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아동문학 2023 겨울호
다슬기/고이
오늘은 2학년 첫날이에요.
“안녕? 나는 지아야.”
옆자리에 앉은 여자아이가 인사했어요.
“어? 아, 안녕? 나는 지누야…….”
까까머리 홍이가 홱 뒤돌아봤어요.
“어라? 둘이 이름이 비슷하잖아. 지누랑 지아! 뭐야, 뭐야? 둘이 사귀는 거야?”
홍이가 깔깔대며 놀렸어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홍이랑 또다시 같은 반이 되다니! 난 정말 운이 나빠요. 홍이는 소문난 말썽꾸러기란 말이에요.
나는 책상에 탁탁! 소리가 나게 책을 올렸어요. 기분 나쁜 티를 내려고요. 그때 옆에 있던 지아가 중얼거렸어요.
“그러네. 정말 잘 어울리는걸?”
나는 깜짝 놀라 지아를 쳐다봤어요. 지아가 나를 보며 생긋 웃었어요. 그때였어요. 지아 콧잔등에 애벌레 한 마리가 나타났다 사라졌어요.
처음엔 몰랐어요.
지아 웃는 모습이 조금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바로 코 때문이었어요.
지아는 코를 잔뜩 찡그리며 웃어요. 마치 코로 하는 윙크처럼요!
콧잔등을 찌푸릴 때마다 쪼글쪼글 주름이 생겨요. 마치 애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아요.
나는 지아가 웃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어요.
“지누?”
지아가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어요. 내가 넋을 잃고 보던 걸 들켰을까 봐 창피했어요. 내일부턴 절대 지아를 보지 않을 거예요.
이상한 일이에요.
집에 와서도 자꾸만 생각나요. 지아가 웃는 모습 말이에요. 지아가 웃을 때마다 내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요.
지아는 모든 아이에게 그렇게 웃어요. 코찔찔이 민구에게도 썰렁맨 은재에게도요. 심지어는 맙소사! 내가 싫어하는 홍이에게도 찡긋, 코 윙크를 해요!
알아요. 저 미소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요. 그렇지만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어요.
쉬는 시간이에요.
“지아야, 너 누구 좋아해?”
예나가 물었어요.
‘좋았어, 예나!’
새침데기 예나가 오늘만큼 예뻐 보인 적이 없어요.
나는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어요. 지아 대답이 들리지 않아요.
‘지아야. 조금만 크게 말해 봐.’
나는 코끼리만큼 크게 귀를 키웠어요. 그러다 나도 모르게 지아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어요.
세상에! 지아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어요!
지아가 나를 보며 쌩긋 웃어요. 애벌레 한 마리가 또다시 나타났다 사라졌어요.
예나가 찡얼찡얼 보챘어요.
“얼른 말해줘. 궁금하단 말이야.”
지아는 그냥 웃기만 했어요.
그날 밤 나는 한숨도 못 잤어요.
지아도 나를 좋아하는 걸까요? 그래서 나를 보고 웃었던 걸까요?
지아 콧잔등에 사는 애벌레가 꼬물꼬물 기어 왔어요. 내 심장을 톡톡 건드렸어요. 심장이 팔딱팔딱 개구리로 변했어요. 매일 뛰는 심장이지만, 어제와는 다른 느낌이에요. 심장이 오늘 처음 태어난 것 같아요.
오늘 나는 지아에게 고백할 거예요.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교실 앞이에요. 멀기만 하던 길이 이렇게 짧아지다니! 지아는 정말 놀라운 아이예요. 마법을 부리는 게 틀림없어요.
그래요. 나만의 마법사!
지아에게 그 말을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하지만 교실 문을 여는 순간, 나만의 마법사는 요술 빗자루를 타고 휘잉 날아가 버렸어요.
지아가 홍이와 마주 보며 이야기하고 있어요. 지아가 홍이를 보며 까르르 웃어요.
찡긋, 찡긋, 찡긋.
애벌레 세 마리가 한꺼번에 지나갔어요.
나는 꽁꽁 얼어버렸어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어요. 정말이지 바보 같았어요.
나는 수업 시간 내내 화가 나 있었어요. 선생님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앞에 앉은 홍이 뒤통수를 노려봤어요. 동그란 머리통이 수박 같아요.
"지누야?“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봐요.
앗!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요? 홍이를 째려보느라 까맣게 몰랐어요.
“어디 아프니? 잔뜩 인상을 쓰고 있네.”
“칠판이 안 보여서요…….”
“칠판이?”
선생님이 나를 보고 칠판을 보더니 다시 나를 봤어요.
선생님이 놀라는 게 당연해요. 나는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있으니까요.
“어, 그게 수박 때문에…….”
“수박?”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했어요. 아이들이 키득키득 웃었어요. 내 앞에 앉은 수박 머리통도 뒤돌아 앉아 킥킥 웃어요. 자기 때문에 이 난리가 난 것도 모르고 말이에요.
선생님이 다시 수업을 시작했어요.
“여러분, 짝꿍을 보면 떠오르는 동물을 말해볼까요?”
홍이가 손을 번쩍 들었어요.
“카멜레온이요! 예나는 빨주노초파남보 매일 다른 색깔 옷을 입고 와요!”
“와아, 멋져요! 홍이가 짝을 잘 관찰했네요.”
홍이가 어깨를 우쭐우쭐 흔들었어요.
치, 저게 뭐예요. 볼수록 밉상이에요.
다음은 예나 차례예요.
“홍이는 얼룩말 같아요. 쉬는 시간마다 복도를 마구 뛰어다니거든요.”
홍이가 “이히잉!” 소리를 내며 따그닥 따그닥 말 달리는 흉내를 냈어요. 아이들이 배를 잡고 웃었어요.
선생님이 말했어요.
“다음은 지누가 말해볼까?”
나는 엉거주춤 일어섰어요.
“어, 지아를 보면…….”
지아가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봐요.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어요.
“……애벌레가 생각나요.”
“뭐어? 애벌레?”
“우하하! 애벌레래, 애벌래!”
아이들이 탕탕 책상을 두드리며 마구 웃어댔어요.
갑작스러운 소란에 선생님은 어쩔 줄 몰라 했어요. 그때였어요.
“선생님! 지아 울어요!”
지아가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어요. 나는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어요.
“왜냐하면……왜냐하면…….”
나는 작은 소리로 우물거렸어요. 하지만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았어요.
망했어요.
수업이 그대로 끝나버렸어요.
선생님은 이유를 묻지 않았고, 나는 영영 대답할 기회를 잃어버렸어요.
지아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어요.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어요.
아이들은 지아를 애벌레, 송충이, 굼벵이라 놀려댔어요. 그때마다 지아는 두 팔에 얼굴을 묻고 울었어요.
너무 슬펐어요. 지아와 나 사이에 우주만큼 커다란 공간이 생긴 것 같아요. 지아는 옆에 있지만 지구와 달만큼 멀리 떨어진 느낌이에요. 나는 깜깜한 우주 속을 혼자 떠다니고 있어요. 창밖은 따스한 봄이지만 나의 우주는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에요…….
토요일이에요. 엄마 아빠와 냇가에 갔어요.
“다슬기가 안 보여요.”
내가 시무룩하게 말했어요.
“지누야, 바위 뒤를 잘 살펴보렴. 다슬기는 꼭꼭 숨어있단다.”
아빠가 말했어요.
나는 커다란 돌을 들어보았어요. 정말로 다슬기가 따닥따닥 붙어있어요.
다슬기 한 마리를 손바닥에 올렸어요. 햇살을 받은 다슬기가 반짝반짝 까맣게 빛나요. 문득 지아 생각이 났어요. 꼭꼭 숨은 지아 마음을 보고 싶어요.
마음은 왜 보이지 않는 걸까요? 눈에 보이면 좋을 텐데.
바위 뒤에 꼭 붙은 다슬기처럼
들추면 보이는 다슬기처럼.
그날 저녁 식탁에서 엄마 아빠는 시끄럽게 떠들어댔어요.
나는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지누? 무슨 생각해?”
“……애벌레요.”
나는 지아를 생각하며 말한 거예요. 그걸 알 리 없는 엄마가 소리를 질렀어요.
“애벌레? 어머, 징그럽게!”
엄마가 몸서리를 쳤어요.
“오, 멋진데?”
아빠가 싱긋 웃었어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어요.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요. 애벌레가 얼마나 예쁜데. 얼마나 사랑스러운데.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어요.
“자니?”
아빠가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었어요.
나는 일부러 자는 척했어요.
얼마나 지났을까요? 나는 살며시 눈을 떴어요.
으악! 하마터면 소리 지를 뻔했어요. 아빠가 나를 내려다보며 씨익 웃고 있어요.
나는 벌떡 일어나 베개를 끌어안으며 말했어요.
“아빠, 난 지아가…….”
거기까지 말하고 지아 얼굴을 떠올렸어요.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졌어요.
“아니, 애벌레가 정말 좋은데…… 엄만 그걸 이해 못 해요.”
아빠가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봐요. 뭔가 곰곰 생각하더니 배시시 웃어요.
“지누야, 애벌레는 뭘 좋아할까?”
“몰라요.”
나는 한숨을 푹 쉬었어요.
아빠는 언제나 내 말에 대답은 안 하고 엉뚱한 질문을 던져요. 어떤 날엔 재미있지만, 오늘은 아니에요.
“지누야,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잘 봐야 해.”
나도 알아요. 그래서 답답한 거예요. 지아 마음이 하나도 안 보이니까요.
“하지만 지누, 마음을 보여줄 수는 있지.”
아빠가 이마에 쪽 입을 맞추곤 방을 나갔어요.
나는 책상에 놓아둔 유리병을 바라봤어요.
돌멩이 뒤에 숨어있던 다슬기가 슬금슬금 기어 나와요. 작은 더듬이를 까딱까딱 움직여요. 나 여기 있다고 손짓하는 것만 같아요.
‘마음을 보여줄 수는 있지. 마음을 보여줄 수는 있지…….’
아빠 말이 벌떼처럼 귓가를 웽웽 울렸어요.
아침이 밝았어요.
나는 예나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무슨 일이야? 지아 집은 왜? 얼른 말해줘. 궁금하단 말이야.”
예나가 시끄럽게 굴긴 했지만, 결국 지아 집을 알아냈어요. 다행히 우리 집이랑 엄청 가까워요.
나는 아빠에게 살짝 귓속말했어요.
“저 애벌레 보러 가요.”
아빠가 찡긋 윙크했어요.
지아집 초인종을 누르자 지아 아빠가 나왔어요.
“누구지?”
“어, 어……저는……”
그때 아저씨 등 뒤로 아직 잠이 덜 깬 지아가 나타났어요. 부스스한 머리를 한 지아는 정말 예뻤어요.
나는 등 뒤에 숨겨둔 스케치북을 꺼냈어요.
노랑나비 한 마리를 지아가 봐요.
까만 크레파스로 꼭꼭 눌러 쓴 내 마음을 지아가 읽어요.
지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봐요.
아…… 지아 마음이 꽉 닫힌 걸까요? 다시는 열리지 않는 문이 된 걸까요?
나는 스케치북을 들고 엉거주춤 서 있었어요.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망설였어요. 그때였어요.
지아가 살며시 손을 내밀었어요. 나는 얼른 스케치북을 주었어요. 지아가 커다란 나비를 품에 안았어요.
“고마워, 지누.”
지아가 환하게 웃었어요.
순간, 애벌레 한 마리가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졌어요.
봄이 왔어요. 지아와 나의 우주에 연둣빛 봄이 찾아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