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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떠나며 - 이연식', 일본인들의 증언과 기록, 미군정 보고서, 등을 참조하여 8.15 패전을 맞이하는 조선일본인들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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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본 천왕이 무조건 항복을 발표한다. 라디오 방송을 듣는 일본인들은 고개를 푹 숙이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가슴이 무너진다.
방송이 끝나자 마자, 부산지방교통국장 다나베 다몬은 경성에 있는 교통본국으로부터 '일본 본토로 즉시 출항할 수 있는 큰 배를 준비하라'는 긴급 지시를 받는다. 이틀 후 총독 부인 일행들이 부산에 도착하여 배에 타자 바로 출항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배가 심하게 기울면서 멈춘다. 총독 부인이 그동안 조선에서 모은 재산과 보물들을 너무 많이 실었기 때문이다. 반 이상을 바다에 버리고서야 겨우 부산항으로 되돌아 온다.
부와 권력 그리고 정보를 독점한 특권층은 일본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 먼저 도주하기 시작한다. 이를 바라보는 일본인들은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 경상도 하동소학교 평교사인 후지와라 지즈코는 돈있는 이웃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밀항선을 구해 먼저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몹시 서운함을 느낀다고 일기에 쓴다.
만주에 진주한 관동군 이야기는 유명하다. 소련군이 진격해 오자 관동군 총사령부는 만주국 고위층과 군 간부들의 가족과 재물을 군용열차에 실어 남쪽으로 피신시킨다. 피신 통보를 받지 못한 약 100만 명의 일본인들은 대부분 소련으로 끌려가 무서운 강제노역에 시달린다. 나중에 살아 돌아온 이들은 당시 관동군 간부들을 고발한다.
이런 사례는 함경도 나남(=청진)에서도 생긴다. 일본질소비료회사 공장장인 시바타 겐조는 ‘소련 해군이 함포사격을 시작하자 일본 조선군 제19사단은 나남역에 헌병대를 배치하여 몰려드는 피난민들을 쫓아내면서 군용열차에 자기들 가족들만 태워 경성으로 도망갔다.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에게 삽이나 나무 몽둥이를 들게 하여 소련군의 총알받이로 앞세웠다’ 라고 증언한다.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 지역은 더욱 심하다. 소련군은 38선을 봉쇄하고 공장 설비들을 뜯어 가면서 일본인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한다. 이러던 중 진남포에 있는 큰 기업인 일본광업주식회사의 간부 직원들이 가족들과 함께 밀항선을 구하여 남몰래 도주한다. 남은 일반 직원들은 소련군의 더욱 엄격한 감시와 억류를 받으며 도주한 간부들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자국민들의 신변을 보호해야 하는 경찰서 간부들도 도망가고 관공서 간부들 군 간부들 마찬가지이다. 가진 자들의 이런 행태들은 그동안 일본제국을 지탱해오던 굳건한 이념과 질서를 한순간에 허물어뜨리고 잠재되어 있던 불신과 갈등이 터져나오게 되는 계기가 된다.
8월 16일 오전, 조용하던 전날과 달리 경성 시내 여기저기에 조선인들이 만세를 부르며 모여들기 시작한다. 1919년 만세사건 이후 처음이다.
약 1주일 동안 913건의 습격 파괴 폭행 신고가 접수된다. 주로 경찰서, 행정관서, 신사 등이 그 대상이다. 특이한 점은 폭행 당한 피해자들 대부분은 조선인 하급 관리들이다. 이는 행정 조직의 말단은 조선인을 고용하여 이용한 총독부의 지배 방식인 점도 있지만 일본인 간부들은 일찍 도주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동안 물자를 공출하고 사람을 징발하는 등의 악역을 이들 조선인 하급 관리들이 맡아 하다보니 이들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도 작용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8월 18일, 조선인들의 잦은 습격 보고를 받은 총독부는 각 기관에 걸어둔 천왕 사진과 신사의 위패를 불에 태우라는 지시를 내린다. 승신식이다.
충남 강경경찰서의 나카무라 기미는 천왕의 방송 다음날 경찰서에 출근하니 조선인 하급관리들이 경찰서장 의자에 앉아 이제부터 자기가 서장이라면서 웃는 모습을 보고 패전을 실감한다. 밖에서는 투옥되었거나 군대에 끌려간 사람들의 가족들이 소리를 지르며 경찰서로 돌을 던진다.
1945년 9월 일본제국 외무성이 연합군사령부에 보고한 숫자에 의하면, 조선에는 일본 군인 약 27만 명, 민간인 약 85만 명이 있다.
평상시에는 온순하던 조선인들이 갑자기 관공서를 습격하고 신성한 공간인 신사를 파괴하는 모습을 보고 일본인 대부분은 이해를 못하고 의아해 한다. 조선에서 태어나고 일본인 거주지역에서만 생활한 젊은 일본인들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조선인을 접촉한 적이 별로 없다. 그나마 부유층이거나 유학파 등 일본화된 사람들뿐이다.
20년이상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한 노련한 일본인 중견 관리 오카노부 교스케도 평상시 상류층 조선인들과 자주 어울리면서 조선인을 잘 안다고 자부해왔지만 막상 해방되고 나니 그동안 상류층의 겉모습만 봤을 뿐이었다고 한탄한다.
식민지배 초기에는 크고 작은 저항들이 많았으나 3.1운동 이후 총독부의 강경한 통치가 이어지면서 일본인들의 긴장감이 점차 사라진 것이다. 심지어 패전 소식 이후에도 상당히 많은 일본인들은 자기들이 왜 고향인 조선을 버리고 타향인 일본으로 가야 하는지 수긍을 못한다.
8월 16일 하루에만 경성에 있는 은행에서 약 2억원이 인출된다. 단 하룻만에 보유하던 준비금의 5분의1일이 인출되어 나간 셈이다. 며칠만 더 이런 예금인출이 계속되면 은행이 파산하고 큰 폭동이 생기는 건 뻔하다.
8월 19일 조선군관구사령부는 일본은 연합군과 조약을 가질 것이므로 당황하지 말 것과 치안 유지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이를 믿는 일본인은 아무도 없다. 예금이 언제 동결될 지 모르니, 내 몸과 내 재산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혼란 속에 은행 인출이 계속 된다. 결국 총독부 재무국장 미즈타 나오마사는 조선에서 조선화폐를 가지고 다니면 위험하니 인출하지 말고 경성은행 통장으로 일본에 가면 일본화폐로 인출할 수 있다고 허위 발표도 한다. 예금 인출 사태는 점차 지방으로 확산된다.
급격히 늘어난 조선화폐를 일본화폐로 바꾸어주고 이를 다시 귀국하는 조선인들에게 되파는 환전상들이 큰 돈을 번다. 일본인들의 재물을 싸게 사들이고 밀항선을 알선하고 밀수를 하고 새로운 부자들이 탄생한다. 시중에는 물자들이 넘쳐난다. 남대문 시장에는 쌀, 설탕, 밀가루, 옷감, 가죽들이 산더미처럼 쌓인다. 일본인 집 앞에도 팔려는 세간살이들이 마구 나온다. 빨리 팔고 빨리 밀항선을 타야 한다는 일본인들이 점차 늘어난다. 밀항선을 타는 항구에는 이런 물건들을 사고 파는 도깨비 시장들이 호황을 이룬다.
총독부도 이런 사태를 지켜볼 뿐이다. 8월 20일을 전후하여 일본인들의 신변을 보호하고 귀국을 돕기 위한 민간단체 즉 세화회 (=경성내지인세화회)가 각 지역에서 결성된다.
9월 9일 미군이 진입한다.
9월 19일 연합군총사령부의 지시로 아베 조선총독과 일본인 고나리들이 해임되고 미군들이 행정을 대신 한다. 미군정이다. 미군정은 귀국하는 일본인들에게 일인당 1천엔과 휴대할 수 있는 짐만 가져가게 한다.
일본인들은 밤마다 짐보따리를 풀었다 묶었다 하면서 어떻게 하면 비싼 물건을 더 많이 가져갈 수 있을까 궁리하고, 무거운 짐보따리를 등에 짊어지고 넘어지지 않고 걷는 연습도 하고, 귀중품과 현금을 속옷에 숨기는 방법도 서로 나눈다.
인천세화회 회장인 고타니 마스지로는 귀환열차에 오르다가 무거운 등짐 때문에 쓰러져 일어서지도 못하고 버둥대는 여자와 큰 짐을 지고 울면서 걸어 가는 어린 아이들을 보며 패전국민으로서 추방 당하는 자신들의 참담한 모습에 눈물을 흘린다.
그나마 남한의 일본인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북한에 진주하는 소련군은 모든 재물과 가재도구 곡물들을 수탈한다. 남자들은 강제노역을 시키거나 소련으로 강제송환시키고 여자들을 폭행한다. 소련군의 전통적인 현지조달 방식이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까 마사시는 천황의 항복 발표 이후 매일의 일상을 글로 남긴다.
' ... 8월 15일 방송을 듣는 순간 앞으로 만만찮은 고난이 펼쳐질 것을 직감한다.
다음날 여기저기서 조선인들의 만세소리가 들려온다.
8월 17일 학교에 가니 대학자치위원회가 결성되어 있다. 그들에게서 통행증을 받았다.
며칠 지나니 조급한 마음에 세간살이를 먼저 팔아치운 이웃들은 귀환 열차도 못타고 오히려 불편하게 지낸다. 경성의 최고 엘리트들도 당황하면 똑같다.
일주일 쯤 지나니 그동안 숨어있던 관리자들이 슬며시 나타나 여기저기서 큰소리를 친다.
무작정 항구로 가는 사람, 어떻게든 조선에 눌러앉으려는 사람, 일본 본토도 이미 초토화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 온갖 모습으로 혼란스럽다.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 사람은 벌써 밀항선을 타고 도망갔다. 본토에 친척이 있거나 조선에 생활 기반이 없는 사람은 본토로 건너갈 방법을 찾는다. 기왕 건너간다면 하루라도 먼저 가야 기회를 잡는다고 서두른다. 조선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어떻게든 남아있으려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닌다. 조선의 일본인들은 머리가 복잡하다.
한 달도 안되어 경성 거리에는 오히려 활기가 넘친다. 푸줏간에 고기가 걸리고 술집도 문을 연다. 일본인들은 가재 도구를 들고 나와 빼앗기듯 겨우 돈으로 바꾼다. 신사 입구에 이상한 간판들이 내걸려 있다. 관공서의 문서도 바뀌고 경성일보도 바뀌고 라디오 방송도 조선어로 한다. 일본인들은 정보를 얻지 못하여 더욱 혼란에 빠진다..
미군정의 지시에 따라 일본군인 일본경찰 일본 관리 순서대로 강제 귀국된다. 10월부터는 일반인들의 귀국 순서가 돌아온다.
북한 지역에서 넘어온 일본인들을 수용하는 수용소가 14개나 만들어진다. 이들은 지옥에서 탈출했다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재민 진료소가 설치된다. 본토의 하카타 항구에는 더 큰 진료소가 있다. 여기는 북한에서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아녀자들의 낙태를 해주는 곳이다....'
이듬해 1월 23일 경성을 떠나는 그는 '...민족대이동의 비극을 보았다...'고 일기에 쓴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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