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양면 용산리 ‘뒷솔밭’에 청동기시대 고인돌 유적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 우리고장의 명소를 탐색해 보던 중 1970년대에 옛날 우리가 뛰놀던 뒤솔밭에 흩어져 있던 큰 바위 들이 청동기시대 고인돌(支石墓) 유적이라는 글을 발견하였다.
즉 지금부터 3천여 년 전인 청동기시대에 우리 마을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르고 보니 선무랑공께서 무오사화를 피해 자양의 노항에 자리 잡으신 것이 약 백년 500여전인데 특히 손자이신 호수공이 계셨던 강호정(자호정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고인돌이 산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몰 직전에 고향을 방문했을 때 바위 밑을 파헤친 흔적이 있어 물어보니까 경대박물관에서 교수들이 고인돌인지를 조사를 했는데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도 지금 까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우리 마을의 뒷솔밭에 흩어져 있는 바위에 대한 이야기인데 길 가에 있는 한 평정 도의 넓적하고 평평한 바위에 모여앉아 ‘꼰’을 뜨며 놀랐고, 그 바위에 짐을 지고 가다가 그 위에 지게를 세워두고 쉬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설에는 그곳에 모여 있는 바위들이 옛날 장군들이 모여앉아 공기놀이를 한 공기돌 이라고 했다. 그 큰 바위를 어떻게 손에 넣어 들고 공기놀이를 했을까하는 장군의 힘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나는 어릴 때 고향에서 자라며 장군에 대한 전설을 많이 들었기에 나도 크면 장군이 되어야지 하는 꿈도 꾸어보았다.
처음 수몰 될 때 까지는 그 바위들이 그대로 물속에 잠겼는데 그르다 물이 줄어 우리 마을 터전이 노출 되었을 때에 운계형님과 같이 간 일이 있었다. 그 때는 그 고인돌인 바위들은 그대로 있어서 바위 위에서 사진도 찍었다.
그때 까지 우리가 올라앉아 찍은 바위에 인구(寅丘)란 글씨가 뚜렷이 새겨져 있었 는데 그 훗날가보니 바위들은 모두 없어졌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도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고, 누가 그 사실을 행정당국은 알고 있었는지?
는지?
마당지산 끝자락 즉 전망 좋은 부채꼴의 지형인 사진의 호숫가에 튀어 나온
끝부분에 고인돌 무리들이 있었다.
운계형님과 고인돌의 하나인 바위에 올라앉아 옛 추억을 회상해 봤다.
나의 오른손 아래쪽 바위에 인구(寅丘)란 글씨가 뚜렷이 새겨져있었다.
다음은 [네이버 지식백과] 용산동 고인돌 [永川 龍山洞 支石墓] (고고학사전, 2001. 12.,
국립문화재연구소)를 내용을 그대로 이기한다.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에 있는 청동기시대 고인돌(支石墓) 유적이다. 1978년 경북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용산동 고인돌은 금호강의 한 지류인 자양천 근처의 전망 좋은 선상지(扇狀地)에 입지하고 있고, 발굴 당시 현존하던 10기의 고인돌 중 7기가 조사되었다. 조사된 자료 중 6기는 모두 반경 20m 내외에 모여 있었고 1기만이 약 75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고임돌(支石)을 갖춘 고인돌은 7기 중 4호 고인돌 1기뿐이며, 여타 고인돌에서는 1·2·5·7호 고인돌처럼 고임돌을 갖추지 않았고, 덮개돌(上石) 아래에 작은 돌들을 넓은 면적에 깔아 두었다. 고임돌을 갖춘 4호 고인돌에는 이와 같은 잔돌을 깔지 않고 있다. 1호 고인돌과 7호 고인돌에서는 마치 방형(方形)의 묘역처럼 깬돌(割石)이 구역을 이루며 모여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1호 고인돌에서는 돌널(石棺)이 발견되었으나, 여타 고인돌에서는 석층(石層)이 덮개돌을 받는 부분에서만 약간 높았을 뿐 전체적으로 편평한 면을 이루고 있었다. 하부구조가 고임돌만 남아 있고 다른 시설이 없거나 돌덧널(石槨) 형태이지만 1단 정도를 돌린 돌돌림(圍石) 형태의 형식 등 허술한 하부구조를 지니는 고인돌은 경북지방의 동쪽지역에 주로 산재해 있으며 이것이 이 지역 고인돌의 공통된 형식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청동기시대는 대체로 BC 10세기경으로 소급되는데, 중국의 요녕 지방, 시베리아 지역의 청동기문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요녕 지방에는 일찍이 비파 모양의 청동단검으로 특징지어지는 독특한 청동기문화가 형성되었다. 그 후 점차 한반도의 독자적인 청동기라고 할 수 있는 세형동검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지는 토기는 한반도 서북지역의 팽이형 토기, 남한지역의 무늬 없는 토기 등이 있다. 팽이형 토기는 각형 토기라고도 하는데, 바닥의 직경이 3~4cm밖에 되지 않는 좁은 평저이고, 윗부분은 밖으로 말려져 이중형을 띠고 있다. 태토에는 점토에 모래·활석·석면들이 섞여 있는데 주로 청천강 이남과 한강 이북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무늬 없는 토기는 화분 모양의 평저 토기를 기본으로 하여 윗부분에 구멍[孔列]무늬가 장식되어 있는 것도 있다.
청동기시대의 석기는 마제석검, 반달돌칼, 돌도끼 등과 같은 마제석기가 있다.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는 움집으로 대체로 강을 바라보는 얕은 구릉지대에 분포해 있으며, 신석기시대의 주거지에 비해 깊이가 낮아지고 면적도 넓어진다. 이는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어 농경이 본격화되면서 경제력이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농경활동을 증명해주는 도구로서는 반달돌칼·홈자귀·괭이 등이다. 경기도 흔암리 유적에서는 쌀·보리·조·수수, 충남 송국리에서는 쌀, 평양 남경 유적에서는 쌀·조·콩·기장·수수 등이 탄화된 형태로 발견되어 당시의 농경생활을 짐작케 해준다. 또한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신앙의 측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경남 울주의 반구대 암각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