜻의 개유와(皆有窩)란 도서실을 만들어 수많은 책을 수집해 밤낮으로 읽어 학문이 넓고 깊은 경지에 들었으며, 또 문장력도 탁월했다. 규장각은 8개월간의 준비 끝에 즉위 이듬해인 정조 1년(1776년) 9월에 설치했다.
규장각은 세종 때의 집현전, 성종 때의 홍문관과 같은 성격이지만 정조는 이를 문화와 정치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처음에는 역대 임금의 어제․어필을 정리하여 모시고, 각종 서적의 수집과 편찬의 기능을 목적으로 설립했다. 정조는 여기에 청나라로부터 사들인 수만 권의 장서를 채워 우수한 인재들을 양성하고 교육하는 기구로 이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규장각은 겉으로는 왕립도서관이지만 속으로는 학술과 정치, 나아가 개혁정책의 산실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규장각의 관제는 제조(提調) 아래 제학(提學)․직제학(直提學)․직각(直閣)․대교(待敎) 등이 있었고, 정조 3년에는 내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 4명을 두었다. 또 정조 6년에는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했다. 규장각의 인적 구성은 크게 각신과 초계문신과 검서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각신은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인재는 노론․소론․남인․북인 등 정파와 인맥을 가리지 않고 발탁하여 정조의 개혁정책을 보좌하게 한 사람들이다. 초계문신은 당하관 이하 문신 가운데 37세 미만인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여 재교육을 실시하여 더 크게 쓰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규장각에서 재교육을 받고 매월 시험을 치렀는데, 탈락자들은 재시험을 보도록 하여 자질향상을 도모했다.
정조 5년(1781년)에 16명이 첫 선발된 초계문신은 정조 24년(1800년)까지 10회에 걸쳐 모두 138명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규장각에서 학업을 마치면 바로 암행어사로 각도에 파견되었다. 검서관은 규장각의 일반 사무직인데 모두 서자 출신이란 점이 특징이다. 박제가와 이덕무 등 서자 출신이면서도 당대의 실학자들이 대표적 인물이다. 정조는 또 즉위 직후부터 재위 21년까지 도합 80여 만 자에 이르는 새 활자를 주조하여 내규장각에 비치하고 <증보문헌비고> 146권과 <국조보감> 등 많은 책을 간행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남겨주었다. 하지만 정조 사후 순조조에 들어서면서 규장각이 배출한 인재 대부분이 조정에서 축출되고 규장각은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게 된다.
정조는 천성이 소탈하고 검박한 사람이었다. 성품은 세심한 편이었다. 따라서 정치도 사태의 본질부터 세밀하게 분석하고 검토한 뒤 대처방안을 강구하여 하나하나 소리 없이 실천에 옮기는 군주였다. 그러니까 근래 어떤 지도자들처럼 입만 열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거나 앞뒤 가리지 않고 막말을 쏟아내는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이러한 출중한 자질의 군주였던 만큼 정조의 치세에서 실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학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변화에 부응하기 위한 새로운 학문사상이었다. 기존의 성리학이 해결할 수 없는 시대적 변화를 수용하기 위한 학문이었다.
영․정조대의 실학자들은 대체로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으니 경세치용학파, 이용후생학파, 고증학파 등이다. 이들은 이중환․안정복․정약용 등 경학․역사․어문 등을 주로 연구하거나, 청나라의 제도를 연구하고 상업을 장려한 홍대용․박제가․박지원 등 북학파 학자들, 객관적․과학적 학문연구 방식을 강조한 고증학파의 추사 김정희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여기에서 홍대용의 명언 한 가지를 소개한다.
“하늘에서 보면 화이(華夷)의 구별은 있을 수 없다. 법이 좋고 제도가 아름다우면 아무리 오랑캐라 할지라도 떳떳이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정조는 정파와 신분보다는 능력 위주의 인재를 선발하여 박제가․이덕무․유득공․서이수 같은 서자들도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채했다. 또 초계문신 정약용에게 청나라에서 구해온 <고금도서집성> 가운데 서양인 테렌스가 지은 <기기도설(奇器圖說)>이란 책을 주며 무거운 물건을 쉽게 들어 올리는 방법을 연구토록 지시했다. 정약용은 이에 도르래를 이용한 기중기 제조법을 설계하여 수원성 축조시 막대한 경비와 인력과 시간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이런 것이 실학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정조가 물심양면의 후원을 아끼지 않고 양성한 실학파 인재 대부분은 정조 사후 안동 김씨 보수정권 아래서 대부분 쫓겨나고 말았다. 정약용만 해도 천주교를 믿는 서학파로 몰려 머나먼 전남 강진 다산초당에서 18년이란 오랜 유배생활을 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보수․중도․개혁 연립정권 이룬 탕평정치
영조는 당쟁의 폐해를 절감하고 노론과 소론을 아우르는 탕평책을 썼으나, 이는 파벌을 배제한 인재의 발탁과 적재적소 인사를 위하기보다는 권력 상호간의 견제에 더 무게가 실린 것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군주에 대한 의리에 앞서서 일체의 정파를 배제한 진정한 탕평정치를 펼치려고 노력했다. 그의 탕평에 관한 의지와 집념이 얼마나 깊었는가 하면 자신의 거실을 ‘탕탕평평실’이라고 이름붙일 정도였다. 영조의 탕평책이 완론탕평(緩論蕩平)으로 불린 반면 정조의 탕평은 ‘시비를 엄하게 가린다’는 뜻에서 준론탕평(峻論蕩平)이라고도 부른다.
정조는 먼저 영조 때 폐지된 이조전랑권을 부활시켜 신하들의 언로를 보장했다. 당시 조정은 노론계 청명파, 소론계 준론파, 남인계 청남파 등 3개 정파가 있었다. 김종수를 대표로 하는 청명파는 외척을 배제하고 사림정치의 근본을 강조하는 원칙적 보수파였다. 서명선을 비롯한 준론파는 오로지 탕평정책의 원칙을 강조하는 중도파였다.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청남파는 노론을 견제하며 개혁을 추구하는 진보파였다. 정조는 이들 3대 계파의 대연합으로 연정을 이끌어냈다. 정조 12년 채제공이 우의정으로 발탁됨에 따라 조정은 노론인 김치인이 영의정, 소론인 이성원이 좌의정에 자리잡아 3당 연립정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정조는 이 연정을 지휘하여 금난전권 혁파, 수원성 축조 등 개혁정책을 펼쳐나갔다.
정조가 탕평정치를 무난히 펼칠 수 있었던 뒤에는 그의 훌륭한 자질과 탁월한 리더십이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만일 정조가 당장의 이익이나 성급한 성공을 위해 권모술수나 부리는 소인배였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탕평책으로 사회지도층을 개혁의 전면에 내세운 정조는 본격적으로 사회․경제 개혁 작업에 나섰다. 가장 먼저 실시한 것이 신분제의 개선을 통한 사회개혁이었다. 정조는 이른바 서얼금고제(庶孼禁錮制)를 철폐하여 서자도 벼슬길에 오를 길을 열어주었다. 중앙에서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우두머리 구실아치인 좌수(座首)를 제외한 향임(鄕任)에 서자의 임명을 허용했으며, 군부대인 장용영(壯勇營)에서도 사자는 물론 중인도 받아들였다.
또한 노비추쇄법을 폐지해 사회적 화합을 도모했다. 물론 이로 인해 급격한 변화는 없었지만, 조선왕조 개국 초에 40%에 이르던 노비계급이 정조대에는 10%대로 떨어졌다는 연구 결과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이는 결국 신분제 붕괴의 서막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양반만이 사람이 아니라 중인 이하 노비도 사람이라는 의식을 확대시킨 계기가 되었다.
정조는 1791년에 이른바 신해통공을 통해 자유경쟁 시장체제의 막을 열었다. 채제공의 건의를 받아들여 실시한 이 조치는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市廛) 상인의 사상(私商) 규제와 매점매석 등 금난전권의 특혜를 철폐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중소 상인과 영세 자영업자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문화의 개화와 화성 건설
정조는 또 서민을 위한 임금답게 조선왕조 사상 가장 많은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심을 파악하고 민생을 보살핀 현군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정조 재위 24년간 60회에 걸쳐 암행어사를 파견한 것을 나타났다. 이는 6개월에 한 차례 꼴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조 자신도 왕위에 있는 동안 60여 회나 민정시찰을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정조의 치세는 조선왕조의 르네상스를 이룩한 황금기였다. 생활수준의 향상과 문화적 욕구 확산과 맞물려 이 시대에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수많은 예술가가 나타나 눈부신 활약상을 보였다. 여기에는 규장각이 많은 서적을 간행하여 문화 활동을 장려한 데 힘입은 바도 컸다. 불후의 걸작인 박지원의 <열하일기>, 박제가의 <북학의>를 비롯하여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이 저술되었으며, 독서인구가 늘면서 대중문학 활동도 활발해져 <춘향전><흥부전> 같은 소설이 간행되고 대여점도 등장했다.
또한 신재효(申在孝) 같은 중인 출신의 재능 있는 사람이 나타나 서민의 애환을 담은 판소리의 수집과 정리에 힘을 쏟기도 했다. 그리고 김홍도(金弘道)․신윤복(申潤福)․김득신(金得臣)과 정선(鄭敾) 같은 탁월한 재능의 화가들도 이 시기에 활약했다. 이러한 서민예술의 발전은 그 동안 양반층에만 국한되다시피 하던 문화적 욕구를 서민층까지 확산시켜 결과적으로는 모든 백성의 의식수준을 근대적 시민의식 수준으로 이끌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정조가 국왕이기 이전에 효심이 지극한 효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수원 화성이 정조의 지극한 효심에서 비롯된 업적이라는 사실도 너무나 유명하다. 정조가 오랜 숙원사업이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의 이전을 추진한 것은 재위 13년(1789년)이었다. 정조는 즉위 뒤에도 해마다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며 추모의 눈물을 비오듯 뿌렸는데, 그동안 자신의 뜻대로 이장도 못한 것은 오로지 할아버지 영조의 유시 때문이었다. 영조가 “너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사도세자건에 대해서는 절대로 관여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던 것이다.
또한 영조의 명령에 따라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일찍 죽은 큰아버지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를 이었으므로 사도세자에 대한 추모조차 뜻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수원 화산에 천장을 결정한 정조는 작업과정을 일일이 살펴보며 몸소 지휘하여 불과 3개월 만에 현륭원 조성공사를 완료했다. 그리고 인근의 용주사를 중건하여 사도세자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고 자주 능행을 했다. 기록이 전하는 정조의 능행은 모두 15회라고 한다. 현륭원은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된 이후 융릉(隆陵)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조의 효심이 깃든 이 능행차는 수원화성문화제에서 해마다 재현되고 있으며, 서울시와 경기도는 2007년부터 이 행사를 수원만의 행사가 아니라 세계적인 문화행사로 발돋움시킨다고 한다. 즉, 창덕궁에서 융건릉에 이르는 62km 구간의 정조대왕 능행차를 완벽하게 재현하여 세계적인 볼거리로 만들며, 또 화성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한편, 사도세자묘의 이장과정에서는 경강상인들이 한강에 배다리를 놓아 영구를 건너게 했으며,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는 신작로도 닦았다. 전에는 사당과 과천을 거쳐 수원으로 통하던 길을 금천-안양-군포-지지대고개를 거쳐 수원으로 통하는 새 길을 닦았던 것이다. 여기에는 과천을 거쳐 수원으로 가는 길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 가운데 한 명인 김상로의 형 김약로의 무덤이 내려다보이는 게 싫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지지대고개란 명칭도 정조가 사도세자 묘를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자주 멈춰 뒤돌아본 고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현릉원을 조성한 정조는 5년 뒤인 재위 17년(1793년)에는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한 대역사에 착수한다. 수원성을 축조한 처음의 목적은 나중에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뒤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사도세자 묘 곁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조의 이와 같은 애틋한 바람은 죽은 뒤에야 이루어지게 된다.
정조는 화성이 건설된 뒤 인근에 저수지를 건설하고 농지를 조성하여 농민들이 정착토록 했으며, 또 서울에서 상인들을 불러 모아 상업 활동을 하도록 하는 등 신도시 건설에 다각도로 신경을 썼다. 그리하여 오늘의 경기도청소재지 수원은 보잘것없는 소읍에서 일약 인구 100만의 대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순조 1년(1801년) 9월에 간행된 <화성성역의궤>는 이 화성 축성사업을 정리한 책이다.
정조는 과연 독살되었나
무슨 일이든지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르는 법이다. 정조가 이처럼 재위 24년 동안 쉴 새 없이 국리민복을 위해 개혁정치를 추구하는 동안 음지에 숨어서 숨죽이고 있던 노론의 강경파인 벽파(辟派)는 호시탐탐 반격의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들은 막대한 국고를 쏟아 부어 거국적으로 벌이는 현륭원 조성과 화성 축성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사실 벽파가 위기를 느낀 것은 화성 축조 자체보다는 반대당인 남인의 득세에 있었다. 정조는 남인의 우두머리인 채제공에게 화성 축성의 총책임을 맡겼고, 또 장차 남인 가운데서 걸출한 인재인 정약용 등을 재상으로 발탁할 의중을 드러냈던 것이다.
정조는 재위 24년(1800년) 5월에 신하들에게 앞으로 국정은 새 도시 수원을 중심으로, 또 남인을 중용하여 개혁정치를 계속 추진하리라는 요지의 구상을 밝혔다. 이를 계기로 정조와 벽파 간의 긴장은 갈수록 높아졌다. 그리하여 20여 년 간 지속되어온 탕평의 기조마저 흔들리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태풍 전야의 고요와도 같은 소리 없는 긴장의 골이 깊어가고 있을 때 아무도 예기치 못한 의외의 사태가 벌어졌다. 정조가 갑자기 중병으로 자리에 드러누워 버린 것이었다.
정조는 오래 전부터 종기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이 과도한 국정 탓인지 갈수록 심해지다가 그해(1800년) 6월 초순에 악성종양으로 악화되었던 것이다. 한 달도 못된 6월 하순에는 혼수상태에 빠져 결국 6월 28일에 허무하게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재위 25년 만이요, 당시 그의 나이 한창 때인 49세였다. 그렇게 해서 조선왕조 500년 사상 세종대왕에 이어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칭송받던 개혁군주 정조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개혁의 완성은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렸다. 정조의 치세가 좀 더 오래 갔다면 조선의 근대화가 보다 일찍 왔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지만, 역사에서 가정은 아무 소용없는 노릇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다만, 정조 사후 독살설이 있었다는 사실을 덧붙이고자 한다. 정조독살설의 근거는 정조가 종기의 악화로 급서할 정도로 체력이 허약하지 않았고, 노령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또 치료법인 연훈방에 들어간 수은이 치명적이었다는 설도 있으며, 이 연훈방을 건의한 인물이 벽파의 영수 심인지의 인척인 심인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더 있다. 국왕의 죽음에는 대비가 임종할 수 없다는 예법을 따르지 않고 정조와 정치적으로 라이벌 관계인 정순왕후 김씨가 홀로 임종했다는 점이다.
이런 정황증거를 들어 여러 사람이 정조는 독살 당했다고 여겼는데, 정약용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정약용은 자신의 문집 <여유당전서>에서 정조가 정순왕후를 포함한 벽파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죽은 것으로 암시했다. 하지만 정조의 독살 여부는 아직까지 정확한 물증이 나온 것도 아니고, 또 이제 와서 아무도 분명히 단정지을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정조는 생전에 원하던 대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가까이 묻혔으니 그곳이 오늘의 화성 건릉(健陵)으로, 이 두 능을 합해 융건릉이라고 부른다.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산1-1번지의 융건릉은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화성 성곽은 사적 제3호, 팔달문은 보물 제402호, 화서문은 제403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정조의 효심이 깃든 화성행궁은 경기도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조 사후 왕조사는 어떻게 흘렀는가. 정조 이후 제23대 임금은 불과 11세의 철부지 순조(純祖)가 즉위했는데 임금이 너무 어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권을 장악한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정적인 시파(時派)의 군사적 배경이던 장용영을 혁파하고, 신유박해(辛酉迫害)를 통해 천주교 신자와 정약용․이가환 등 300여 명을 숙청했으며, 정조의 이복동생으로 잠재적 정적인 은언군도 죽여 버렸다. 또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를 제거하는 등 실학자들을 탄압하고 시파를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그 뒤 안동 김씨 세도정치시대로 접어들어 왕권은 유명무실해졌고, 근대화를 향한 조선왕조의 발걸음은 더욱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최고지도자의 출중한 자질과 탁월한 통솔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국가의 지상목표인 부국강병과 국리민복은 아무나 입으로만 떠들어서 이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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