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전시관 관람을 위한 예습으로
다음 시간은
오창석과 제백석을 공부하겠습니다.
오창석(吳昌碩1844-1927)
절강성 안길현 강오촌에서 태어났으며 학자 집안 출신이었다. 이름은 준경(俊卿)이고 창석은 호였다. 호는 여러 가지이다.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고, 곧 서당에 가서 글을 배웠다. 10세 때는 인장 새기는 것을 배웠다.
고향에서 청나라 정부군과 태평천국 군이 전투를 벌이자 17세 때 가족이 산속으로 피난을 갔으나 남동생과 여동생이 잇달아 굶어 죽었다. 이후로 안휘성과 호북성을 떠돌면서 온갖 힘든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 살았다. 21세가 되어서야 고향에 돌아왔으나 모든 가족이 죽었고 아버지와 둘만 남아서 농사를 지었다.
22세 때 오흥 처녀 시주를 아내로 맞아 결혼을 하였다. 결혼을 하고 곧 집을 떠나 항주, 소주, 상해 등지로 떠돌아 다녔다. 스승도 찾고 친구도 만들었다. 유월(兪越)에게서 詩와 詞를 배웠다. 양현(陽峴)에게 서법을 배웠다. 상해에서 사귄 친구는 장웅, 호원, 포화, 육히 시욕승, 제정원, 심근, 반조음, 오운, 오대징 등으로 화가, 시인, 소장자 들이었다.
1882년에는 가족을 데리고 소주로 이사하였다고 다시 상해로 옮겨서 정착하였다.
오창석은 30세가 넘어서야 그림에도 흥미를 느끼고 공부하였다. 이미 훌륭한 서법을 익히고 있었으므로 전서의 필법으로 화조를 그렸다. 친구 고옹의 소개로 임백년을 만나서 그림을 배웠다. 이후로 두 사람은 아주 돈독한 우정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였다. 이때 진선, 서위, 팔대산인, 이선, 이방응의 영향을 받았다.
50세 이후에는 그의 그림이 발전을 거듭하였다. 당대의 유명화가들인 장사령, 장맹천, 조지겸, 임백년, 호공수, 장웅, 포화 등의 용법을 익혔다.
1896년에 임백년이 죽자 오창석이 해상화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1904년에는 전각가 섭위명, 정인, 오금배, 양식 등이 모여서 인장에 대한 토론을 하였다. 1913년 중앙절에 항주에서 서령인사(西泠印社)를 결성하여 회장이 되었다.
후학 양성에도 열성적이었다. 진자증, 제백석, 왕진, 반천수, 진반정, 왕개이, 사맹해가 그의 제자이다.
50-65세까지는 화풍의 변화가 나타났다. 65세 이후는 오창석 화풍의 대성을 이룬 시기이다. 1927년에서 상해에서 87세를 일기로 죽었다.3남1녀 중에 오함과 오동매는 서화와 전각ㅇ 뛰어났다.
오창석의 회화 제재는 화훼가 주류를 이루었다. 비교적 늦게 그림을 배웠으므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는 40세가 지나서 였다.
오창석은 매화 그리기를 좋아 하였다. 난초도 잘 그렸다. 대나무, 국화도 그가 흔히 다룬 제;재이다. 만년에는 모란도 많이 그렸다. 그림 위에 쓴 시구가 뛰어나서 시, 서, 화, 인이 하나로 융합되게 함으로 근대 화조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법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오창석은 전각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오창석의 전각이 가장 성숙하고 예술의 성취도가 큰 분야였다.
오창석은 예술은 쉽게 이해되어야 일반 대중들과 쉽게 소통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이 말이 그의 예술이 대중화되고 인기를 얻었던 이유일 것이다.
오창석(吴昌硕, 1844-1927)은 청조말에 활동한 유명 서예가이며 화가로서 호는 부려(缶廬)를 비롯하여 고철(苦鐵), 대농(大聾), 파하정장(破荷亭長) 등을 사용했다. 시, 서, 화, 전각 등을 두루 잘해 사절(四絶)이라 불리웠다. 평생을 석고문을 임서하여 얻어진 필법과 전각의 장법을 회화에 도입하여 그만의 독특한 예술을 완성하였다. 임백년, 조지겸, 허곡, 황빈홍과 함께 해상화파(海上畵派)의 대표 화가이다. 시집으로 「부려집」, 인보로 「삭고려인존」 「부려인존」, 서화집으로 「고철쇄금」 등이 전한다.
오창석은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전각에서 시작하여 서법을 학습한 뒤, 30세 이후 임백년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50세 이후에는 시, 서, 화의 삼위일체를 완성하는 완숙하고 개성있는 작품을 남겼다. 오창석의 문인화는 신문인화로 불리는데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모란, 연, 수선, 송백, 과일과 채소 등 평범한 소재를 즐겨 그렸다. 그의 작품은 임백년과 조지겸의 영향을 받아 원색 계열의 화려한 색채를 많이 쓴 것이 특징이다. 그는 상해에서 활동한 모든 해상화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전해져 우리나라 근대 문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 망명했던 민영익, 서병오와 깊은 인연을 맺었으며, 김용진, 이한복, 서동균 등이 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창석의 작품은 청조 말기와 민국 초기에 상해를 오가던 일본상인들에 의해 전해져 다수의 작품이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천도복숭아는 중국인들에게 불로장생과 이상향의 상징으로서 오창석의 수도도(寿桃图)는 제백석의 작품 못지않게 유명하다.
152.제백석(齊白石1863-1957)
호남성 상담현 백석포향에서 태어났다. 산 골짝 마을에서 논 한 마지기 없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첫 손자여서 사랑을 듬뿍 받았다. 4세부터 할아버지에게 글을 배웠고, 7세 때는 할아버지가 알고 있는 300자를 모두 익혔다. 이후로 서당에 다니면서 글을 배웠다. 그림도 조금씩 익혔다. 16세 때는 나무에 물상을 조각하는 목공 기술을 배웠다. 그때까지 목공은 장인으로서 배운데로 새기는 것이었으나 제백석은 나름대로의 독창성을 발휘하였다.
20세가 되었을 때 우연히 개자원화보를 보고 그림 그리는 기법을 익혔다.
제백석이 중, 장년이 되는 1900년 대는 중국이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림도 잘 팔리지 않자. 55세 때 고향인 백석포향을 떠나서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도 그림을 그리고 도장을 새기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북경에서 생활할 때 다른 화가들이 유명한 화가를 그대로 본 따서 그리면서 전통적인 회화로 자부하였으나 제백석은 팔대산인을 주로 따르면서 사의화(寫意畵)를 그렸다. 그가 주로 추종한 화가는 이외에도 서위, 석도, 양주팔괴, 조지겸, 임이, 오창석 등이었다.
진사중을 만나서 ‘제백석 자신만의 독창성이 있는 그림을 그리라’는 충고를 듣는다. 이 말에 공감하여 전통을 이어면서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초상화를 그려서 생활을 꾸렸다. 그림 솜씨가 알려지자 생활도 좋아졌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마흔 살까지 그림을 그리느라 여행 한 번 못 하였다. 그는 옛 그림을 따라 그리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본 것을 그리기 위해서 여행을 떠났다. 서안, 천진, 북경, 상해 등지로 여행하면서 실경을 직접 그렸다. 이후 몇 차례 여행을 하였다. 그의 회화 평을 요약한 글을 보자.
“제백석의 회화에 나타나는 필묵의 맛은 중국의 전통적인 것이지만 회화 형식은 중국 현대의 것이다. 그의 사상을 포함한 회화 예술의 총체는 바로 20세기적인 세계성을 가지고 있다.”
위의 평처럼 제백석의 회화는 19세기와 20세기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제백석의 작품은 인물, 산수, 화조 등 모든 분야를 섭렵하였으나 그 중에 사의화조화(寫意花鳥畵)가 미술사적인 효과가 뛰어났다.
제백석은 전통적인 주제를 벗어나서 노동 생활 등 세족적인 내용을 생동감있게 그렸다. 당시의 문인들은 거들떠보지 않던 주제들이었다. 제백석은 민간 미술의 지저분한 부분은 떨쳐내고, 문인화의 깔끔한 부분을 필법을 조화롭게 융합시켰다. 전법(篆法)과 금석(金石)의 기법을 곁들여서 독특한 홍화묵엽(紅花墨葉--붉은 꽃과 검은 잎을 위주로 그린 그림)의 일파를 이루었다.
1920년 대의 중국 산수화는 사왕파(四王派), 황산파(黃山派), 원체파(院体派)가 유행하였으나 제백석의 산수화는 스스로 경험한 것을 그렸다. 산수에서 고산이나 기암절벽은 그리지 않았다. 연못, 강, 저녁노을 등 그가 경험한 사실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였다. 당시에는 그의 산수화가 배척을 받았다.
제백석의 인물화는 공필화에서 사의화로 바뀌었다. 아주 정밀하고 섬세한 초상화 기법을 배워서 그렸으나 30세 이후에는 사녀화를 그렸다. 40세 이후에 비로소 산수화를 그리면서 사의화로 방법을 바꾸었다. 인물화도 정교함에서 감필사의(減筆寫意) 쪽으로 바뀌었다. 그가 이룩한 인물화는 간필(簡筆)이었다. 이를 의필(意筆)이라고 하였다. 그의 인물화는 오대의 왕흡, 송의 양해, 명의 서위, 장풍을 거쳐 청대의 황신으로 이어지는 계통을 이었다. 제백석 인물화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 해학성을 꼽는다. 노년에 이르러서는 붓을 몇 번만 움직여서 자신의 의도하는 바를 그려낼 수 있었다.
제백석의 그림이 중국에서 잘 팔린 것은 아니었다. 일본에서 전시회를 가지고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중국에서도 그의 그림을 좋게 평가하였다. 처음에는 수집가들이 그의 그림을 샀으나 나중에는 민간인들도 그의 그림을 구하려고 하였다.
북경에서 가진 전시회를 당시 북경예술전문대 교장이었던 서비홍이 그림을 보고 교수직을 요청하였다. 학력도 없고,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일도 없다면서 거절하였으나 몇 번의 요청으로 교수직을 맡았다. 학생들에게 대상을 직접 관찰할 것을 주문하였다.
1931년에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하였다. 마침내는 북경도 일본군의 손에 들어갔다. 제백석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일본인이 많았지만 일본인에게는 절대로 그림을 팔지 않았다고 한다.
1946년에 북평미술가 협회를 창립하여 서비홍이 회장이 되고 부회장이 되었다. 1950년에 중앙미술학원을 창립하였을 때도 시비홍은 원장이 되고 명예교수가 되었다. 1953년에는 인민예술가라는 칭호를 얻었다.
1957년에 북경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