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동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의 대표적인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가 합쳐져 확대 지정된 곳이다. 이곳은 고인돌, 조개무지, 항구 시설, 봉황토성 등이 발굴돼 청동기 시대부터 가야 시대까지 아우르는 복합 유적의 성격을 지닌다. 또한 가야인의 생활상과 더불어 가야 왕권의 존재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회현리 패총은 조개껍데기 등이 쌓여 만들어진 조개무지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각종 철기 및 골각기(동물의 뼈‧뿔‧치아‧패각 등 유기물을 소재로 만든 도구류의 총칭), 토기와 탄화미炭化米(불에 타거나 지층 안에서 자연 탄화돼 남아 있는 쌀) 등은 가야 시대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이곳에서 발견된 중국 화폐 화천貨泉은 당시의 국제 교역 상황을 잘 보여 준다.
봉황대는 조선 시대에 김해부사를 지낸 정현석이 ‘언덕의 모양이 봉황이 날개를 편 모습과 같다’ 하여 대를 쌓고 봉황대라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 구릉 주변에서는 가야 시대의 다양한 생활 유적 및 유물들이 발견됐으며, 구릉 위에는 황세장군과 여의낭자가 어린 시절 함께 지냈다고 전해지는 황세바위 등이 위치하고 있다. 봉황대 서쪽에서는 가야 시대 토성과 대규모 창고형 건물터가 확인됐고 옛 봉황초등학교 남쪽에서는 가야 시대의 배가 발견돼 당시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던 가야의 해상 왕국으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2003년에 왕궁 추정지 동쪽에서 봉황토성의 일부가 확인되었으며 2015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왕궁 추정지 발굴 조사에서는 4세기의 대형 건물터와 화로 모양 그릇 받침, 원통 모양 토기, 굽다리 접시, 유리구슬, 굽은옥 등 가야 왕릉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유물이 출토됐다. 2019년에는 왕궁 추정지 인근에서 대형 적심積心(초석을 받치는 건물 기초시설) 건물터가 발견됐는데, 약 20m 높이의 왕궁 관련 시설로 추정돼 가야 왕궁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