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윤기진 (尹起晉)
1854년(철종 5) ~ ?, 본관은 파평(坡平), 부친은 명훈(命勳)으로 고종(高宗) 19년(1882) 임오(壬午) 별시2 병과(丙科) 7위로 합격하여 1883년(고종 20)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主事)로 임명되어 1884년(고종 21) 7월까지 주사직을 역임하였다.
1884년(고종 21)에 행해진 주천(注薦)에서 민영수(閔泳壽)‧송병주(宋秉宙) 등과 함께 천망(薦望)을 받았다. 같은 해 홍문록(弘文錄)에 이름을 올렸고, 다음 해에는 도당록(都堂錄)에 이름이 올랐다. 이후 주로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집의(執義)‧헌납(獻納) 등 대간직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부교리(副敎理) 등에 임명되었다.
1887년(고종 24) 사헌부 장령으로 대사헌(大司憲) 한경원(韓敬源) 등과 함께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재필(徐載弼)‧서광범(徐光範)을 아직 처벌하지 못했으니 조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90년(고종 27) 헌종의 모친인 신정왕후(神貞王后)가 사망하였을 때 이조참의(吏曹參議) 한용교(韓龍敎)가 곡반(哭班)에 참가하지 않았으니, 유배할 것을 주장하여 결국 한용교는 중화부(中和府)로 유배되었다.
이후 첨지중추 부사(僉知中樞府事)‧예조 참의(禮曹參議)‧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임명되었고, 1894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제수되었다. 1897년(광무 1) 김재현(金在顯)‧이호준(李鎬俊)‧김영수(金永壽)‧민영준(閔泳駿)‧조병식(趙秉式) 등과 함께 황제의 칭호를 사용할 것을 청하였다.
같은 해 정은조(鄭誾朝)‧이남규(李南珪)‧조남식(趙南軾) 등과 함께 중추원 이등의관(中樞院二等議官)에 임명되고, 1898년(광무 2) 이후에는 옥구 군수(沃溝郡守)‧여산 군수(礪山郡守)를 지내고, 1901년(고종 38년) 11월 28일 비안 군수(比安郡守)에 임명되었다가, 1902년(고종 39) 5월 9일에 곽산 군수(郭山郡守)에 임명되었다.
조선의 성립부터 1895년(고종 32)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대동기년(大東紀年)』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였던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ulbert, H.B.)의 위촉과 알선으로 상해(上海) 미화서관(美華書館)에서 출판되었는데, 총 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