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주나물의 유래
신숙주는 조선 세종때의 집현전 학자로 성삼문과 함께 한글을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신숙주는 중국어,여진어,몽골어 등 7개의 언어를 구사하고 여러 차례 명나라를 오가며 한글을 만드는데 힘썼다.특히 신숙주가 밤늦게까지 집현전에서 학문 연구를 하다가 깜박 잠이들자 그 모습이 대견스러웠던 세종이 친히 용포를 벗어 그에게 덮어 주었고,아침에 잠이 깬 신숙주가 성은에 감격해 울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임금도 감동시킨 이런 신숙주가 현재 ‘배신’의 대명사로 낙인이 찍힌 이유는 무엇일까?세종은 죽기 직전에 성삼문과 신숙주에게 단종을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다.아들인 문종의 쇠약함을 알기에 손주인 단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를 염려해서였다. 하지만 단종이 여러 중신들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본 신숙주는 세종의 부탁을 뒤로 한 채 수양대군의 정치활동에 동조하게 된다.어린 단종으로 인해 신권(신하의 권력)이 왕권에 비해 막강해져 나라의 기강이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그렇게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단종을 압박하고 세조(수양대군)의 즉위를 도우며 공신의 자리까지 오른다.
반대로 그와 절친했었던 성삼문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하며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다섯명의 집현전 출신 학자들(이개,박팽년,하위지,유성원,유응부)과 세조를 암살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는 작전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처형당하게 된다.이들이 바로 ‘사육신(死六臣)’이다.하지만 그들과 같은 집현전 출신이었던 신숙주는 세조 옆에서 그들의 고문 장면을 지켜봤으며 성삼문의 질타에도 묵묵히 있었다고 한다.사육신이 처형당한 그날,신숙주의 부인이 퇴근한 신숙주에게 “왜 죽지 않고 살아왔냐”며 비난하다 다음날 아침 목을 매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하지만 신숙주는 이에 그치지 않고 폐위된 단종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백성들에게 배신의 대명사로 각인됐다.
그의 변절에 크게 실망한 백성들은 쉽게 상해버리는 녹두나물을 “쉽게 변절하는 ‘신숙주의 이름을 넣어 숙주나물”이라 부르기 시작했다.이용기의 <조선무쌍요리제법>을 보면 당시 백성들이 녹두나물을 만두 안에 넣기 전에 미리 짓이기는데,신숙주를 이 나물 찧듯 하자고 하여 ‘숙주나물’이라 유래 됐다고 한다.
숙주나물은 하루를 넘기지못하고 쉬어 버리므로 조선시대의 유명학자로서 머리가 총명하여 두뇌회전이 빠르고 약삭빨라 교묘한 처세술과 아침, 저녁때의 생각이 달라 그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분간하기어려운 기회주의자 였던 신숙주 에 의하여 유래되었다는 것으로 이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교훈을 주기도 한다.
어제의 동지들을 배신하고 저만이 살아남기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부려 역사에 부끄러운 짓을 한 더러운 오명 보다는 끝까지 절개를 지키며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한 충신 정몽주는 신숙주에 비할정도의 두뇌나 학식이 풍부하지 못했지만 역사의 추앙을 받고 있는것은 새삼 느끼는바가 크다 할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