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읽었다면 이 작품이 그의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주제가 달랐고 문체도 달랐다. (번역을 읽은 것을 가지고 문체를 말하는 것이 간지럽기는 하지만 번역임에도 작가 고유의 느낌은 있는 법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클론이라는 인물들의 본질을 잠깐 지워둔다면 여느 성장소설과 다를 바 없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듯 하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복제인간. 클론이다. ‘보통 인간’들의 장기가 망가졌을 때 그의 수명연장을 위해 장기 기증을 하도록 복제된 클론.
이야기는 간병사로 일하는 캐시가 평범한 기숙학교처럼 보이는 “혜일셤”에서 보낸 시간과 그곳에서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헤일셤”의 영어는 Hailsham인데 애트우드라는 이는 이를 Great Expectations의 등장인물인 Havisham 양과 유비시킨다. 헤비샴이 에스텔라를 훈련시키듯 “헤일셤”의 ‘학생’들은 장기기증자로서 훈련을 받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절한 시각이라고 볼 수 있다. 주 등장인물은 화자인 캐시, 조금 이상한 듯한 행동으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덩치 큰 토미, 그리고 토미의 여자 친구, 루스 이 셋이다.
헤일셤 시절 이들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자신들이 그리거나 만든 작품들을 수집해 가는 마담에 대한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학생들이 만든 작품들을 정기적으로 확인하고 그 중 훌륭한 작품들을 선별하여 가져가는 것일까? 하는 것. 나중에 헤일셤을 나온 뒤 그들은 소문을 통해 그 까닭을 듣게 된다. 혜일셤을 나간 후 만약 어떤 커플이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그때 마담을 찾아가 자신들의 사랑을 입증하고 기증자로서 삶을 유예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를 대비하여 마담은 그들이 오래 전부터 진정으로 사랑한 사이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 작품들을 모으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나중에 토미와 캐시가 만나게 된 마담, 그리고 혜일셤 학교의 교사였던 에밀리 선생님은 그것이 말 그대로 헛소문이었다는 것을 밝혀준다. 그들이 그림을 모았던, 아니 그보다 “혜일셤” 학교를 운영했던 것은 클론들도 감정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믿게 해주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인간적이고 교양 있는 환경에서 사육된다면 ‘학생’들 역시 일반인들처럼 지각 있고 지성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세상에 증명했어. 혜일셤 이전의 클론들은, 우리는 너희를 ‘학생’이라 부르는 게 더 좋지만, 그저 의학 재료를 공급하기 위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단다. 전후 초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희를 그런 존재로 생각했어. 시험관에 싸인 믈질로 말이야.”(358)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클론들의 작품 가운데 우수한 작품들을 선별해 전시회를 열고 후원금을 모금해 혜일셤을 운영했던 것이다. 혜일셤 시절부터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이였던 토미와 캐시, 혜일셤 시절에는 루스로 인해, 그곳을 나온 뒤로는 간병인과 기증자로 서로의 사랑을 이룰 수 없었던 두 사람은 루스가 알려준 대로 소문을 좇아 둘의 사랑을 밝히고 완전한 하나가 되기 위해 마담을 찾아왔지만 결국 이런 진실 앞에 절망한다. 토미는 결국 캐시를 떠나 혜일셤 출신의 다른 기증자들과 마찬가지로 마지막을 맞이하고 캐시는 여전히 간병인 생활을 계속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영화와 소설울 통해 복제인간이나 인공지능 주체들에 대한 SF적 미래상을 그린 이야기들이 많이 다루어지고 더러 복제인간이나 인조인간의 인간덕 감성의 획득 여부를 다루기도 한다. 영화 AI나 Her, 블레이드 러너 같은 영화들에서도 이런 주제들은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영화나 소설들과 다른 점이 있다. 캐시를 포함한 등장인물들은 그들이 클론이라는 점을 밝히지 않는다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인간사회의 구성원들처럼 보인다. 인간적 감정으로 충만하며 서로 간의 사랑과 질투, 반목과 모험 등 ‘인간’이 그 집단에서 겪는 동일한 성장 과정을 경험한다. 그들이 ‘인간’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인간의 의도를 제외하면 그들은 인간과 동일한 모습과 감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소살의 처음은 학창시절을 그린 자연스러운 성장소설차럼, 후반부에는 그들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어린 시선을 거두기 어렵다.
현실에 그런 복제인간, 클론들이 등장할 가능성은 적어도 과학적으로는 완성되어 가는 싯점에 이르렀을 것이다. 윤리적 문제가 큰 쟁점이 되겠지만 우리 곁에 이 소설에 등장하는 캐시, 토미, 루스 같은 클론들이 실재할 날이 그리 먼 것은 아닐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 소설에서 그려지듯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클론’과 기계보다 냉정한 ‘인간’의 모습을 보게되는 것은 아닌지.
이시구로의 이 작품은 손에 드는 순간 끝날 때까지 아주 부드럽게 그리고 쉼없이 읽힌다. 책 날개에 있는 “우리 시대 가장 세련된 문체를 지닌 작가 중 하나”라는 마이클 온다체의 평은 과할지 몰라도 이시구로가 뛰어난 흡인력과 가독성을 지닌 아주 부드러운 문체를 보여주는 것만은 틀림없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첫댓글 "문제는 능력이라기보다는 믿음이었다."(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