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 물 시 장
이 병 옥
뿌연 하늘 탓일까? 저기압인 기분을 환기시키고 싶었다. 봉긋봉긋 물오른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며 화사한 꽃과 연록으로 가득 채울 환희의 봄날을 위해 마중 나가는 마음! 아니, 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며 자동차 키를 들고 집 밖으로 나섰다. 잠시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겨우 방향을 정한 것은 약사동쪽, 오늘이 바로 닷새마다 열리는 풍물시장 장날이기 때문이다. 주차장이 복잡하고 사람이 북적거려 장보기는 다소 불편하지만 그곳에 가면 싱그러운 봄 향기와 사람냄새가 물씬물씬 풍길 것 같은 파릇한 기분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과 차량들이 범벅이 되어 초입부터 심각하다. 나는 자동차에 앉아 한참을 양보하며 기다린 후 주차자리 하나를 용케 얻었다.
몇 걸음 옮기는데 쪼그리고 앉은 야채장수할머니가 “덤 얹어 줄게, 이것 좀 사유.” 하신다. 길바닥에 펼쳐놓은 달래, 고들빼기 등 서너덧 가지 봄나물무더기 외에 검은 보자기 덮은 작은 양은다라이에 담겨진 콩나물은 어림잡아도 금방 계산이 빤하다. “춥지 않으세요?” 하며 걸음을 멈추었더니 한 말씀 툭 건네신다. “꼭 저녁 굶은 시어미 인상처럼 날씨가 영 글렀지-유”하는데 시골특유의 그 투박한 표현이 재미있어 나는 대답대신 킥킥 웃으며 손수 키웠다는 콩나물과 봄 냄새나는 달래를 한 무더기 사들고 일어섰다. 돌아오는 길에 사야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무료하게 앉아계신 할머니 얼굴에서 환한 미소를 얼른 보고 싶어서였다.
뚜껑 없는 그릇그릇에 각종 젓갈과 밑반찬이 맛깔스럽게 놓여있고, 브래지어, 팬티, 남여속옷들이 낯뜨겁게 좌판에 죽 펼쳐져있다. 미니트럭에선 “설탕바나나가 한보따리에 2천원! 2천원!” “꼴단 같은 파가 2천원!” 하면, 저쪽 큰 트럭에선 “마른멸치, 새우가 한 말에2천원! 2천원!” 이라며 빨간색과 검정색 글씨로 가격을 크게 써 붙이고도 계속 외쳐대지만 매상은 예전에 비해 훨씬 줄었다고 투덜거린다. 당파, 쑥갓, 상추, 참나물, 오이호박 등 하우스야채들도 무더기무더기 놓여있다. “싱싱한 양배추가 단돈천원!” 하는 외침에는 장마당에서의 값이 저토록 헐값이니 현지출하 가격은 도대체 얼마일까? 오히려 나는 싼 가격이 더 신경이 쓰인다. 또 옷, 이불, 머리핀 등등 노점상들이 길바닥에 잔뜩 물건을 늘어놓고 발목을 잡건만 복잡한 좁은 길을 바삐 지나쳤다. 여기서 싸게 구입한 옷이나 물건들을 가리켜 우리 친구들끼리는 ‘길거리표’ 혹은 ‘장날표’ 라 부르며 재미있어 한다.
북적거리는 인파를 뚫고 시장 안으로 썩 들어섰다. 좁은 진열대에는 벌겋게 요리한 돼지꼬리와 족발, 비계껍데기가 쟁반마다 수북이 쌓여 입맛을 끌고, 옆집은 순대, 번데기, 삶은 곤달걀에서 뜨끈뜨끈한 김이 피어오른다. 가게 안에는 너덧개 테이블에 플라스틱 빈의자가 놓여있고 한쪽 구석에는 나그네둘이 막걸리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주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닥거리는 모습이 정겹다. 그 옆에선 살아있는 미꾸라지, 가물치, 메기가 빨간 고무다라에서 오물거리는가 하면, 생미역다시마, 고등어, 동태, 갈치 등등 비린내 나는 생선장수 앞에선 장애인 아저씨가 작은 리어카 좌판에 녹음테이프를 가득 싣고 ‘인천항 갈매기’ 노래를 신나게 틀어놓고 졸린 듯 기운없이 앉아있다. 풍물시장의 이런저런 광경은 바로 풍물패들의 신명나는 굿마당이 아닌 서민들의 갖가지 애환이 뭉클뭉클 서려 있는 곳, 우리 이웃들의 실제 삶의 현장이었다.
꽃나무, 과일나무 묘목 등 더 사고 싶은 건 식목일이 아직 한참 남았으니 다음 장날로 미루었다. 볼품없이 검정비닐봉지에 담은 올망졸망 제법 무거워진 보따리를 힘들게 들고 나오면서 대형마트와 비교해본다. 넓은 주차장 시설과 친절한 안내는 물론 전자제품에서 식당까지 다양한 일상용품과 각종 싱싱한 야채들이 종류별로 구분되어 찾기 쉽고 보기 좋게 차곡차곡 진열되어있다. 어디 그뿐인가. 여름엔 냉방, 겨울엔 온풍기 거기다가 정찰제와 구입금액에 따른 포인트 점수, 애프터서비스 등 손님들이 부담없이 편안하게 쇼핑을 즐길 수 있도록 온갖 수단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다. 이렇게 팔다리 아프게 물건을 들고 다닐 필요도 없다. 일단 들어가면 한곳에서 원하는 물건 몽땅 구입할 수 있는 대형마트가 여러모로 편리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게 되고 꾸역꾸역 몰리게 된다.
반대로 동네 슈퍼에는 손님들이 점점 줄어서 생계마저 곤란하다고 울상이다. 예전에는 담배표가 붙은 구멍가게 하나만 잘 운영하면 대여섯 식구는 너끈히 먹고 살 수 있다고 했는데 이젠 그게 먼 옛날이야기란다.
소자본 상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전해들은 친정아버지께서는 술 한 잔 얼큰하게 취하시면 늘 노래처럼 하시는 말씀이 있다. “당최 글러먹었단 말이다, 고기는 푸줏간에서 팔고, 쌀은 쌀가게서 팔고, 생선, 옷, 장난감가게 각각 따로 팔게 허가해서 이웃사람끼리 서로 오며가며 팔고 사고 그렇게 살게 허지, 그건 왜 한군데 죽 모아다놓고 돈 많은 한사람이 다 팔게 해서 한 놈만 부자 만들게 허는 거여!” 라고 하시면서 버럭 역정을 내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래도 우리 아버지 국회로 보내드려야겠네요.”하며 농담처럼 웃어넘기곤 했다. 그런 내가 차츰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나보다. 언제부터인가 반찬거리를 사는데도 첨단기술의 컴퓨터 시스템이 갖추어진 정찰제의 대형슈퍼보다, 촌스럽게도‘깎아 달라. 밑진다,’서로 우기며 현금 거래하는 재래시장에 더 친근함을 느끼게 되니 말이다.
요즘은 따뜻한 햇살에 얇은 옷을 걸치고 외출했다가 추워서 벌벌 떨기도 하고, 오늘 나처럼 날씨가 흐렸다고 두툼한 옷을 걸치고 나섰다가 미련스럽게 땀을 흘리기도 하는 환절기이다. 대형슈퍼가면 또 편리함에 반해 지조없이 마음이 흔들릴지 모르지만, 골고루 균형있게 발전하여 빈부격차가 좀 좁혀졌으면,,, 사람과 사람사이에 정이 흐르는 따뜻한 세상을 염원하는 간절한 소망은 늘 변함없을게다.
오늘밤에는 종일 풍물장터에서 지친 고단한 이웃들의 영혼에 하얀 물소리 같은 생명의 봄비가 촉촉이 내려주었으면 좋겠다.
(2005년 3월에 쓴글이며 지난해 수필세계 5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
첫댓글 아버님 말씀에 한표 던지고 싶습니다. 함께 어울어 사는 것이 좋은 것인데 / 편리하다는 이유로 만드어 놓은 것이 이제와서는 사람살이를 힘겹게 만드는 것이 되었네요 이 선생님의 글에는 늘 정이 듬뿍 있어서 좋습니다.
그냥 물건만 사고 지나가던 풍물시장에 이렇게 깊은 정서가 있을줄... 푸근하고 맛있는글 잘 읽었습니다.
장터의 품목들에서 꼼꼼함에 놀랐습니다. 맞아요. 가끔은 재래시장에서 삶의 냄새를 맡고 싶네요.
백화점의 옷가격을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났는데 ....사람냄새가 나서 재래시장가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거 있지요
이병옥씨, 난 이 글을 그전에 보았다는 핑계로 꼬리글을 떼어먹을라고 했더니 저 아래 한참이나 지나간 내 글 (신용카드)에 늦게라도 꼬리글 준 것 보고 찔끔,난 그렇게 야박스러운 속물인가 봐. 병옥님의 다정다감한 글 늘 감동!
글은 그 사람이라는 말- 실감나거든요. 언제나 긍정적이고 다정다감한 병옥씨 글 잘 읽었습니다.
아름다운 감성을 담은 글이군요. 아버님 께서도 정감이 넘치는 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