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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장 끊어짐을 잇게 하고 (5)
그 무렵, 경보(慶父)와 애강은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노민공이 군위에 오른 지 어느덧 2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루빨리 노민공을 해치우고 자신이 임금 자리에 올라야 하는데 좀처럼 기회가 나질 않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경보(慶父)의 집에 대부 복의가 찾아왔다. 그런데 복의의 표정이 보통 때와 달리 여간 험악한 게 아니었다.
"대부께서 예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습니까?"
복의는 여전히 노기를 띤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인지 천천히 말씀해보십시오."
"본시 내 땅은 주공의 태부인 신불해라는 자의 전장(田莊)과 인접해 있소이다. 그런데 갑자기 신불해(愼不害)가 그 땅은 자기 땅이라며 빼앗아버리는 것이 아니겠소. 그래서 나는 하도 억울하여 주공께 이 일을 호소했더니, 주공께서는 오히려 신불해의 편만 들고 내 말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오. 아무리 주공이 어리다고 해도 이런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이오? 내 참을 수가 없어 공자를 찾아왔으니, 공자께서는 주공께 고하여 제발 내 땅을 찾아주시오."
순간 경보(慶父)의 뇌리 속으로 섬광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문 채 대부 복의를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한결 낮추어 속삭였다.
"주공은 나이가 어리고 철이 없어 내가 말해도 듣지 않을 게 분명합니다. 그러지 말고 아예 이 기회에 큰 일을 해보시는 것이 어떻소이까?"
"큰일이라니요?"
"지금 주공으로 우리 노(魯)나라가 명맥을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렇다면 ....................!"
"그렇소. 그대는 주공을 암살하시오. 나는 그대를 위해 신불해(愼不害)를 제거하겠소."
"하지만 계우(季友)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 그것이 가능하겠소?"
"주공은 아직 어린애라 이따금씩 저녁이면 궁 밖 거리로 나가 아이들과 놉니다. 대부께서 자객을 사 주공이 드나드는 무위문 근처에 숨겨 놓았다가 일거에 해치워버리시오. 그러고 나서 거리의 부랑배 소행이라고 하면 누가 이 일을 알겠소? 그 다음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대부께서는 자객 하나만 물색하시오. 일이 잘되면 내 그대를 재상에 앉히겠소."
"주공이 언제 무위문을 나갈지 어떻게 안단 말이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공이 미복을 하고 나서는 날, 국모(애강)께서 우리에게 미리 통보를 해줄 것이오."
"좋소이다. 노나라 사직을 위해 공자와 뜻을 함께 하겠소."
두 사람은 손을 굳게 잡았다.
며칠 후, 저녁 어스름녘 무위문 밖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는 그 앞을 왔다갔다하면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무위문이 열리며 열 살짜리 소년 하나가 그 곳에서 나왔다. 미복으로 변장한 노민공이었다.
사내는 그 뒤를 밟다가 한적한 곳에 이르자 느닷없이 덮쳐들어 노민공의 옆구리를 세차게 찔렀다.
"악 -!"
노민공은 갸날픈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노민공을 죽인 자객은 나는 듯이 어둠 속을 향해 뛰었다.
"저놈 잡아라!"
시종이 악을 쓰며 외쳐댔다.
그때 맞은편에서 시장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상인 여러 명이 그 광경을 보았다. 그들은 재빨리 옆으로 벌여 서서 도망가는 자객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그들이 막 자객을 밧줄로 결박지려 하는데, 무기를 든 한떼의 괴한들이 나타났다. 대부 복의의 가병(家兵)들이었다.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 상인들로부터 자객을 구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오. 상인 중에 가병의 얼굴을 아는 자가 있었다.
"대부 복의의 소행이다!"
같은 시각, 경보(慶父)역시 사병을 거느리고 태부 신불해의 집을 습격해 그 집 식구들을 몰살시켜 버렸다.
계우(季友)는 이 변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 공자 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는 방 안을 뛰어들어가 누워 자고 있는 신을 발길로 차서 깨웠다.
"속히 달아납시다. 경보가 난을 일으켰소."
두 사람은 신속히 길을 떠나 주나라를 바라보고 달아났다.
노민공이 경보와 복의에 의해 피살되고 공자 계우(季友)가 타국으로 망명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곡부성 전체로 퍼져나갔다. 백성들은 크게 분노했다.
사람들이 시장 거리로 몰려나왔다. 2백 명, 3 백 명.
시간이 흐를수록 인파는 점점 늘어나 마침내 1천 명이 넘었다.
- 주공을 살해한 자는 복의다!
성난 백성들은 대부 복의의 집을 향해 파도처럼 몰려갔다.
순식간에 복의와 그 가족들은 분노한 백성들에게 짓밟혀 몰살당했다.
- 복의를 사주한 자는 경보다!
그들은 방향을 틀어 경보(慶父)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때 경보(慶父)는 애강과 차후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 궁중에 머물러 있었다. 노민공이 죽고 계우가 달아난 일을 기뻐하며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중에 경보의 가노(家奴)하나가 황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성안 백성들이 떼를 지어 집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경보(慶父)는 놀랐다.
"내 잠시 집에 다녀오리다."
궁을 나온 경보는, 그러나 거리 가득히 메운 성난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도저히 집으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곳에서 우물쭈물하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겠구나.'
그는 재빨리 가노에게 일반 백성의 옷을 한 벌 구해오게 하여 허름한 수레를 타고 곡부성을 빠져나갔다.
"거나라로 가자!"
내궁에 앉아 경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애강(哀姜)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경보가 거나라로 달아난 것을 알고 초조와 불안에 몸을 떨었다.
"수레를 준비하라. 나도 경보 공자를 따라 거나라로 가리라."
애강(哀姜)은 이렇게 명하고 달아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애강을 모시던 궁녀들이 입을 모아 아뢰었다.
"부인께서는 경보 공자로 인해 백성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또 그의 뒤를 쫓아 거나라로 가면 다시는 노나라로 돌아올 수가 없게 됩니다. 그보다는 주나라로 가서 계우(季友) 공자에게 용서를 빌고 후사를 정하는 일에 협조하십시오."
듣고보니 그 방법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애강은 예정을 변경해 주나라를 향해 떠나갔다.
겨우 주나라에 도착한 애강(哀姜)은 계우가 머물러 있는 집 앞에 이르렀다. 문을 두드려 계우와 면담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계우(季友)의 반응은 냉랭했다.
"나로서는 부인을 만날 일이 없소."
애강은 낙담하여 면식이 있는 주나라 대부 집으로 가 머물렀다.
한편, 계우(季友)는 경보와 애강이 모두 달아나고 노나라 궁중이 텅 비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 지금이 아니면 언제 돌아갈 수 있으랴.
그는 공자 신(申)과 함께 귀국 준비를 서둘렀다. 동시에 사람을 보내 제환공에게 이번 일을 보고하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숨가쁜 움직임이었다.
공자 계우(季友)가 보낸 사자의 얘기를 듣고서야 제환공은 노나라에 변란이 일어난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지난번 노민공과 회담할 떼와는 전연 딴판이었다.
그는 관중(管仲)을 비롯한 여러 중신들을 불러놓고 뜻밖의 물음을 던졌다.
"듣자니 지금 노나라에는 임금이 없다 하오. 이 기회에 군대를 몰아 곡부성을 쳐부수고 노나라를 합병하는 것이 어떻소?"
제나라와 노나라는 건국 이후 대대로 경쟁국이었다.
제환공(齊桓公)의 등장 이래 대등한 관계가 깨어지고 제나라가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절대적 우위는 아니어서 여느 소국처럼 합병 자체를 거론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어린 군주는 살해당하고 실권을 잡고 있던 경보(慶父)는 거나라로 망명했다. 곡부성의 백성들은 연일 폭동을 일으켜 치안마저 무너진 상태가 아닌가. 반면 제나라의 국력은 중원을 호령할 만큼 강하고 안정되어 있다. 군사를 몰아 쳐들어가기만 하면 노나라를 차지하기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을 것인가.
제환공(齊桓公)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중신들의 동의만 얻으면 당장이라도 군대를 출동시킬 듯한 태도였다. 어쩌면 이미 일부 군대에는 출동 대기 명령을 내려놓았을지도 몰랐다.
제환공의 눈길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훑고 있었다.
"...........................!"
중신들은 침묵했다. 이럴 때 침묵은 동조일 수도 있다. 경쟁국인 노나라를 치자는 일 아닌가.
이윽고 제환공의 시선이 재상 관중의 얼굴에 가 머물렀다.
"중보(仲父)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기다렸다는 듯이 관중이 얼굴빛을 바로하며 되물었다.
"주공께서는 패왕지도( 覇王之道)를 아십니까?"
"별안간 그게 무슨 말이오?"
"주공께서는 이미 천하의 여러 제후국들로부터 우러름을 받는 패공이십니다. 모름지기 패왕(覇王)이라 함은 도리를 바로 세우는 것에 의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도리를 바로 세우는 것'이란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관중(管仲)은 말을 이었다.
"첫째는 강한 나라를 견제하고 약한 나라를 원조하는 것이며, 둘째는 포악한 정치를 하는 나라는 그런 짓을 못하게 하고, 탐욕스러워 침략을 일삼는 나라는 응징하는 것이며, 셋째로는 망한 나라는 다시 존속토록 하고 위태로운 나라는 안정을 도모해주는 것이며, 넷째로 대가 끊어진 나라는 대를 잇게 해주는 것. 이것이 바로 '도리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
관중의 말을 들은 제환공(齊桓公)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얼굴을 크게 붉혔다.
"그렇다면 과인은 노나라에 대해 어찌하면 좋겠소?"
"노(魯)나라는 원래부터 예의를 아는 나라입니다. 지금은 비록 임금을 죽이는 소동이 잇달아 일어났으나, 백성들은 여전히 옛날 주공의 어진 예법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노나라를 쳐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공자 신(申)은 나라를 다스리는 법에 밝고, 공자 계우는 어지러운 시국을 안정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재입니다. 그러므로 주공께서는 이 기회에 노나라에 계절(繼絶)의 은혜를 베풀어 패왕지도를 시행하심이 가장 좋을 듯싶습니다."
제환공(齊桓公)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중보의 말이 옳고 옳도다!"
그러고는 상경 고혜에게 갑사 3천 명을 내주면서 노나라 일을 돕게하니, 주나라에서 귀국한 계우는 고혜의 도움을 받아 공자 신(申)을 노나라 군위에 올려 모셨다. 이 공자 신(申)이 노희공이다.
계절(繼絶) - 끊어진 대를 잇게 하다.
이것 역시 제환공의 업적 중 하나라 평가받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관중이라는 보좌관의 대범한 정치관이 작용했음을 우리는 명확히 알 수 있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