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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에서 무안까지 걸었습니다(1: 2005. 7. 4-9.) / 이훈
2005년 7월 5일 경기도 안산에서 걷기 시작하여 7월 20일에 전남 무안군의 목포대학교 내 연구실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니까 5일에 출발하여 4일 동안 안산에서 서산까지, 비가 와서 집(서울)으로 왔다가 다시 서산으로 되돌아가서 3일 동안(7. 12-14.) 서천까지 갔습니다. 15일에 서울서 볼일이 있어서 14일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가 16일에 서천으로 가서 무안까지 걸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의 여행기 비슷한 것을 적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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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 여행 떠납니다(2005. 7. 4.)
내일(2005. 7. 5.) 도보 여행 떠납니다. 아침에 전철을 타고 안산의 상록수역에 내려서 화성, 서평택, 당진, 서산, 홍성, 대천, 서천, 군산, 변산반도, 고창, 영광, 함평을 거쳐 목포대학교가 있는 무안에 도착하려고 합니다. 하루에 30km쯤 걷게 됩니다. 잠은 여관에서 자고 밥은 사 먹겠습니다.
일요일에는 승용차로 당진까지 예비 답사도 했는데 도로 사정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서 걸어 볼 만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한 흔적이 없는 곳이 있기는 했으나 차가 많이 다니지 않아 조심하면서 걸으면 안전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곳곳에 음식점이 있어서 아무 때나 밥을 먹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문제는 내 체력인데 안 될 것 같으면 바로 돌아오려고 합니다. 몸을 추스려서 멈춘 곳으로 다시 돌아가 걷더라도 어쨌든 목적지까지는 가려고 합니다.
왜 걷느냐고요? 그냥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만 대답하겠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쉴 생각이니까 시간이 나므로 낮에 보고 생각한 것을 피시방에서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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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날(2005. 7. 5.)
첫날 일정 무사히 마쳤습니다. 안산의 상록수역에서 출발하여 화성의 조암리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여러분의 전화, 문자가 아주 큰 힘이 되었습니다.
고속도로는 걸어다닐 수 없으므로 국도와 지방도를 이용합니다. 차들이 많지 않아서 차가 오는 쪽으로 마주 보고 걸으면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당진을 지나면 되도록 해안 가까이 난 길을 걸으려고 합니다. 중간에서 해수욕장을 만나면 내 볼품없는 수영 솜씨도 뽐내 볼 생각입니다.
조금 힘이 들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의 원보와 해병대의 훈련을 빼면 이렇게 오래 걸어 보기는 처음이니까 당연하지요. 오후에 들어서면서는 내 발과 다리가 참 고맙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이제까지 해 보지 못한 생각입니다. 아무튼 오른발 뒤꿈치기 조금 쓰리기는 하나 걱정했던 물집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밤 잘 자면 내일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걷는 사람은 나 빼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외로웠습니다. 좀 힘이 들면 왜 이런 일을 하는 거냐고 내게 물어봤습니다. 대답이 잘 안 나왔습니다. 물을 사러 가게에 들렀는데 할머니가 지키고 계셨습니다. 어디 가느냐고 묻길래 서해안을 돌아서 목포에 간다고 했더니 차 타고 가지 왜 고생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장난 삼아 배가 나와 들어가게 하려고 한다고 대답했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섭섭했습니다. 안 나왔다고 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요? 물론 할머니의 리얼리즘이 이긴 것이지요. 내, 사서 하는 고생을 동정하지만 엄연한 사실을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지요. 승복할 수밖에요.
점심 먹고 오다가 길가에서 참외 파는 곳에도 들렀습니다. 천 원어치를 팔라고 했더니 예쁜 아가씨가 그냥 주겠다면서 깎아 주었습니다. 다 먹고 다시 천 원어치 달라고 했더니 이번에도 그냥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서울에서는 먹어 보기 어려운, 꼭지가 파란 것이라 욕심이 생겨서 억지로 천 원을 주고 참외 네 개를 받았습니다. 토마토까지 얹어 주는 것을 배낭이 무거울까 봐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이 아가씨가 차 조심하라고 당부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씨가 착하면 두루 다른 사람을 배려하게 되는가 봅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 아가씨에게 덕담 하나 해야겠습니다. ‘예쁜 아가씨! 복 많이 받아요!’
걸으면서 이렇게 혼자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나는 주체적인 인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정해진 길만 걸어 온 셈이지요. 이 여행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나중에 천천히 따지기로 하고 우선은 우리 젊은이에게 이런 여행을 권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체로 서는 연습으로서는 그만입니다.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겨우 하루 일정을 마쳐 놓고 이런저런 소리 섣부르게 한 느낌입니다. 여행의 기대와 설렘이 이렇게 만든 거라고 어여삐 봐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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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째(2005. 7. 6.)
오늘도 무사히 이틀째 여정을 마쳤습니다. 다시, 전화와 문자로 격려하고 도움말을 주신 여러분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여러분의 배려가 없었더라면 아마 난 외로워서 죽었을 거예요.
어제는 화성의 조암리라는 데서 머물렀는데 오늘도 예정된 거리를 걸어서 평택의 안중이라는 데서 이렇게 멈췄습니다. 그러니까 군의 경계를 넘은 거지요. 차로야 몇 분 안 되는 거리지만 걸어 보면 다른 군으로 넘어가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흐려서 걷기가 좋았는데 오늘은 햇빛이 비쳐서 땀깨나 쏟았습니다. 그런데도 걷기는 어제보다 쉬웠습니다. 아침에는 그 동안 쓰지 않았던 관절이 여기저기서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는데 계속 걷자 원래로 돌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물집입니다. 어제 발뒤꿈치가 쓰라렸는데 아침에 보니까 물집이 생겼더라고요. 바늘로 찔러 물을 뺐는데도 뭐가 제대로 안 되었는지 하루 내내 사람을 성가시게 했습니다. 나중에는 절뚝거렸습니다. 다른 사람이 불쌍하다고 할까 봐 신경을 쓰긴 했지만 잘 안 되었습니다.
오늘도 재미있는 얘기 한 토막. 오늘 점심은 공짜로 얻어먹었습니다. 남양 방조제를 지나서 원정리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기사 식당이 몇 군데 보였습니다. 그 가운데서 소머리국밥이라고 써 붙인 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국밥을 먹고 싶었는 데다 분위기도 깨끗해 보였습니다. 입구에 들어섰더니 중년의 부부-나중에 알고 봤더니 아줌마와 그의 오빠였습니다만-인 듯한 사람들이 식사하면서 아직 장사를 시작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쓰러질 것처럼 지쳐서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은 상태였고 차린 음식이 잡아끄는 것을 어쩌지 못해 그 밥이라도 좀 달라고 했지요. 내가 좋아하는 물김치-참고로, 어제 저녁에는 열무 국수와 김밥을 먹었답니다-에다 닭고기로 만든 탕이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는 것을 어떻게 놓칠 수 있겠어요! 그랬더니 아줌마가 얼른 진심으로 같이 식사하자는 것이었요. 글쎄, 조금 손 대고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탕을 그대로 두고 새것으로 데워서 내오기까지 하더라니까요. 물론 나는 원래 있던 것을 먹었지만.... 물김치는 내 정확한 눈썰미를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진심으로 맛있다고 하면서 옆에 있는 오빠 되는 분에게는 왜 이리 맛있는 것을 안 잡숫냐고 큰소리까지 땅땅 쳤습니다. 말이 없는 그 분은 날보고 속으로 웃기는 놈이라고 했을 거예요.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가, 이 아줌마가 돈을 벌어서 좀 여유가 생기면 글을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거야 내 전공 아닌가요! 그래, 무슨 얘기냐고 했더니 남편이 중풍으로 오래 드러누운 거며, 지금은 돌아간 시아버지의 폭력이며를 줄줄이 풀어놓는데, 참 고생도 엄청나게 했더라고요. 거저 밥만 먹을 수는 없는 일이어서 나도 한마디했습니다. 여유는 만들기 나름이라면서 정말 글을 쓰고 싶으면 지금부터라도 텔레비전 보는 시간을 줄여서 조금씩 써 보라고 했지요. 이어서, 연습하지 않고 잘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 오늘부터 시작하라고 하는데, 글쎄 오빠 분께서 우리 이야기에 끼어들어서 누이동생보고 뚱뚱하니 운동이나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생 분도 지지 않아서 자기가 언제 논 적이 있느냐고 대드는 것이었습니다. 오빠가 너무 한 거지요. 외간 남자 앞에서 그게 할 소리겠어요! 말리느라고 혼났습니다.
다 먹고 났더니 참외도 내왔더라고요. 아주머니의 성의를 의심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어제의 참외 얘기를 한 것이 영향을 주었던 것도 있지 않았을까요? 좋은 마음은 이렇게 전염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차까지 얻어먹고 나왔습니다. 물론 돈 많이 벌라는 덕담은 잊지 않았지요. 오래 잊지 못할 빛나는 점심 시간이었습니다.
내일은 아산 방조제를 지나 삽교천 방조제를 건너게 되는데 당진 못 가서 머물게 될 것 같습니다. 내일도 오늘처럼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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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째(2005. 7. 7.)
사흘째도 무사히 마쳐 지금 당진에 있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안중에서 출발하여 아산만 방조제와 삽교천 방조제를 건너 여기에 왔습니다. 삽교천 방조제를 지난 것이 네 시쯤인데 여기를 지나면 숙소가 마땅치 않아서 그냥 근처에 있을까 하다가 갈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보자는 마음으로 걷다가 소나기를 만났습니다. 무릎 관절이 아프던 참이라 못 이기는 척하고 차를 타서 당진 읍내까지 와 버렸습니다. 며칠 만에 탄 차는 얼마나 시원하고 빠른지요! 새삼 내 걸음의 원시성을 절감했습니다.
물집은 완전히 아물지는 않았지만 걷는 데는 크게 지장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무릎 관절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천천히 걸었습니다. 쉴 때는 등산화와 양말을 벗고 벌렁 드러누웠습니다. 여기저기 흐트러진 신발과 양말, 가방, 분, 물파스 들을 보면서 참 소중하다는 말을 중얼거리곤 했습니다. 앞으로도 나와 함께할 것이니까요. 내 몸의 군데군데가 잘 버텨 준 것도 고마운 일이고요. 지금까지 큰 문제 없이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최선을 다해 잘해 준 결과지요.
미성년자나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이런 차원에 머물거나 그러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단락을 그냥 뛰어넘고 다음 단락으로 가기 바랍니다. 어제는 한밤중에 잠이 깨고 말았습니다. 소리 때문에요. 옆 방에서 들리는 여인의 울음소리였어요. 꽤 길게 흐느껴서 잠이 다 달아난 것은 물론이고 누가 때려서 저러는가 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게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사이를 두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잠잠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문 열리고 닫히는 소리로 보아 두 사람 이상인 것이 확실했습니다. 아마 마음놓고 울 수 있는 데가 없었는가 봅니다. 누가 관음증(觀淫症)을 본떠 날 보고 청음증(聽淫症)이라고 할까 봐 그만하겠습니다. 아무튼 이 소리 덕분에 그치고 나서도 한동안을 뒤척였고 그래서 낮에는 졸려서 앞에서 얘기한 대로 쉴 때마다 조금씩 눈을 붙이기도 했더랬습니다. 옆 사람 사정도 고려하면서 울 일입니다.
오늘은 거의 방조제만을 지나왔다고 해도 좋을 정도여서 걷는 재미가 좀 적었습니다. 큰 화물차들이 쌩쌩 달려서 생각이 뚝뚝 끊겨 버리는 것도 기분이 안 좋았고요. 어제 얘기했다시피 차가 오는 쪽에서 마주 보고 걸어야 하기 때문에 차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특히 큰 트럭은 좀 과장을 하면 나를 향해 달려오는 무기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차를 모는 사람은 늘 걷는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아주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오늘 받은 격려 문자 가운데, 걷고 있는 나를 생각하니까 옆에서 사람이 걷고 있으면 천천히 운전하게 되더라는 얘기를 듣고 참 고마운 말이라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사실 방조제야말로 도로 가운데서 가장 인공적인 것에 속하는 것이니 어떻게 보면 걷는 사람에게 위협적인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강물이 흐르던 곳을 인위적으로 바다와 분리해 놓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 길을 화물차들이 질주하는 것은 잘 어울리는 일이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지요. 아무튼 오늘 나는 근대 산업 문명의 상징물 가운데 둘러싸인 보잘것없고 외로운 존재였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만 내 도보 여행은 자연과는 별로 관련이 없습니다. 빙빙 둘러서 가는 꾸불꾸불한 길을 피하고 직선적인 아스팔트 길을 걷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는 이 아스팔트 위의 존재를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화물이 우리를 살리고 심지어는 내게 이렇게 걸어서 돌아다닐 수 있는 여유를 갖다 줬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속도는 필연적으로 경쟁을 하게 하고 따라서 누군가는 반드시 져야 합니다. 이게 우리가 사는 근대의 모습입니다. 걷다가 나무들이 있는,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이 보이면 반가워서 들어가 쉬고 바람을 들이고 했던 것은 단지 시원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점심 식사 얘기하고 마치렵니다. 아산만 방조제를 지나자 밥먹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저께 짜장면을 먹고 싶었는데 마침 손짜장이라고 써 붙인 데가 보였습니다. 냉콩국수와 짜장면 가운데서 고민하다가 후자를 시켰습니다. 모자라면 국수도 먹겠다는 마음으로요. 정말 맛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먹어 본 이 음식 가운데서 세 손가락 안에 당당히 들 만하였습니다.
내일도 걷겠습니다. 격려 부탁드리겠습니다.
* 왜 피시방은 이리 어둡고 시끄러운가요? 실제로는 할 말이 없어서지만 주위 환경을 탓하며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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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째(2005. 7. 8.)
서산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서산 시내 거의 다 와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시내버스를 타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잘 걸은 셈입니다. 내 몸은 그동안 길들여져서인지 오전에는 좋은 상태였다가 오후가 되면 무릎 관절이 아프고 그랬습니다. 욕심 내지 않고 천천히 걸으면 앞으로 며칠은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내일부터 비가 온다는데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타향에서 처량하게 비 내리는 소리 들으면서 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그래 보고도 싶습니다. 내리는 비의 강도에 따라 정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걷기가 훨씬 좋았습니다.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적당히 오르막과 내리막도 있었고 화물차도 훨씬 적었습니다. 물론 고마운 내 몸이 잘 적응해 준 덕분도 있습니다.
오늘 걸으면서 옛날에 과거를 보려고 서울로 가는 가난한 양반을 그리면서 이것저것 두서없는 생각을 펼쳐 보았습니다. 내가 직접 해 보니까, 서울에서 응시하자면 보통 일이 아니었을 거라는 짐작이 가는 거예요. 길도 나쁜 데다 도대체 짐은 얼마나 져야 했을까요? 먹거나 잠 잘 곳도 흔하지 않았을 테니 서울까지 가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짚신은 몇 켤레나 갈아 신어야 할까요? 우리의 감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뿐입니다. 그러니까 과거를 보러 가는 것 자체가 고난이었을 뿐만 아니라 배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디 민가에 들러 자게 된다면 백성의 현실을 배우는 기회가 생긴 셈이지요. 이렇게 고생하여 과거에 합격하면 좋은 관리가 되었겠지요? 물론 고생과 배움이 바로 양질의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고생과 배움이 사는 데 아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봐 주는 사람과 제도가 뒷받침해 줘야 하니까요(이런 점에서 젊은이들에게는 이 도보 여행을 권할 만합니다).
백성의 얘기를 들어서만 배우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걸음 자체가 가르쳐 주는 것도 그에 못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걸으면 아주 단순해집니다. 걷다 보면 나중에는 여기저기 아픈 곳, 내 앞에 놓여 있는 길, 먹는 것-이런 것들만 남고 다른 것-쓸데없는 살도 틀림없이 여기에 포함될 것입니다!-은 사라지고 맙니다(그래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으로 머리가 아픈 사람에게도 이 걷기를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도를 닦는 사람은 사람이 없는 높은 산 같은 곳으로 갑니다. 오늘에서야 깨달은 것인데 스스로 고통과 만나고 단순해지려고 하는 거지요. 이래야 근원적인 것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혜초나 원효가 먼 외국으로 걸어서 갔다온 것은 거기서 뭘 배우려고 한 것이겠지만 며칠 사이의 내 경험으로 추측하건대 걷는 일 자체에서 배우는 것이 훨씬 많았을 겁니다.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혹시 누가 너도 그랬냐고 하면 대답할 말이 없지만 말입니다. 내 여행은 아주 어설픈 흉내밖에 안 됩니다. 음식으로 치면 주재료가 시늉과 엄살이고 거기에 양념으로 극미량의 고통이 섞여 있는 격이지요.
고통을 놓고는 얘기할 것이 조금 더 남았습니다. 처음에 도보 여행을 생각한 것은 한비야의 책을 읽고서입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히말라야 등산 이야기를 몇 권 본 것도 작용했습니다. 이들을 읽으면서 내가 염두에 두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이들이 겪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의미였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고난도의 기술은 물론이고 강인한 체력과 의지력 같은 것이 골고루 갖춰지지 않으면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은 그런 차원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인간에게는 도대체 추체험조차가 가능하지 않은 세계지요. 그런데 나는 이런 것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었습니다.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번의 내 여행에는 이런 맥락도 있습니다.
로맹 롤랑은 베에토벤과 같은 영웅(사상이나 힘으로써 승리한 사람이 아니라 오직 마음으로써 위대하였던 사람)이 겪은 고통(고뇌)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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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기에 이야기하려는 사람들의 생애는 거의 언제나 기나긴 수난의 역사였다. 비극적 운명이 그들의 넋을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병고와 간난의 철상(鐵床)-위에다가 단련시키고자 하였거나, 혹은 그들의 동포가 뼈아프게 당하고 있는 말할 수 없는 고난과 굴욕의 광경을 봄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심정이 갈갈이 찢어지고 그로 인하여 그들의 생활이 여지없이 거칠어졌거나, 하여튼 그들은 나날의 시련의 빵을 먹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의지력으로써 위대하였다면, 그것은 그들이 또한 불행을 통하여서 위대해졌기 때문이다. 불행한 사람들이여, 그러므로 너무 서러워하지 말라. 인류의 우월한 사람들이 그대들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 그들의 용기로써 우리들 자신을 북돋우자. 그리고 우리들이 너무나 잔약할 때는 그들의 무릎 위에 잠시 머리를 고이고 쉬자. 그들은 우리들을 위로해 줄 것이다. 그들 성스러운 심령들로부터 청량한 힘과 기운찬 자비의 분류(奔流)가 용솟음친다. 그들의 작품을 묻지 않고서라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서라도, 우리들이 그들의 눈 속에, 그들의 생애의 역사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인생이란 고뇌 속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풍요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로맹 롤랑, 이휘영 역, <<베에토벤의 생애>>, 문예출판사, 1989, 11쪽. 참고로, 이 책은 이 도보 여행 이틀째 안중에서 묵을 때 ‘아름다운 가게’에서 500원을 주고 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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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의 영웅이나 히말라야를 오르는 사람의 고통에 비하면 내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쓰러질 것 같다가도 좀 쉬거나 밥을 먹으면 다시 힘이 나니까요. 그래서일까요, 내가 느끼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막연하게 죽음 직전의 것이라고 생각해 볼 뿐입니다. 자기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슬퍼할 일만은 아니지만 그 세계를 곁눈질이나마 하고 싶은 바람은 여전합니다. 간절하지만 욕심은 부리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될 일도 아니지만.....
내일까지는 비가 안 오면 좋겠지만 자연이 하는 일이니까 어떤 날씨도 그대로 받아들여야겠지요? 여러분, 계속하여 격려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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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 여행을 잠시 멈추면서(2005. 7. 9.)
화요일까지 비가 온다는 예보를 듣고 아침 일찍 서산에서 안산으로 오는 버스를 탔습니다. 바로 서울로 가는 버스도 있었지만, 같은 도로로 달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내가 왔던 길을 되짚는 기분으로 이 노선의 버스를 골랐습니다. 당진까지는 바로 내가 걸은 그 길을 버스도 달렸습니다. 하루 걸린 길을 30분에요. 내가 쉬었던 곳을 지나치면 얼마나 시간이 지났다고 글쎄 무슨 그리움 비슷한 감정이 들더라니까요. 아마 내 땀의 흔적이 남아 있으니까 그랬을 테지요?
서울에 와서 점심 시간에 학부 4학년 제자들을 만났는데 살이 많이 빠지고 보기가 좋아졌다고 했습니다. 인사 삼아 한 얘기겠지만 꼭 그랬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몸무게를 재 봤더니 2킬로그램 이상이 줄었습니다. 당연한 결과지요. 하루 세끼와 물, 참외 몇 알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계속 땀을 흘리면서 운동한 셈이니까요.
여러분이 계셔서 이번 걸음이 그런대로 여행다울 수 있었습니다. 전화나 글로 격려해 준 분들은 물론이고 그냥 조용히 지켜봐 주신 분들께도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 올립니다. 비가 그치는 대로 바로 시작할 다음 여행에도 변함없이 함께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더불어서 내 몸에게도 비슷한 인사를 해야겠습니다. 물집으로 뒤덮인 발, 다리, 좀 들어간 배, 무거운 배낭을 잘 버텨 준 어깨, 그리고 각각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해 크게 이상이 없이 여행을 하도록 해 준 여러 기관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오후에 들어서는 근육이 땅기고 관절이 아파서 절뚝거리기는 했지만 잠자리에 들면 어디 한 군데 쑤시거나 결리는 데가 없어 편하게 잘 수 있었습니다. 가출의 경험이 있었던 이가 전화로 여기저기 쑤시지 않느냐고 묻길래 전혀 그런 게 없다고 하자 놀라워했습니다. 아무튼 내 몸의 각 부분들이 합심해서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 한 결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비 때문에 여행을 멈추게 되어 안타깝지만 한편으로는 이 비야말로 적당한 때에 쉬도록 배려해 준 은혜로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여러분과 자연이 함께 내 여행이 이뤄지는 데 도움을 주셔서 흐뭇한 마음을 감추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왜 이제야 시작했느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도보 여행은 아주 즐거웠습니다. 뭐가 그러냐고 하면 시원하게 대답할 말이 없지만 지금이라도 바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그 답이 아닐까 합니다.
첫댓글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발견의 여행>>에 내가 걸으면서 겪은 것과 비슷한 대목이 있길래 확인하려고 내 여행기를 꺼내 봤습니다. 거의 20년이 지나서, 내가 해 놓고도 '아, 이랬구나'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대목도 많네요. 글로 써 놓지 않았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될 뻔했습니다.